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공기가 뼛속마저 시리게 만드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산소가 가득 폐로 들

어옴과 동시에 그 차가움은 신선함으로 변했다. 시간을 보니 7시 5분 이었다. 공터에

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있었고, 아줌마 몇몇은 신나는 음악을 틀어 놓은채 춤을 추는

것이 보였다. 나는 공터 한켠에서 준비운동을 했다. 기지개를 펴며 공기를 폐부 깊숙

한 곳까지 빨아 드렸다.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니 파란색 바탕에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있었다. 산뜻한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아침운동을 하는 것인가 보다. 나는 호주머니 속에 넣어 가

지고 왔던 줄넘기를 꺼내었다. 우선 줄넘기를 300회 정도 할 참이었다.




줄넘기를 하면서 나는 내 신체가 운동부족임을 절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초등학생때

만 하여도 줄넘기 500회는 거뜬히 해내었는데 지금은 100회도 버거웠으니 말이다. 하지

만 나는 꾿꾿히 300회 동안 줄을 뛰어넘었다.




약 20분, 줄넘기 횟수로 치면 700회 정도 했을때 공터에서 춤추던 아줌마들이 해산했

다. 그리고 운동하던 아저씨들도 모두 공터를 떠났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시끌벅쩍

했던 공터에는 적막함이 흘렀다. 그리고 그 적막함으로 인해서 왠지 모르게 더 추워

졌다.




하지만 모두 떠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공터를 한바퀴 돌면서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알고 나는 놀랐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가 있

을까? 무언가 아련한 느낌이 나의 모든 것을 감싸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 머리

속에서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지만, 나의 입술은 저절로 미소가 지어

졌다. 아니겠지. 내가 잘못 본 것이겠지. 나는 다시 공터를 한바퀴 돌며 아까 보았던

그 구석쪽을 보았다.




응?




나는 한바퀴 더 돌았다.




그리고 또 한바퀴,




또 한바퀴,




또…….





"헐!"




여섯바퀴 돌았을 때에 나는 확신할 수 있었다. 내 마음은 설레임으로 가득찼고, 심

장은 두근거렸다.





나는 공터 한바퀴를 천천히 돌았다. 그리고 60보 정도 걸음을 떼었을 때에 내 시야

에 누군가가 들어왔다. 공터 구석쪽 벤치에 앉아서, 이어폰을 꽂고 잠을 자고 있는

남자. 아니, 눈을 감고만 있는 것인가. 아무튼. 그는, 그는 분명히 저번에 보았던

사람이다.




피시방에서 나의 컴퓨터를 꺼버린 사람. 그때 그 사람의 인상은 매우 좋았다. 매너

있는 남자. 얼굴도 꽤 잘생겼었다. 그리고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이 남자와 운명이 아

닐까? 하고. 하지만 곧 다시 생각을 수정했었다. 지나가는 사람 중 한명일 것이라고,

나는 그때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뭔가 말을 걸어보고 싶다. 그렇지만 그때와 똑같이 용기는 나지 않았다. 늘어진 츄리

닝 차림이 내게서 자신감을 더 빼앗아 갔다.




이대로 끝?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고 끝나기를 원해? 박수연아 제발 말을 걸어봐!




마음속에서, 나의 영혼의 목소리가 끝임없이 들려왔다. 세상에 속해있는 모든 물질적

인 것을 떠나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말을 걸어보라고. 남루한 모습, 너저분한 나의 모습

에 속박되지 않고 그냥 말이라도 걸어보라며 누군가가 나의 귀에 속삭였다. 하지만 나

의 이성, 정신은 이미 속세의 정의에 옭아매진 상태였다.




볼품 없는 나의 지금 이 모습을 보면 남자는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말을 걸지 않는 것이 낳다. 라고.




한참을 생각하는 사이에 나는 공터를 세바퀴나 더 돌았다. 세바퀴째 돌때 나의 발은,

영혼의 속삭임에 이끌려 남자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으나 곧 나의 이성이, 나의 발을 조

종하여 다시금 공터를 돌게 만들었다.




그리고 네바퀴나 더 돌았을 때에.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눈을 뜬 남자의 모습을 보니 역시 그때 그 사

람이 분명했다. 남자는 돌아가려는듯 기지개를 크게 펴고는 계단을 타고 밑으로 내려가

기 시작했다.




"아."




공터에서 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아쉬운 감정이 나의 마음을 두드려댔다. 한숨이

나온다.




"아아. 하아~ 수연아 이러면 언제 남자를 사귈래. 아오……."


혼자서 우두커니 서서, 나는 나에게 핀잔을 해대었다.




그리고 나는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날에 공터에 나가보았다. 하지만 나의 허황된 꿈이었나 보다. 그 남자는 보이지 않

았다. 어제 말이라도 걸어볼걸.




다음날도 나는 공터에 나갔다. 역시 남자는 없었다.




다음날도, 다음날도, 다음날도…….




그리고 다시 일주일이 흘러 토요일이 되었다. 나는 줄넘기를 가지고 공터로 향했다.




