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님의 '발칙한 상상'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연재물은 아니고요 단편 시리즈입니다.

원래 공포작가도 아니시고 이 글들도 공포물은 아니지만

세상을 홰까닥 뒤집어 보는 설정들이 재미나서 퍼오기로 했습니다.

'상상 세계'란 것을 수박으로 비유해 보자면..

clancy님이나 영준님의 글들은 수박을 썽퉁~! 하고 썰어낸 다음

속을 박박 긁어내서 만든 화채라고 할 수 있는 반면에

평화님의 '발칙한 상상' 시리즈는 삼각형의 칼집을 내어

작지만 깊은 조각을 건네주며 '한 번 맛보세요'라고 말을 건네는

시장 아주머니의 이야기라고 비유하고 싶습니다.

작지만 깊이 있는 그래서 뭔가를 느끼게 해주는 동화같은 세상의 일면...

평화님께서 전해주시겠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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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writer25.com & www.zaca.net

작가 : 평화




나는 지금 깊은 혼란속에 빠져있다. 지난 과거 속에 내가 겪은 일들이 모두 거짓인 것을 알았을 때 나는 큰 충격에 휩싸였었다. 동료들은 나의 이런 모습을 보며 충분히 그럴 수 있으니 시간이 지나면 모든 걸 이해할 거라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이 모든 사실이 두렵다. 불과 몇 달전에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믿을 수 없는 진실...
나는 이제 무엇을 믿고 살아야 할까?

몇 달전, 나는 평범한 가정의 맏딸이었으며 한 남자의 연인이었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의례 그렇듯 우리는 결혼을 약속하고 있었다. 그에겐 나를 한 평생 편히 살게 해 줄만한 능력따윈 없었지만, 특유의 자상함과 남자다움으로 내 마음을 휘어 잡고 있었다.
휴일이면 우리는 그의 고물차를 함께 타고서 데이트를 했다. 가끔 안전벨트가 고장나서 애를 먹기도 했지만 나에겐 그런 사소한 일까지도 행복으로 느껴졌다.
적어도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그랬던 것 같다....

그 날..
나는 점심시간을 이용해 그가 근무하는 회사로 찾아 갔었다. 오랫만에 식사를 함께 하고 싶었던 나는 그를 놀래켜 주려고 연락도 않고 사무실을 찾았다. 그런데 그 곳, 복도에서 나는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최근 들어 금연한 그가 담배를 물고 창을 향해 돌아서 있었고 그 뒤로 한 젊은 여자가 무릎을 꿇은채 눈물을 흘리며 무언가를 애원하고 있었다. 나는 벽에 기대 숨어 그들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제발 부탁이예요. 우리 아이... 이대로 죽게 내버려 둘 순 없잖아요. 당신이 도와줘야 해요. 당신의 아이란 말예요."
여자의 음성은 절규에 가까웠다.
"이봐. 조용히 하라구. 여긴 회사란 말이야.
그래, 당신 말대로 그 아이가 내 아이래도 난 그럴 수 없어. 그 사실을 내 약혼녀가 알아봐. 그 여자, 날 버리고 말거야.
난 그녀없인 안됀다구."
여자는 거의 바닥에 주저 앉아 울고 있었다. 그녀의 흐느낌은 온 복도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모르도록 할 수도 있잖아요. 이건 생명이 달린 거예요."
"아마 내 골수는 맞지 않을거야.
당신도 그렇게 생각해. 그러게 그 아이 낳지 말았어야지.
당신은 어쩌자고 나도 모르게 그 아이를 낳은거야? 응?
당신 혼자 낳은 아이, 당신이 알아서 해."
"나도 평생 연락 같은 거 할 생각 없었어요.
당신이 없는 곳에서 죽은 듯이 숨어 살 생각이었다구요. 어차피 그날 밤도 내가 의도적으로 유혹한 거였으니까.
당신의 사랑이 없으면, 당신의 아이라도 사랑하며 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제 그럴 수 없게 되었어요.
검사만 받아줘요? 네? 우리 아이 살려 주세요."
돌아선 그의 얼굴은 고통으로 일글어져 있었다.
"만약 골수가 맞다면 수술해야 되잖아.
그럼 내 약혼녀도 알게 될거야."
"아니예요. 나, 당신과 연관된 아이란 거 말하지 않을께요. 약속해요. 그럼 그 분은 모를 거예요."
그는 울고 있는 여자의 얼굴을 말 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힘없이 말했다.
"생각... 해볼께. 그만 돌아가."
그는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늘어뜨린 채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 모습이 더이상 보이지 않는데도 여자는 그대로 무릎을 꿇고 한참을 훌쩍였다.
나는 그 건물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 오는데 현기증이 났다. 그런데, 이상스럽게도 머리속만은 텅 빈 것처럼 고요하기만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 그는 나에게 한동안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는 말을 전했다. 장기이식센터에 골수를 기증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그는 나에게 병원에 올 필요가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나는 마음이 아팠다. 몇날 며칠을 방에 틀여박혀 울기만 했다.
그냥 울면 가족들이 걱정할까봐 비디오 가게에서 제일 슬픈 영화만 골라 빌려 밤새 틀어놓고 울었다.
나는 그에게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나를 괴롭히는 건 지나간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흔들릴 지도 모르는 그의 마음 때문이었다.

