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난 내 가족이 떠나간다는 상상 조차 해보지 않았어요.

꿈에서조차 그런 꿈은 안 꿔봤는데

막상 현실로 다가오니

드라마나 영화처럼 눈물은 안 나오더라구요.

다만 뇌가 없어진 것 처럼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상을 마무리 하고 오는 친구들과 친척들의

연락을 모두 받지 않았고, 아니 아예 휴대전화에

손을 대지 않았습니다.

여동생은 방에서 하루 종일 울고 자고 울고 자고

어머니가 가장 힘드시겠지만

우리 먹으라며 밥을 항상 차려놓으셨고

전 어머니를 생각해 먹는 둥 마는 둥 시늉을 했습니다.

그렇게 학교에 연락해 상을 치루고

지금까지 방에서 가만히 시체처럼 있다가

밖으로 나왔습니다.

여태까지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지만

그동안 생각치 않은 것들이 한 번에 떠오르며

이 모든 것들이 분노로 바뀌었습니다.

이 망할 세상은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한 번 보자.

하고요.

거실에 나오니 어머니는 울다 지쳐 주무시고 계셨고

어머니 옆에 아버지가 살포시 누워계셔씁니다.

화장실에 가니 아버지가 면도를 하고 계셨고

베란다에는 아버지가 어머니께 잔소리를 들으며

야식으로 드실 라면을 찾고 계셨고

현관에 가니 아버지가 신발장의 배드민턴 채를

찾고 계시며 주차장으로 가보니 아버지가

차에 시동을 걸며 동생을 학교로 바래다 주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그 순간 제 몸의 분노는 다 녹아버렸고

그제야 눈에서 뭔가가 쉴 새 없이 쏟아졌습니다.

아버지, 전 아버지가 그립습니다

미치도록 그립습니다

안 뵌지 5일 밖에 안 되었지만 이젠 미치도록

뵙고 싶습니다. 내가 취업하고 장가가면

얼마나 잘해주려 했는데,

이번 달 알바 월급 타면 아버지, 아버지가 좋아하던

그 주꾸미 집에서 소주 한 잔 하려고 했는데,

학점 잘 받았으니 용돈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다음 주에 은미누나 결혼식 가자며.

나 그래서 알바도 뺐단 말이야.

근데 어떻게 이렇게 가버려요?

나랑 내 동생 두고 어떻게 가버려요?

우리 엄마....엄마는 어떡하라고요...

우리 앞에서 애써 괜찮은 척 하며

속은 다 찢어지셔 너덜너덜 하실 엄마는...어떡하라고...

그렇게 가버리냔 말이에요

나 아직 아버지한테 당구 다 못배웠잖아요

내가 친구들 중에 제일 못 친다구

아바지가 나 150칠 때까지 가르쳐 준다고 했잖아요

우리 집 앞에 당구장, 처음 갔었잖아요 2주 전에

이번 주에 또 가기로 해놓고 왜 안 오시냐구요

아직도 믿기지가 않아요

나 재수할 때 엄청 힘들어 했잖아요

우울증 걸리고 막

그때랑은 비교가 안 돼요 아버지.

항상 자신처럼 되지 말라며 말하던 당신이 너무

보고싶어요.

그리고 난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아버지.

한 평생을 우릴 위해 몸 쓰시던 당신이 너무 멋있고

한없이 자랑스러워요.

난 아버지가 살아온 그 길을 당신이라는 이정표 없이

걸어갈 수 있을까요?

그냥 미치겠습니다 미쳐서 죽을 것만 같아요.

이렇게라도 글을 남기지 않으면 정신병으로

죽어버릴 것만 같아요.

아버지...한 마디만 듣고 가주시지....

여동생이랑 어머니는 내가 책임진다고,

죽을 때까지 보호하며 잘 살게 만들겠다고

그 한 마디만 듣고 가주시지

만약 내가 죽어 염라대왕이 내가 지옥에 가는 이유가

당신께 효도를 하지 못한 죄라고 하면

난 오히려 감사하며 지옥으로 갈 것 같아요.

이렇게라도 말씀 드릴게요

아버지 전 동생과 어머니를 끝까지 보살피고

제 살을 깎아가며 행복하게 해줄 것입니다

아버지만큼은 안 되겠지만 평생 보필면서 살아갈게요

그리고 아까 마음잡고 통화한 ㅇㅈ이랑 ㄱㅈ이 ㅁㅈ알죠?

왜 아버지가 같은 방향이라고 아이스크림 사주시고

펜션 놀러갈 때 데려다 주셨잖아요

이 놈들이 내 슬픔에 같이 울면서 찾아온다고

전화 하더군요

많은 친구 필요없이 진짜 친구 5명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하셨잖아요. 나 이 정도면 성공한 거지요?

난 아버지를 닮았나봐요 우리 엄마 동생도 모자라

할아버지 할머니가 걱정이 많이 되어요.

내일 할아버지 댁에 가야겠어요 가서는 울지 않을게요

당신을 이 세상에 나게 하고 날 나게 한 분들이잖아요

조부모님 또한 극진히 살필게요.

이 정도 약속이면 아버지 하늘 가기 전에

꿈 속에 나와주실 수 있죠?

할 말은 무진장 많은데 말문이 막혀서

못 할 것 같아요

그때 아버지가 그냥 올라가실 것 같으니까

노트에 꼼꼼히 적어 보여드릴게요

아버지, 이 약속들, 당신이 남기고 가신

남은 숙제들 잘 해결할게요

그럼 이만 이 편지는 여기서 마칠게요

참새를 통해 다음 편지 전해달라고 할게요

그럼 아버지 존경하는 우리 아버지

너무 감사하고 고맙습니다

사랑한다는 말은 차마 죄송스러워 못 할 것 같습니다

제가 이 숙제를 다 해결하면 그때

사랑한다고 전할게요

아득하게 먼 우주에서 편히 쉬십시오

2018년 05월 25일 당신의 길을 걷고 싶은
ㅂㅅㅎ씨 아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