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몹시 긴 글이지만 꼭 읽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부탁드릴께요●

XX조선소



이곳에 몸 담은 지도 어느덧 일년.



그 날은 철야 근무를 하는 날이었다.



철야라고 해봤자 시간만 길 뿐, 평소 하는 일보단 훨씬 수월한 작업이다.



헌데 내 기분은 왜 이리 찜찜한 걸까?



"준석아!! M12 볼트 4개만 가꼬온나!!"



내 불쾌함의 창조자께서 날 부르시는구나...



"네~ 네~ 갑니다. 가요"



이름: 정기태, 나이: 40좀 넘은걸로 알고 있음



출생지: 알 바 아님, 주 관심사: 자기자랑, 사기, 뒷담화 등등등..



나이로는 한참 형이지만 정말이지 형 대접 하기 싫은



그야말로 인간말종.



오늘은 그 인간과 함께 기나긴 밤을 보내야 하는 날이다.



"야 잘 봐라이. 스파나（스페너）질은 요래요래 응? 이르케 하는기 정석인기라. 손이 안보이제?"



지겹지도 않나.. 저 정도면 병인데..



"와.. 역시 형님 기술이 최고네요"



아.. 이 말이 목구멍을 넘어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뒷골이 찡~해오며 온 몸에 소름이 돋았다.



빨리 그만 두던가 해야지...



기태형은 시계를 힐끗 들여다 보곤, 배관을 스페너로 통통 두드리며 말했다.



"자, 가변은 이자 마무리 됐고... 밥 묵고 펌프 돌릴 준비하자"



라고 말하면 될 것을



"봤제? 이 정도 기술이 있어야 저녁 먹기전에 가변이 마무리가 되는기라."



......차라리 저녁을 굶겠소.







저녁을 먹고 다시 배로 돌아왔다.



펌프를 돌리고 한 바퀴 순찰을 돌아 본 후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자.. 이제부터 딱히 할일이 없다.



저 인간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오늘밤 나의 운명이 결정된다.



희박한 확률이지만 나는 내심 '무관심'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저 인간이 자유와 방목의 우수성을 인지하고 있길 희망했다.





"준석아"



너무 희박한 확률이었나;;



기도가 채 끝나기도 전에 날 찾는다.



"왜요!"



내 소심한 성격으론 최대한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니.. 내가 싫제?"



헉!!!!



내 소심함이 가출했나?



너무 티나게 말했던 걸까?



진실은 언젠가 밝혀지고 할아버지의 명예와 상관없이 수수께끼는 모두 풀리는게 정설이라지만



이런식으로 진실의 무게가 나에게 들이닥치자 적잖이 당황스러운게 사실이었다.



"아하..아니요. 그럴리가요..."



아..젠장.. 이건 누가봐도 그렇다는 거잖아.



뭔가 꼬이는 게 느껴졌다.



당황한 나와는 달리 평소와는 다른 차분함으로 말을 이어가는 기태형이었다.



"내도 안다. 맨날 지 자랑만 해사코, 동생들 밥 한번 제대로 안 사주는데다가.. 넘 욕이나 할줄 아는 놈이 뭐시 좋긋노?"



난 이 부분에서 두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하나는 그걸 아는 사람이 그래?



또 하나는 오늘 저 형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



"하...그래.. 악착같이 살았제"



기태형은 짧은 숨을 내 뱉으며 낙서라도 하는 마냥, 한 손으로 바닥을 긁었다.



......저한테 왜 이러세요 ㅜㅜ



"음.. 행님이 이야기 하나 해주까?"



넵!! 말씀하십시요 형님!! 피콜로 싸다구 때릴 청력으로 경청하겠나이다!!



그러니 제발 때리지만 마세요....



"벌써 몇 년 전 얘기고 이기..."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내 평생...



두 번 듣기 힘든...



너무나 가슴 아픈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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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하여!!"



쨍~!



모 기업 로고와 사은품이라는 글귀가 찍혀있는 맥주잔이 부딪혔다.



이 날은 기태 부부에겐 더 없이 행복한 날이었다.



그 동안 알뜰하게 모은 자금과 대출금을 보태서 그리도 희망하던 카센터를 오픈한 것이다.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기태는 부인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마누라는 짠만 하고 마시모 안되는 거 알제?"



