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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학년 도서부원의 왠지 애처로워 보이는 모습을 뒤로 한 채 우리는 도서관에서 빠져나왔다.
그나마 윤석이 그 부원에게 "나중에 또 올거야. 책 읽는 것을 꽤 좋아하거든."이라고 말해주어서 다행이였다. 눈웃음까지 지어가며 날려주는 미소를 덧붙여서 말이다. 그 창백한 얼굴에서 움트는 미소를 한 조각 음미하며 도서관 문을 닫는 것은 또 다른 흥미가 있었다. 아까도 말했듯이 이 윤석이라는 녀석은, 본인이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한 카사노바 기질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와 말을 할 때는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던 그 차가운 입술도 금새 영업용 스마일을 띨 수 있다는 것이 약간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뭐, 재미있으니까.



세 명이서 걸어왔던 복도를 이제 네 명이서 돌아가고 있다. 아까부터 느낀 것인데 지금 이 상황, 상당히 위화감이 든다. 힘 없는 수행자에게 주어지는 막중한 임무들, 하나를 채 끝내기 전에 이어지는 또 다른 고난들. 말하자면 어떤 게임의 퀘스트를 수행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드래곤 퀘스트는- 너무 구닥다리일 지도 모르겠지만 어찌 되었든 그 정도의 무게감이다. 하지만 게임의 퀘스트와는 다르게 단계마다 잔류된 에러가 수행자를 괴롭힌다는 점에서 현실감은 꽤 풍부하다.



"지금까지 문예부에 가입한 사람은 몇 명이나 되지?" 잠시의 침묵 끝에 건낸 형우의 그 질문에
나는 금새 잊어버린 이야기의 실타래를 비로소 끌어내는 기분이였다.
형우를 찾으러 왔으면서 잠시동안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결코 쓸데없는 곳에 쏟고 있었던 것은 아니야. 아까까지의 정보를 머리속에서 정리중이였어.
그 많은 양의 데이터를 한 번에 소화하기란 나 같은 미약한 정신 메커니즘으로는 불가능하다고.
그런 것을 이제 형우가 조력자로 나섰으니 나는 감사히 짐을 더는 수 밖에 없었다.
"이제 3명이야. 너랑 나, 그리고....." 아직까지 서로 통성명을 하지 않았네. 형우와 지효.
뭐, 뒤에서 차분히 걸어오는 윤석도 마찬가지지만 저 녀석은 문예부에 들어올 것 같지는 않으니 서로 모르는 채 지내도 별 문제는 없지 않을까. 형우를 찾는 것을 도와준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그건 최소한 친구로서의 의리일 뿐. 친절하다면 친절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무뚝뚝한 녀석의 얼굴을 보니 기분 나쁜 감정이 가슴 켠에서 들끓는다. 최소한 사람다운 표정은 지어줄 수 있잖아. 이 쪽에서는 무시당하는 느낌이 든다고. 이런 생각을 하면서 고개를 돌렸을 때 문득 윤석과 눈을 마주치고 말았다. 5m를 사이에 둔 어색한 거리감. 막상 눈을 마주치니 녀석도 꽤나 당황한 듯 보이지만 겉으로는 드러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본인은 모르는 것 같지만 지켜보는 사람은 다 알 수 있는 법이지, 음. 안경알에 박힌 듯한 매초롬한 눈가에는 어느 겨울의 서리가 서려있는 양 긴장의 끈을 조금도 풀지 않았고 그저 뻔한 초점으로 내 눈길을 응시하고 있었다. 좀 전까지의 여정을 함께 한 동료인데도 우리를 믿지 못하는 것일까. 아니면, 원래 낯을 가리는 편인데 이번에는 특별히 무리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녀석을 위해 이런 마음 씀씀이까지 해야 될 필요는 없지, 음. 왜냐하면 난 저 녀석이 싫으니까. 하지만 이건 딱히 내가 나빠서 그런 것이 아니야. 저 녀석도 나를 싫어하는 걸.



"김지효라고 해. 앞으로 잘 부탁해."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지. 나보다 낯을 더 타는 것 같던 지효가 용케도 먼저 형우에게 손을 내민 거야. 말도 더듬지 않고 똑바로 형우의 얼굴을 바라보며 내뱉는 지효의 목소리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지만 주저함이 전혀 없었어. 약해보이지만 굉장히 강한 아이라는 걸 다시금 느끼며 이어질 형우의 예의바른 대답을 나도 모르게 기대하며 둘 사이의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어.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형우가 지효를 무시한다는 것이였어. 용기 내어 내민 그 손에는 한 톨의 관심도 던지지 않은 채 그저 어깨를 스치며 지나갔지. 얼굴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곧장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더니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윤석의 기억에 근거하는 말이지. 나는 그저 내 소중한, 작은 풀꽃 같은 지효의 샹냥함을 매몰차게 짓밟은 형우의 행동에 너무나 화가 났을 뿐이였어. 화나 났었다는 것도 순화해서 표현한거야. 거칠게 말하면, 형우의 얼굴을 치고 싶은 충동이 휩싸돌았다고 할 수 있어.



"내가 문예부에 들어온 이유는 이래. 오래 전에 나는 어떤 문예대회에 나간 적이 있었어. 네 달 전부터 준비한 나로서는 굉장히 소중한 기회이자 희망이였어. 그 대회에 나가 입선하면 내가 정말 들어가고 싶었던 고등학교, 예술고등학교에 들어갈 수 있었단 말이지. 문학특기자로 말이야. 그래서 정말 열심히 준비했지. 닥치는 대로 소설을 읽었고 날마다 창작 연습을 하면서 실력을 키워나갔어.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틈틈이 비평도 받고 말야. 굉장히 힘들었지만 나는 참고 견딜 수 있었어. 내 꿈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였으니깐 말야. 그렇게 날이 흘러갔고 어느덧 대회 당일이 되었지. 그 날 주제는 '슬픔'에 대해 단편을 쓰는 것이였어.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 전부터 눈여겨보던 주제였거든. 자신 있게 글을 써내려갔고 마감 시간이 채 되기 전에 글을 완성했어. 정말 모든 것이 완성되는 기분이 들었지. 대회 결과를 기다리는 하루 하루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어. 또 다시 여러 날이 지나고, 대회측으로부터 결과가 통보되었지. 그런데 말야....... 그런데..... 내가 낸 글이 수상란에 없었어. 나는....... "


이후의 말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미안하다.



나중에 윤석에게서 들은 말이지만



이어진 형우의 몇 마디 말이 채 끝나기 전에 내가 형우의 뺨을 향해 주먹을 갈겼다고 한다.



그리고 한동안 싸움이 이어졌고 그 소식을 듣고 달려온 교사들에 의해 진정되었다고



윤석이 말해주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는 싸웠다는 사실 자체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도대체 형우가 뭐라고 했을까.


그리고


지효는 왜 울고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