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각사각,
흑심이 종이위를 춤추는 소리가 차가운 밤 공기를 타고 방 밖으로 세어나간다. 아니, 조금 감상적인 생각이었을까? 아무리 밖이 조용해도 그렇지, 글자쓰는 소리가 밖에까지 들린다니, 바보아냐? 하는 생각을 하며 자조적인 웃음을 지어보인다.
밖은 고요하다. 하늘에는 둥근 보름달이 밝게 떠 밤하늘을 열심히 밝히고 있건만, 달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밖에는 인기척 하나 없다.

그렇다고 밤 늦은 시간이냐면 딱히 그렇지도 않다. 한겨울이라 대여섯시만 되어도 해는 떨어지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의 생활패턴이 변하는가 하면 그건 아닌것이다. 참고로 지금 시각은 9시 15분을 막 지나가고 있는 참이다.



꼬르륵-.



그러고보니 오늘은 하루종일 재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그야 하루 종일 작업에만 메달렸으니 어쩔수없나……. 오늘 하루도 이렇게 지나가는가 하는 생각에 머리속을 스쳐지나간다. 나름대로 오늘은 오늘에 충실했던 훌륭한 날이였다고 자평해보며 크게 기지개를켠다.
원고가 전혀 진척되지 않았다는 사소한 진실을 오늘하루 마음속 깊은곳 어딘가에 쑤셔 넣어두기로 했다. 응, 그거로 됐다.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에 있는 가스레인지 위에 물을 올렸다. 물이 끓을 동안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해 보았지만 곧 귀찮아져서 커피나 마시자는 결론을 내놓았다. 끓는물을 머그컵에 조심스럽게 붓고 그 위에 커피믹스를 넣는다. 커피가루가 물에 닿기 무섭게 녹아내리며 퍼져간다. 무색무취의 물이 마치 연금술의 그것과 같이 커피색으로 변해갔다. 좋은 향도 나기 시작했다.
티스푼을 이용해 몇번 휘저어 잘 녹지않은 부분을 섞어주는 작업을 끝내고는 컵을 들어 입으로 가져가 한모금 마셨다. 짙은 갈색을 띈 액체가 입안으로 쏟아져 내린다.
특유의 쓴 맛이 혀를 통해 전달되어 들어온다. 아직 나는 커피의 맛을 잘 알지 못한다. 그저 커피의 향과, 마신 후에 정신이 번쩍 드는듯한 그 느낌이 맘에 들어서 커피를 마시는 나로써는 이런걸 맛있다고 들이켜대는 어른들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아, 나도 어른이지.

실없는 생각을 하며 작업실로 돌아왔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는 원고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고 작은 스탠드등만이 주위를 밝히고 있었다. 음침해 보여서 형광등을 켰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형광등이 몇차례 깜빡깜빡 하더니 불이 들어왔다. 드디어 방안이 환해졌다. 환해진 방안을 한바퀴 둘러봤다. 지금까지와 다를 바 없는 처참한 모습이 그대로 들어나 있다.
며칠전 방세를 받으러 왔던 희나씨는 '히키코모리인건 자유지만 혹시나 일을 치를때는 집 밖에서 해줘, 방세가 떨어지면 곤란한걸…. 그치?'라는 진심인지 농담인지 알기 어려운 말을 방실방실 웃으며 하고갔다. 그사람도 참 미스테리한 부분이 많다. 젊고 미인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모든 스텟이 으로 둘러쌓인 라스트 보스같은 느낌이랄까? 언제나 마이페이스이기도 하고…….



딩동-!



희나씨에 대한 깊은 고찰을 시작하려는 찰나에 방해가 들어왔다. 누구지? 별 볼일 없는 녀석이면 혼쭐을 내주겠다고 다짐하며 현관쪽으로 향했다.



"신문이라면 보고 있는데요, 바꿀 생각도 없구요."

"너무해-! 알면서 그러는거지?"

"아아……."

"그래! 나라구-! 어서 문을 열-"

"우유는 알러지가 있어서 안되구요, 저 절 다닙니다. 교회는 별로 흥미 없어요. 보험은 이 이상 들고 싶지 않고요. 물건은 둘 곳도, 살 돈도 없습니다. 그럼 수고하세요."