"하모예~ 아가 있는데 술이 말입니꺼? 고마 기분만 내는기지예"



기태 내외의 진짜 행복이 미순의 뱃 속에서 숨쉬고 있었다.



미순은 자신의 배를 만지는 남편의 손을 잡으며 웃어보였다.



"아가야~ 엄마 아빠가 카센터 해가꼬 니 맛있는 거 마이 사주께~"



그 날밤은 마음껏 웃었다.





"사장님! 오셨습니꺼~!"



기태는 정장 차림의 중년 신사에게 기름떼 묻은 얼굴로 넉살 좋게 다가섰다.



"그래 다 됐습니까?"



"하모예. 고장 난 부분은 수리 다 끝났꼬예, 서비스로 왁스질도 좀 해봤십니더. 차가 반질 반질 하지예?"



고개를 끄덕이는 중년의 남자는 고맙다는 표시로 기태의 어깨를 토닥였다.



"허허, 이 친구 장사할 줄 아는고만"



"뭐를예, 이 정도야 기본 아입니꺼. 사장님 엔진오일하고 미션오일 갈 때 다 되가그든예. 한 몇일만 더 끌고 댕기시다가



놀로오는 셈 치고 한번 들러주이소"



다른 데 같으면 모른척 바가지 씌울 법도 한데 정직하고 성실히 일하는 모습이다.



"그럼 살펴가십시요~"



꾸벅 인사를 한 기태는 양팔을 걷어붙이고 다시 일자리로 향했다.



"자기야~"



돌아본 그 곳엔 미순이 양손 가득 무언갈 싸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허어!! 이 머시고! 이런거 싸들고 오지 말라카이"



황급히 달려나가 짐을 낚아챈 기태는 툴툴 거리며 사무실로 향했다.



"배가 이리 불러 오는데 자꾸 무거븐 거 들고 댕기싸모 안된다 카니까 그라네"



"아직은 괜찮네요 서방님! 내랑 아가야 걱정 말고 당신 몸이나 좀 챙기가믄서 일하이소"



미순은 사무실 한 켠에 있는 휴지를 뽑아 들어 기태의 얼굴을 닦아냈다.



"이기 멉니꺼~ 까마귀가 친구하자 카긋네~"



"그른거 신경 쓸 거 같으모 이 일 몬한다. 쓸데없는 소리 할끼모 집에 가그라"



내심 아내가 싸온 도시락이 마음에 들면서도 입으로는 딴소릴 한다.



임신 중인 아내가 걱정되어 늘 속 없는 말만 늘어놓는 기태였다.



"아참, 마누라. 내 내일은 쫌 늦을끼구마"



"와예? 뭔 일 있습니꺼?"



"아니, 뭐 별 일은 아이고. 친구 하나가 쫌 보자카네"



부추전을 오물거리며 웃어보였다.



"이거 윽수로 맛있네~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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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글쎄 그게 아이라케도!!"



"나라 임마!!"



어제의 대화를 보아선 기태를 붙잡고 있는 저 남자는 기태의 친구가 틀림없었다.



"친구야. 이기 다 니 생각해서 하는 말이라카이"



친구는 답답한 표정으로 기태를 막아섰다.



"이기 오랜만에 만나가꼬 기껏 한다는 소리가, 뭐?? 보험??"



"아 진짜 그른기 아이라케도. 막말로 야! 니가 내 보험 안들어 주도 내도 돈 벌만큼 번다"



"그라모 얘기 끝났네"



"친구가 하는 말 아이가. 니 사업한다는 놈이 사업자보험 하나 없이 불안해가 되긋나 말이다"



친구는 계속해서 사고의 위험이나 화재,전기, 도난과 같은 피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 보험으로 대비하라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 딴데 쓸 돈 없다!"



기태는 일언에 뿌리치고 자리를 떠나버렸다.



"에이 몹쓸 새끼. 친구라고 있는기 보험이나 팔아물라 케사코 쯔쯔"



돌아오는 길에 연신 침을 퉤! 뱉으며 궁시렁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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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에엥!!~~ 삐뽀삐뽀!!!"



요란한 사이렌 소리와 분주하게 움직이는 빨간 유니폼의 사람들.



그 가운데 신발 한 짝은 어디로 갔는지 시커먼 맨발을 드러내고 주저앉은 기태의 모습이 보였다.



밤하늘은 무심히도 맑아서 별이 총총 빛나는데



기태의 머리 위론 바람을 타고 흩날리는 이슬비 같은 물방울이 스며들었다.



