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무슨 소리야. 이 망해가는 빌어먹을 문예부를 살리는데 네 몸을 불사르라고. 젊은 청년."


잠깐


이건 또 뭔가.


뭐냐고



...



"..자,잠깐. 그건 또 무슨 말씀이세.."


"못 알아먹었어? 그러니까, 너도 이제 책임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말.이.지."



"어....그..그럼.."



이해가 안돼. Why? 어째서?

그 상냥하던 스마일은 온데간데 없고 얼굴에 남아 있는 건 미소의 잔상뿐.

어디서 나타났는지 꽤나 사악한 웃음을 입술에 품고 있는 저 여자.

저 사람이 아까 그 부장이 맞다고 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리 나와봐라.

아니라는데 내 얼마 안되는 빈약한 통장 잔고를 전부 걸어주마.

여자라는 동물은 원래부터 이중적? '내면의 또 다른 나'라는 건가?

의미를 알 수가 없어. 정말.

돌변한 그녀의 태도에 나는 그만 정신이 혼미해졌고

아찔거리는 한 가닥 정신줄을 붙잡는 것만으로도

그 상황에서는 참 힘들었다고 변명하고 싶다. 아니, 정말 그래.

이 상황이 즉각적으로 이해가 되는 사람이 있을까, 보통.

있다면 그는 확실히 머리가 좋거나 엄청난 정신력을 가지고 있는 초인적인 인간일 것이다.

유감이지만 나는 그저 평범한 잔챙이거든. 그러니까 이 상황은 나에게 있어서 믿기지 않을 수밖에.


"사실 혼자 걱정을 많이 했거든. 이 x같은 문예부를 나 혼자 떠맡는다는 게 영 꺼림칙해서 말야."


성격 한번 와일드하신 누님이셨네, 이거. 아까 그 소녀감성은 모두 연기?

몰라뵈서 죄송했습니다.

이 여자, 아니 문예부장은

내 손에서 잽싸게 계약서를 낚아채 만년필과 함께 서랍에 집어넣더니

거만한 표정으로 나의 얼굴을 쭉 훑었다.

자기가 이겼다는 듯한 저 오만한 눈웃음

아-.조금 화가 나는걸. 하지만 별 수 없잖아.

저 얼굴에 속아 넘어간건 다름 아닌 나인걸.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 말야.

무엇보다

이미 배는 떠나버렸는걸.


"그래서 말야, 앞으로 네가...."



...



도서관까지는 생각보다 거리가 꽤 있었다.

즉, 이 싫은 녀석이랑 5분 이상 같이 있어야 했던 것.

그나마 지효가 내 옆에서 걷고 있다는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겠지.

그러기를 7분 정도. 지효도 말이 없기는 마찬가지라서 살짝 지루한 감이 없지는 않았지만

뭐, 첫 술에 배가 부를까.

곁에 있는 것으로도 충분한데 정답게 말을 나누는 것은 너무 큰 욕심이겠지 싶어서

나 또한 입을 닫고 조용히 걸어갔다.

그러기를 7분

마침내 도서관에 다다른 세 명의 용사들.

안경을 손등으로 한 번 쓱 올리더니 윤석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다 왔어. 여기가 학교 도서관이야."

나도 안다고. 그 정도는.

"...그 형우라는 아이가 여기에..."

그러고 보니 지효, 너는 따라오지 않아도 됬었는데.

"...그냥."

아 그래.


...


도서관 문을 연 것은 윤석이였다.

우리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유동인구라고는 한 명도 없는 황량한 도서관 풍경

역시 예상대로군.

뭐, 이 시간대라면 모두들 귀가했을 테니깐. 이게 당연한거야.

오히려 지금 도서관에 있다는 형우가 별나다면 별나다고 해야 되겠지.

잽싸게 찾아서 가자고. 시간도 없으니.

그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뭐지. 이 물이 흐르는 듯한 상큼한 음성은.

목소리의 발원지는 도서관 대출대였다.

고개를 돌려보니 어떤 여자애가 한 명 앉아있었다.

아직 사람이 남아있었던 것일까.

음. 지금까지 여기에 남아있다는 것은 도서관 관련 업무를 맡고 있다는 말이겠고...이를테면...

혼자 외롭게 도서관을 지키고 있는 도서부 부원....정도일까?

1학년인가. 꽤 아담한 체구에 긴 생머리. 작은 손에 들린 책은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연애물을 좋아하나. 이 아이.

"실례합니다. 친구를 찾으러 왔습니다."

뜬금없이 말을 거는 것도 역시 윤석이였다.

이것 봐....

굳이 인사할 필요는 없을텐데. 사서도 얼마나 당황하겠어.

봐봐. 저 당황하는 사서의 가녀린 얼굴을.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잖아.

아니 왜 어색한 손인사? 서로 아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흔들지마. 내가 다 민망하잖아.

이럴 때는 쓸데없이 붙임성 있다는 건가. 윤석이라는 녀석은.

"채, 책 빌리러 왔어..요?"

아니 아니, 우리도 다 같은 1학년이라고. 존댓말 할 필요는 없어.

"그, 그래? 그러면 왜, 왜 온거야? 이, 이제 곧 도서관 문 닫을 시간이,인데."

왜 네가 떨고 있어? 혹시 우리가 나쁜 사람들로 보이는거야? 그러면 조금 심한데. 그래도..

-라는 말은 못했다. 윤석이 내 말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 곳에 온 이유는 내 친구를 찾기 위해서야. 아까 형우....음 그래, 혹시 전에 '버섯머리'가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았니? 눈에 띨텐데 말야. 머리가 마치 버섯.."

"아, 그 아이라면 저기 있을거야. 외국 소설란에 들어간 걸 아까 봤어."

"아 그래? 고마워. 한 10분이면 될거야. 조금만 기다려줄래?"

"으..응."

얼굴을 살짝 붉히는 사서. 왜 부끄러워 하는 거지? 이런 평범한 대화에.

"그러면..."

사서를 향해 날리는 윤석의 상큼한 미소. 이 녀석. 의외로 Nice-guy? 알 수가 없네.

왠지 기쁜 표정이 된 사서를 뒤로 하고 우리는 외국 소설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미소를 지을 때는 언제고 또 차가운 얼굴이 되어버린 윤석을 보면서 생각했다.

사람이라는 거....정말로 Two-face?


...




















보신 분들은 추천이나 댓글을 달아 주시면 고맙겠지만서도 사실 싫어하시는 걸 알아서

어찌 할 수 없는 마음을 주체하기가 어렵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