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혜야. 왜 그래? 으...응?"



문득 걸음을 멈춘 지혜가 이상스러운듯 지우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얼굴을 붉게 붉히며 생각에 잠겨 있는 지혜의 이 모습이 너무도 낯설게 보인 것이다.
잠시 허둥거리던 사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신 없이 주머니를 뒤지며 남은 돈 한 푼이라도 찾아보려던 지우.
그러나 돈（錢）의 여신은 그 가벼운 눈길조차 던지지 않았다.
한 개쯤 튀어 나올 법한 동전은 어디에 숨었는지 얼굴도 내밀지 않았고 손에 잡히는
건 언제 들어갔는지 알 수 없는 먼지 뭉텅이 뿐이였다. 지갑을 열어봐도 학생증만 덜렁 담겨 있었고
그 흔한 천원짜리 한 개도 들어 있지 않았다. 이쯤되면 그만 두는 수밖에 없었다. 별 수 없이 포기하고 나자 무언가 시원해지는 것 같았지만 수학 시간에 있을 선생의 혼쭐이 너무나 무서워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아.......이걸 어떻하면 좋지?' 하지만 친구 좋다는 것이 뭔가. 옆에서 걷고 있는 지혜와 J에게 용돈을 잠시 빌려쓰면 문제는 깨끗이 해결될 것이었다. 미안하긴 하지만 다음 주에 받는 용돈으로 갚으면 되니 만사해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지혜에게 부탁을 하려는 순간 지혜가 작은 소리로 속삭이는 것이였다.



"채태하......."



"채태하? 지혜야, 채태하가 왜?"



혼잣말로 우물거리던 그 말을 지우에게 들킨 지혜는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모르는 표정이 되었다.
"아...아니. 그냥. 오늘 채태하가 또 무슨 난동을 피울까..해서."
지혜는, 속으로는 채태하에게 마음이 있으면서도 그것을 일부러 감추는 듯 겉으로는 퉁명스럽게 말하고는 했다. 마치 자신은 채태하에게 별 흥미가 없는, 오히려 싫어한다면 싫어하는 선생 욕하기 좋아하는 학생인 듯말이다. 학생이 선생을 진심으로 좋아하면 상처 입는 건 학생뿐이라는 여고의 공식을, 지혜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채태하의 얼굴을 대하면 두근거리는 자신의 심장까지 속일 수는 없었다.



채태하가 자신에게 딱히 별다른 관심을 주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선생과 학생 사이. 지혜는 이 관계에 만족하고 있었지만 가끔은 자신에게 좀 더 다정하게 대해줬으면 하고는 한다. 물론 마음으로만 말이다. 친구들한테도, 가족들한테도 말한 적이 없는 자신만의 작은 비밀이다.




"채태하? 그게 누구야? 아는 오빠야?"

"응? 우리 학교 수학 선생이잖아. 새삼스럽게 왜 그래?"



지우의 뜬금 없는 말에 지혜는 약간 어이가 없어졌다. '자기 학교 선생 이름도 모르다니, 너무하잖아.'
하지만 그것보다, 자신의 친구가 채태하라는 존재를 모른다는 사실에 놀라울 따름이였다. 지우라면 분명 자신과 마찬가지로 채태하에게 연정을 품고 있을 것이라 평소에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아... 그래? 우리 반에는 다른 선생님이 들어오셔서 몰랐어.....미안.."



소심한 우리의 지우는 지혜에게 사과까지 한다 .
지우네 반에는 채태하가 아닌 머리 벗겨진 대머리 선생이 수학 시간마다 드나들기 때문에
지우가 채태하를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채태하의 그 명성을 친구들에게 자주 듣기는 했지만 실제로 본 적은 별로 없었다. 그저 우리 학교에 이렇게 인기 많은 선생이 있었나....하는 식의 호기심을 가질 뿐이었다. 이렇다보니 이름조차 기억에 잘 남아 있지 않은 것이었다.



지혜의 그 퉁명스러운 대답에 지우는 부탁의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혹시 아까의 말로 기분이 상해서 돈을 안 빌려주겠다고....'
문득 지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상한 것 같지는 않지만.....그래도..
만약 거절 당한다면 대머리 선생으로부터의 엄격한 꾸중은 피할 수가 없었다.
'으.......' 말을 하려고 우물거리는 지우의 입술을 지혜는 금방 알아챘다.

"김지우. 뭐 할 말이라도 있어?

'지...지혜야. 미안한데 돈...돈 좀...꿔줄래? "

"돈? 돈은 갑자기 왜? 무슨 급한 일이라도 있어?"

"저....오늘 사가야하는 수학의 정석...살 돈을 집에 두고 왔어..."



금새 울상이 되어 울먹거리는 지우. 자신의 입으로 한 말이지만 듣고 보니 가슴이 철렁 내렸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준비했을 그 책을 자신만 가지고 오지 않았을 것 같았다.
온 교실로부터 쏟아지는 눈총을 견딜 자신이 없었던 지우에게 기댈 곳이라고는 이 두 친구밖에 없었다.



"풉....나는 또 뭐라고. 야, 김지우. 너무하는 거 아냐? 아침에 넥타이도 제대로 매고 오지 않더라만은..
뭐, 이럴 줄 알았지. 크크.... 이번 한 번만이야! 금방 갚아야해. 알았지, 지우?"
의외로 시원시원하게 승낙하는 지혜. 덧붙여서 J도 한 마디 했다.
"그러길래 어제 미리 준비 했어야지....지우야. 지혜야, 반 씩 나눠서 빌려주자. 책값이 여간 비싸니?"



지우는 가슴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어려울 때 손을 내밀어주는 다정한 두 친구. 이 둘을 바라보는 지우는 행복감에 젖어 가슴이 헤롱거렸다. 참을 수 없었던 지우는 팔을 벌려 두 친구를 폭 껴안았다.



"얘들아, 정말 고마워. 역시 너희밖에 없어..♥"
약간 당황한 표정이였지만 두 명도 싫지는 않은 모양. 어색하게 웃으며 지우를 살살 달랬다.
"하...하...뭐 이런 거 가지고 그래....김지우! 숨막혀..켁..."

...





세 명의 소녀가 걸어가고 있는 이 거리는 신성 여고의 사랑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