후-. 강적이였다. 놈은 완벽하게 침몰했는지 아무런 반응도 없다. 모처럼의 K.O.승을 거머쥐었더니 조금은 우쭐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다시 찾아온 정적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세어나왔다. 어쩔 수 없다. 대개 작가라는 작자들은 다 이렇다고 스스로를 위로해본다. 오늘은 오늘이고, 내일은 내일이다. 내일은 방정리도 좀 하고 밖에 나가 부족한 비타민D를 광합성 하는 시간을 가지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오늘은 이만 작업도 마무리 하고 쉬어야겠다.

다시 작업실로 돌아가 여기저기에 쌓여있는 원고지들을 주워 한곳에 모았다. 컴퓨터는 없다. 기계치인건 아니지만 우선, 당연하게도 컴퓨터같은 고급 기재를 들일만한 돈이 없다. 아무리 한국이 컴퓨터의 보급률이 세계1위라고 해도 이곳, <<세인트가（家）>>에 한정해서는 컴퓨터란 여전히 비싼 고급 전자기기일 뿐이였다. 어째서 이 건물에는 돈없는 서러운 청춘들박에 없는지 모르겠다.
뭐, 그런 전기세 괴물이 없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건 없다. 아직은 아날로그식이 더 편하기도 하고, 손때묻은 필기도구들이나, 완성되어 하나 둘 쌓여가는 원고지를 볼때면 느껴지는 그 성취감은 분명 쇳덩어리에게선 느낄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너저분한 방이 왠지 생활감 넘치는 따듯한 장소로 느껴지는듯한 느낌까지 들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건 역시 아니지 싶어 고개를 세게 좌우로 흔들어대자 다시금 제정신이 돌아왔다. 자신의 눈 앞에 보이는 것은 따듯한 가정방이 아니라 돼지우리임을 다시 한번 상기시켰다.

잠깐, 돼지우리라니?

다시금 방을 찬찬히 훑어봤다.
여기저기 굴러다니는 쓰레기들, 한구석에서 빌딩을 짓고 있는 컵라면 다발과 음식이 눌어 붙어 있는 냄비까지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



전혀 몰랐다. 이정도로 참혹한 환경이였다니. 희나씨의 말도 마냥 농담을 아니였다는게 느껴졌다. 무언가에 씌여 있었던게 아닐까 싶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헤 이곳에서 이것들과 함께 뒹굴며 먹고 잘 수 있었겠는가?
끊임없는 궁금증들이 해일처럼 몰려 들었지만 잠시 재쳐두고 악취의 원인이 되고 있는 음식물들을 우선적으로 처리하기로 했다. 저녁이 넘은 시간이기 떄문에 본격적인 청소작업은 내일 해가 밝아야지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
빈 컵라면용기를 쓰레기봉투에 담고 냄비를 설거지하기 위해 주방으로 향하고 있는데 현관에서 하는 문이 열리는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 이외의 스페어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고작해야 집주인인 희나씨 뿐인데, 희나씨는 이런 무례한 방문방법은 사용하지 않는다. 역시 도둑이나 강도같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의 방문인것 같다. 유일한 무기인 나무배트는 엉망진창인 방 어딘가에 묻혀있다. 도마 옆에 놓여있는 식칼이 보였지만 바로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대신 도마를 들어 방패 삼기로 했다. 벽에 걸려있던 프라이펜이 무기로 낙찰되었다. 마지막으로 비교적 깨끗한 냄비를 머리에 뒤집어 썼다. 좋아, 완벽하다.

스윽─.

바로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젠장, 장비를 갖추는데 너무 시간을 투자한 나머지 놈이 접근해 오는것 조차 놓치고 만 것이겠지. 이쯤에서 세이브 파일을 로드 시켜 주었으면 했지만 아쉽게도 현실에선 그런 기능을 지원해주지 않는다. 부모님, 불효자는 먼저 갑니다. 모두 안녕…….
같지도 않는 짧은 유언을 속으로 되뇌이며 두눈을 감았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역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서 질끈 감았던 두 눈을 살며시 뜨고 인기척이 느껴졌던 방향을 향해 몸을 돌렸다.



"푸흡! 쿠흑, 풉!"

"…웃음을 참을건지 신나게 웃을건지 확실하게 해주면 고맙겠어."

"히끅, 그럼 사양않고… 푸핫, 푸하하하!"



