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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부드러운 아침이였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아침 공기가 세상에 아련히 스쳐와 어제 밤에 묵은 잠기운을 금새 내몰고 달아나 버렸다. 어둠에 잠겼던 하늘에 눈부신 햇살이 구름 위로 떠오른다. 죽은 생명이 살아나는 부활의 시간, 많은 철학자들이 사랑하기를 마다치 않은 인간의 아침은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왔다.






닭의 목을 부러트려도 새벽은 온다지만 어쩔 땐 새벽보다 사람이 먼저 아침을 깨워준다. 멀리서 보이는 주황빛 제복들. 미화원이라는 이름으로 거리를 더러움으로부터 지켜주는 이들의 멋진 활약으로부터 우리의 아침은 시작된다. 부지런한 청소부들이 밤새 쌓인 거리의 쓰래기와 먼지를 부산히 쓸어가는 와중에도 신문 돌리는 청년이 자전거를 타고 쏜살같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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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마을을 제 손바닥 보듯 하는 신문팔이 청년에게 이 시간은 하루 중에서 가장 중요한 금싸라기 같은 때이다. 자전거 패달을 쉬지 않고 밟으며 땀 흘리는 청년. 이 청년이 마지막으로 도착한 신문 배달지는 거리의 끝에 붙어 있는 이층 단독 주택이다.







이 집에는 지우라는 아이가 살고 있다. 사거리에서 오른쪽으로 쭉 꺾어 들어가면 보이는 지우의 집. 지붕은 지우가 태어난 날 흰색으로 페인트칠을 해 놓아 멀리서 보아도 눈에 띈다. 지우가 하얀색처럼 항상 순수하게 살기를 바라며 지우 아빠가 팔을 걷어붙히고 하루 종일 걸려 완성한 멋진 지붕이다. 지우도, 지우 아빠도, 지우 엄마도 모두 이 지붕 아래 있는 집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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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관을 열고 들어오면 지우의 분홍빛 캠퍼스 운동화가 나란히 붙어있다. 지우 엄마는 한 시간 전 아침 운동을 나가 아직 들어오지 않았다. 해외로 외근을 나간 지우 아빠의 칙칙한 검정 구두가 현관에 들어오지 못한 지도 꽤 되었다. 돌아오려면 아직 하루를 더 기다려야 한다.







전형적인 워커홀릭인 지우 아빠는 가끔 가정보다 일에 푹 빠져 지낼 때가 많다. 지우 엄마는 그것이 내심 섭섭했지만 지우는 마음 속으로 아빠를 이해한다. 겉으로 보이는 일은 드물지만 늘 가족을 생각하는 아빠를 지우는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몸은 떨어져 있지만 마음으로 기댈 수 있는 근사한 남자, 지우의 가슴 속의 아빠는 굵은 매직으로 그려놓은 듯 언제나 선명히 새겨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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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뭉쳐 있던 거리의 밤을 이슬빛 환희가 쓸어가는 오전 일곱 시는 지우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지금쯤 열심히 팔을 휘두르며 마을 거리를 유유히 걷고 있을 지우 엄마는 항상 젊게 사는 멋진 여성이다. 사실 지우 엄마는 지우 아빠보다 몇 살이나 어리다. 10살 가까이 차이가 나는 둘이 어떻게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우 엄마는 늘 "그건 운명이였어."라고 말하며 황홀해 하곤 한다.








지우 아빠의 능력이 좋아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둘이 정말 눈이 맞아서 그렇게 되었는지는 둘만이 알겠지만 지금은 모두 행복하니 다 괜찮은 것 아니냐고, 지우 할아버지가 말하고는 한다. 그렇지만 아직도 그 둘의 사이가 탐탁지 않은 지우 외할머니는 지우 아빠가 마음에 차지 않는다고 늘 불만이다. 어린 자신의 딸을 못된 꾐수로 속여 낚아챘다는 것이 외할머니의 주장. 물론 지우 엄마가 가장 먼저 화를 내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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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름뱅이에게는 고통스러운 시간이지만, 하루를 즐길 줄 아는 멋진 사람들은 모두 이 맛을 알 거라는 지우 엄마의 근거 없는 주장도 지우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원체 잠이 많은 잠꾸러기 김지우에게 아침은 그야말로 귀찮기만한 자연의 심술에 불과했다. 그것을 아는 지 모르는지 운동 나가기 전 지우 엄마가 열어 놓은 유리창에서 아침 바람이 휘돌아오며 지우의 온 몸을 감싸돈다. 덕분에 졸립기만 한 지우의 몸도 무겁게나마 생체 리듬을 활성화 시키기 시작했다.







