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이 일궈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

소설 ‘작별하지 않는다’ 를 의지와 표상이라는 두가지 관점으로 주관을 보태 해석합니다.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표상이란 지각（받아들이며 체득함）에 입각하여 형성되는 것입니다.
표상은 3개로 나뉘어집니다.

1. 지각의 대상이 지금 거기에 있을 때의 지각 표상
2. 과거에 지각된 대상이 기억에 의해 재생되는 기억 표상
3. 과거의 여러 요소가 주관에 의해 조합되어 나온 상상 표상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 -9p

주인공 경하의 꿈으로부터 시작되는 첫 장은 주인공을 몽환과 관념의 세계로 초대하는 단서가 됩니다.
그렇기에 소설의 분위기는 시적인 서술과 더불어 몽환적으로 연출됩니다.

주인공 경하는 꿈과 현실을 드나들며 두통과 떨림이라는 이상증세를 겪습니다.
증상이 심하기에 유서까지 적어놓을 정도입니다.

“어디서부터 모든 게 부스러지기 시작했는지” -17p
“때는 2012년 겨울, 그 책을 쓰기 위해 자료를 읽으면서부터 악몽을 꾸기 시작했다.” -17p

자료란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공수부대의 폭력적 진압이 담긴 사진자료 입니다.
경하는 그 주제로 ‘작별’ 이라는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데 처참함만을 느끼며 물러서게 됩니다.

“나는 몇 개의 사적인 작별을 했다.” -12p

이 일련의 전개는 표상으로서의 접근이 실패했음을 의미합니다.
의지가 꺾인 겁니다.

어느 날, 친구 인선은 목수일을 하다가 두 손가락이 잘립니다.
인선의 전화를 받고 병원에 들어선 경하는 병원에서 두 가지 장면을 보게 되는데 한강의 의도한 강력한 은유로서 작용합니다.

1- 손가락과 발가락이 잘린 사진과 그것들이 봉합된 사진
2- 인선의 잘린 손가락의 신경을 유지하기 위해 절단부위를 바늘로 찔러 자극을 주는 장면

여기서 그 표현에 대해 덧붙이면,
작가 한강은 그로테스크한 장면들을 노골적으로 보여줍니다.
주제의식과 연결되기에 의도된 바로 볼 수 있지만 읽기가 섬뜩했습니다.
생동감이 있다고 할 수 있겠죠.

“잘렸어. 전기톱에.” -37p

이어 전개되는 바는 소설로서의 개연성을 확보하기위한 장치들로 이어지는데 경하와 인선이 어떻게 친구가 되었고 그들이 어떤 인간인지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그들은 경하의 꿈을 다큐멘터리로 만들려 하는데 경하가 무의미함을 깨닫고 그만하자고 말했으나 인선은 그 꿈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결국 인선의 목공작업장에는 경하의 꿈에 나온 상징물로 가득 차게 되죠.

경하는 인선의 부탁을 받아 인선의 집으로 향하기 위해 제주도에 도착합니다.
여기까지의 개연성은 매끄럽게 이어지는 편입니다.

허나 인선의 집은 제주도에서도 외진 곳에 있습니다.
그곳으로 가면서, 결국 피를 흘리게 되고 휴대폰이 꺼져버리게 됩니다.
경하를 관념의 세계에 고립시키기 위한 개연성으로 작용하지요.

이처럼 작가는 개연성을 확보하는 데에 능숙합니다.

따라서 경하가 관념의 세계에 도착하자 개연성이 눈 녹듯이 사라지는 부분은 의도된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겠죠.

그 관념의 세계란 인선의 작업장과 집을 일컫는 것입니다.

앞서 말했듯이 인선의 작업장은 경하의 꿈에 나온 상징물로 가득 차있습니다.
이는 경하가 ‘작별’ 했던 상징과의 재회입니다.
경하는 다시 그 꿈으로 그 의지로 그 작별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들은 현실성이 없습니다.
그 공간에 대한 일말의 변명도 덧붙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렇기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강은 그걸 노렸습니다.

제주 4.3사건
인과와 명분이 어쨌든 제주도의 민간인들이 학살당한 사건

“어떻게 악몽들이 나를 떠났는지 알 수 없었다.” -177p

악몽을 꾸지 않는다는 것은 지금 이 자체가 꿈이기에 가능한 일이고
동시에 현실의 은유이기도 합니다.
관념의 세계에 들어왔다는 의미입니다.

“작별인사만 하지 않는 거야. 정말 작별하지 않는 거야? 완성되지 않는 거야, 작별이?” -177p

그 다큐멘터리의 이름을 작별하지 않는다 라고 이름 붙이자는 경하의 말에 인선이 묻습니다.
이어지는 관념적이고 몽환적인 분위기에 해석이 어려울 수 있는데 단서는 있습니다.

이 세계를 해석할 수 있는 이어지는 단서들은 인선의 어머니에 대한 회상으로 이어집니다.