"하이고. 이 새벽에 이기 무신 일이고.."



"왜 얼마전에 새로 들어온 카센타 안 있습니꺼. 그기 지금 홀랑 다 타뿌따네예"



"어메 세상에나... 일한지 얼마 되도 않했는데 쯔쯧.."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은 너도 나도 안타까움을 가장한 호기심으로, 욕구를 충족하기 위한 정보를 모으기 바빴다.



입으론 걱정을 말하지만 결국엔 남의 일이요, 그저 보기드문 불구경에 지나지 않은 일일 터.



기태는 머릿속이 복잡해 졌다.



이런 일이 어찌 나에게 있을 수 있을까로 시작해서



다가올 미래. 아내. 그리고 뱃 속의 아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지 막막할 뿐이었다.



"씨발 새끼.. 한번만 더 찾아와 주지..."



그 와중엔 보험을 권했던 친구 얼굴도 있었던 모양이다.



한참이 지났다.



서서히 현실이 보이기 시작하자, 너무 놀라 꼼짝도 못하고 있던 아내 얼굴이 떠올랐다.



부푼 배를 안고 따라나서겠다는 걸 간신히 말리고 나온 터였다.



일단 돌아가자...



'다시 시작하는거야. 난 할 수 있어.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 따위 인생 교과서에나 있을 법한 말들은 떠오르지 않았다.



단지 갈 곳이 그 뿐이기에 그저 움직일 따름이었다.



터벅터벅...



잃어버린 신발 탓에 절뚝이는 뒷모습이 멀어져 간다.



투박한 운동화 한 쪽만 덩그러니 남아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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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응급상황입니다!! 보아가.. 배가 갑자기 차오르는데..."



새벽 3시 ○○병원 신생아중환자실.



부산한 움직임과 긴박하게 울어대는 경고음.



다급한 사람들 중심에 누워있는 갓난 아이의 배가 푸르스름해지며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빨리!!"



의사는 땀을 뻘뻘 흘리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있었다.



"삐익!! 삐익!!"



더욱 격렬해진 경고음.



그 순간, 아이의 눈과 입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정적이 흐른다.



항생제를 주사하거나 수혈을 담당하던 의료진들은 모두 말을 잃었다.



그렇게 시끄럽게 울어대던 경고음도 멎어 버렸다.





"사망...하였습니다"







"안돼!!!!"



삑- 삑- 삑-



아직은 규칙적으로 들리는 기계음. 정상은 아니지만 태어날 때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아이.



그제서야 기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그런가... 꿈이지만 여긴 여전히 신생아중환자실이다.



그건 꿈이었지만 내 아이는 여전히 삶이 불투명한 상태다.



꿈이 현실이 아닌 것에 안도했지만 지금 현실이 꿈이 아닌 것에 또 다시 먹먹해지는 밤이었다.





기태의 불행은 카센터 화재사고에서 끝난게 아니었다.



"노산이 주된 원인이긴 하지만 강한 충격이나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기도 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만... 최악의 경우도... 생각하고 계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런 말씀 드리게 되어 정말 죄송합니다.."



임심 중이던 미순의 정신적 충격 탓일까?



아이는 예정보다 훨씬 이른 시기에 세상을 맞이하게 되었고



그로 인해 신생아중환자실에서 고가의 장비에 몸을 의탁할 수 밖에 없었다.



화제사고... 대출빚... 나날이 불어나는 병원비...



후우...



아이가 들을세라 숨쉬듯 탄식하며 자릴 일어섰다.



새벽일 하러 갈 시간이었다.



병원에서의 첫날밤이 떠올랐다.



"애기야.. 아빠가 우리 딸래미 이름 지어왔는데 맘에 드는지 모르긋네..."



온기조차 느껴볼 수 없는 아이를 바라보며 기태는 말을 이어갔다.



"보전할 보（保）에 나 아（我）자를 써서 보아라고 지었데이.. 어떻노? 이쁜 이름이제?"



기태의 눈가엔 눈물이 그렁그렁 했다.



"아빠는 이자부터 열심히 돈 벌어서 우리 보아를 지켜줄테니까네...



우리 보아는 이름 맹키로.. 너 자신을 지키고 있어야 된데이.. 알긋제?"



흐르는 눈물을 참을 수 가 없었다.



그러다 번쩍 정신이 들어선, 후딱 눈물을 훔쳤다.