공터에 도착하고, 나는 제일 먼저 '그곳'을 찾았다. '그곳'이 어디냐하면 바로 그 남자

가 있었던 곳. 나는 혹시 몰라서 공터를 도는 척하면서 그곳을 들여다 봤다.




"……!"




'그곳'으로 향했던 나의 시선은 급하게 거두어 졌다. 그리고 나는 재빨리 걸었다.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바보 같은 나의 모습이 웃겼다. 그리고.




나는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그 남자가 보였다. 일주일 전과 같이 그 남자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눈을 감은채 있었다.




나의 얼굴에는 다시한번 미소가 지어졌다.




그 남자는 매주 토요일 아침 7시 똑같은 벤치에 앉아서 음악을 들으며 잠을 잤다. 아니,

잠은 자지 않았다. 눈만 감은 것이었다. 나는 그 남자가 자지 않고 눈만 감고서 벤치에 앉

아 있다라는 사실을, 그 남자를 네번 정도 더 보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물론 그 남자가

무엇을 하는 지는 모른다. 단지 명상을 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추측할 뿐이었다.




오늘도 이렇게 이 사람을 보고 하루를 시작하니 기분이 좋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


알바가 끝났다. 집에 가려고 하는데 누군가한테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안녕? 수연아."


호프집에서 같이 알바하면서 친해진 병민이었다.





"김병민이. 왠일이야. 전화를 다하고. 내가 알바 끝나기를 기다렸냐? ㅋㅋ."



"헐. 어떻게 알았어. 너 알바 끝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ㅋㅋㅋ. 왜?"



"아니, 그냥. 너 오늘 시간되?"



"시간? 응. 남는게 시간이야. 왜?"



"그래? 아, 그럼 술한잔 하자. 내가 살게."



"둘이서? 김미진도 불러서 같이 먹지?"



"미진이? 흠. 원래 사실을 말하자면……."



"왜? 뭔데?"



"내가 말해서 거부하거나 회피하지 말아라."



"말해봐."



"그 전에 말할게 있는데. 수연아 우리 나이 때에는 인맥을 많이 늘려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니?"



이새끼 혹시......김병민이 말하는 중에 나는 김병민이 할 말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시 병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이 아니라, 오늘 친구끼리 만나기로 했는데 같이 만나면 안되냐?"


역시나 나의 예상은 정확했다.



"야. 내가 거기를 왜가냐? 니 친구들끼리 술마시는데. 싫어."


"수연아 제발. 안되?"


"당연하지. 넌 내가 친구끼리 만나는데 갑자기 너를 부르면 너 올 수 있냐?"


"나? 나는 당연히 갈 수 있지."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김병민.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뻥치지마! 어떻게 오냐? 나도 갈 수 없어. 내가 거기 가서 무슨 말을 하는데? 그리

고 애초에 내가 왜 니 친구들을 만나야 하는데?"


"제발 수연아. 그럼 이렇게 하자. 오늘 오는 대신에 내가 나중에 너 대신에 하루 알바

해줄게. 그리고 빕스 사줄게. 어때?"



흠.



"흠. 알았어. 내가 빕스 때문에 이러는거 아니다. 니가 불쌍해서 같이 가준다. 오늘."


"ㅋㅋㅋㅋㅋ. 야 너 조금 속보이는데?"


"안간다?"


"알았어. 미안 미안. 좋아. 그럼 9시까지 신촌으로 올래?"


"신촌?"


"응. 거기에서 만나기로 했거든."


"알았어. 그런데 병민아. 왜 내가 거길 가야 하는 건지 말해줘봐."


"네가 이쁘니까?"


"헐. 소름돋았어. 전화 끊어도되?"


"ㅋㅋㅋㅋㅋ. 이따가 신촌에서 보자. 끊어!"








신촌에 도착하니 병민이가 보였다. 병민이는 말도 안되는 칭찬세례를 나에게 쏟

아 부으며 내가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했다.




"내가 착해서 와준거야. 알지?"


"예. 예 그렇고 말고요. 그럼 가봅시다."


그렇게 말하며 병민이는 어딘가로 향했다. 그리고 곧 병민이가 멈춰선 곳은 장사가

꽤 잘되는 한 호프집이었다.




"여기야."


병민이는 당당하게 호프집에 문을 열고 들어섰다. 병민이를 뒤따라 들어간 나는 왠지

모르게 긴장되었다.




병민이가 들어섬과 동시에 멀리서 손을 흔드는 일행이 보였다.




"재들이야."


병민이가 나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네왔다.




나는 병민이 가리킨 곳을 보았다. 그런데.




헐.




저 사람은?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신기하다.




웃기다.




나의 얼굴에는 미소가 지어졌다.




"이쪽은 내가 알바하는 호프집에서 만난 친구야. 이름은 박수연. 수연아 이쪽은

아까말한 내 고등학교 친구들이야."


병민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의 시선은 그사람에게 향한 채로였다.





"안녕하세요? 박수연이에요."


인사를 한 나는 그사람의 옆이 비어있음을 알았다. 앉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결론

은 쉽게 나왔다. 앉자.



