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님께서 '어둠의 문'에 처음으로 올리신 공포글...

근데 이 분 스타일 상 섬찟만땅잔인무도한 내용은 아니네요..

여전히 이 분 특유의 잔잔하게 세상을 관조하는 스탈의 글..

아침이고 하니 우선 이 글로 워밍업해두셔요^^

즐점들 하시고...

달랑 이틀이면 다가올 연휴를 바라보며 활기찬 월욜을 보내시길 바랍니다_（__）_

========================================================================================

출처 : 어둠의 문（cafe.daum.net/blacknovel）

작가 : 평화



그녀를 처음 본 날을 기억한다.
온 종일 비가 내려 거리마저 고요하던 오후, 오가는 사람마저 뜸해져서 혼자있기 외로웠던 그날, 그녀는 지루했던 내 시선을 잡아 당기면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은 때였다. 얼핏 보아도 범상치 않은 외모, 유난히 창백한 얼굴을 하고 그녀는 초조한 듯 카운터에 물건들을 올려 놓았다. 화장지, 치솔, 치약, 세제, 건전지, 인스던트 음식들... 생필품들이었다.
그녀는 무슨 사연으로 비 내리는 날 이런 것들을 고르고 있는 것일까? 내 머리 속은 온통 호기심으로 들끓었다.
그녀가 계산을 하고 비 내리는 거리가 훤히 내다 보이는 유리문을 나선 후에도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나는 내내 이상한 기분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 여자, 너도 봤구나.
야, 나는 그 여자 생각만 해도 꿈자리가 다 사나워져. 사람이면 그렇게 창백할 수가 없잖아? 안그래?
그리고 말야, 그 여자 꼭 비오는 날에만 여기 온다.
그 여자 사는 집이 저어기 산 아래에 있는 작은 이층집 있지? 왜 있잖아. 매일 커튼이 내려져 있는 집. 거긴데, 단 한번두 밤에 불이 켜지지 않았대.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밤에 불이 켜지지 않는다. 뭔가 이상하지 않아?
그 여자는... 귀신인게 분명해."
편의점 아르바이트 선배인 내 친구의 말을 듣고 나는 그만 폭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21세기, 과학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시대에 살면서 귀신이라니 그게 있을 법한 얘긴가.
"정말이라니까. 그 주위 사람들은 밤이면 무서워서 그 집 근처엔 얼씬도 못한다구.
웃을 일이 아니야. 너, 비오는 날 조심해."
친구가 워낙 정색을 하는 통에 웃음을 그치긴 했지만 그 말을 믿을 수는 없었다. 소문이란 원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눈덩이처럼 불어나는 지라, 그녀의 섬칫한 외모를 두고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임에 틀림이 없었던 것이다.
친구의 말을 듣고서는 오히려 호기심이 더욱 커져 언제부터인가는 비가 내리길 기다리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비가 내리고, 드디어 그녀가 편의점에 나타난 날 나는 용기를 내어 그녀에게 말을 건냈다.
"저어... 언니!!"
그녀는 조금 당황하는 빛을 보였지만 곧 냉정한 미소를 흘리며 내 부름에 대답했다.
"저번에도 오셨죠? 언니에 대한 소문 들었는데.
좀 엉뚱하지만, 언니랑 친해지고 싶어서요...
전 귀신 어쩌고 하는 거 안 믿어요. 저랑 친구 하실래요?"
그녀는 웃었다. 내리는 빗소리에 묻혀진 그녀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감돌고 있었다.
"물론이예요. 우리 집 알면 한 번 놀러와요. 밤에는 일찍 자니까 낮에 오세요. 기왕이면 비오는 날이 좋겠네요."