'하모! 애비가 이리 약해빠지가꼬 아가 무신 힘이 나긋노.'



기태는 단숨에 뒤돌아 씩씩하게 병실을 나섰다.



그 날처럼... 오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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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입원하면서 생활은 더욱 더 어려워졌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기태는 닥치는 대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뭐든지 가리지 않고 하기 시작했다.



인력시장의 막노동부터 시작해 이제는 고철까지 줍고 다녔다.



그럼에도 생활비는 고사하고 병원비 대기도 턱없이 모자랐다.



그런 사정에 아내도 일을 하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출산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겁없이 덤비는 모습에 기태는 버럭 호통을 쳤다.



"그 딴 생각하지 말고 아나 잘 돌바라!"



화가 나긴 어미도 마찬가지였다.



"그라모 우짜라꼬예! 돈 나올 구녕이 없는데!! 내는 애미 아닙니꺼!! 내도..!!"



"이노메 여편네가 확마!!"



본심과는 상관없이 서로를 할퀴고 있는 부부였다.



한바탕 소란이 있고 난 후 들릴 듯 말 듯한 말을 남기며 또 다른 일터로 향했다.



"... 니까지 잘못되모... 내는 우짜라고.."



떨리는 목소리엔 눈물이 묻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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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도 어김없이 짜투리 시간에 틈틈이 고철을 줍고 있었다.



조금씩 주워서 기름값이라도 벌어야 쓸데없는 지출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버려진 냄비와 그릇 따위를 모아 전재산인 소형 트럭에 싣고 있는데



마침 작은 손수레를 끌고 오던 할머니 한 분이 말을 걸었다.



"하이고~ 오데서 이리 고물들을 주서왔을꼬~?"



기태는 애써 무시하며 하던 일을 계속 하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할머니는 트럭에 바짝 붙어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요거 요거 내 세 개만 주모 안될까이?"



뭐 하는 할망구지...?



"옳지!! 저 냄비하고 저거하고 몇 개만 가꼬가께이~?"



그러더니 막무가내로 트럭에 실린 고철들을 자기 손수레로 옮겨 담기 시작했다.



"보소!! 보소!! 짐 머하는 기요?"



"아니, 아니, 이거 몇 개만 가꼬가께~ 이거 몇 개 해봤자 돈 을마 안되에~"



"그기 중요한기 아이라 넘으 물건을 그리.. 아니!! 지금 머하냐고!!"



마구잡이로 쓸어담는 할머니를 밀쳐내며 손수레에 실린 고철들을 다시 주워담기 시작했다.



"아이코!! 이 젊은 놈이 영감 잡네!!"



털썩 주저 앉으며 세상 떠나갈 듯 고함을 치는 할머니 주위로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보소!! 동네 사람들!! 이 버르장머리 엄는 젊은기 노친네라꼬 함부로 막 대하고 그라네요~"



사람들은 수근대기 시작했고 기태는 잠시도 그 곳에 더 머무를 수 없을 지경이라



황급히 자리를 뜰 수 밖에 없었다.



"니미.. 재수가 없을라니까.. 별 그지 같은 노친네가 다 붙어가꼬는..."



중얼중얼 한탄을 늘어놓던 그가 갑자기 차를 멈춰 세웠다.



끼이익!!



곧 핸들을 주먹으로 쾅! 내려치면서 고함을 치기 시작했다.



"씨발!! 고철 그거 어?!! 키로에 600원 밖에 안하는거!! 씨발!! 그거 때문에 내가!! 어?!!"



사실 말 그대로 할머니 손수레에 채워봤자 몇천원도 안될 돈이었다.



기분 좋으면 영감 과자나 사드시라고 그냥 줄 수도 있는 돈이었다.



그런데 뭣땜에...



울컥울컥한 마음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따르르르릉~



솟구친 마음이 채 진정되기도 전에 아내에게서 연락이 왔다.



"여보.. 빨리.. 빨리 병원으로 좀 와보이소... 글쎄.. 의사 선생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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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급히 달려간 병원에선 걱정했던 것과 달리 평소와 별반 다름없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규칙적인 기계음... 아이는 여전히 인공호흡기를 통해 숨을 쉬고 있었다.



"무..무슨 일입니꺼?"



"아.. 이렇게 급히 오실일은 아니었는데.."



놀란 기태보다 더 당황한 듯한 의사의 말이 이어졌다.



