1. T-34



"야이 씹할! 그게 말이 돼?"

최병장이 애꿏은 전령에게 철모를 집어던지며 내뱉었다. 원래 저리 성질머리가 더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전령이 가져온 작전계획이라는 것이 우리 다수의 바람과는 꽤나 상충되는 것이었기에 전령의 벌건 뺨을 걱정해주는 이는 없었다.

전령은 이미 이런 태도에 진력이 난 듯 군소리 없이 막사 밖으로 사라졌다. 쩔뚝거리는 모양새를 보아하니 다른 소대에선 정강이라도 차였나보다.

춘천의 6월은 무덥다. 익살맞은 이들은 춘천의 사계절은 겨울, 되 추운 겨울, 여름 그리고 되 더운 여름으로 이뤄진다고들 말한다. 이 무더운 날씨가 잔뜩 긴장해 있는 병사들에겐 불쾌함을, 전령에겐 더 큰 부상을 야기했다는 것을 인민군은 짐작했을런지도 몰랐다.

멀어지는 전령을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던 유상병이 말했다.

" 내래 독립군하던 동무에게 듣기로, 그 땅크란 놈은 여간 잔망한 것이 아니란 말이라, 코 앞까지 가서 수류탄을 까 넣는데도 모른다고 안함둥?"

부대 내 최고령인 유상병은 깊게 패인 주름만큼이나 넉넉한 인심의 소유자였다. 함경도 출신이라 남들이 보기에 다분히 불순한 어휘를 구사하는 그였지만 "언제 뒤에서 총구를 돌리지 모른다" 고 말한 누군가를 2주일동안 죽만 먹게 만든 전력이 있다.

"성호 네놈은 고저 보고만 있음 되지비. 내래 코 앞서 총각 뒤지는 꼴은 못본다우!"

유상병은 비쩍 마른 가슴을 탕탕치며 장난스레 말했지만, 난 그 모습으로부터 상당한 감동을 받았다는 것을 부정하지 못하겠다.유상병은 우리 아버지 뻘 되는 나이였고 나 또한 유상병의 아들 뻘 되는 나이였기에 입대 이후 지난 6개월 간 꽤나 많은 보살핌을 받고있었다. 그의 허풍섞인 수다를 받아주는 것은 일종의 노동이었지만 고달픈 군생활 속 그의 존재는 특별했기에 그리 고깝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말이 쉬운거지 그놈들 탱크도 사람죽이라고 만든건데 그리 쉽게 잡을 수 있겠어? 엄호병력 화력도 만만치 않을 텐데 코 앞까지 가려면 네댓명은 벌집이 될걸."

최병장이 담배를 물며 말했다.

전령이 갖고 온 소식은 이러했다.

' 지난 6월 25일 새벽 4시경 이후로 괴뢰군이 38도선을 넘어 침공을 감행했다. 곧이어 미군과 UN군의 참전이 있을 것이니 춘천, 강릉을 비롯한 동부전선은 방어선을 구축, 적의 전차와 병력을 격퇴하고 지원병을 기다리라.'

여기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세가지였다. 미군은 아직 참전을 안했다는 것, 적은 전차를 끌고 온다는 것, 우리가 적을 격퇴할 때 까지（ 혹은 격퇴당할 때 까지） 지원병력은 없다는 것. 젠장. 제대하면 서울에 올라가 장사를 하려고 했는데.

최병장의 말 이후 소대원들은 침묵에 잠겼다. 아마도 못 이룬 계획을 생각하고 있거나 가족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을 것이다.

' 성호야, 줄을 잘 서야 한다. 무슨 일이든 절대 맨 앞에 나서지 말고 걸어다닐 때도 중간에서 다녀야 한다.'

눈에 물기를 가득 머금은 채로 말씀하시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아버지는 마루에서 뒤돌아 앉아 담배를 태우고 계셨고 누님들은 이미 주검이 된 동생을 본듯 동네가 떠나가라 대성통곡을 해댔다. 삼대독자라고 총알이 피해가지는 않을 터였다.

나는 유상병에게 만년필을 빌려 종이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유언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