그래서...
나는 비가 오는 날을 골라 그녀의 집을 방문했다.
소문처럼 창문마다 커튼이 드리워진 그 곳에는 기괴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어둑어둑한 실내에는 조명 하나 켜두지 않았고, 어딘가에선 곰팡이 냄새도 나는 듯 했다.
"언니는 왜 매일 커튼을 내리고 살아요?
사람은 햇볕을 자주 봐야 한대요. 언니 피부가 왜 그렇게 창백한가 했더니 다 이 커튼 때문이었어요."
그녀가 내놓은 차를 마시면 나는 생각해 둔대로 훈계를 시작했다.
"언니는 이 냄새가 역하지도 않나요? 집도 햇볕을 쬐지 못해서 곰팡이가 슬었다구요. 계속 이런 식이면 언니의 몸에도 곰팡이가 생길지 몰라요."
그러나 그녀는 계속해서 주절대는 나를 내버려 둔채, 표정없이 차맛만을 음미하고 있는 듯 했다. 한참을 떠들어 대고 그것이 소용없는 짓임을 깨달은 후에야, 나는 다시금 그녀를 빤히 들여다 보았다.
그녀는 왜 귀신이란 오해를 받으면서까지 이 기괴한 삶을 사는 것일까?
"언니 혹시 병에 걸린 거예요? 왜, 그런 거 있잖아요.
영화같은 데 보면... 햇볕 알레르기 뭐 그런거."
"아니.."
"정말 궁금하거든요. 왜 이러고 사는지. 무슨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
"듣고... 싶어요?"
그녀는 찻잔을 내려 놓고 나를 보았다. 순간 내 목으로 마른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녀의 입에서 나올 이야기들로 나도 모르게 긴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그냥 이 이야기를 내 얘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이야기라고 생각하고 들어줘요. 아니면, 내가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좋아요. 아뭏든 이 이야기 때문에 내가 누군가에게 설득당한다거나 내 삶의 방식을 방해받고 싶진 않아요.
단지 듣기만 한다고 약속해 줄래요?"
"네..."
"알았어요. 그렇담 이야기 못 할 것도 없겠네요.
그래요, 나도 처음부터 피부가 이렇게 창백하진 않았어요. 창문에 커튼을 드리우고 살지도 않았구요. 너무도 평범한 한 남자의 아내일 뿐이었지요. 그가... 그가 그렇게 죽기 전까지는 말이죠..."

10여년전 우리는 행복했어요. 그의 사업도 꽤 잘돼는 편이었구, 금슬도 좋았었죠. 그런데 어느 날부턴가 그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어요. 이상한 말을 하는 거예요.
"여보, 난 요즘 내 그림자를 떼내고 싶어져."
처음엔 웃었어요. 농담을 하는 줄 알았거든요.
"바보! 그림자는 떼 낼 수 없는 거라구요. 늘 우리 몸에 꼭 붙어 있죠.
당신이 피터팬이 되지 않는 한 영원히 그림자를 떼어낼 순 없을걸요?"
그러나 그의 욕망은 점점 더 깊어져 갔어요. 어떤 날은 자신의 그림자를 노려보면서 이렇게 말하는 거예요.
"어떻게 하면 널 떼어낼 수 있지?
날 그만 좀 괴롭히라구. 꿈속에서 널 만나는 것도 이젠 지긋지긋 해."
그리고 또,
"여보, 사랑과 영혼이라는 영화가 있지?
그 영화에서 죄 지은 사람이 죽으면 그림자들이 몰려와서 그 영혼을 지옥으로 데려가잖아. 나도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아.
빨리 이 그림자를 떼어 버려야 할텐데..."
그러면서 내게 하소연을 했어요. 야단도 쳐 보고 달래도 보았지만 그의 그 병적인 증세는 가실 줄을 몰랐죠.
그러던 어느날이었어요. 날씨가 무척 화창한 날이어서 방안까지 햇빛이 가득 해 그림자가 아주 잘 보였어요. 그는... 그래요. 그가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어요. 외출후 돌아온 나는 그를 보고 비명을 질러 댔어요.부엌에서 가져온 요리칼을... 요리칼을... 내리쳤어요. 자신의 발에다.
......
온 바닥에 피가 흥건했어요. 나는 어쩔 줄 몰라했죠. 내 얼굴에, 몸에, 옷에 피가 마구 튀고 있었어요. 그래도 그는 그 짓을 계속 했어요. 칼로 발을 자르고.. 자르고.. 자르고...

그녀는 너무 흥분하는 바람에 호흡이 가빠져 있었다.
얼굴이 온통 눈물에 뒤덮인 그녀를 안고 나도 충격에 휩싸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의 이야기는 계속되고 있었다.