지우와 함께 잠들어 있던 몸이 기지개를 펴는 양 이런 저런 복잡한 기분을 가져다 준다. 지우가 아침을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가 아침 특유의 기분 변동이다. 기분이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 스스로도 알 수 없게 만드는 가슴의 울렁거림은 이내 짜증으로 돋치어 인상을 찌뿌리게 만든다. 지우가 아침을 싫어하는 두 번째 이유는 스스로가 제어할 수 없는 생리현상이다. 아침에 일어나는 가장 빠른 생체 운동은 굉장히 찝찝한 기분을 묻히며 몸 속에 경고음을 발령한다. 밤새 고인 물이 뱃속에서 빠져 나오려고 안간힘을 써대며 가만히 있지 못하게 괴롭혀대는 이 고통을 아침마다 당해야 하는 건 지우로서는 참을 수 없는 고역이다. 그러나 지우도 평범한 사람인 이상 여기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별 수 없이 화장실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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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기에 앉아서 볼일을 보던 지우는 문득 화장실에 걸려 있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자기가 생각해도 예쁜 곱상한 얼굴에 윤기나는 머리카락, 앵두 같은 입술은 그 누구보다도 예쁜 여자아이의 얼굴이였다. 자신도 모르게 흐뭇한 웃음을 거울 앞에서 지어본다. 이런 저런 얼굴 표정도 지어보고 눈매를 내려보기도 하며 아름다운 자신의 모습을 거울 앞에서 마음껏 보여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푹 내쉰 후에 자기 스스로에게 말하듯 소리를 내어 다짐하기 시작했다.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그 말을 바라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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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우야. 오늘도 아름답고 고상한 여자 아이의 하루를 마음껏 살아보자. 항상 밝은 마음으로."
이 말은 지우 엄마가 몇 년전 자기 손으로 이면지에다 써 화장실 벽에다 붙여둔 것이다. 그러면서 지우보고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여기에 와서 이걸 따라 읽어야 해. 엄마하고의 약속이야."라는 말을 하기를 잊지 않았다. 처음에 지우는 왜 그런 말을 구태여 해야 하는지 의심스러웠지만 습관이 되자 이내 아무렇지도 않게 되었다. 그냥 우리 집에서는 당연히 해야 하는 아침 인사 같은 것인가 보다. 이렇게 생각하면 그만이었다. 매일 매일 시키지 않아도 아침마다 스스로 열심히 외우다보니 좋은 느낌이 마음을 감싸도는 듯한 기쁨이 깊은 곳에서 새어나왔다. 지우에게 이 말은 주 기도문과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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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수와 양치질을 간단히 한 후 지우는 부엌으로 갔다. 식탁에는 지우 엄마가 운동을 나가기 전에 만들어 놓은 두 조각의 샌드위치와 한 컵의 오렌지 주스가 기다리고 있었다. 쪽지도 한 장 있었는데 그 쪽지에는 "우리 딸. 오늘도 학교 잘 다녀와."라고 적혀 있었다. 지우 엄마는, 그렇게 일찍 운동을 다니면서도 지우 아침을 챙겨 주는 것을 거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이렇게 쪽지를 남기는 것도 말이다. 지우는 다정한 엄마의 마음이 자신에게 전해지는 따스함을 느끼며 샌드위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입으로는 우물거리며 지우는 이런 생각을 해보았다. '만약 아빠가 해외로 자주 다니지 않으셨으면 어땠을까.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세 명이 한 식탁에 둘러 앉아서 이렇게 맛있는 샌드위치를 먹을 수도 있었을텐데.' 지우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그렇게 일찍 아침 운동을 나가는 건, 건강 때문이라고 본인이 말하고 다니기는 하지만 사실은 아빠가 없는 식탁에 앉기가 쓸쓸해서 그러는 것이라고. 지우는 왠지 아빠가 그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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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다 먹고 그릇을 싱크대에 가져다 둔 뒤에 지우는 교복을 입기 시작했다. 하얀 와이셔츠에 초록 치마, 검은 조끼에 파란 마이까지 걸쳐 입으니 영락없는 여자 고등학생이였다. 그것도 꽤나 예쁜 축에 속하는. 교복을 다 입은 후 오늘 가져가야 할 교과서를 챙겨넣는 와중에 어제 사야했던 문제집을 깜빡하고 잊은 것이 떠올랐다. "오늘 학교 가는 길에 사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밖에서는 지우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학교에 같이 가는 아이들이라 어서 나가 그들을 웃는 얼굴로 맞이해야 한다. 지우는 친구들이 너무나 좋다. 너무나 소중하고 사랑하는 보물 같은 존재들이다.
현관에 있는 캠퍼스 운동화를 신은 후 지우는 밖으로 나갔다. 문 앞에서 친구 두 세 명이 지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친구 한 명이 지우의 목을 가리키며 쿡쿡 웃는다. 지우의 단짝 친구, 지혜다.
"지우, 너 넥타이 하는 거 잊었잖아. 그러고 가려고? 크크크"







지우는 화들짝 놀라며 얼른 집 안으로 들어가 넥타이를 가지고 왔다. 지혜가 말해주지 않았으면 넥타이도 없이 학교에 갈 뻔 했다.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꾸중을 듣게 되는 건 불 보듯 뻔한 것. 지우는 지혜의 마음씀씀이가 고맙기만 했다. "지혜야, 고마워." "새삼스럽게! 알면 됬어." 지혜가 웃는 눈으로 지우를 바라보았다. 우물쭈물거리는 이 덜렁이 친구가 지혜는 귀엽기만 하다.
"자, 이제 가자." "응." 지혜와 지우와 또 다른 친구는 이제 학교를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세 명은 아름다운 학생들이 다니는 고등학교, 신성 여고의 학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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