눈앞에는 교복이 어울리지 않는 작은 몸집의 여자아이가 배꼽이 빠져라 웃고 있었다. 속으로 신나게 욕을 퍼부어주며 거울에 모습을 비춰보았더니 그 꼴이 참으로 가관이다. 병정놀이를 하는듯한 그 차림은 둘째치고 머리에 뒤집어 쓴 냄비에선 어디에서 나왔는지도 모르겠는 미역줄기마저 대롱거리며 걸려있어 괴기함을 더했다. 이래서는 다 큰 어른이 병정놀이를 한다는 애교수준의 귀여운 소문이 아니라, 세인트공동주택에 사는 마도학을 연구하는 흑마술사가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을 치루는것을 목격했다는 괴담이 퍼질게 뻔했다. 그렇게 되면 어떠한 형태로든 희나씨에게 피해가 가게 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책임을 지고 방을 빼게 되는 최악의 사태까지 머리속에서는 이미 선명하게 시뮬레이션이 되고 있었다. 이 가까운 미래에 일어날 재앙을 피하는 방법은 눈 앞에 버릇고 건방진 꼬맹이의 입을 막는 수 밖에 없다고, 모든 세포가 만장일치로 외치고 있었다.



"꼬마아가씨, 여긴 어떻게?"

"뭐?"



내 완벽한 응대의 어디가 불만인지 녀석은 신나게 웃어대던것도 멈추고는 대신 눈을 크게 치켜뜨고 나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탐색하는것보단 역시 스트레이트를 날렸어야 했다고 생각하고 있던 나는 녀석과 논이 마주친 순간 왠지 모를 거대한 살기를 느껴 몸을 부르르 떨어야만 했다. 작아도 침입자는 침입자 라는 거구나. 하고 생각하며 역시 조심스럽게 대하는게 좋겠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느냐고……."

"그 전에!"



긴장감에 나도 모르게 나온 말이지만 그래도 존댓말을 사용해줬는데 침입자는 그걸 아무렇지 않게 받아넘긴걸로도 모자라 중간에 끊어먹고는 되려 언성을 높이고 있다. 또,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도, 전혀 위축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나를 내려다 보고있단 느낌이 들 정도로 거만하기까지 하다. 마치, 먹이 사슬 피라미드의 최정점에 있어야 할 '그것'이 여기 있는 '이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저 불러 이르킨다. 그나저나 그 전이라니, 아무리 생각해도 말 실수를 한거 같진 않은데 왜 저리 심기가 불편한건지 모르겠다.



"혹시, 꼬마아가씨?"

퍽!



내 말이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듯 수도로 내 정수리를 내려친다. 더 기분이 나빠지기 전에 정답을 찾아낸건 기쁘지만 아프다. 그것도 몹시.



"…손은 그래도 맵구나."

"무슨 뜻이야?"



무의식적으로 나온 말에 다시 한번 내려칠 기세로 손을 높이 들고 물어온다. 정답을 알았으니 이 아가씨를 달랠 차례라는건 알겠는데 정확히 '꼬마아가씨'의 어느 부분이 맘에 안들어서 이 사단을 부리는지 도통 감이 오지 않는다.



"…별로 아무 뜻도 없어."



적당히 둘러대며 힌트가 될 만한걸 찾기 위해 녀석을 슬쩍 훑어봤다. 누가 봐도 작고 마른 몸, 가슴 언저리까지 오는 긴 흑발, 자세히 보니 꽤 귀여워 인기 있을겉 같은 이목구비와, 그 가운데서도 기가 드세다는걸 알려주기 위함인지 빛나고 있는 눈동자. 무엇보다 수상한 교복. 아무리 많이 쳐줘야 중학교를 못 넘을 것 같은데 교복은 이 일대에선 명문고로 유명한 고등학교의 교복이였다. 멍하니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녀석이 표정을 구기며 뒤로 물러나 나와의 거리를 벌렸다. 흥, 누굴 범죄자 취급하는거야, 이 무단가택 침입자야! 라고 한소리 해주고 싶지만 한대 더 얻어 맞을것 같아 그만두었다.
경멸에 찬 시선 반, 약간의 두려움이 담긴 시선─그래도 자신이 여자아이라는 자각은 있는 것 같다─반을 받으며 한가지 결론을 도출해 내는데 성공했다. 일단 저 아이는 예의 그 명문소를 다니는 언니가 있다고 가정했다. 이맘때의 꼬맹이들이란 하나같이 얼른 커서 어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이 녀석도 예외는 아닐테니 언니 교복을 입고 나와 헤메다 내 방까지 온게 분명하다. 그래, 힘껏 변장을 했는데 장단을 맞춰주긴 커녕 단번에 정곡을 찌르니 기분이 상할대로 상한거야. 어른으로써 어린아이의 꿈을 짓밟는 행위를 하다니, 정말 맞아도 할 말이 없다. 비록 상대는 꼬마지만 진심을 전하기 위해 정식으로 사과하기로 정했다.



