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봄의 여신이다.






약간은 서늘한 아침. 공터의 어느 한 벤치에는 적막함이 흘렀다.



수연이와 나는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친구들이 있을 때에는 몰랐는데 막

상 이렇게 여자와 단둘이서 있게 되니 딱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빠르게 요동치는 나의 심장만이, 어떻게든 그녀에게 대화를 걸어 보라며

보챌 뿐이었다.




하지만 무슨 이야기를 하란 말인가.




이미 내가 말할 타이밍은 놓쳤다. 그래도 내가 굳이 끝끝내 생각해서 무엇을 말한

다면, 지금 내 얼굴은 엄청 소심한 사람의 얼굴이 되어있을 지언데 오히려 안좋은

방향으로 이끌 것이다. 현재 상황에서 이상한 말을 하면 안된다.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있는 것이 백배는 낳을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또다른 것에 대해서 의식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 인터넷에서 봤는데. 대

화 같은 것에 있어서, 남자가 오히려 여자를 리드해서 여자가 말하기 편해지도록 하는 것

이 호감 받는 남자의 유형이라고. 옛날에 본 적이 있는 어떠한 글귀가 순간 나의 머리에

떠올랐다.




이야기 해야 한다. 말을 해야 한다. 엄청난 압박감이 나의 머리를 짓눌렀다. 식은땀이

이마에서 턱으로 떨어져 내렸는데 난 그것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나, 긴장하고 있구나.





"무슨 생각해?"


내가 답답했던 것일까? 수연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고개와 함께 눈알을 옆으로 돌려 수연이를 쳐다봤다. 수연이는 상체를 앞으로 숙

인채 날 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수연이를 유심히 관찰하듯 보았다. 화장은 하지

않은듯 하지만 너무나 귀여운 얼굴이었다. 똘망똘망하고 속눈썹이 긴 눈망울과 분홍색으

로 반짝거리는 입술. 특히 제일 기억에 남는 것은 너무나도 좋은 피부였다. 하얗고 뽀얀

피부.




"왜 네가 여기에 있는 거야."


몇초동안 다른 생각을 하다가, 방금 전 수연이가 했던 질문에 대해서 답했다. 그런데 그

것이 한없이 퉁명스러웠다. 나는 말을 내뱉어 놓고, 내 속안에서는 엄청난 절망적인 비명을

내질렀다.




멍청한 놈아! 넌 그렇게 밖에 말을 못하냐!




내 마음속에 누군가가 있어서, 나에게 엄청 쓴소리를 하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이미 내뱉고 지나간 것. 돌이킬 수 없었다. 역시 말은 잘 생각하고 해야하는 것이었

다.




그래도 다행이라면 내가 퉁명스럽게 말을 했다고는 하지만 과연 수연이도 그렇게 보였을까?

아닐 것이다. 수연이와는 별로 친하지도 않고, 또한 서로에 대해서 잘 모르니 말이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반복되면 나는 퉁명스러운 사람, 차가운 사람이 될 수 있겠지만.




나는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다.




그러나.




곧 나는 깨달았다. 내가 했던 모든 생각들은, 나의 좁은 마음에서 파생된 나의 소심하고 찌질한

생각이었을 뿐임을.




"왜 내가 여기 있으면 안되니?"


수연이는 두 눈을 크게 뜨며 입술을 삐죽 내민채 말했다. 그런데 웃으면서 말했기에, 수연이가

지은 그 표정과 화가 나 보이는 말투는 장난이고, 또한 수연이가 나와 말을 하고 싶어하고,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나는, 나의 온몸을 휘감았던 알지못

할 위압감을 떨쳐낼 수 있었고, 내 뇌리를 지배했던 찌질한 생각들을 모두 훌훌 털어낼 수 있었

다.




그때 나는 오로지 한 생각 뿐이었다.




나는 시선을 돌려 수연이의 눈을 쳐다보았다. 순간 차가운 공기를 타고 수연이의 향기가 나

의 코로 들어왔다. 나의 입이 열렸다.




"수연아. 너 되게 예쁘다."


뭔가에 홀린듯 내가 말했다.




"그,그래? 하하하……."


나의 말을 듣고, 수연이는 허탈한 듯한 웃음을 내뱉었다.




절망.




여자한테 부담주지 말라고 멍청아아아아아아! 누군가가 나의 뇌리로 텔레파시를 보내어 나를

욕하는 듯하다.




아. 갑자기 이런 말을 하면 역시 부담스럽겠지?




현재 상황만 봐도 그랬다. 웃음기가 돌고, 나를 향해 고개가 돌려져 있었던 수연이었지만

지금은 나에게서 고개를 돌리고 있었고, 웃음기는 전혀 돌지 않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말을 걸어야 할까? 내가 말을 해야 한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운동을 하느냐? 아니면 어디에 사느냐? 아, 그런데 이런 질문을 하

면 수연이는 또 부담을 받을지 몰랐다.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방금 전에 떠났던 압박감이 다시 돌아온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떠나기

전이었던 그때보다 훨씬 무거운 것이 되어서, 이번에는 나의 온몸만이 아니라 나의 정신마저

도 짓눌렀다.




하지만 그때 하나의 생각이 딱 떠올랐다.




