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유하] Vol. 18
















모든 것은 챗바퀴처럼.




원래 돌아와야 할 지점으로 되돌아왔다.










유난히도 작은 사건들이 많았던 목예제도 끝이나고, 우리 모두는 다시 입시생이 되어있다.




학교와 학원, 두 군데를 번갈아다니면서 서로의 꿈을 위해.




그리고 한편으로는..... 자신을 믿어주는 타인들의 기대에 조금이라도 부응해주기 위해.




....그렇게 4B연필과 수채화용 브러쉬를 쥐고서, 새하얀 도화지 위에 꿈을 그려낸다.










시간이 지나는 동안, 내 주변으로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었다.




목예제가 끝나고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집에 들어갔다가, 처음으로 아버지께 맞을 뻔 한 일이나...




유하의 전 남자친구, 강여명 그 자식에 대한 이야기.




....그 자식, 알고봤더니 목일예고 이사장과 친분이 있는 인사의 아들 놈이었다.




집안도 빵빵한 놈이라 목일예고측에 금전적인 지원도 잦았던 탓에, 그 난동을 피우고도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았단다.




대신 유하에게 얼씬거리는 일은 없어져서 그나마 다행이라며, 애써 불만을 삭히는 꽃님이였다.




....아무리 친구와의 부탁이라지만, 그런 놈이랑 사귀면서 버텼었다니....




유하 녀석, 비위도 좋다.













....그 외에도.




오랫만에 학원에 나온 성원이가 이야기해주길, 경훈이는 결국 미술을 포기하고 뒤늦게 수능준비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했다.




집안의 반대가 너무 심해서, 도저히 미술을 계속 할 수 없겠다는 내용의 전화를 받았다며 은근히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쩝....




무언가 찝찝한 기분이 몸을 감싼다.




......나름대로 괜찮은 놈이었는데.... 결국은 포기해버리는구나... 미술을.




아니, 포기.... 라기 보다는... 타협이 더 맞는 말이겠지.













전반적인 학원의 분위기도 나날이 달라져갔다.




....입시 B반은 이미, 며칠전부터 완벽한 입시체제를 구축해가기 시작했다.




목표대학별로 학생들을 나눈 뒤, 각각의 파트에 강사 한명씩을 투입시킴으로써 더 높은 합격률을




창출해내자는 것이 B반의 전략이었다.




....B반에서 열심히 실력을 쌓고 있는 여정이.




그녀도 B반의 흐름에 맞춰 자신의 목표를 한단계 끌어올린, 성균관 대학교를 공략중인 상태.




꽃님이는 그 괄괄한 성격과는 반대로, 차분하고 분위기있는 소묘력을 인정받아 현재 자신의 목표




학교에 조금 웃도는 곳을 알아보고 있다.










입시 A반은 말할 것도 없는 에이스 지역.




....이른바 '아이비 라인'이라 불리우는, 지하철 2호선 내에 위치한 서울 주요 대학들만을 목표로




삼고있는 아이들이, 새벽까지 남아서 그림을 그려대는 엘리트 교실이었다.




A반에 투입되고 있는 강사들 역시, 명문대 재학중인 대학생과 경력이 우수한 강사들을 엄선하여




구성되어 있어서, 학원측이 A반에 거는 기대는 엄청났다.










마지막으로, 나와 영진이. 그리고 유하가 수업받고 있는 입시 C반.




사실, 유하는 원래대로라면 B반 수강생이었지만 사정상 C반에서 수업받는 것이니....




....일단 제외하고.




하여튼 이놈의 C반이 문제였다.




애당초 실력저조자들을 모아 만든 반이라, 수업 분위기가 안잡히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나 영진이를 비롯한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각자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에 열심히는 해주고




있었지만, A반이나 B반같은 '죽기살기'식의 전의가 느껴질 정도는 아니었다.




....하다못해, 나 역시도....




유하와의 관계가 너무나도 진전된 이후로는, 긴장이 풀려버려서인지...




그녀의 마음을 허락받기 전의 나에 비교할 때, 정말이지 게을러져 있었다.













이래선 안된다고!










유하에게 인정받기 위해 노력했던, 약간은 불순했던 동기를 싸악 개조해서....




....이제 나 자신을 위해 적극 투자해야 할 때였다.




나 역시도 세종대를 목표로 입시질을 하고 있었으니, 유하와 같은 학교에 가기 위해서라면 더욱




정진해야 마땅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러던 와중, 봄은 이미 훌쩍 우리의 어깨 너머로 지나가있었다.
















