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성에 관심이 없었다. 군대에서 선임이나 후임이,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어도 나에겐 관심 밖이었다. 인생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나의 성공이 먼저였으니까.




하지만 어쩌면. 내가 여자를 많이 만나보지 못해서 이러한 생각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녀를 만나면서 나의 인생, 신념, 생각은 송두리째

바뀌어 버렸으니까.




20011년.


그해 봄.


그녀의 이름은 박수연. 수연이와의 만남은 벚꽃이 만개할 무렵이었다.




당시 그때의 나는 군복무를 막 마치고서 드디어 민간인이 되었다는 기

쁨을 만끽하며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정도로 술을 퍼마셨다. 지금 생

각해보면 너무나 미련한 짓이라고 생각한다. 술을 마시다가 술로 인해 배

가 꽉차면 화장실로 가서 토하고 그리고 비워낸 장을 또다시 술로 채웠

으니까.




그때는, 나는 내 몸의 건강은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나는 2년간의 구속에

대한 보상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이 자신의 몸을 상하게 하는 멍청한 일임

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것을 "자유."라는, 그러한 좋은 의미로 머리속에 각

인시킨채 앞날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었다.




그때의 나는 분명 미숙한 존재였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허울뿐인 그 삶으

로 만족했다. 나는 내가 철이 들었다 느꼈으며 "나는 이제 어른이다." 라고

생각했으니까.




수연이를 만난 것은 그 즈음이었다.




여느 날과 같이 인생에 대해서, 여자에 대해서, 학교에 대해서, 부모님에 대

해서, 자동차에 대해서 등등 수많은 주제를 안주삼아 술을 홀짝일 때였다.





평소라면 누구보다도 일찍 왔을 병민이가 오늘은 좀 늦을 것이라며 당부했었

는데 정했던 약속 시간에서 1시간이나 더 지났을 때에 병민이가 나타났다. 그

런데 병민이 뿐이 아니었다. 반갑게 손을 흔드는 병민이 뒤로 어떤 여성이 보

였다.




병민이가 뒤에 있는 여성에게 무언가 말하자, 여성은 미소를 지으며 우리가 있

는 쪽을 쳐다봤다.




나와 친구들은 한창 내뱉던 말을 멈추었고 그 자리에서 아무도 말을 하지 못

한채 병민이. 아니, 병민이 뒤에 서있는 여성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의 앞에 딱 멈춰 선 병민이.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병민이가 아닌, 병민이

옆에 서 있는 여성에게 향해졌다. 그런 우리들을 보고 병민이가 씨익 웃었다.




"이쪽은 내가 알바하는 호프집에서 만난 친구야. 이름은 박수연. 수연아 이쪽은

아까말한 내 고등학교 친구들이야."



"안녕하세요? 박수연이에요."


그녀의 음성이 나의 귓속으로 들어왔다. 왠지모르게 장난기가 가득한 목소리라고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수줍음을 잘타는지 목소리 끝이 약간 떨려왔다.




그녀는 소개를 끝마치고 나의 옆에 앉았다.




좋은 향기가 나의 코로 파고 들었다. 달콤한 과일 냄새 같은. 나도 모르게 고개

가 오른쪽으로 돌려졌다. 그녀는 갈색으로 염색된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고, 눈은

웃고 있었는데 그 커다랗던 눈동자가 반달로 변해서 사라졌다. 나의 시선은 그녀

의 작은 콧망울을 따라 입술로 내려갔다. 그녀의 입술은 분홍색이었는데 반짝 거

리는 그 입술에서 왠지모르게 과일 향기가 나는 것 같았다.




나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세요?"


말하며 미소를 짓는 그녀. 그녀가 말을 할때마다 달콤한 무언가가 나의 오감을

잠식했다.





"에이. 말 놔, 수연아. 다 동갑이야."


내가 대답을 할려는 찰나, 병민이가 끼어들며 말했다.





병민이의 말에 그녀는 활짝 웃더니, 다시 나를 본다.





"안녕?"



"으,응. 안녕."


솔직히 말해서. 나는 이렇게 개인적인 자리에서 또래에 여자를 만난 것은 처음

이었다. 나는 대답을 한다고 했는데, 나의 말투는 위축이 되어 있었다.





난생 처음으로 또래에 여자와, 그것도 바로 옆에서 대화하는 것은 처음에는 무

척이나 힘들었다. 하지만 수연이와 친해지기까지는 약 30분도 걸리지 않았다. 역

시 술의 힘은 대단한 것이었고, 남자가 네명이나 있다는 것이 무언가 나에게 용기

를 북돋아 주었다.