"운동다했어?"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수연이를 쳐다보며 내가 말했다.



"응."


수연이가 말했다.




"좋은데 알려줄까?"


내가 말했다.




하지만 너무 갑작스러운 말이었는지 수연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의문스런 표정으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경치가 좋은 곳이야. 너무 갑작스럽나? 하지만 왠지 아는 사람을 이곳에서 만나서, 꼭 그

곳을 보여주고 싶어. 무척 좋은 곳이거든."


그곳에 가게 된다면, 적막함은 사라질 것이다. 그곳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좋아."


수연이는 잠시 말성이는 듯하다가 이내 입을 열였다.




"좋아. 그럼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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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공터를 지나서, 공터에 이어진 산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약 20분 정도 산을 올랐을 때

에 그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은, 산 중심부에 위치한 공간이었다. 암벽 위에 올려진 거대한 돌댕이. 그 위에 우리는 도

착한 것이다.




이곳은 숲풀을 헤치고, "출입금지"라는 줄을 넘어서 들어가야만 했기에 아무도 오지 않는 곳

이었다. 하지만 나는 줄 곧 이곳에 다녔었다.




모든 것이 뻥 뚫려 있는 곳. 저 멀리 건물들이 너무나 작으마하게 보이고, 하늘이 뻥 뚫려 있

고, 산세가 나를 감싸주는 듯한 느낌이 드는 곳. 이곳에 오면 모든 고민을 잊게 되고 편안

하게 쉬다 갈 수 있는 곳이었다.




나는 문득 수연이를 쳐다봤다.



갑작스런 산행, 그리고 가파른 절벽을 올라서인지 수연이는 가쁜 숨을 토해내고 있었다. 그러

나 내가 보고 있는 이 광경을 수연이도 봤는지, 수연이는 입을 떡 벌렸다.




"와! 짱이다!"


수연이는 저멀리, 작으마한 시내를 보며 감탄사를 내질렀다. 그런 수연이를 보며 나는 미소를

지었다.




"좋지?"



"응. 너무 좋아."


수연이의 말에 나는 또한번 웃었다.




"저기 봐바. 예쁘다."


수연이는 산봉우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수연이가 가리킨 곳을 보니, 그 산봉우리는 벚꽃으로 인해서 하얗게 변해버린 상태였다. 아름다

웠다. 아니, 너무나 웅장하고 위대해 보였다.




수연이와 나는 한참을 구경했다.




어색함 따위는 없었다. 이제는 압박감에도 짓눌리지 않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이 나의 모든 생각

을 빼앗아 버렸다.




우리는 적당한 자리에 풀썩 주저 앉았다. 수연이가 들고온 생수를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캬아! 시원하다."


"ㅋㅋㅋ."




귀엽다.




"물 마실래?"


수연이가 나에게 물병을 내밀며 말했다.




나는 얼떨결에 물병을 받아 들었다.




수연이가 방금 마셨는데…….




이럴수가. 간접키스인가? 엔돌핀이 분비된다.




나는 조심스레 물병을 입가에 가져다 대었다. 지금 내 입술이 닿은 곳이, 방금 전 수연이

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라고 생각하니 온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때 수연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높게 솟아오른 돌덩이 위로 올라갔다.




수연이가 올라간 곳은 왠지 위험해 보이고, 실제로 내가 올라가 보았는데 너무 무서워서

바로 내려온 곳이었다. 하지만 그곳에 올라간 수연이는 그다지 두렵지 않은 모양이었다. 오

히려 수연이는 중심을 잡아야하는 팔을 하늘로 펼친채,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그리고

는.




"야야야야야야! 호호호호호!"


하며 외쳤다.




나는 그런 수연이를 보며 웃어댔다.




수연이는 그런 나를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봤다. 하지만 곧 미소를 지으며 한 쪽 눈을 나에

게 찡긋해 보였다. 나는 또한번 웃어댔다.




수연이는 한동안 그 높은 곳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

대로 자리에 누웠다. 푸르른 하늘이 시야에 들어왔다. 너무나도 파랗다고 난 생각했다.




얼마간에 시간이 그렇게 지나고, 나는 문득 시계를 쳐다봤다. 10시를 넘어가고 있는 중이

었다.




이제 슬슬 내려가야 겠다. 나는 일어서서 수연이를 쳐다봤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불어왔다.




수연이의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그리고 머리카락 사이로 수연이의 눈동자가 보였다. 먼곳을

응시하는 듯한 눈동자는 더없이 아름다웠고, 공허해 보였다.




나의 코로 어떠한 향기가 들어왔다. 그것은 생명이 넘치는 봄의 향기였다. 그것은 벚꽃의 향

기 였으며, 풀의 향기였다. 그리고 수연이의 그 달콤한 향기였다.




나는 수연이를 쳐다봤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나는, 현재의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 눈 안에 들어온 그녀를 영원토록

간직하고 싶다고.



나는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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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은 2편 보시면 아시겠지만,

민수 시점 끝난 부분에서 다시 이어지는 겁니다.

이번주에 예비군 훈련을 가기 때문에 어떻게든 올리고 갑니다 ...

예비군 가기 엄청 싫으네요 ㅠㅠ

즐거운 일주일 보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