시린 칼바람과 꽃샘추위는 온데간데 없고, 나른하고 따사로운 햇살이 학원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학원건물 근처에 심어져있는 벚꽃을 비롯한 가로수들도 제각기 나뭇잎들을 피워내며, 입시생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나른하고도 가슴이 뭉클거리는 계절.




....이 계절, 이 순간.




나는 유하와 함께였다.













노력의 대가였을까.




학원측의 염려에도 불구한 채, 나는 실기력의 눈부신 발전을 이루어냈다.




....어금니 꽉 깨물고 하니까 안되는 게 없었다.




유하를 생각하는 내 마음이 깊어갈 수록, 그녀에게만 빠져 있어서는 안되겠다는 경각심 덕분에




채찍질을 멈추지 않으며 나를 단련해갔다.




수채화 교실의 한수진 선생님과 건국대 강사 선생님도, 이정도라면 가능성이 있다면서 응원을




아끼지 않았고, 유하 역시도 자기일처럼 기뻐하면서 나를 독려해주었다.













행복의 계절, 4월.










학원 보수공사 및 강의실 증축공사로, 3일간의 비공식 휴일이 생겼다.




3일간의 휴일이 있기는 했지만, 유하와 시간이 맞는 날이 없어 데이트를 약속할 수 없었다.




아쉬운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래도 어쩌겠어.... 신분이 입시생인데.










학교에서 수업을 받고 있는 나에게, 유하의 문자 메세지가 핸드폰 액정을 메우며 나를 호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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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온편지 01




쫑기쟈기야우엥~!

완전졸려죽겠어요

온몸이노곤흐물해

수업한개도귀에안

들어와요어쩜좋아




2001 04-03

10:57 수신

발신인 : 은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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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풋... 귀엽기는....













선생님의 눈을 피해, 조용히 킥킥거린 후 답장을 또닥거리기 시작했다.




혼자 실실 쪼개며, 핸드폰을 만지자 옆자리에 앉아있던 영진이가 어깨를 툭툭 건드리며 말한다.













영진 : 야, 뭐냐? ...마누라 호출이야?







나 : 어어.... 문자 하나 와서.







영진 : 보여줘.







나 : 킥... 뭘 보여줘, 자식아.







영진 : 니 남편은 나잖아. 왜 바람피워.







나 : 너도 니 여자친구랑 잘만 놀면서 뭘그래. .....아, 틀렸다. 다시다시.







영진 : ....킥.... 좋아 죽네. 조심해라, 그러다가 걸리면 핸드폰 압수당한다?







나 : 어...













문자 메세지를 보낸 후, 가만히 생각을 해본다.




그러자, 고개를 창문 방향으로 틀어 책상에 엎드린 채로 하늘의 구름을 감상하고 있을 유하가 머리




속에서 마구 그려지기 시작했다.




무표정한 얼굴로 봄의 나른함에 잔뜩 취해있을거야, 아마.




눈동자를 또르르 굴려가면서 구름을 쫒다가, 내 문자 메세지가 도착하면 벌떡 일어나선 핸드폰




액정을 확인해보겠지....




...킥킥킥, 뻔하다 뻔해. 수업 분위기 안잡힐 때는 절대 공부에 집중할 애가 아니니까.










Send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집어넣은지 얼마 되지도 않아, 칼같은 문자 메세지가 도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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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온편지 01




쫑기가말해준대로

하다가선생님한테

제대로걸렸...방금

꿀밤세대맞았는데

최고로아퍼~흐엥!




2001 04-03

11:01 수신

발신인 : 은유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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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할만만 꼭꼭 찍어 보낼 것 같은애가 의외로 착실하게 40자 다 채워서 보내네... 킥킥...

어휴, 귀엽단말야.... 역시 사랑을 속삭일 때는 풀버전 문자가 최고지.







영진 : ....뭐라고 혼자 쪼개면서 쫑알대? .....마누라랑 문팅하니까 좋냐?







나 : 문팅이라니 임마. 사랑을 속삭인다고 해줘.







영진 : ...어후... 담은지 얼마 안되는 이, 배추 겉절이 같은 커플들. .....우리처럼 오래도록 숙성된

김장김치 커플을 좀 닮아봐라. 일주일째 문자한통 안보내도 화내기는 커녕 삐지지도 않아요.