어색한 분위기가 주변에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 어색함 속에서 나를 보고 있는 하나의 시선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 뜨거워서 나의 몸을 타오르게 만들었고, 나의 심장을 뛰게 만들었다. 그사람이

날 보고 있다. 어떻하지? 인사라도 해야하나?



"안녕하세요."


그사람을 보며 인사를 건네기는 했는데. 아, 너무 어색하게 말한 듯했다. 그렇지만 다행이

도 병민이가 나의 어색함을 풀어주었다.



"에이. 말 놔, 수연아. 다 동갑이야."


넌 좋은 친구다. 김병민이.




나는 다시 그사람에게 시선을 돌렸다.


"안녕?"


"으,응. 안녕."


나의 인사에 당황한 것인지, 아니면 수줍어서 그런 것인지. 하지만 그사람의 목소리는

너무 좋았다.





그사람. 아니, 민수와는 금새 친해졌다. 술에 기운을 빌려서인지 용기가 샘솟았고, 민수

역시 처음과는 달리 어느정도 과감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처음에 비해서 과감한 것이지,

진짜 과감한 사람에 비하면 과감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민수의 행동 - 손금을 봐준다던

지, 게임에 걸려서 어색하게 날 안는다던지, 내 머리카락에 무언가 묻었다면서 살짝 쓰

드담는 거라든지.- 은 미소가 저절로 지어질 정도로 귀엽다고 생각들이 들었다.




그런데 생각에서만 멈췄어야 했다. 하지만 빌어먹을 내 입은 나의 통제에 벗어나서 자기

멋대로 짓거릴 뿐이었다.



"귀엽다, 너."


꼬부랑거리는 목소리로, 나는 민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 실수다.




내가 내뱉은 말이 실수라고 느낀 것은 몇분 지나지 않아서 였을 것이다.




왠지 뭔가가 사라졌다. 쉬이 오가던 대화도 사라졌고, 그 귀엽던 스킨쉽도 사라졌다.

내가 잘못한 것인가? 아, 역시 방금 전에 한 말이 타격이 컸다. 하지만 이럴 수록 더욱

기운을 내야 한다. 쿨한 여자로 보여야 점수를 더 따게 될 것이다. 속으로는 그렇지 않

지만, 나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병민이와 말을 들으며 시끄럽게 웃어댔다.




그런데 그때였다.





민수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애."



"뭐 벌써가게?"


병민이가 말했다.




벌써 간다고? 아쉽다. 보내기 싫다.




아앙. 가지마."


나는 민수의 옷깃을 붙잡으며 말했다.




"수연이 왜 이렇게 취했어? 아, 엄마가 오늘 일찍 오라고 했어. 늦게

가면 엄청 맞어."


웃으면서 말하는 한민수. 순간 아련한 느낌이 가슴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나는

민수의 잡았던 옷깃을 풀었다.





"갈게. 잘놀고 가라. 수연아 즐거웠어. 나중에 또 보자."


"응. 잘가. 민수야."


아쉽다. 나는 호프집을 나서는 민수의 등을 쳐다봤다.



몇번이나 봐온 저 넓은 등.



나의 입에서는 한숨이 쉬어졌다. 하지만 곧 미소가 지어졌다.







병민이들과 헤어진 시간은 12시 10분 이었다. 나는 집으로 가면서, 병민이한테 얻은

민수의 핸드폰 번호로 카톡을 날렸다.



[안녕. 민수야.]

[오늘 재미있었어.]

[너 너무 빨리 들어간거 아니야? ㅠㅠ]

[잘들어갔어?]



나는 보내고 나서 확인하고, 또 확인했다.



언제 나의 카톡을 볼까? 아직 안들어갔나?



그런데 3분 정도 더 지났을 때에, 카톡 옆에 붙어있는 "1"이라는 숫자가 사라졌다. 그리

고 답장이 왔다.



[수연이야? 나 지금 집에 도착했어. 애들이랑은?]



왔다, 왔어. 그사람한테서 카톡이 왔다. 한달동안 이름조차 몰랐던 그에게서.




[응. 병민이한테 너 번호 받았어. 애들하고는 방금 헤어졌어.]


[그렇군. 오늘 재미있었다. ㅋㅋㅋ]




민수의 글을 읽고, 나는 오늘 일을 떠올렸다.




아침에 그사람을 보고, 저녁에 그사람을 알게되고......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ㅋㅋ. 나도.]


[그래. 다음에 또보자. 잘자.]


[응. 너도 잘자. 굿나잇!]




아. 기분좋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반짝이 별 몇개가 보였다. 이상한 모양의 구

름도 보였다.




웃음이 나온다.




"이런 일이 정말 일어나다니!"




나는 카톡으로 들어갔다. 프로필을 설정했다.




배경은 우선 그 사람을 보았던. 그 공터의 하늘.




그리고.




상태메세지는…….




씨익.




"기분좋은날."







-----------------------------
또 일주일만에 올리네요...

죄송합니다 .......

수정없이, 정신없이 썼습니다.

아무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편까지 수연이의 시점이고,
다시 이제 민수의 시점으로 돌아갑니다.


추천좀 해줘요...ㅠㅠ

아 그리고 봄이오면은 꼭 1편부터 봐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