그가 병원에서 퇴원을 하고, 그와 나는 다시 만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이미 달라져 있었다. 그전처럼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주지도 않았고, 휴일이 되어도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거절하기 일쑤였다. 어쩌다가 시간을 내는 날이면 꼭 무슨 볼일이 남은 사람처럼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나는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만은 없었다.
적당한 날을 골라 그녀의 아이가 있는 병원을 찾아갔다. 그렇게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그이 놔 줄 때도 됐잖아요?"
"붙잡은 적 없어요."
그녀는 예상외로 당당했다.
"뭐라구요? 그날 그 사람 회사 복도에서 한 얘기 다 들었단 말예요.
아이를 미끼로 매달리는 것."
"아이 아빠에게 골수 기증 받는 것도 잘못인가요?
그 사람 의지에 의한 거예요."
"우린 결혼할 사이예요.
그때 내가 눈 감아 줬으면 이젠 그 쪽에서 알아서 비켜줘야 하잖아요?"
"결혼할 사이이지. 결혼한 사인 아니잖아요?
권리로 따지자면 내가 그 쪽보다 더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나는 기가 막혔다. 그 날 그 복도에서 울며 매달리던 모습이 정말 그녀인가 싶을 정도로 그녀는 당당했다.
"그래서 어쩌겠단 거죠?"
"어쩌겠단 생각 따윈 없어요. 난 그 사람이 원하는 대로 할 거예요.
당신이 날 찾아온 이유, 그가 돌아 섰기 때문이겠죠?
그렇담 더 이상 얘기 할 필요가 없겠군요. 그는 아마 당신에게 결별할 핑계를 찾고 있을걸요? 이미 내겐 사랑한단 말까지 했어요. 아이가 있구, 사랑하는데 당신이 물러나야 하지 않나요?"
"뭐? 뭐라구요?"
나는 너무도 챙피해져서 그만 그 자리를 뛰쳐나오고 말았다.
등뒤에서 그녀의 비웃음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나는 당장에 그에게 전화를 해서 만남을 청했다. 장소는 그의 회사 옥상이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붙잡고 싶었던 나는 배수진을 치려 했던 것이었다.
"이 시간에 여긴 왜 불러내?"
투덜거리며 계단을 오르는 그가 보이자 나는 옥상난간에 걸터 앉았다.
"나, 여기서 뛰어 내릴거야."
그러나 그는 장난인 줄 안 모양이었다. 싱긋이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뭐 안 좋은 일 있어? 나한테 화났구나?"
"나, 장난 아냐!"
심각한 내 표정을 보고 그는 이내 표정이 굳어졌다.
"왜 그러는데? 이러지 말고 이리 내려와서 얘기하자. 응?"
"자기 나 사랑해?"
"그럼."
"거짓말!"
"거짓말이라니?"
"나, 그 여자 만났어. 당신 아이도 봤구."
그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리고는 괴로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미안해. 말 못했던 거. 난 네가 알게 되면 날 떠나버릴까봐 그랬어. 내가 다 얘기할께. 그러니까 내려와."
내 눈에선 눈물이 흘렀다. 그동안의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드는 것 같았다.
"그 여자야? 나야?"
"뭐?"
"이젠 나 같은 거 아무것도 아니지?"
"그런 말이 어딨니? 내가 널 얼마나 아끼는데.."
"그럼 요사이 왜 나한테 무심했어? 다 그여자 때문이잖어."
"그래, 그것도 다 얘기할께. 우선 내려와, 위험해."
"얘기 먼저 해."