"미안!"



아무말도 없이 서서 불안감을 증폭시켜가더니 갑자기 난대없는 사과를 해오니 놀랐는지 녀석의 두 눈은 동그랗게 변했다. 노여움이 가신 이때가 이회다 싶어 더욱 열심히 고개를 숙였다.



"절대 널 바보 취급하려는 생각은 없었어, 네 기분같은건 전혀 생각하지 않고 말해서 정말 미안."

"…별로, 그런거 신경 쓰지 않지만…. 이렇게까지 사과하면 어쩔 수 없네."



녀석의 눈빛이 누그러지며 사과를 받아들이는 듯한 말을 우물우물거리며 꺼냈다. 이런 사과를 받아본 적이 없는걸까? 귀염성이라곤 눈꼽만큼도 없었지만, 녀석에게서도 진심이 느껴져왔다.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하기 힘들 나이일텐데도 이 아이는 사과를 받아주었던 것이다. 대견한 마음에 머리를 쓰다듬어 줄까 싶었지만 또 오해를 살까 싶어 대신 말로써 그 어른스러움을 치하했다.



"그래, 언니 교복 같은걸 입지 않아도 넌 출분히 어른스럽다니까."

퍽!

"아야얏!"



맞았다, 또 맞았다. 어째서? 왜? why?
거실 바닥에 자빠진 채 양손으로 정수리를 문지르며 항의하는 듯한 몸짓으로 녀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녀석은 밉살스런 표정 대신 당장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나를 흘겨보고 있었다.



"…언니같은건 없어……."

"…어…에?"



녀석의 예상 외의 반응에 당황한 나는 내 추리의 근간을 뒤흔들어 놓을 폭탄발언에 대해서도 얼빠진 대답밖에 내놓지 못했다. 그런 내 행동에 녀석은 교복 스커트에 달린 주머리를 뒤적거리는가 싶더니 작은 메모장 같이 생긴 물건을 꺼내 내 눈 앞에 들이내밀었다. 메모장에는 빛나는 황금색 실로 <<미리내 고교>>라는 글자가 학교 공식 마크와 함께 세련된 글자체로 깔끔하게 박음질 되어 있었다. 이 메모장은 그 유명한 명문고의 학생증인 것 같다. 여기까지 생각을 하고 다시 녀석을 바라보려는데 녀석이 학생증을 펼쳐보였다. 학생증에는 놀랍게도 녀석의 사진과 이름, 생년월일과 함께 이 증서는 위 학생이 미리내고교생임을 증명한다는 글귀가 커다란 도장자국과 함께 적혀있었다.



"…혹시 이름이 강아리?"



실날같은 희망이 담긴 말을 녀석의 눈치를 보며 조심스럽게 건냈고, 녀석은 대답없이 고개를 주억거리는 것으로 내 기대를 무참피 꺾어버렸다. 학생증에 나온 생년월일에 따르자면 이 아인 올해 2학년이 되는 여고생인 것이다.



"……."



이번에야말로 할 말이 없어졌다. 투정 부리는 아이를 달래려는 것 같은 가벼운 일이 아닌 것이다. 사춘기를 겪고 있을 한 소녀의 콤플렉스인 듯한 점을 마구 들쑤셔 놓았다. 그걸로도 모자라 착각의 착각을 거듭해 말도 안되는 사과까지 했다. 그리고 소녀는 그 잘못된 사과에 진심으로 응해주었다. 소녀의 입장에선 완전히 손바닥에서 놀아난 꼴일 것이다. 마음에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을지, 싶게 생각하지 않아도 능히 짐작 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감히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문득 머리 위에 작지만 따스한 손길이 느껴졌다.



"하람, 하늘에서 내려준 축복받은 사람의 이름."



주저앉아 바닥을 향하고 있는 나의 머리를 부드럽게 스다듬으며 소녀는 말했다. 어째서 내 이름을 알고 있는건지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소녀가 말을 이었다.



