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국소설이 잔뜩 꽂혀있는 도서관 으슥한 구석에 박혀서

그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외딴 앉은뱅이 의자에 홀로 앉아

고독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던 그 남자

그래 나는 그 날

형우를 처음 만났다.




...




"네가 형우지?"

알고 있었음에도 뭔가 물어봐야겠다는 느낌이 들었어.

확신을 받는다는 개념이랄까. 아무튼 그런 것이지.

장난으로 문예부에 가입했을 가능성도 고려해야 했으니까.

만약 그랬다면 이 녀석은 나의 마음을 가지고 논 꼴이 되는 거잖아. 뭔가 열받아.

뭐, 사실 나는 아무것도 아니기는 했지만 말야. 혼자 너무 오버하는 꼴이였을지도.

그래도 나는 엄연한 문예부 '임시 부장'님이라고. 약봐서는 곤란해.

그러니까 지금 나는 너의 입에서 나오는 몇 가지 단어의 조합을 원하고 있는거야.

그래, 이를테면

"맞는데."

뭐 맞다고 한다. 그러면 맞는거겠지, 뭐.

"음...... 그러니까, 문예부에 가입하겠다고 신청을 해놨지?"

"그런데?"

친구끼리는 닮는 법일까. 이 녀석, 나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어.

그걸 보는 윤석의 묘한 비웃음 섞인 눈초리를 감당해야 하는 이 기분 나쁜 상황에서

나는 무슨 말을 건내야 했었을까.

"그 책, 제목이 뭐야?"

아니, 나도 상당한 멍청이인가. 지금 그 문맥에서 그 질문이 왜 튀어나오는 거지?

어떤 종류의 수사법? 지금 와서는 한 번 묻고 싶다. 책 제목 수집가라도 되는지?

"이 책 말이야? 아 이건 나니야 연대..."

그 말이 채 끝나기 전에 옆에서 잠자코 서있던 윤석이 잽싸게 내 말을 가로막았다.

"형우, 너 문예부...라는 곳에 가입하기로 했다면서? 그거 진심이야?"

뭐지, 이 녀석. 기껏 여기까지 안내해줬으면서 지금 와서 훼방을 놓을 셈인가.

아니, 그럴 수는 없지.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형우는 정말로 몇 안 되는 문예부 가입신청자야.

그 밑뿌리까지 흔들거리는 위태한 문예부 존속에 필요한

아주 중요한 인재라고.

개똥이던 소똥이던 가능하면 대량으로 달이고 싶은 기분이다.

국물만 우러나면 그게 그거지 뭐.

맛이야 상관 있겠냐고. 굶어죽기 일보직전인데.

배에 뭐라도 들어와야 살 수 있지 않겠어?



...



미안하다. 말이 좀 엇나갔다.

이 때 당시의 나의 머리속에는 커다란 상념의 시계추가 좌우로 사정없이 흔들리며

온 정신을 뒤틀어놓았기 때문에 기억의 중심이 흐트러졌어. 이해해 줄 수 있지?

어쩌면 그 때 어떤 '데자뷰'를 경험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네.


...



이윽고

형우가 몇 마디 했던 것 같다.

"......때문이야. 잊을 수가 없잖아."

지금 뭐라고 했지? 분명 옆에서 제대로 들었는데도 뭐라고 했는지 하나도 모르겠어.

"그래. .....때문이라고. 그러면 뭐 어쩔 수 없지."

팔짱을 끼고 발을 땅에 탁탁 구르며 초조한 모습으로

형우를 지켜보던 윤석이 내뱉은 그 말은

뭔가 흐릿한 안개발 같이 눈 앞에 아른거리며

결코 그 본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


아니 이거 좀 이상하잖아. 모자이크 처리 같은 건가.

그런데 말도 모자이크가 될 수 있나.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귓구멍에 들어오질 않는단 말이야.

데시벨 문제냐? 헤르츠 문제냐?

"...으......"

괴로운 얼굴로 내 옆에 서 있던 지효.

아 그래.

잠깐 이 녀석의 존재를 잊었구나. 무슨 생각인지.

그때였어.

지효가 내 얼굴을 향해 묘한 눈길을 주더니

이내 내 옷자락을 꽉 붙잡는거야.

당황했지. 아니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지..지효야?"

하지만 녀석은 말이 없었지.

지효의 그 작고 여리기만 한

그러나 너무나 강해보였던 왼쪽 손은

내 교복 와이셔츠 자락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어.

지효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슬픔의 빛깔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무엇을 알아차렸을까.

아니

무엇을 알아차려야 했을까.

그러나 그 때의 나는 결국 아무것도 듣지도, 깨닫지도 못했다.

지금 와서는 새삼스러워.

왜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