"할아버지가 좀 위독하셔. 너 걱정할까봐 말 못했던거야."
"정말이야?"
"그럼."
"그래도 아이 수술해 주면서 좋았지? 예전 애인이랑 데이트도 하구."
"그건 무슨 말이니? 난 그 아이 얼굴도 못 봤어.
내 골수가 그 아이랑은 안 맞고 다른 사람이랑 맞아서 수술했던 거였어. 아인 다른 사람에게서 이식 받았어."
"그럼 그 여자 말은 뭐야?
자기가 사랑한다고 했다던데?"
그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아니야, 그런거. 난 회사 복도에서 한번, 검사 받으면서 한번. 그렇게만 만났을 뿐이야. 물론 과거에 대해선 내가 잘못했어. 그렇지만 너 만나고서 너 외에 다른 사람 생각해 본적 없어.
그것만은 믿어줘."
그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나는 갑자기 내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사랑하는 사람을 믿지 못하고 멋대로 상상했던 내가 한심했었다.
"자, 이제 내려와."
그는 양팔을 벌려 내게 다가왔다. 나는 난간에서 내려가려고 몸을 비틀었다. 그런데 순간 기우뚱하고 중심을 잃은 나는 눈 깜박할 사이 빌딩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옥상에서 나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무서움에 떨다 이윽고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짙은 분장을 하고 누워 있는 나를 빙 둘로 싸고 앉아 있었다. 나는 어리둥절할 수 밖에 없었다.
"여기가 어디죠?"
"정신이 좀 들어?"
"너 이번에 연기 좋더라."
"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 들을 수 없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의 이상한 옷차림..
"이제 네 파트는 끝났으니 저쪽으로 가서 구경이나 하자."
나는 한 여자의 손에 이끌려 연극 무대가 보이는 자리로 가 앉았다.
내가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데, 내 옆에 앉은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
"넌 아무리 죽는 역할에 충실해도 그렇지 진짜 기절해 버리면 어떡하니?"
"예?"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길이 없던 나는 연극 무대위로 눈길을 돌렸다. 그런데...
무대위에서는 나의 가족들이 내 영정사진을 앞에 두고 통곡을 하고 있었다. 그 가운데 내가 사랑했던 그도 있었다.
나는 그제서야 모든 것을 짐작하고 말았다.
연극... 연기... 나...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은 한낱 연극에 불과했던 것이었다......

나는 오늘도 그가 나오는 연극을 보며 그를 느낀다.
다른 이들이 아무리 각본으로 짜여진 연극일 뿐이라고 해도 내 가슴속엔 아직도 그가 있다.
단지 내가 믿을 수 없는 것은 이 세상이다.
지금 살고 있는 세계도 어쩌면 저 무대위에 연극처럼 모두 거짓인 건 아닐까?
객석에 앉은 나는 스산함을 느낀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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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님의 한말씀]

우리 모두도 속고 있는지 모릅니다.
각본에 짜여진 연극 속에 던져져 자신이 주체라고 생각하며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