“내가 스물 두살, 우리 큰아들이 백일 되실 때라, 우리집 쪽으로 군인들이 총을 막 쏴댐시단 울 애기를 보듬고 솜이불을 뒤집어썼주.” -224p

4.3 사건에 대한 증언이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됩니다.
관념의 세계를 이루는 일부분인 것이죠.

총을 맞아 피를 흘리는 남동생에게 자신의 손을 깨물어 그 피를 먹여주는 인선의 어머니는 행복감을 느꼈다. 피를 흘렸으니 피를 마셔야 산다는 것이다. 남동생의 숨결에서, 누나의 피를 꼴깍 넘기는 목구멍의 움직임에서 살아있음을 확인한 그녀는 안도하며 그렇게 행복했다.

이어 폭설로 단전이 된 인선의 집을 밝히는 불꽃이 등장합니다.
관념의 세계에서 진실을 들춰내는 불꽃이며 경하가 유일하게 따르고 의지하는 불꽃입니다.
이에 반해 눈은 경하를 고립시켜 단절시킵니다. 눈은 곧 단절과 침묵입니다.
나무에 쌓인 눈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무엇을 생각하면 견딜 수 있나. 가슴에 활활 일어나는 불이 없다면. 기어이 돌아가 껴안을 네가 없다면.”

불꽃이란 곧 인도입니다. 경하를 관념에서 현실로, 코발트 광산에 매장된 사람들의 진실을 밝혀주는 인도함으로, 이해할 수 없는 역사에서 다시 개연성으로

흐름을 요약하면

현실 - 관념으로의 접근 - 관념의 세계 - 불꽃 - 현실

이 과정에서 표상이 드러나며 그것이 전개됩니다.

1. 지각의 대상 （4.3사건과 인선의 어머니）이 관념의 세계에 있음
2. 과거에 지각된 대상（4.3사건의 증언）이 기억에 의해 재생됨.

그렇다면 과거의 여러 요소가 주관에 의해 조합되어 나온 상상표상은 어떻게 주제의식과 결부되었을까요?

“（학살에 관련된 자료를 보고） 병원에 붙어있던 손가락과 발가락이 봉합된 사진들처럼 차라리 보지 않는 편이 낫지 않을까?”

“무엇이 지금 우릴 보고있나. 나는 생각했다. 우리 대화를 듣고 잇는 누가 있나. 아니, 침묵하는 나무들뿐이다.” -320p

“정말 누가 여기 함께 있나, 나는 생각했다. 그게 너일까, 다음 순간 생각했다.” -323p

“신경을 살리려면 손가락의 상처부위를 찔러야하는 것처럼”

주제로 통하는 단서는 분명히 있습니다.

초반에 나오는 소설 ‘작별’은 다큐멘터리 ‘작별하지 않는다’ 라는 제목으로 승화됨에 따라 의지의 계승이 되었으며 이는 하나의 역전극으로서 전개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결국 마지막 장에 이르러 돌아갈 길을 밝히기 위해 성냥에 불을 붙이지만 오히려 성냥은 부러집니다.
허나 경하는 기어코 그 성냥에 불을 붙입니다.

표면상으로는 어두워진 길을 밝혀서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것이라는 개연성을 확보하여 현실로 인도할 것이지만,
발현되는 의미는 그처럼 단순한 성질이 아닙니다.

돌아가기 위해.
관념의 세계가 된 인선의 작업장과 집으로
인선의 작은 새 아마에게로
친구 인선에게로
인선이라는 인간에 깃든 흔적에게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작별을 무효로 만듭니다.
곧 작별하지 않는다는 의지입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에서 느껴지는 의지와 이어지는 대목이며 그 제목이 가진 의미를 명확히 하는 단서입니다.

“아직 사라지지 마” -324p

관념의 세계에서 4.3사건의 흔적으로 이끌리는 부분에서의 개연성은 모호하나
돌아가야하는 명분은 충분합니다.

단서를 종합해 밝혀낸 관념의 세계가 시사하는 바는 이렇다고 생각합니다.

사회와 역사에 이끌리는 것은, 개개인에게는 개연성이 없는, （갑자기 훅 들어온） 사건에 불과하나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역사적 사건의 칼날을 피해 가족들에게 돌아가야한다는 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당위임을 표현한 것이라고.

한강이 일궈낸 이 관념적인 공간은 드러난 것처럼 드러나지 않은 부분도 중요합니다.

“불이 당겨지면 네 손을 잡겠다고 나는 생각했다. 눈을 허물고 기어가 네 얼굴에 쌓인 눈을 닦을 거다. 내 손가락을 이로 갈라 피를 주겠다.” -324p

제가 생각하는 소설의 주제는 작별하지 않을테니 사라지지 말라는 요청이며 강력한 의지와 그 표상에 대한 보존입니다.

사실 좀 어렵고 재미 없는 소설입니다.
한국 순문학은 지루하다는 편견을 전혀 타파하지 못했지만 그것은 외적인 부분이고
소설 내적으로는 한강 작가가 일궈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는 높게 칠 수 있겠습니다.

메모장에서 붙여놓기 했는데 글자크기가 좀 이상한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