그렇게 우리들은 술을 마셨고, 게임을 했으며, 친구 사이라고는 믿기지도 않을

스킨쉽을 했다.





체액이 교환되는 그러한 행위는 없었지만. 수연이의 손을 잡았고, 뜨거운 포옹을

했다. 그리고 수연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그녀가 마셨던 술잔으로 술을 따라 마셨

다.




나의 본능은 술에 의해서 더욱 과감해졌다. 수연이는 나의 그러한 행동을 어떻게

받아 들였는지 모르겠지만 수연이 또한 나의 손길을 피하거나 하지 않았다. 단지

간혹가다.




"귀엽다, 너."


하며 나의 두눈을 직시할 뿐이었다.




그런데 나를 바라보는 수연이의 그 눈동자가 너무나도 이뻤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반쯤 감긴 그 눈은 너무나 교태스러워웠고 나의 마음속 깊숙히 파고들

정도로 뇌쇄적이었다.




슬쩍 친구들을 보니 무척이나 심심해 하는 표정이었다. 친구들이 수연이에게 대화

를 걸어도 결국 수연이의 마지막 물음은 언제나 나였다. 그렇다보니 친구들은 수연

이에게 대화를 걸지 않았다. 자기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대었고 곧 피곤하다

는 표정을 지었다. 특히나 병민이가 심했다. 병민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서

술을 홀짝였는데, 어쩌다가 나와 눈이 마주칠 때면 무언가 아련한 눈빛을 나에게 보

내었다.




그리고 난 곧 왜 병민이가 나에게 그런 눈빛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나는 병민

이의 그 눈빛을 받고 쭉 병민이를 관찰했는데 병민이는 계속해서 수연이를 보고 있

었던 것이다.




나는 어림직작으로 병민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수연이에게 스킨쉽을 하지 않았다. 말도 잘 걸지 않았다. 물론 수연

이가 개인적으로 나에게 물어오면 대답은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될 수 있으면 수연

이 보다는 모두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다보니 수연이도 자연스럽게 나와만 대화를 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게 질문을

했고 친구들도 그제서야 활짝 웃으며 수연이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나는 슬쩍 병민이를 쳐다봤다. 병민이는 과장된 포즈와 함께 인터넷에서 보았던 웃

긴 이야기를 터놓는 중이었다. 뭔가 재미있었다. 병민이의 이야기가 재미있는게 아니

라 -난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를 수백번 들었다. 언제나 모든 사람들에게 잘 대해주고

재미있는 말을 잘해주는 병민이가, 한 사람을 위해서만 엄청 애쓴다는 것이 뭔가 웃겼

고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는 병민이가 조금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문득 수연이를 보니, 수연이는 병민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깔깔깔." 웃어댔다.




그 순간 내 가슴은 뭔가 답답함이 느껴졌지만 나는 분위기가 달아올라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어 시간을 보았다. 시간은 정확히 11시 27분 이었다.




"나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애."


나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뭐 벌써가게?"


병민이가 말했다.





다른 친구들도 왜이리 빨리 가냐며 거들었다. 수연이도.





"아앙. 가지마."


술에 취해서, 나의 옷깃을 붙잡으며 수연이가 말했다.





"수연이 왜 이렇게 취했어? 아, 엄마가 오늘 일찍 오라고 했어. 늦게

가면 엄청 맞어."


확실히 오늘 집을 나가기 전 엄마의 당부가 있었다. 12시 넘어서 오면

아구창 뽀개진다고.




"마마보이냐? ㅋㅋㅋㅋ."


내 말에 윤석이는 그 순간을 놓칠세라 깨알드립을 쳐날리며 실실 쪼개었

다.




나는 그런 윤석이를 보고 가운데 손가락을 펴주었다.




"갈게. 잘놀고 가라. 수연아 즐거웠어. 나중에 또 보자."




"응. 잘가. 민수야."


수연이는 아쉽다는 표정을 지우고는, 곧 방긋 웃으며 나의 인사에 화답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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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도착한 시간은 11시 53분 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엄마가 거실 쇼파에 앉아 티비를 보고 있었다.



"민수왔니?"


엄마가 말했다. 그러면서.



"아 7분만 더 늦었어도 스트레스 풀 기회였는데. 아깝네."


엄마의 표정은 진심이 담겨져 있었다. 나는 그것이 웃겨서 소리내어 웃어댔다.




