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수강신청의 날은 다가왔다. 분명히 두 달 가까운 시간이 지난 것인데 왜 이리 금방도 돌아온 것 같은지, 내다버린 시간들에 스스로 감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나는 결국 이번 방학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졸업 조건은 산처럼 쌓여있고, 졸업까지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게임이 재밌다는 이유로, 공부가 감이 안 잡힌다는 이유로,

시간을 스스로 내다버렸다.

선택의 시간은 이미 내 앞에 다가와서, 목을 조를 밧줄을 자랑하며 군침을 뚝,뚝 흘리고 있다. 선택, 그래 선택의 시간이다. 대학 생활을 없던걸로 치고 다른 분야를 찾아나갈지, 얌전히 졸업 조건부터 맞추고 볼지 라는 두 선택지다.

졸업 조건은 빡세다. 아니, 빡센게 아니라 너무 맞지 않는 일이다. 졸업 조건만 생각하고 있자면 고삼시절의 내게 돌아가 뺨따구라도 한 대 날려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분풀이가 끝날 만큼 후려친 다음에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죽어도 그 학과를 써서 이 고통을 받지 말라고. 뺨 값치고는 싼 편인 경험들이니 그 녀석은 오히려 내게 감사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이런 나날의 연속이다. 암담한 오늘과 미래를 보고 있자면 나는 과거로 도망치는 선택을 한다. 눈을 감고 고등학교 시절을 떠올리고, 중학교 시절을 떠올린다. 술에 절은 남자가 있다.

저 남자는 이제 와서 보면 대단하기도 하다. 어떻게 저렇게 술을 먹고도 간이 멀쩡해서 다음 날 출근을 할까, 일주일을 놓고 봐도 당신의 간은 일하는 날이 쉬는 날보다 많았다.

불쌍하게도, 그 술에 힘들어하는건 당신의 간 만이 아니었고, 덕분에 내 인생, 마음 한 켠에는 항상 술이 자리를 잡고 있다. 술에게서 도망치는 일은 이젠 질려버렸고, 이제 와서 당신의 술의 업적을 일일이 나열하지는 않을 것이다. 암만 재밌는 '나홀로 집에' 도 매 년 보면 질린다. 하물며 틈나면 머리 속에서 틀어주는 그 기억들이 내겐 재밌을리가 없다.

안타깝게도 난 당신의 유전자는 받지 못했나보다. 새내기 시절 학과의 술자리는 늘 1차를 넘기지 못했지. 하물며 존재감도 없는 나를 챙겨줄 사람은 없었고, 대충 취한 척을 하면서 불편한 자리를 빠져나오는게 일상이었다.

술에 좋은 기억도 없는데 술자리만 갔다 하면 남자화장실에서 무슨 짓을 하는 건지, 선배들은 화장실에 잠시 가지 말라고 하곤 했다. 적어도 토사물 때문은 아니었고, 아마 누군가의 주먹에 번들번들한 개기름이 뻘겋게 묻었을 것이다. 그런 자리들이었다.

생각나는대로만 적어도 술은 참 할 얘기가 많다. 술을 20살 이후로 입에 댄 적이 없는데도 말이다. 한 사람을 보며, 명절에는 한 집안을 보며 체득한 금주에 대한 다짐은 스무살에 방점을 찍었고, 그 다짐을 신념처럼 지켜온 것 하나는 자랑할 수 있다.

사람은 술에 의해 망가지고 난폭해지며, 상처를 입히는 일에 거리낌이 없어진다. 술은 폭력에게 뒷돈을 받는 비선실세이며, 누구에게 뒷돈을 주는지 아직도 보란듯이 살아있는 녀석이다. 법에게 뒷돈을 찌르고 있으며, 사람의 등에 칼침도 놓을 줄 아는 교활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면 하루가 또 지나간다. 참이슬에, 사람에 대해 암만 떠들어봤자 나는 결국 인생에서 도망친 사람이다. 내 인생을 겉돌기 시작한지 어느덧 10년 가까이 되어가고 있다.

열일곱은 내 인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에 대해 회의감을 느끼고 허탈함에 빠졌던 나이. 난 이미 그 시점에서 내 인생을 겉돌기 시작했다. 세상이 내가 없어도 굴러가는건 알고 있었지만, 내 세상마저 내가 없어도 굴러가는데 문제없음을 깨달았던 시기였다.

그렇게 살아온 결과는, 지금의 참상으로 남았다. 그 왜, 어릴적 메이플을 시작할 때 주사위로 원하는 직업의 스텟을 높게 뽑고 시작하는 것은 국룰이 아니었던가. 나는 멍청하게도 그 주사위 하나 굴릴 줄 몰랐나보다. 전사를 골라놓고 실수로 민첩 하나를 눌러서 레벨에 맞는 무기를 못 끼고는 했다.

웃긴 이야긴데, 지금의 내 꼴을 보고는 웃을 수가 없는 이야기라는게 또 웃긴 일이다. 하기사 그 녀석은 레벨업을 할 때마다 힘이라도 찍었는데, 난 나이를 먹으면서도 찍은 스텟이 없으니 그 녀석만 못하구나 싶다.

스물 여섯의 봄이 돌아왔다. 이때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세상은 돌고, 내 세상도 나 없이도 돌아갈 것이다.

나는?
도망칠까? 라고 생각하다가, 스스로의 생각에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니까, 최근 형님이 취업에 성공하셨다. 형님은 형님의 목표, 길을 꾸준히 걸어오셨고, 그 길의 끝이자 보답으로 취업에 성공하신 것이다. 아주 정석적인 해피엔딩의 길이다.

그런데, 도망친다는 것은 어쨌거나 어느 방향을 향하는 일인데, 도망치는 곳에는 아무 것도 없다. 목표도 방향도 없는 걸, '도망친다' 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하는 짓은 도망치는 것 조차 아니고, 도망치는 모습을 보여주는 VR기기로 눈과 귀를 가리고,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모래지옥처럼 서서히 빨려들어가는 것. 그 표현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이런 헛소리나 생각하고 있다.

어린시절의 한 때 꾸던 꿈이 있다. 나를 세상에서 지우고 지워 내가 세상을 떠나도 아무도 모르는 꿈인데, 중성마녀의 말처럼 세상은 어린 시절의 꿈대로 되지 않는 법이다. 나는 어린 시절의 꿈을 몇 번이나 거절당했고, 아무 것도 되지 못한 채로 남았다.

이런 나도 오늘을 살고, 내일을 살아가야 한단다. 세상은 그저 환경의 제공자일 뿐이고, 세상보다 더 잔인한 건 인연인 것 같다. 얼마나 많은 기회를 날렸는지, 이런 쓰레기 같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인연 때문이다. 참 징하게도 살 것 같은데. 밥벌이 하나만 정해졌으면 소원이 없겠다. 이 쓸데없이 긴 글은 오로지 밥벌이를 못 정해서 투털거린 푸념글이다.

언론은 겁주기를 좋아한다. 청년 실업률은 역대 최대를 찍고 있고, 고령화니 출산율을 이야기 하며 너희는 단물만 쪽쪽 빨리고 버려질 세대라고 한다.

별 감흥은 없다. 내 밥벌이만 했으면 좋겠다. 내 사회적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무언가가 그래도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다. 찾기 전에 죽게 된다면 그래도 좀 아쉬울지 모른다. 그런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