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겹 들어오는 겨울의 광명에 나의 얼굴을 비추어본다.
죄 많은 내가 이 청명한 （그렇기에 너무나 따가운） 심판의 저울에 나를 놓이는 것은
숨겨왔던 나의 부끄러움과 아픔에게 조금이나마 눈 마주치기 위해서 그리고 또한 그것들에게 참회하기 위함이다.

거울에 비친 죄인과 교도관의 눈을 피해
그리고 네 작품의 작가와 내 작품의 첫 번째 독자를 피해
-그래 어쩌면 모든 것을 피해보려
두리번 거리며 내가 숨어야 할 곳을 찾는다.

하지만
수없이 저질러온 부끄러움과 아픔 만이 나의 곁에 젖어있기에
그것들에 또다시 부끄러움과 아픔을 느끼며 눈물로 그것들을 적신다.

한 없이 고통스럽다.

부끄러운 이가 거울을 보는 것은 퍽이나 고통스러운 일이다.
거울에 비춰진 나의 치부가 눈물을 머금고는 뿌옇게 변한다.
나는 우습게도 이러한 감정에 안도감을 가지고는 이제 나의 심판을 마치려
-그래 어쩌면 모든 것을 피해보려
두리번 거리던 나의 눈길을 거두고는 눈을 감는다.

하지만
수없이 저질러온 부끄러움과 아픔이 나의 곁에 젖어있기에
그것들에 또다시 부끄러움과 아픔의 눈초리를 느끼고는 눈을 감는다.

한 없이 절망스럽다.

고통스러운 이가 주변의 시선을 받아내는 것은 퍽이나 절망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심판을 피하고 다시 찾아오는 그 어둠은 내가 느끼는 절망보다 더 농도가 짙은 고통이다.
폐가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아니라면 찢어진 상처의 피향기 만이라도） 희석시키기 위해서는 무언가... 무언가 떠올려야 한다
-그래 어쩌면 모든 것을 피해보려
눈을 감은 후 가장 먼저 그려지는 것은 나의 부끄러움이자 상처이다.

하지만
수없이 저질러온 부끄러움과 아픔이 나의 곁에 젖어있기에
나의 눈앞에 그려진 거울（그리고 거울 속의 나. 그래... 부끄러움과 상처들까지）을 피할 수는 없다.

한 없이 부끄럽다.

절망에 젖어버린 이가 자신의 치부를 눈 앞에 마주한 채 （이제는 눈도 감을 수 없게 되어버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퍽이나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너와 나의 부끄러움과 상처들을 （어쩌면 사실은 나를） 똑바로 마주하기 위해서 칠흑 같은 어둠을 지나 너에게 다가간다.
그리고 마침내 나의 흔적을 지나 너에 다다랐을 때 묵묵히 기다려온 너를 만나러 거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래 어쩌면 모든 것을 마주하려
거울 속의 광경은 눈을 뜰 수 없이 밝은 빛만이 나를 비춘다.

하지만
수없이 저질러온 부끄러움과 아픔이 나의 눈 앞에 놓여있기에
눈이 멀어버릴 듯한 밝은 빛 속에서도 나는 눈을 감을 수가 없다.

한 없이 아름답다.

자신의 치부와 고통과 부끄러움에게 죄책감을 느끼던 한 소년에게 심판의 빛이 아닌 참회의 빛이 비춘다.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것은 퍽이나 아름다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새 나의 머리를 깨어버릴 듯한 빛이 다시 눈을 감기 전 마주했던 한 줌 겨울의 광명만큼 이나 어두워져 버리고는
아까는 미처 밝아서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나를 （어쩌면 사실은 너를） 대면하게 된다.
-그래 이제는 모든 것을 마주하려
그래... 우리가 만나게 되기까지 너무 많은 것이 흘러버렸다. 그것이 시간이든 부끄러움과 아픔이든 시간에 흘러 희석되어버린 잔해물이든.

한 없이 고통스럽다.
한 없이 절망스럽다.
한 없이 부끄럽다.
한 없이 아름답다.

심판의 저울에 내가 비춰진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감정들이 나의 살갗 하나하나에 패이고 베이고 스며든다.

나를 저울의 한 팔에 올려본다.
너를 저울의 반대 팔에 올려본다.
나의 팔에서 너에 대한 죄책감을 내려 놓는다.
너의 팔에서 나에 대한 상처를 내려 놓는다.
나의 팔에서 너에 대한 부끄러움을 내려 놓는다.
너의 팔에서 나에 대한 아픔을 내려 놓는다.
그렇게 몇 번 더 저울질 하기를 반복
몇 번간 휘청거리던 저울은 （아니 거울은） 어느새 평형에 이르렀다.

이제 남아 있는 것은
너와 나 그 뿐.
아니 나일뿐.

마지막으로
나의 첫 독자에게 묻는다.
너의 첫 작가에게 묻는다.
우리가 저울질하며 내려놓았던 수많은 잔해물들을 우리의 글에 담아도 될지.

이제 거울 안에는 태초의 나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그려냈던 시간의 파편과 잔해물들을 이 글에 울컥울컥 토해내고는
다시 홀로 너만을 두고 거울을 닫고 밖으로 나온다.

밖은 여전히 칠흑과 같은 어둠이다.
하지만 아직은 눈을 뜰 준비가 안 된 것 같다.
조금은... 조금은 이 어둠의 바다에서 부유하고 싶다.
암흑의 평원 속에는 이제 아무것도 없다.
심지어 내가 너를 만났던 거울마저도.

검정 도화지를 배경으로 새하얗던 너를 한 번 그려나 볼까.
너를 그리려 붓을 들고 한 획, 한 획 천천히 그려나간다.
어느새 그려져 있는 것은 다름 아닌 파랑새 한 마리.

갑자기 무언가 이질감을 느끼고는 번쩍 눈을 뜬다.
귓가에는 어느새 해가 져버린 노을과 포르르 울어대는 파랑새 한 마리
눈을 감기 전 새하얗게 나를 쏘아붙였던 심판의 저울은 간 데 없고
이제는 노랗게 져버린 광명과 파랑새가 함께 부르는 위로의 세레나데

눈을 감았다 뜨니 글이 써진 것은
파랑새가 나의 글을 적어내고는 떠나버린 것과 같은 이치일 것이다.
밤을 향해 날아가는 파랑새의 힘찬 날갯짓
내가 미처 가지고 나오지 못한 너와 저울질 한 그것들을
새파란 날갯짓과 함께 나의 글（너와의 잔해물을 토해냈던 나의 그 글）에 뚝 뚝 떨어뜨리고는
포르르 날아가버리는 파랑새
그 파랑새는 나던가? 아니면 너던가? 아니면 둘 다이던가?
그 질문의 답이 무엇이든
나의 첫 독자이자 너의 첫 작가는 언제나 우리였다.

어느새 떠오른 달빛에 거울 속 파랑새 한 마리만이 날갯짓을 하며 날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