그랬어요. 그는 자신의 발을 잘라내고 있었어요. 뒤 늦게 정신을 차리고 그를 말려 보았지만 소용없었죠. 급기야 그는 내게 재갈을 물리고 나를 침대에 묶어 버렸어요.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흘렀어요.
그가 지쳤는지 피가 흥건하게 고인 바닥에 누웠어요.
"당신에게 고백할 게 있어.
난 말야, 당신을 만나기 전 아주 나쁜 사람이었어. 사람도 여럿 죽여봤구, 마약장사, 여자장사도 해봤어, 난 어려서부터 갱단에 있었거든.
어느날 우연히 유학 온 당신을 보고 머리 속이 텅 비어 버리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어. 사랑에 빠져 버렸던 거야. 난 그대로 모든 걸 접고 당신이 있는 이 곳으로 와 버렸지. 당신과 함께 있고 싶단 생각뿐이었어.
그런데, 당신과 함께 하면서는 내 지난 과거에 대해 많은 생각을 했어. 내가 아무리 부정하려고 해도 그 어두운 과거들은 그림자가 되어서 날 항상 따라 다녔어.
천사같은 당신을 보면서 내가 얼마나 괴로웠는지 상상도 할 수 없을거야.
그림자를 떼내야만 했어. 내 발을 잘라서라도.
내 발에 붙어서 멀리 떨어져 나갔으면 했어. 그런데... 그 마저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구나..."
그에게서 고통의 신음소리가 흘러나왔지만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어요. 물려진 재갈 때문에 내겐 사랑한단 말조차도 허락되진 않았어요. 검붉은 피바다위로 버젖이 그의 몸에 붙어있던 그 검은 그림자들 저주하는 일밖에 나는 정말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다음날 파출부 아줌머니가 올때까지 우린 그렇게 있었어요.
그는 결국 출혈과다로 죽고 말았죠. 그가 그렇게도 싫어하던 검은 그림자를 그대로 매단채 그렇게 죽어갔던 거예요.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난 그림자가 무서워졌어요.
자꾸만 그림자가 없는 곳으로 숨어들었죠. 집안에 커튼을 내리고 가급적 외출도 삼가했어요. 꼭 나가야 할 일이 있으면 비가 내리는 날을 기다렸어요.
난 10여년을 그렇게 살았어요. 그림자를 피해다니면서...

눈물에 젖어있던 그녀를 달래놓고 나는 그녀의 집을 나섰다.
그녀는 사람들의 말처럼 귀신도 아니었고, 병을 앓고 있지도 않았다. 그저 아픈 상처을 안고 살아가는 갸녀린 여자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제 비는 그치고 그녀의 집앞 골목은 햇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나는 내 발에 붙어있는 내 그림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어느새 친구가 와서 내 어깨를 툭 친다.
"야,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여긴 뭐하러 온 거야? 그래도 무사하니 다행이네.
너 이 집에 갔단 말 듣고 얼마나 놀랬는데.."
"별일 없었는 걸 뭐."
"그래서 궁금증은 풀렸냐?"
"그 언니... 참 불쌍한 사람같아.
그림자가 무섭대. 그래서 자꾸만 그림자가 없는 곳으로 숨어드는 거구. 정말 우리 몸에서 그림자를 떼어낼 방법은 없는 걸까?"
"그림자를 떼어낸다? 방법이 있지. 하늘 높이 뛰는 거야. 이렇게!"
친구는 힘껏 뛰어올랐다.
"또 금방 다시 붙어버릴 걸. 뭐."
"그럼 공중 부양술을 배우면 되겠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그냥 평생 달고 사는 편이 낫겠다."
"그런데 너 말야. 그 여자 그림자 본 적 있어?"
"당연히 없지. 10여년 동안 그림자 없는 곳만 다녔대."
"그럼 혹시... 그 여자에겐 그림자가 없는 건 아닐까?
그림자 떼내기에 성공했을 수도 있잖아.
그림자가 없기 때문에 늘 그림자가 생기지 않는 곳만 다니는 거야."
"뭐...?"
스산한 바람이 불어와 내 머리칼을 흐트러뜨리고, 나는 뒤를 돌아 내가 나왔던 그녀의 집을 올려다 보았다.
여전히 커튼이 드리워져 어둡게만 느껴지는 그 집. 그 곳을 향해 친구와 나, 두 사람의 그림자가 길게 이어져 있었다.
< 끝 >


[평화님의 한마디]

오랫만에 쓰다보니 공포보다는 오히려 철학적인 글이 되지 않았나 걱정입니다. 원래 글 써 놓고 깔끔하게 입다무는 게 멋있는 줄 알면서도 자꾸만 주절대는 촌스러운 짓을 하게 되네요.

인간에겐 항상 따라다니는 어두운 존재들이 있습니다. 나쁜 과거, 잠재된 악 같은 거요. 그것은 절대로 떼어낼 수 없는 것들이죠. 마치 그림자처럼요. 그런데 만약 마지막 대사처럼 그것이 없는 사람이 있다면 오히려 이것이야말로 공포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그림자가 없는 사람... 상상해 보셨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