나 : ....부러워해야되냐, 그거?







영진 : ....아니. 내가 널 부러워해야되지.







나 : 그렇군.







영진 : 그래. ......망할 놈. 문자쓰다가 삑사리나 내서 보내버려라.













....녀석이 공책에 빼곡히 글씨를 채워넣으며 빈정거렸다.




킥, 그렇지만 기분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바래오던 여자.




....지금은 내 여자친구가 된, 그녀와의 문자 왕래는 더없이 나를 기쁘게 해주고 있었으니까.













....17통 정도의 메세지를 주고받은 후에야, 우리는 3일이 지난 후 학원에서 보자는 인사말로...




길고 긴 문자채팅을 끝낼 수 있었다.










유하가 보낸 수십통의 메세지들 중, 어감이 귀엽거나 흔히 볼 수 없는 애교를 잔뜩 떨어놓은




메세지들은 삭제시키지 않고 고이고이 보관해두는 습관을 기르기 시작한 나.




...오늘 역시, 마음에 쏙 드는 메세지 3개를 선별해, 저장함으로 옮겨둔다.




킥킥... 이제는 하루일과 중에서 이런 시간들이 꽤나 익숙해져 있다.










그녀도 나처럼 느끼고 있을까?




....뭐든지, 그녀와 연관되어있는 거라면.... 설레이고 두근거리는 이 즐거운 감정을.

























.....휴일이 끝난 뒤, 수채화 교실.




세 반으로 나누어져, 각 반의 실력에 맞게 개편된 '소묘교실 시스템'이 이곳에도 적용되었다.




[순수회화] 목표자와 [만화, 디자인] 목표자.




그리고 그 큰 분류 밑으로, 목표하고 있는 대학별로 세부적인 분류가 이루어져....




현재 나와 유하는, 같은 [세종대 만화애니메이션 파트]에서 수업을 받고 있다.




....그리고 영진이는, 여정이와 함께 [성균관대 디자인 파트].










압축되어 있는, 그리고 효율적으로 분류되어있는 수업 시스템도 마음에 들었지만....




.....유하와 좀 더 밀접한 위치에서, 함께 수업을 받으며 즐거워할 수 있다는 것에 더욱 흡족함을




느끼는 나였다.




서로의 정보를 공유하고, 가끔씩은 같은 처지에 대한 위로도 주고받고.




.....컨디션이 안좋아 그림이 안풀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프링글X와 함께하는 스트레스 해소용




자리를 마련하기도 했다.










다만, 아직까지는 연인사이인 것이 비밀이었기에.




같은 책상에 마주 앉아서 그림을 그리거나, 사람들의 염장을 지를만한 애정표현을 서슴없이




한다거나 하는 일들은 할 수 없었지만...




오히려 그런, 절제되어있고 제한되어있는 사항들이 나와 유하와의 애정전선을 더더욱 뜨겁게




달궈주는 역할을 하고 있었다.
















유하 : （프.링.글.X）







나 : （...안돼... 조금 있다가 쉬는 시간 되면 먹자. 너 지금 먹다가 들키면 엄청 혼나!）







유하 : （아 씨... 지금 먹고 싶은데.... ....먹자아~ 응? 먹자, 먹자.）







나 : （아, 글쎄... 너 줄려고 사온거니까 먹기 싫다고 해도 줄거야. 조금만 참자, 참아. 응? 아~

착하다 우리 애기. 착하다, 착해. 토닥토닥~）







강사 : 야!! 너희 둘. 둘이 붙어서 속닥속닥 뭘 소근거리는거야? 그림 완성 다했어? 어디 내놔봐.

밀도 안올라가 있으면 둘 다 아주 죽을줄 알어?!







나 : 아, 아니요. 여기서 밀도 어떻게 올려야 되는지 물어본거에요. 그, 그치?







유하 : 예, 맞아요. ....아, 씨~ 진짜 안올라가네... ....선생님, 여기 어떻게 묘사해야 되요?













.....이런 식이었다.




강사 선생님을 따돌린 후,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눈웃음짓는 유하와 나를 바라보는 영진이의...




꼴같잖다는 표정이... 괜시레 기분좋다.










아....




아름다운 세상이여.




....원더풀, 뷰리풀....




그저, 오늘만 같아라.
















....




......




...........




그 해, 2001년의 여름은 뜨거웠다.