"엄마는 아들이 늦어서 걱정되는게 아니라, 어떻게 하면 아들을 때릴까하고 생각하는

거 같아요. ㅋㅋㅋ."



"아니야.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아 엄마는. 단지 아들의 아구창을 때린 다는 것은, 아들

이 아직 느껴보지 못한 위험을 미리 맛보여 주겠다는 엄마의 생각이야."



"그게 뭐에요? ㅋㅋㅋㅋ. 그런 위험을 미리 맛보고 싶지 않아요."



"잘못된 생각이야. 너가 밤길에 누구한테 얻어 맞아봐. 넌 그때 당황해서 아무런 행동

도 하지 못할걸. 하지만 엄마가 미리 널 폭력으로 단련 시켜 놓으면 너는 밤에 누구한테

맞더라도 이성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거야."



"ㅋㅋㅋㅋ. 엄마. 전 누구한테 얻어 맞을 생각도 없고, 그리고 얻어 맞게 된다면 그 전

에 도망칠 거에요. 아, 우리 엄마는 정말. ㅋㅋㅋㅋ. 엄마 과거에 이종격투기라던가 권투

라던가 생각해보신적 없어요?"



"응?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엄마는 없었어. 그냥 너의 얼굴을 보면 주먹이 불끈

쥐어질 뿐이야."



"ㅋㅋㅋㅋㅋ. 아들을 그렇게 때리고 싶어요?"



나의 말에 엄마는 얼굴이 시뻘겋게 변할 정도로 웃어댔다.




엄마와의 수다는 20분 정도 더 하고 끝이났다. 나는 마지막으로 "밥 안먹어요."라고

말한 뒤, 내 방으로 갔다.




방에 와서 핸드폰을 보니 카톡이 와있있다.




나는 카카오톡을 클릭했다.




'친구찾기'에 표시된 1과 '채팅'에 표시된 4. 나는 마음속으로 '수연이 일까?' 하고 생각

했다. 나는 먼저 '채팅'을 클릭했다. "착한아이"라는 명으로, 프로필이 하늘사진인 어떤

사람이 "잘들어갔어?" 라고, 카톡이 와 있었다. 나는 그것을 클릭했다.



[안녕. 민수야.]

[오늘 재미있었어.]

[너 너무 빨리 들어간거 아니야? ㅠㅠ]

[잘들어갔어?]



수연이다. 보낸 시간을 보니 12시 13분. 내가 가고 나서 바로 헤어졌나? 아무튼 우선 먼

저 답장을 해야했다.



[수연이야? 나 지금 집에 도착했어. 애들이랑은?]


내가 글을 쓰자마자 내 글 옆에 자리한 "1" 숫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바로 답장이 왔다.



[응. 병민이한테 너 번호 받았어. 애들하고는 방금 헤어졌어.]


[그렇군. 오늘 재미있었다. ㅋㅋㅋ]


[ㅋㅋ. 나도.]



여기서 난 갈등했다. 대화를 이어 나가야 할지 아니면 끝맺어야 할지. 하지만 나는 곧,

"여자는 관심없다. 내 성공이 우선이다." 라고 머리속에 떠올린 후 글을 썼다.



[그래. 다음에 또보자. 잘자.]


[응. 너도 잘자. 굿나잇!]



대화를 끝맞치고, 난 '친구찾기'에 있는 수연이를 내 친구목록에 추가했다. 수연이의

프로필을 클릭해보니 밝게 빛나는 태양과 푸르른 하늘, 그리고 하얀 구름이 보였다. 상태

메세지에는 "기분좋은날." 이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건 그렇고 참 이뻤다. 향기도 기억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아, 전화번호 안물어봤다."



나는 혼자 중얼 거리며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머리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설

레임, 여자, 웨이브 진 단발머리, 촉촉한 입술, 부드러운 피부, 좋은 냄새……그리고.




병민이는 수연이를 좋아하는 거겠지?



"아."



친구가 좋아하는 사람한테 이성적으로 호감을 가지는 것은 안좋은 일이다. 나는 의식적

으로 의리를 찾았다.




하지만 이때는 몰랐다. 의식적으로 내가 병민이를 찾았다면 나의 무의식은, 무의식 속

에 나는. 그녀의 향기를 원했고 그녀의 음성을 듣고 싶어 했으며 그녀의 눈을 통해 나를

보고싶어 하고 있었다. 이때까지는, 나는 이러한 것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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