"부인께도 말씀드렸지만.."



고개를 돌려 아내를 쳐다봤다.



신음소리... 턱 밑까지 차올라 숨도 제대로 못쉴 정도의 눈물...



"그게..."



"아 퍼뜩 말씀해 보이소. 먼데 그랍니까? 바쁜 사람 불러다가 장난하는 거또 아이고"



"이런 말씀 드리기 정말 죄송합니다만... 지금..."



기태는 도무지 무슨 말이 튀어나올 지 짐작조차 되질 않아 커다란 눈을 이리저리 굴릴 뿐이었다.



다만 죄송하다고 하는 꼴을 보니, 좋은 얘기는 아닌 듯 싶었다.



의사는 결심이 선 듯 말문을 열었다.



"아시겠지만... 보아는 심장과 폐 기능이 손상돼 산소호흡기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버틸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억지로 연명시키더라도.. 얼마나 버텨줄 지... 지금 보아가 느낄 수 있는 것은 고통 뿐이라는 게 저희측 소견으로..."



"그..그래서..? 소견이 머라꼬예?"



".... 안락사 시키는 것이..."



그 순간 기태의 두 주먹이 의사의 멱살을 잡고 벽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벽에 바짝 붙은 의사를 있는 힘껏 들어 올려 노려보며 말했다.



"머..머라꼬?!! 머어?? 안..안락사??!!"



"지..진정하십시요.. 쿨럭! 쿨럭! 보..보아를 위해서도.. 가족을 위해서도.. 지..지금.. 쿨럭!! 벼..병원비도 연체되고..힘드.."



"머!! 병원비? 얼만데!! 내 다 주께!! 얼마나 되는데? 어!! 그깟 병원비!!"



기태는 의사를 내팽개치며 웃통을 까 보였다.



"자!! 씨발껀!! 이거 갈라가꼬 내장이고 콩팥이고 너거 쓸 거 다 도리가라!! 그라모 병원비 되긋나?!! 어?!!"



병실은 고요했다.



기태를 제외한 모두가 말을 꺼낼 수 없었다.



누구도 기태를 말릴 수도 없었다.



그것은 기태의 얼굴이 단순히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 그 자체였기 때문이었다.



"의사 선생님... 한번만 봐주이소... 병원비는 내 목숨걸고 드릴께예...제발..



예?? 하루라도.. 어? 하루만 이라도!! 혹시 모른다 아입니꺼... 예??"



오열하는 기태.. 흐느끼는 아내.. 고개 숙인 의사..



겨우 숨만 쉬는 아이...



중환자실에서만 꼬박 반년 이었다.



"내는... 내는... 얼마 보지도 몬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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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우.. 그래 사정 사정 해가꼬 1년을 버팄다 아이가... 그래도 비슷한 아들에 비하모 오래 같이 있었는기라.."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그리고 이 사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악착같이 자기 위치를 지키려 했던 것도,



그렇게 자기 자랑만 하며 내가 꼭 필요한 사람이라고 간절히 표현했던 것도...



옳다고는 할 수 없지만 나름의 사정이 있었구나..



"후..."



나도 모르게 한숨이 세어 나왔다.



"... 담배나 한대.."



당사자는 덤덤한데 괜히 내가 복받쳐 올라 진정시킬 필요가 있겠다 싶어 부스스 일어섰다.



기태형은 말 없이 따라 올라왔다.



배의 갑판위에 올라 담배를 입에 물었다.



바닷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왔다.



"오늘이 그 가시나 기일이다.."



먼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기태형을 바라보며 기일이라는 말에 흡사 옆에 그 아이가 있는 것 마냥 느껴져



피우던 담배를 냅다 던져 버렸다.



기태형은 바닷바람을 한 껏 들이 마시며 말했다.



"봐라 보아야... 이기 바다라 카는기다..."



누구는 매일 보면서 아무 감흥없는 바다가 그 아이에게는 단 한번도 볼 수 없었던 신세계라니...



기태형이 자신만의 의식을 마친 뒤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찌됐든 행님이 이야기를 윽수로 감동적으로다가 잘하제?"



또..또..또.. 지 자랑..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전처럼 밉지는 않았다.



"예! 윽수로 멋있는 거 같네요!"



내 아버지의 삶또한 그와 비슷하진 않았을까... 다시 한번 생각해보는 밤이었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