언제나 활발하고 순탄한 애정행각을 벌여오던 우리에게도, 한여름의 후덥지근한 날씨는 견디기




힘들었다.




원래부터 약간 멍한 백치미가 있던 유하와...




남을 배려할줄 알고 온순하긴 하지만 한번 일이 틀어지면 냅다 화가 치미는 다혈질의 나.













....제일 조심해야 할 계절인, 여름이 다가온 것이다.






















유하 : 흐에에에..... 아으.... 어.... 에이... 우우.... 왜 에어컨 안고쳐주는거야아앙.... 흐어엉....







나 : 뭐, 뭐하는거야.... 유하야, 무거워. 너 내가 손이라도 잡으려고 하면 덥다고 난리더니, 이젠

안더워? ....나 몸에 땀 많은거 알지? 니 손이랑 팔에 내 땀, 한가득 배인다~







유하 : .....흐어... 으.... 상관없어요오....







나 : 상관없기는... 있다가 또 땀나면, 버스에서 곁에 앉지도 못하게 할거면서. 나 네 옆에 앉고

싶으니까 얼른 등에서 떨어져주세요.







유하 : .....므허엉.... .....싫어어.....







나 : 얘가 오늘은 왜이렇게 퍼져가지고.... .....너 이렇게 있다가 선생님이랑 애들 들어오면 뭐라고

둘러대려구... 지금 이 자세, 빼도박도 못한다니까?







유하 : 걸리면 걸리는거지 뭐어.... 사귀는 거 맞는데, 둘러댈 필요가 뭐 있어요오.... ....흐느적....







나 : 너, 괜찮아 정말? 우리 사귀는거 학원에 알려져도?







유하 : ....이미 아는 애들으은... 흐에에에.... 땀난다... ....다 알고 있을거얼... 우아~ 인간 오징어다,

인간 오징어어.... 흐느적, 흐느적.... 오징어 웨이브으~







나 : 완전 응석쟁이 다 됐네... ....야, 일어나봐.













나의 등에 자신의 가슴팍을 찰싹, 붙여놓은 채.




내 머리 사이로, 자신의 두 팔을 앞으로 내민 자세로 쳐져있던 유하를 일으켜 세우는 나.




일부러 다리에 힘을 풀고, 흐느적거리면서 내 품에 안겨대는 유하다.




평소대로였으면 너무나도 귀여웠겠지만.....




.....사실 그 때 나는 엄청난 스트레스가 쌓여있던 상황이었다.










학교에서 학생주임 선생님에게, 예능계열 희망학생에 대한 선입견 가득한 잔소리와 은근한 무시를




당한데다가 아주 사소한 일로 친구와 주먹다짐 진전까지 가는 일이 있었다.




그 여파가 학원에서 까지도 지속되면서, 그림 역시도 내 뜻대로 풀리질 않았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내가 별로 좋아하지 않던 강사 선생님 몇분이, '세종대 파트'에서 내 실력이 제일 미달된다는 것을




교묘하게 비꼬며 킬킬거리는 것을 본의아니게 엿듣기도 했다.




게다가 바로 지금.




.....유하가 내 품에 계속 매달리는 바람에, 내 몸이 뒤로 밀리면서 책상을 밀치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조그마한 물통에 받아뒀던 물이 살짝 엎질러져 내 그림 위에 번지는....




....그야말로 멋진 상황까지 연출되고 있었다.










유하에게 화가 나지는 않았지만, 안좋은 일이 겹쳐있던 데다가....




하던 일 마저도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꼬여만 가자, 울컥하는 마음이 드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차마 유하 면전에다가 대고 신경질을 부릴수는 없는 노릇.




유하에게는 언제나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이 이미 습관처럼 가슴에 박혀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라기 보다는, 자꾸만 겹치는 스트레스를 향해 허공에다대고 소리를 질러버렸다.













나 : 어후... 오늘 진짜 되는 일 하나도 없네... 왜이러지...? 날씨 때문에 불쾌지수만 높아지고....

.....아으으으으!!! 정말!!! 스트레스 엄청 쌓이네!!! 크아~! 짜증나!!! 아아악!!!







유하 : ....!













내 목에 양 팔을 두르고서 교실바닥을 향해 추욱 몸을 늘어뜨리고 있던 유하가, 나의 괴성을 듣고는




깜짝 놀라며 나를 올려다봤다.




씩씩거리면서 유하를 내려다보는 표정이 예사롭지 않았던지, 그녀가 자신의 두 팔을 조심스럽게




갈무리하며 일어서기 시작했다.