"당신이니까, 이번만큼은 특별히 용서해줄게."



거기까지 말하고, 소녀는 내 머리에서 손을 거두며 경쾌하게, 하지만 우아한 몸동장으로 뒤로 살짝 물러나 내가 일어날 공간을 만들어 주었다. 손은 내밀어 주진 않았지만 빛나는 두 눈동자는 깊은 신뢰를 보내오고 있다. 마치 오늘 처음 만난 사이가 아닌듯한,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사람을 보는듯한 눈빛이다. 신비한 느낌이 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툭툭 털고 있자니 다시 한번 녀석의 음성이 내 귀를 울렸다.



"다시 정식으로 소개할게. 나는 강아리. 이 공공주택 바로 앞 건물로 이사왔어. 잘 부탁해."



이제야 손을 내민다. 아리의 천진난만한 웃음에 쭈뼛거리면서도 손을 맞잡았다.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나도 모르게 말이 터졌다. 표정관리도 안되서 뺨이 헤실헤실 풀어졌다.



"바보, 어째서 내 방을 침략했는지 해명하는게 우선이잖아."



가벼운 농담을 던질 생각이였는데 아리는 이제야 깨달았다는 듯 숨을 집어 삼키더니 얼굴이 빨게지기 시작했다. 마치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리길 수십번 반복하고 나서야 말이 정리되기 시작한것 같았다.



"우리 엄마랑 당신네 어머니은 오랜 친구셔."



짧은 그 한마디는 이 모든 상황을 종결시키는 말이였다. 부모님 사주를 받고 아들래미가 잘 먹고살고 있는지 보러 온 것이겠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한가지 남아있다. 내 의중을 알아차린건지 아리는 부끄러워 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야, 처음부터 침입할 생각은 없었어. 하지만 당신이 문을 안열어 주는걸."



아치는 부끄러움을 날려보내려는듯 과장스럽게 몸을 움직여가며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괘씸하기도 해서 그냥 집에 돌아가버려야지, 하고 건물 현관을 나서려는데 희나 언니가 그 모습을 봤는지 무슨 일이냐고 물어 오는거야. 상황설명을 짤막하게 했더니 '어머어머, 그건 가보지 않을 수 없네.'라면서 키를 넘겨주는걸. 억지로 등까지 떠밀려서 '파이팅!'이라고 외치니 그냥 돌아갈 수가 없었어."



머리에 손을 얹고 신음했다. 그렇군. 희나씨가 사건의 발단이구나. 내일 날이 밝는데로 찾아가서 단단히 항의해야겠다고 마음깊이 다짐했다. 그리고 <<희나언니>>라니, 여자들이랑 원래 그렇게 금방금방 친해질 수 있는건가보다. 하고 그 엄청난 친화력에 조금 감탄했다.



"왜 문은 열어주지 않은거야?"



이번엔 아리쪽에서의 질문이였다. 나는 내 방에 불쑥 찾아오는 손님 같은게 있을리가 있겠냐고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식어버린 커피가 들어있는 머그컵을 들어 단숨에 비워버렸다. 아리는 내 대답에 쓴웃음을 지었다.
그게 대화의 끝이였다. 10분 남짓했던 시간이 너무나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나는 침묵이 계속 이어지는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다시 싱크대에 서 설거지를 시작했다. 아리는 한켠에 식탁 의자를 차지하고 앉았다.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리는 줄곧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할 말이 있는듯한 눈치여서 물어보니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다. 대답하는 아리의 눈이 떨리고 있었던 것 같아 화장실에 가고 싶느냐고 다시 되물었더니 '얼간이'라는 욕과 함께 참치캔이 날아왔다. 이번엔 눈이 떨리고 있지 않았다.
아리는 화장실 발언에 심통이 났는지 볼을 잔뜩 부풀린 채로 눈도 마주치지 않더니 바닥에 굴러다니던 잡지 하나를 주워들고 읽기 시작했다. 내가 설거지를 끝내고 젖은 손을 닦을때까지 그러고 있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나 어디론가 갔다.
곧장 다시 나타난 아리는 커다란 냄비를 들고 있었다.



"카레, 아까 가져왔었는데 현관에 놓고왔어."



아리는 냄비를 내려 놓으면서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막 이사와 아직 짐을 다 못풀었다느니, 덕분에 장도 재대로 보지 못해 매일매일이 카레라느니 하는, 요약하자면 카레는 엄청나게 많으니 사양하지 말고 받으란 이야기였다.



