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를 다시 만난 건 크리스마스를 일주일여 앞둔 작년 어느날이었다.

지이~잉 지이~잉

“여..보..세요”

해가 중천에 걸쳤는데도 나는 한 밤중이었다.
딱히 일어난다고 할 일도 없을 뿐더러 어제 새벽까지 술로 달리다 보니 머리는 깨질것 처럼 아파왔다.

소맥을 하는게 아니였어...

“경식이니?”

밝고 경쾌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나야! 제아”
.
.
“제아? 문제아?”

“그래. 잘 지냈지?”

‘어... 엉... 그렇치 뭐...”

내가 10여년만에 뜬금없이 전화를 한 그녀를 금새 기억해 내는 건 그녀의 특이한 이름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녀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일련의 사건들 때문이기도 했다. 그녀를 처음 만난 건 대학1학년이 끝나가던 12월초였다. 연말에 열리는 과축제에 함께 갈 여학생이 없었던 나를 포함한 친한 몇몇 과친구들를 어여삐 여기신 우리 토목과 홍일점 여자선배의 주선으로 만난 여대 무용과와의 미팅자리에서 였다. 돌아가며 자신소개를 하다 그녀의 차례가 되었고 같이 온 여학생들이 약간 고개를 숙이고 킥킥거리는 걸 처음이 아닌듯 익숙하게 무시하며 자신을 소개하던 그녀의 당당한 모습이 지금도 잊어지질 않는다.

“문제아 라고해. 학교는 안다녀. 이 애하고 고등학교 동창이야. 한명이 펑크를 냈다고 해서 대타로 나왔어.”

모두들 어린 나이였음에도 물구하고 첫미팅자리에서 존칭을 쓰는것과는 달리 숨길법한 이야기도 당당히 밝히고 스스럼없이 반말을 내뱉는 그녀의 모습에 사실 나만 빠져든것은 아니였었다. 자리에 있던 과친구들 모두가 그녀의 일거수 일투족에 과장되게 반응하였고 은연중 호감을 표시하였다. 그런 모두를 뒤로하고 그녀가 최종적으로 각자 짝을 이루어 혜어지는 순간 나를 찍은것은 나를 포함해 그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에게는 의외의 선택이었고 작은 충격이었다. 그후로 우리는 짧지 않은 만남이 이어졌고 내가 군대를 가며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들과 다를것 없이 이별을 맞았다. 난 지금까지 그녀가 왜 나를 자신의 짝으로 지목 했는지는 물어보지 않아 모른다. 아니.. 어쩌면 내가 잘나서 그녀의 선택을 받았다고 믿고 싶은 나만의 착각으로 영원히 묻어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녀가 1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뜬금없이 전화를 한 것이었다.

“결혼은 했어?”

그녀의 의외의 질문에 잠시 당황이 되었다.내일모레면 서른을 코앞에 둔 나이에 새삼 이상할것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10년 전 그녀의 모습만 기억할수 있는 나는 그녀에게 이런 질문조차 생소하고 낮설었다.

“아..아니..너는?”

반사적으로 아무뜻없이 묻지는 않은것 같았다.

“내가 니 전화번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지 않아?”

“어~ 정말 어떻게 알았어?”

개인적인 사정으로 대학때 친구들과 연락이 끊긴지 몇년이 지난 후라서 그녀가 내 연락처를 어떻게 알았는지 내심 궁금했다.

“돈 쫌 썼지.ㅎㅎ”

“뭐라고?”

“아니야. 그냥 혼자 소리야. 그건 그렇고... 나 안보고 싶어?”

십년만에 전화를 하는게 맞나싶게 그녀는 나와 다르게 마치 아무일 없었던 10년 전 그대로의 목소리로 자연스러웠다. 어쩌면 그녀가 날 버렸다는 것 조차 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가 느닷없이 이별을 통보한 군대 상병시절! 손꼽아 벼르던 말년휴가를 앞당겨 나와서 그녀의 행방을 찾기위해 백방으로 수소문 하였지만 그녀는 물안개처럼 사라져 버린 뒤였다. 그녀의 소식을 듣고자 그녀의 친구들을 만나 하소연하다 술 취해 뻗어버려 귀대시간을 넘기고 영창을 가기도 했었다. 내가 아무말도 못하하고 있자 적반하장격으로 따지듯 재차 물어왔다.

“나 안보고 싶냐고?”

십년전 날 버린 애인에게 지금와서 왜 그랬냐고 묻는것도 우스웠다. 그리고 무었보다 난 그녀가 간절히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응! 보구싶어”

“히히 넌 그때나 지금이나 맹추같은 건 여전하구나.”

“무슨말이야? 그게..”

“내가 널 버리고 도망간 거 잊어 먹은거야? 근데두 보구싶다는 말이 나와?”

썅~

그때도 그랬었다.. 그녀는 항상 나를 놀려 먹었고 나는 항상 당하는 입장이었다. 그녀는 그런 내모습을 재미있어 했고 좋아했다.영특한 나는（?） 그걸 이용했었는지도 모른다.