나 : 후우....







유하 : .......







나 : ......아, 미안... 소리질러서. 너한테 화낸게 아니고.... 그냥 사실, 오늘 정말.... 하루종일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서... 스트레스가 너무 쌓여가지고 그랬어.







유하 : ....아우, 깜짝이야. .....후아, 쫑기 목소리 되게 크다.







나 : 네 앞에서는 조용조용히만 이야기했으니까.







유하 : ...처음 알았어. 쫑기 목소리 그렇게 큰지.







나 : ....놀랐어...?







유하 : ....응. 그것도 아주 서프라이즈.







나 : ....미안.







유하 : 아냐아, 미안해할 필요 없어. ....말을 하지 그랬어어... 그것도 모르고 괜히 눈치없이 어리광

피워댔잖어. ....쫑기, 속으로 무지 욕했겠다~







나 : 아니래도... 그냥 마인드 컨트롤이 안되서 그런거지.







유하 : 어우, 하여튼 사람 미안하게 만드는 방법도 가지가지라니까.... 말하랬잖아, 말. 말을 안하면

내가 아무리 눈치빨라도 쫑기 속마음을 모르잖아요. ....나, 가뜩이나 맹해서 그런거 잘 모르는데.







나 : ...그런가? 하긴, 그렇겠다.







유하 : ....나갈래? 밀폐된 교실 안에만 있으면 오히려 더 심란해질거야.







나 : .....







유하 : 가자, 가자~! 내가 생과일쥬스 사줄게. ....여기 학원 뒤에 새로 생긴데 알아? 내가 쫑기랑

같이가려고 봐둔데가 있어요~ ....가자, 가자!
















....그녀가 잡아당기는 손에 이끌려, 학원 앞의 생과일쥬스 전문점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만해도, 생과일 쥬스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파는 가게가 얼마 되지 않았던지라 학원 앞에




위치한 그 생과일쥬스 전문점이 신기하게만 느껴졌었다.










유하가 좋아하는 체리쥬스와, 유하의 추천으로 고른 허브&레몬 아이스티.













유하 : 쭈~욱. 한모금 마셔.













아기자기하게 생긴 빨대를 꽃아, 있는 힘껏 빨아올려 단숨에 삼키는 나.




....그 짓을 한 너댓번 하자, 관자놀이 부분이 심하게 땡겨오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 : 우악...!! 슬러쉬 빨리 마신 것 같은 기분.... ....어억, 머리야...







유하 : 푸하하~ 표정 웃겨.







나 : ....어우... 차갑다고 말을 하지! 난 그냥 미적지근한 쥬스인줄 알았잖아.







유하 : 미적지근한게 여름에 팔리겠니? 센스, 센스!







나 : ...쳇.







유하 : 킥킥킥... .....와, 근데 아까... 쫑기 버럭 화내니까 쪼오~금 무섭더라. 화내는 모습을 처음

봐서 그런가? 나긋나긋하던 애가 갑자기 꽥~ 소리 지르니까, 소름 돋던데.







나 : 어휴... 그 이야기는 이제 그만해. 나 지금 엄청 후회하고 있으니까. 니 앞에서 그런 모습 냅다

보여버린거....







유하 : 뭐 어때? 여자친군데. ....앞으로 사귄 시간이 더 길어지면, 더 심한 것도 볼텐데~







나 : .....음? 뭐?







유하 : 내 입장에서는, 남자의 매너와 레이디 퍼스트 정신을 의심하게 될거고... 쫑기 입장에서는

....으음... 아! 그래. ....여자에 대한 환상을 버리게 될거라는 거? 그 정도?







나 : ....너, 내 앞에서 더러운 짓 하려고 그러지.







유하 : 어? 설마~ 나 은근히 깔끔한거 모르는구나, 너?
















예쁜 글래스에 담긴 쥬스 두 잔을 앞에다두고, 에어컨 바람을 쐬자 달궈진 머리가 식기 시작했다.




그녀와 정신없이 수다를 떨다보니, 구질구질했던 기분이 어느새 다림질을 한 것 처럼 말끔해졌다.




.....역시, 마법이라니까....




위대한 마법사, 은유하양.....




....존경할게, 존경할게.






















.....여름은 그렇게, 유하의 깊은 배려심으로.... 무르익어갔다.