"아주머니께 감사하다고, 잘 먹겠다고 말 전해드려. 짐 푸시는데 필요하시면 부르시라고도 전해드리고."



카레를 받으며 감사를 표시했다. 인스턴트가 아닌 카레가 얼마만인지 감도 오지 않는다. 카레 생각을 하니 하루종일 혹사당한 배가 다시 한번 배고픔을 호소해왔다.



"푸흡, 됐네요. 우리집 짐 걱정 말고 본인 배나 신경쓰시죠."



쿡쿡 웃으며 얄미운 소리를 해온다. 반격을 해주려고 했지만 기분이 좋아보이는 아리를 보니 그럴 맘도 사라져 버렸다.



"너무 오래동안 실례하고 있었네. 냄비는 다시 받으러 올테니까 맛이 어떤지는 그때 알려줘."



아리는 다시 오겠다는 말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밖에 어두웠기 때문에 나는 아리를 바래다 주겠다고 했고, 아리는 집이 바로 코앞인데 무슨 배웅이냐며 사양했다. 하지만 나도 아리도 고집을 꺾지 않아서, 이곳에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겠다는 절충안을 내놓을때까지 우리는 실랑이를 벌여야만 했다.
아리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건물 현관에 다시 모습을 들어냈다. 고개를 들어 내가 바라보고 있음을 확인한 아리는 천천히 앞을 향해 한발한발 걸어나갔다. 하나부터 시작한 발걸음은 정확히 스무발자국이 되는 지점에서 멈추었다. 앞에는 작은 마당이 딸린 단독 주택이 있다. 정말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사는구나. 그렇게 생각하니 며칠전 밖에 소란스러웠던것 같기도 하다. 아리는 어느새 대문을 지나쳐 마당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마당을 빠져나오기 직전에 몸을 빙글 돌려 나를 정면으로 바라봤다. 아아, 그러고 보니 인사를 안했구나 싶어 손을 들어보였다. 내가 손을 들어올려 보이자 아이는 새하얀 이를 내보이며 손을 크게 좌우로 흔들어댔다. 아리의 입술이 움직였다. 바이바이─. 라고 말하고 있다는걸 간신히 깨달았다. 나도 입모양을 움직여 답해주었다. 그재서야 아리는 만족했는지 총총걸음으로 집안에 들어가 모습을 감췄다.



"후아─."



깊은 숨을 내쉬는것과 동시에 피로가 몰려왔다. 몇일치 에너지를 한번에 다 쏟아낸듯한 느낌이다. 이렇게 주위가 소란스러웠던건 일년전 내가 입주하던 그 날이 마지막이였다. 세인트 공동주택의 전통이라면서, 희나씨는 내 팔을 잡아끌고는 뒷마당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주인공을 기다리면 입주자들과 함께 시작된 입주 축하파티는 아직까지 기억이 생생하다.



P I P I P I ─.



좀 더 옛생각을 하며 여운에 잠겨 있으려니 집 안에서 휴대폰이 전화가 왔음을 시끄럽게 알려왔다. 나는 이미 늦었다구요. 라고 혼잣말을 구시렁대며 집안으로 걸음을 옮겨 전화기를 집었다.
전화를 걸어온 상대는 예상대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호들갑스러운 말투로 아들의 근황은 묻지도 않으신채 당신의 친구가 근처로 이사 갔으니 보면 인사 잘 드리고 싹싹하게 굴라는 말씀을 하셨다. 내가 시큰둥하게 이미 그 집 딸이 방에 찾아와 먹을것도 주고 갔으며 방 바로 앞 건물에 이사온것 같다고 말씀드리니 조금 놀라신 듯 했다. 왜 애한테 쓸대없는 소리를 하셨느냐고 한소리 하려고 했는데 범인은 어머니가 아니신듯 했다. 오히려 어머니께 염치없게 음식까지 받았으니 처신 잘 하라는 협박아닌 협박까지 듣고서야 전화기를 내려 놓을 수 있었다.
전화를 끊은 나는 늦은 저녁을 먹었다. 반찬이라고는 김치와 방금 얻은 카레밖에 없었지만 두 공기나 비웠다. 한밤에 과식을 했으니 내일 아침은 퉁퉁 부은 얼굴로 맞이하게 될 것이다.

카레는, 맛있었지만 조금 달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