“우리 만날수 있을까?”

“어딘데?...”

그녀의 만나자는 제의에 묻는 내 목소리가 떨렸다.

“미국”

“장난해?”

“헤헤헤”

“미국에는 무슨 일로? 일?”

“응! 출장”

“언제 오는데 ?...”

“왜? 공항에 마중이라도 나오게?”

“제아야!”

“농담 아닌데... 공항에 마중나와 줄꺼지?”

“언제 오는데?”

“크리스마스 이븟날”

꼭 그녀가 크리스마스 이브라는 걸 강조하는 것 처럼 들렸다.

“24일?”

“왜? 애인하고 보내야 돼서 못 나온다는 거야?”

“아니.. 그렇다고..”

난 십년 전과 다를것 없이 그녀에게 또 끌려가고 있었다.

“몇시 비행기인데?”

“대한항공 오후 7시30분 도착! 나와 줄꺼지?”

그녀의 목소리가 진지해져 있었다.

“그래.. 될 수 있으면...”

“우와~ 지금 튕기는거 맞지? 경식이가 누나의 호출에 밀땅을 다 하네.. 세월이 좋긴 좋구나. 이런 날이 다 오고 그치?”

조금 전까지의 진지함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녀도 내심 나와의 통화가 떨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것을 감추려 씩씩한 척 하는 것 일수도 있어 보였다.

“.......”

“우리 처음 만나서 자주갔던 그 막걸리 파전집! 이름이 뭐였더라 ..”

그녀가 추억을 더듬고 있었다.

“민속촌”

“그래 맞아! 지금은 없어졌겠지?”

“아니 그대로야 하나도 안 바뀌고..”

“정말?”

그녀의 뛸듯이 기뻐하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정말 그랬다. 10년의 세월이 무색하리만치 그곳은 테이블에 놓였던 재떨이조차 그대로였다.

“아저씨 아줌마도 그대로셔”

“대~박!”

민속촌이라는 막걸리집은 사실 우리동네에 있는 주점이었다.당시 그녀는 우습게도 항상 데이트때 나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고 어디에서 만나든 마지막은 그 주점에서 막걸리와 아줌마가 지져 준 파전으로 하루를 마무리했었다.그녀의 이별을 통보받고도 내가 그녀에 대하여 알고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심지어 문제아라는 이름마저 장난처럼 알려준 가명이 아닌가 의심하고 괴로워했던 날들이 있었다. 그녀와 헤어진 후 그 주점은 나에겐 아픈 기억이었지만 굳이 피하지도 또한 애써 찾아가지도 않았었다.

“경식아! 기억나? 우리가 만나고 처음 맞는 크리스마스 이븟날을 그곳에서 보냈던 거.”

그랬었다. 지금이야 추억을 가진 사람들만이 간간히 찾는 곳으로 전락했지만 당시만해도 그곳은 평상시에도 자리를 잡을수 없는 문전성시를 이루던 곳이었다. 아줌마와 아저씨는 싹싹한 그녀를 좋아했고 우리는 주점에 하나뿐인 로얄석인 창가쪽 자리를 그날 차지하고 앉아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맞이했던 추억이 있었다. 크리스마스라는 분위기와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캐롤. 슬슬 올라오는 술기운에 그날 우리는 첫키스도 했었다. 새삼 추억이 하나씩 떠오르자 내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우리 그날 만나서 그때처럼 그곳에서 실컷 퍼 마셔볼까?”

“지금은 그때 같지 않아..손님도 별루없구..그런 날 가기엔 을씨년스러울껄”

“괜찮아. 우리에겐 추억이 있잖아. 너와 내가 함께한..”

“그러던지..”

마음과 다르게 나는 계속 퉁명스럽게 그녀를 대했다. 나를 버린 것에 대한 내가 할수있는 최대한의 반항이고 작은 복수 인지도 몰랐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 척 하는 것인지 그녀는 상관없이 예전처럼 자신의 할말에 만 열심이었다.

“그럼! 우리 약속한 거다. 24일 일곱시 반 비행기야 잊지마! 그때 봐”

“여... 여보세요?”

띠띠~띠이~~~~

하나도 변한게 없었다. 마치 십년 전으로 돌아 간 기분이었다. 난 또 그녀의 연락처도 묻지를 못하고 전화를 끊었다. 언제나 이런식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난 그녀에 대해 아는게 하나도 없었다. 그 흔한 전화번호마저 모르긴 그때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였다. 짜증이 날법도 한데 나는 알수없는 설레임에 떨고있었다. 이븟날 만나서 같이 보내자는 것은 그녀에게 현재 남자가 없다는 말이었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설례였다.줏대도 없이 말이다.

그녀는 얼마나 변했을까?
드라마속 여주인공처럼10년의 세월이 비켜간 것 처럼 그대로 일까?
무슨일을 하기에 미국으로 출장을 갔을까?
아직도 나를 잊지 못하고 있었던 걸까?