여름방학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아침과 저녁, 그리고 새벽을 반납하면서 그림만 그려댔다.




학원에서 일부러 쉬는 날을 정해주지 않으면... 여름방학이고 뭐고, 국물도 없었다.




찌는 듯한 더위와, 냉방병에 시달리며 하루 왠종일을 석고와 수채물감으로 때워야 했다.




그 때 그사건 이후로, 나는 유하 앞에서는 절대로 짜증을 내지 않았지만... 역시나 불쾌지수를




높여주는 늦여름의 무더위는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










점점 죄여오는 입시 부담과, 뜻대로 풀리지 않는 실기력.....




....철모르던 시절, 강사 선생님의 칭찬과 스스로 자만하던 그 향상된 실기력이.




알고보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의 그 허무함과 절망감.




.....이 실력으로 과연, 내가 목표하는... ...아니, 그녀가 목표하는 대학을 합격할 수 있을지.....




부담감에 버무려진 의심이 피어오르자, 역시 견딜 수가 없었다.










꿋꿋히 이겨내야 하는데..... 노력만이 살길인데....










자꾸만 쳐져가는 어깨를 나도 어쩌지 못했다.




....그리고 그 시절이, 아직까지도 내 가슴을 짓뭉개듯 후벼파는 막심한 후회를 낳게 해준 시절




이기도 했다.




온종일 멋지고 성실한 모습만을 보여줬어도 모자랐을 시간이었는데....




그렇게 무기력하고 실망스러운 모습을 연달아 드러내버렸기 때문에.




....그런 내 모습을 그녀에게 보인 것이....




이토록 후회하는 날이 와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는, 그 시절을 기억 속에서 지우고 싶어 한다.



















......여름이 나의 안타까운 계절이었다면....




유하의 안타까운 계절은, 가을이었다.










섬세하고, 여린. 그러면서도 그 성격을 티내는 걸 싫어하던 유하.




그렇기에 더더욱, 가을을 타는 자기 자신을 싫어하면서도 뭉클한 가을 느낌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멍한 모습으로 교실 창틀에 기대어, 하루종일 창 밖의 낙엽을 바라보기도 했고....




....또 가끔씩은, 수업중에 말도 없이 나가서는 한시간 넘게 돌아오지 않는 적도 있었다.




에이스급이던 그녀의 실기력은, 눈에 띌 정도로 떨어져만 갔고 학원의 걱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학원 입장에서는, 유하정도의 입시생이 원하는 서울내의 대학교....




그것도 이름있는 대학교에 합격해줌으로서 기대할 수 있는 광고효과가 엄청났기 때문이었다.




원장 선생님과의 상담 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상담실을 들락날락 거리는 통에 수업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했다.













그에 따라, 그녀의 신경도 굉장히 예민해져만 갔다.




유하는 나와 함께 있지 않을 때에는 언제나, 그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그런데, 그 표정이 예전과 매우 달라졌음을 나는 깨닫게 되었다.




도도하고 기품있는, 마치 그녀를 고귀한 존재로 생각하게 만드는 그 품격있는 무표정이....




....싸늘하고, 불만에 가득차있는 어둡고 음습한 표정으로 변해버렸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다보니, 가을을 무척좋아하던 나조차도....




.....가을을 제일 경멸하는 계절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오랫만에 연장없이, 오후 12시 40분쯤에 끝난 학원 수업.




영진이와 여정이, 그리고 꽃님이에게 양해를 구한 뒤... 유하와 함께 [걷기 데이트]를 시작했다.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흔들며 싫다는 의사를 표시하던 그녀를 겨우겨우 달래 얻어낸 시간이었다.




남자친구의 입장으로, 가을의 마법에 피폐해져만 가는 여자친구를 도지히 두고볼 수 없었으니까.




이대로 나뒀다간, 겨울이 지나고 실제 수능시험과 실기고사를 치르는 순간 까지도 그녀의 원래




페이스를 되찾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낙엽이 수북하게 깔려있는 보도블럭길.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늘상 짓고 다니던 싸늘한 포커 페이스를 유지하며... 땅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신경질적인 동작으로 낙엽들을 차내면서 걷기 시작했다.













나 : ....유하야아... 우리 손잡고 가자.







유하 : ......마음대로.













내가 내민 손을 잡는 둥, 마는 둥하며 느적느적 걸어가는 유하.




....이럴 때는 그저, 그녀의 기분을 맞추고 그녀의 기분을 풀어주는 게... 내 임무라고 생각했다.




