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억하기 싫은 그 날, 별 아래 앉은 그 날.




...




점차 얼굴이 사색이 되어가는 나에게 이런 말을 했었지. 넌.

"어때? 좀 짚이는 것이 있어?"

아니, 짚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그거잖아, 그냥.

그래. 예전에 몇 번 지효한테 '이상한' 전화를 건 적이 있어. 물론 기분이 상했을수도 있겠지.

하지만 이 쪽도 사정이라는 것이 있다고. 나라고 지효를 괴롭히려고 일부러 그랬을까.

다른 사람은 모르더라도 지효만큼은 알아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 혼자만의 착각이였을지도 모르겠다.

"그, 그럼...지효가.."

"글쎄, 그냥 그 말 뿐이였어. 별로 다른 낌새는 보이지 않더라고."

그렇다면 그냥 내 전화가 싫다는 건가. 단순한 변덕이였으면 좋겠는데.

하지만 지효가 '단순한 변덕'을 부리는 그런 시시한 아이라고는 생각이 안드는걸.

"이왕 말하게 된 거 다 말하는 것이 좋겠어. 지효가 말야...."




...





뭐?




...




이건 그 날로부터 2달전의 일이다.



[2달전]

때는 초여름, 봄 사이 돋아난 잎사귀들이 한창 짙푸르게 뻗어 나가는 생기 넘치는 계절.

이 활기찬 청춘의 꽃을 맞아 생기발랄한 젊은이들의 유쾌한 일상이 매일 같이 계속되었지만

역시 니트한 나로서는 어떤 생산적인 일을 할 생각이 전혀 나지 않았고

아무리 기다려도 지나가지 않는 이 지루한 일과에 숨 막혀 지하세계로 빨려들어가기 일 분 전이였다.

거기는 차라리 시원하기나 하지. 여기가 지옥이라면 지옥이라고.

아, 아-.

무슨 재미있는 일이 없을까. 심심해.

창가 쪽을 바라보아도 보이는 것이라고는 그저 하늘과 해.

뭔가 열받는다고. 이 평범함에.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에 홀로 빛나고 있는 저 태양.

남에 대한 배려라고는 제 몸에 난 혹점만큼이나 한없이 작기만 한 저 파렴치한 빨간 구슬.

이카루스라던가 아폴론이라던가 뭐라도 좀 해보라고. 직무유기 아니냐고, 이거.

교실에 설치되어 있는 에어컨은 오래 전에 고장이 나 작동도 하지 않고

녹슨 날개가 가엾기만 한 선풍기 두 대가 덜컹거리며 가까스로 그 질긴 목숨을 연명하고 있었으니

거기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 찌는듯한 몸뚱이를 식혀줄리가 만무했다. 아 정말, 짜증나. 짜증.

뭔가 좀 확 깨는 것이-.

그 순간 내 머리 속에서 웅웅거리는 며칠 전의 대화.


"어제 휴대폰으로 말야, 모르는 사람한테 '너 뭐가 문제냐?'라고 한 다음에 바로 끊었거든.

그랬더니 그 사람이 바로 다시 연락을 하더라고. 그러고는 "누구세요?" 이러는 거야.

그래서 내가 "너.네 아.버.지.다." 이렇게 대답해줬지. 푸하하하-.（이 녀석, 상당히 바보다.）

그리고 또 바로 끊었어. 왜 그랬냐고? 그냥 장난이야 장난. 아 그 사람, 생각보다 화난 것 같더라고.

어쩔 수 없지. 그 사람이 운이 나빴는걸. 그 사람 잘못도 아니고 내 잘못도 아니지.

물론 그 다음에 이어졌던 전화 공세는 모두 거절했고. 그 사람만 멍청하게 된거지. 크크크-."



어...그러니까

즉, 장난전화?



"그거 좋네!"


미안. 나도 상당히 바보다.

'이거다!'라는 느낌으로 마음에 와닿았던 그 계획은

마치 설산에서 불어오는 눈발 날리는 바람처럼 답답한 가슴을 시원하게 녹여주었다.

아 그렇지. 이거면 꽤 재미있을 것 같다.

하지만 정말 해도 괜찮을까.

음..

.
.
.

'역시 그만두는 편이 낫겠지.'


그렇게 단념했으면 좋았을 것을.




...




아니, 괜찮을거야. 이건 그냥 장난이잖아.

누구도 이거 가지고 상처받지는 않는다고. 보통의 사람이라면 말이지.

그래. 내일 당장 해보자.

그 날 나는 악마의 꼬임에 넘어가고 말았다.

그 악마가 불러올 재앙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말이다.




...




다음날

교실 속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지효에게 다가서서 말을 걸었다.

"휴대폰 번호? 갑자기 왜?"

아니, 아는 애들 번호 등록해두려고. 언제 필요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응. 알았어. 휴대폰 줘봐. 내가 직접 해줄께."

아 그래도 괜찮아? 그럼-.

누가 봐도 평범한, 문제될 것이 없는 이 대화.

그러나 여기에는 철저한 어둠의 계산이 조용히 스며들어 있었으니

최근 급격히 친해진 지효와 좀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는 나의 작은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나쁠 건 없잖아. 어디까지나 반 친구로서, 동아리 부원으로서의 우정이다.




...




문제는 그 다음

그 날의 일과를 어찌 어찌 잘 마치고

방과 후에 혼자 집으로 가는 길

어제 생각해둔 그 '농담'을 문득 실현시켜보고 싶어졌다.

괜찮지 않아? 띡 좋은 타이밍이잖아.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왼손에 들어보았다.

적당한 중량감에 나쁘지 않은 외형. 이 정도면 이 계획을 발동시키기에 안성맞춤이다.

이대로 전화를 거는 거다. 뭐든지 마음 먹었을때 바로 실행해야 한다고 생각해.

더 고민해봤자 쓸모 없을 뿐이겠지. 일단 저지르고 보는 거야.

미리 사과해야겠네. 나의 이 장난의 먹잇감이 된 불쌍한 사람에게 말야.

"음...몇 번..." 그 때의 나는 휴대폰을 다루는 법을 잘 몰랐다.

이상하게도 번호를 몇 개 누른 것 같지도 않은데 통화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두-. 두-.


이상하네. 번호를 다 누르지도 않았는데 통화가 되다니. 아무래도 이상하잖아.

음. 하지만 의외로 제대로 다 눌렀는데 그렇게 느껴지지 않았을 뿐이라던가?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애당초 이건 장난전화라고. 누가 받더라도 상관 없으니까 이대로 속행이다.

대충 그런 마음가짐이였다.


"여보세요?"


통화음이 네 번도 채 걸리기 전에 전화를 받은 묘령의 아가씨의 목소리는

나를 살짝 당황하게도 하였으나 오히려 나를 흥분시키는 효과도 없지 않았다.

이쯤되면 폰xx 라던가 그런 문란한 짓까지도 할 수 있지 않을까...라던가 이런 생각.

그렇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 대사다. 잊지 말아야지. 중요한 것은 언제나 우선순위에.


"너 뭐가 문제냐?"


자-. 어서 대답해보라고. 뭐든지. 재미있게 골려줄테니..


"....태수..야...?"




어?


지효의 목소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