갖은 상상을 하며 일주일을 보냈던 것 같다. 내 생에 제일 길던 일주일은 그렇게 지나가고 드디어 그녀와 만나기로 한 아침이 밝았다. 밤새 뒤척이다 새벽에야 잠이 들었는데 몇시간 자지도 않았는데 일곱시께에 눈이 떠졌다. 간만에 목욕탕을 가서 때도 밀고 헤어숍에 가서 머리도 만지고 엇저녁 준비해 둔 비장의 옷（?）도 꺼내어 입고 그녀를 맞이 할 차비를 온전히 끝 마치고도 약속시간까지는 서너시간이 남아 있었다.그때처럼 안절부절 무었을 할지 몰라 우물쩡거린 때도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루하던 시간은 지나고 나는 파란색 공항행 버스에 몸을 실었다. 하늘은 잔뜩 흐려서 화이트 크리스마스가 아닐까하는 설레임을 주었다.십년전 그때처럼 말이다.....
공항 입국장에 들어선 나는 당황했다. 나오는 출구가 하나가 아니고 둘이었다. 어디로 나올것인지 우리는 약속한 바가 없었고 나는 그녀의 연락처도 모르는 처지였다. 도아니면 모라는 심정으로 내가 전에 이용했던 출구쪽에 서서 그녀를 기다렸다. 비행기는 제시간에 도착하였고 대충 입국심사와 세관을 통과하는 시점이 되자 하나 둘씩 사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좀 한심해 보였지만 나는 혹시 그녀를 못 알아 볼까봐 눈에 불을 켜고 두리번거렸다. 그렇게 초초하게 기다리던 시간은 점점 흘러만 갔고 그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혹시 그녀를 놓쳤을까봐 다른 출구쪽도 뛰어갔다 와보기도 하고 휴대폰도 켰다 껐다를 반복했지만 끝내 그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휴대폰은 울리지 않았다. 그렇게 두세시간이 지나고 이제는 뒤따라 도착한 다른 비행기 손님들이 출구를 빠져나오는 걸 바라보는 나는 허탈감과 이름모를 배신감, 분노, 혹시 못 마주쳤나 하는 초조함,등 머리속이 복잡했다. 마지막으로 한번 더 다른 출구쪽을 둘러보고는 입국장을 나섰다. 버스를 타기위해 나오니 눈이 내리고 있었다.

씨발~~

그녀를 만나면 하려고 마음먹고 있던 일들이 물거품이 되자 꾸역꾸역 나 자신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병신가튼 새끼..... 그럼 그렇치.....

몇일간 상한 얼굴을 그녀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끊고있던 술이 간절히 생각났다.

휴대폰에 저장된 전화번호에 오늘같은 날 같이 술 마셔 줄 솔로친구는 없었다. 갑자기 그녀와 가기로 했던 민속촌주점이 떠올랐다.

그래. 거기라면 오늘같은 날 사람도 없을 것이고 혼자 술 빤다고 쪽 팔릴일도 없을테니..

목적지를 정하고 할 일를 만들고 나자 속상하던 기분이 조금은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던 내 핸드폰이 울려서 나를 놀라게 한 것은.....

지이~잉 지이~잉

“여보세요”

“경식이니? 나야. 제아”

제아였다.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무슨일이야? 일곱시 반 비행기 아니였어?”

“미안! 일이 있어서 어제 들어왔어. 많이 기다렸지. 오늘 공항에 가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못갔어. 미안해”

“아니야....”

“화났구나?”

“아니라니까?”

나는 나도 모르게 고함을 질렀다.

“맞네. 우리 경식이 화났거 맞네.”

데자뷰처럼 그녀의 그런 말이 10년전 어느때인지 모르지만 들었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넌 언제나 똑같아. 매번.... 내 생각 따윈 안중에도 없지. 됐어”

또한 나의 이런 반응도 10년 전 어느때를 떠올리게 하였다.

“미안해 경식아! 일이 있었어. 정말이야. 사실 오늘 온것처럼 하고 공항에서 널 만나려고 했는데.... 하여간 미안해”

“어딘데?...”

이렇게 또 당했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속으론 그녀를 만날 생각 뿐인 내자신이 싫었지만 마음과 다르게 입에서는 그녀에게 묻고있었다.

“맞춰 봐”

“내가 그걸 어떻게 알.....”

나는 불현듯 떠오르는 한 장소가 생각났다. 나와 생각이 같을까?..

“혹시 그 주점... 민속촌”

“응! 지금 가는 중이야. 너도 와 줄꺼지?”

두번 말하면 잔소리였다. 하지만 병신같이 꼴에 자존심은 잃고 싶지 않은 작은바람에 화난듯 대답하고 전화를 끊은 것이 내가 한 소심한 복수의 전부였다.

“알았어. 갈께”

마음은 벌써 저만치 달리고 있었는데 버스는 오늘따라 왜이리 정시에 오지를 않는지... 나중에 공항버스 배차담당에게 전화로 항의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