자, 자, 자.




돈주고도 못만드는 이쁜얼굴, 그런 표정으로 값어치 떨어뜨리면 안되요~ 유하양.













나 : ...요즘, 힘들지.







유하 : 뭐가.







나 : 그냥 이것저것... 우리 유하, 가을타는거 같아서.







유하 : 아닌데.







나 : 으음... 입시 스트레스 때문에 그래?







유하 : ...별로.







나 : 그것도 아니면 왜그럴까... .....아! 나한테 뭐 화난거 있구나, 그치?







유하 : 없어, 그런거.













.....나와는 한차례도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평소답지 않은 냉랭한 대답으로 일괄하는 유하.




오메... 이 가을날, 당장이라도 얼음송곳이 비처럼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았다.




한참을 사귄 것 같은데도... 역시 여자 쪽에서 이렇게 태도가 돌변해버리면, 나 역시 뻘줌하게




긴장을 해버린다.







.....어휴... 이러다가 괜히 더 신경 긁어버리는 건 아닌가 모르겠네...




어쩌지... 그렇다고 그냥 이대로 놔둘 수는 절대로 없는데...




그렇다고 계속 말을 시키자니, 이 녀석 짜증지수만 높일 것 같고....













갈팡질팡, 고민에 빠져있는 사이.




....어느새 그녀의 집앞이다.




마, 말도안돼... 아니, 이렇게 가까운 길인데 누가 목일예고 근처랑 우리 학원이랑 멀다고 한거냐!




젠장... 5분도 안걸은 것 같은데 벌써 30분이 지나다니..... 미쳤어, 미쳤어.













유하 : 들어갈게. 바래다줘서 고마웠어.







나 : ....어? ....가... 가려고?







유하 : 그럼?







나 : ....으음.... 아니, 그냥...







유하 : ...간다. 조심해서 들어가.







나 : .....으응.... ......아! 유하야!







유하 : ....?













나의 부름이 귀찮다는 듯, 현관 문으로 들어가려다말고 고개만 돌려 나를 응시하는 유하.




....후우...




진심이...




내 진심이 통했으면 좋겠어.













나 : .....어떤 말을 해도.... 지금 네 상태는... 네 스스로 이겨내야 하겠지만... ....정말... 내 진심이

네 마음이랑 머리랑 몸이랑.... 주변 상황에까지... 통했으면 좋겠어. ....나, 유하 너 굉장히 굉장히

좋아해. 지금 네 이런 모습이... 솔직히 말하면, 내 가슴을 찢어놓는 것 같아.







유하 : .....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한다, 우리 유하는.













나 : ....근데, 너 원망한다거나 그러는 거 아냐. 내가 말주변이 없어서... 어, 그리고 긴장하면 더

말을 제대로 못하는 놈이라... 내 진심을 말로 표현해내기가 쉬운 건 아니지만... 후우... 그래도

나는, 언젠가는 통할거라 생각해. .....잘해왔었지, 우리? ...그 동안. 그 만큼 난 널 믿어.







유하 : .....







나 : 시간 더 이상 안뺏을게. 조금만 더 들어주라. ......난... 네 남자친구니까.... .....니가 싫다고

버텨도, 니가 내 어깨에 기대서 쉴 수 있도록 해야되거든? 난 지금... 그런 내 입장이 너무나도

행복해. ....비록... 내 멋대가리 없는 말쪼가리에, 네 기분이나 안상하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멍청이긴 하지만....







유하 : ....







나 : ....강요는 안해. 그리고 빌지도 않아. .....부탁하는 거야. .....날 밟고... 날 의지하고.... 그런

모습을 보여줬으면 좋겠어. 유하 니가 만약... 지금 네 상태를 벗어나고 싶다면...







유하 : .....
















....말없이 내 눈동자를 응시하는 그녀.




쏘아보는 건지... 힘없이 바라보는 건지도 분간이 안된다.




하지만 나, 유하의 남자친구 인간 한종기!













...마지막 말에 힘을 실으며, 힘차게 소리친다.
















나 : .....니가 짐을 벗어던질 수 있는 둥지가... 나 였으면 좋겠어.











아.. 아침엔 춥고, 낮엔 덥고...

나른하게 잠도 오고~ 죽을맛이군여

그나저나 당구장 아르바 힘드네요 -_-;;;;;;;

재미있게 읽어주시는 여러분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