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웃자만 주로 보다보니 게시판의 목적에 안맞는 글로 폐를 끼칠까봐
제 필요에 가장 가까워보이는 고민게시판에 오게됐습니다...
눈팅만 하다가 갑자기 아이디 만들어 이런 글을 쓰는 게
제 딴에도 퍽 우습게 느껴지고... 장문의 글 쓰고싶지 않아 줄였습니다. 그럼에도 너무 긴 글임에 미안합니다.
저는 물리학을 공부하는 학부생입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물리학을 더 공부하고
연구하는 삶을 사는 게 꿈이었어요.
무슨 과학고나 영재고를 나온 건 아니어도
중학교 때 처음 꿈을 가진 이후로 정직하고 꾸준하게
물리학을 알기 위해 노력하고, 스스로의 호기심을 소중히 여겨왔습니다.
그런데 요즘 공부에 회의감이 많이 드네요.
유학길에 오를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어서 군대를 일찌감치 다녀왔고
군대에서도 없는 시간을 쪼개 수학을 공부하면서
복학하면 노력한 덕을 보겠거니, 전공과목에서 실력을 더 인정받을 수 있겠거니 기대했는데
막상 복학하고 나니 생각만큼 잘되지 않네요.
전자기학 중간고사를 자신있게 풀었고 성적에 대해 많이 기대하고 있었는데
만점에 가까운 친구들이 수두룩하더군요. 저보다 늦게 입학한 학생들이고 개중에는 1학년들도 있는데
왜 그들은 되고 전 안되는 걸까요. 아무리 학부 코스웍이 학문적 커리어에 대해 모든 걸 말해주는 지표는 아닐지라도요...
처음 전공 역학을 들었을 때처럼 배우는 내용을 충분히 이해 못해 어버버 헤맨것도 아니고, 스스로 시간 투자해가며
수업시간에 배운 내용 이상으로 공부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치른 시험인데도 이렇게 불만족스러운 결과가 나오니
아니 이건 어떻게... 스스로 납득이 잘 안 되네요. 이러고도 공부를 계속해야 하는지 납득이 안 됩니다.
부모님께 환영받는 꿈이 아니었어도, 제가 부러워하는 친구들처럼 과고 영재고에서 공부하지 못했어도, 저 자신만큼은
스스로의 능력을 믿어주고 끊임없이 자신을 향상시키려고 고민해 왔는데...
처음 물리학을 공부하겠다 꿈꿨던 15살 그때의 마음이 이젠 없는 것 같아요. 자존감을 잃고 있다는 걸 스스로 느낍니다.
어떤 대학생들은 저학년 때부터 연구하고 싶은 분야를 정해서 파고들어가기도 하던데, 전 그런 것도 없어요. 이제 고등학교 때와는 달리
막연히 물리학이 좋다는 생각보다는 여기에 어떤 세부분야가 있는지, 내가 하고싶은 분야는 무언지 상을 잡아야 할 텐데... 주변인들은 제가 조급하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이제 막 복학했는데 벌써부터 할 고민은 아니라고들 하던데
제 생각엔 제 삶에 뭔가 근본적으로 결여된 게 있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느껴지지 않아요. 죽음이 두렵다, 아프다, 지난 날들이 아깝다 따위의 이유 말고
정말 이 순간 내가 자살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마음속에 그려지지 않네요.
다소 순진하고 투박하고 세상물정 모르고, 친구를 적게 사귀고, 남들 눈에 조금 이상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내가 뜻을 둔 분야에서만큼은 항상 진지하게 생각하고 모르는 걸 공부하고, 그렇게 많은 걸 성취해왔고 앞으로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믿었는데
이제 그런 믿음이 다 깨졌어요. 참 답답스럽게 느껴지시겠지만 대체 뭐에 얻어맞고 깨진 건지도 잘 설명을 못하겠습니다. 시험을 못 봐서?
학부 졸업만 하고 취업을 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진지하게 드네요. 그런 고민을 하기 시작하니
제가 지금까지 학문 이외의 길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다는 걸 새삼스레 깨닫게 되더군요.
그냥 처음부터 취업할 생각으로 대학교에 다니고 있던 사람들에 비해 전 그냥 멍청이가 된 것처럼 느껴져요.
취업 고민을 진지하게 한 사람들은 취업용 스펙이라도 준비했겠죠. 저처럼 이도저도 아닌 채로 헤메는 게 아니라.
금융공기업에 가고 싶다던 고등학교 동창, 고시공부를 한다는 대학교 학우들이 저보다 훨씬 대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어디가서 학문적 커리어를 위해 준비해왔다고, 그들 못지않게 인생 설계를 잘 하고 있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제가 어떤 마음으로 물리학을 꿈꾸게 됐는지 이젠 그것조차 희미하게 느껴집니다. 모든 걸 다 잊어버리고 길을 잃은 것 같습니다.
재밌는 것도 없고 하고싶은 것도 없습니다.
그냥 그렇게 살고 있네요. 영문 모른 채 산다는 느낌.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힘든 마음에 누군가를 향해 외치고 싶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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