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전에 이효리 씨와 이상순 씨 부부가 나오는 방송의 한 장면을 본 적 있다.
옛날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왜 그랬을까'하며 한탄을 하는 이효리 씨에게, 이상순 씨가 담담하게 해준 말이 인상깊었다.
"그 땐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겠지..."

인터넷의 시대는 바야흐로 '알빠노'와 '누칼협'의 시대이다.
'알빠노'는 말 그대로 남의 문제에 대해 자기가 알 바냐고 묻는 말이고,
'누칼협'은 어떠한 선택으로 인해 남이 겪고 있는 문제에 대해 그 선택을 하라고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는 뜻으로 비웃는 말이다.
두 어구 모두, 생각해 보면 소름이 돋을 정도로 냉소적이다（'알빠노'는 자연스러운 사투리 말투도 아니고, 고인이 된 노 전 대통령을 조롱하기 위해 극우 네티즌들이 쓰는 어체이기에 더 경계하게 된다）.
두 말의 느낌 자체와는 별개로, 사람들 사이의 소통에 있어서는 치명적인 말들이다.
누군가의 문제에 대해 자기가 신경쓸 바가 아니라고 외면하는 것은 대화의 여지를 단절하는 행위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자연스러운 대화 상황에서 '누가 칼 들고 협박이라도 했냐'는 발화는,
동등하지 않은 선택의 상황에서 굳이 더 나쁜 선택지를 골랐을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보통 사람들은 자신에게 좀 더 좋은 선택을 하려고 하기에 어떤 선택에 의해 피해를 입은 상황 모두에 보편적으로 '누칼협'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다른 사람의 선택에 대해 누칼협이라는 말로 비웃는 행위는,
그 사람이 왜 그런 선택을 하려고 했는지에 대한 이해가 결여된 행위이다.
아니, 이해를 포기해 버리겠다는 선언인 것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수많은 선택지로 인해 파생되는 다중우주（멀티버스）를 소재로 다루는 영화이다.
미국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는 이민자 에블린（양자경 분）은 남편과의 관계, 딸과의 관계, 일과 관련된 세무 등으로 그다지 행복해 보이는 인생을 살지는 못하고 있다.
급기야 세금 문제로 인해 세탁소가 압류당할 위기에 처하자 국세청을 찾아가지만,
거기에서 남편 웨이먼드에 의해 멀티버스를 넘어다니는 존재들을 목격하고 스스로 수많은 가능성의 우주를 헤매게 된다.

영화 전반부（챕터 1 : 에브리씽）의 악역은 원로 배우 제이미 리 커티스가 분한 국세청 직원 '디어드리'이다.
디어드리는 에블린이 제출한 영수증들을 검토하고 문제점을 찾는다.
영수증은 어떤 재화의 값을 치르고 그 증거로 받는 종이이다. 즉, 선택의 증표이다.
인간의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말처럼,
한 인간이 해 온 선택들을 시간으로 적분한 것이 인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영화 내에서도 영수증은 에블린이 해온 선택들, 에블린의 인생의 표상으로 활용된다.
디어드리는 그 영수증들의 항목 하나하나에, 마치 0을 그리듯 동그라미를 치며 에블린의 영수증들을 부정한다.

영화 후반부（챕터 2 : 에브리웨어）에 이르러선 멀티버스의 모든 가능성을 보고 타락해 버린 소녀,
조부 투바키이자 에블린의 딸, 조이의 계획을 막기 위해 모든 등장인물들이 분투하게 된다.
그 모든 통계적 필연성을 전부 경험했기에 모든 선택이 무의미해져 버린 조이는 세상과 자신의 삶을 부정하려 한다.
에블린은 자신의 소중한 딸을 지키기 위해, 다른 인물들은 세상에 극도로 위험한 존재인 조이를 제거하기 위해 한바탕 삼파전을 벌인다.
여기에서 에블린은 우주적 존재이자 공포의 대상이 된 자신의 딸을 상대하기 위해 한 가지 결단을 하는데,
딸과 마찬가지로 자기도 모든 가능성을 경험하고 오는 것이다.
우주의 유일한 존재로서 깊은 공허와 허무에 빠진 딸을 위해 에블린은 스스로 이해자가 된다.

에블린과 조이는 모녀 관계이지만, 모녀 관계에는 기본적으로 세대의 차이가 존재한다.
또 에블린은 결혼하여 가정을 꾸려나가는 이성애자이고,
이민자 1세대로서 주위 백인 사회에 조화되고 싶어하지만 태생적인 차이에 의한 거부감을 가진 인물이다.
조이는 동성애자이며, 백인 여자친구를 사귈 만큼 주위 사회에 녹아드는 데에 거부감이 없는 인물이다.
이러한 수많은 차이로 인해 모녀 관계는 영화의 시작부터 파국으로 치닫는다.
그러한 와중에, 조이의 정체인 우주적 존재 조부 투바키는 흥미를 가지고 에블린을 지켜보고 있었다.
집을 떠나와 남편 웨이먼드를 따라오는 '선택'을 한 에블린은 모든 멀티버스에서 가장 평범하고 가난한 삶을 사는 에블린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이라이트에 이르러 에블린은 조이, 웨이먼드, 그리고 멀티버스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따스하고 유쾌하게, 마치 구원과도 같은 위로와 격려를 전한다.
이효리 씨가 과거에 했던 선택에 '그땐 그런 이유가 있었겠지'라고 말하던 이상순 씨처럼.

웨이먼드를 만나 인생이 불행해졌다고 생각하던 에블린은 자기가 웨이먼드를 '선택'했던 이유를 찾아낸다.
그리고 다른 멀티버스에 있는 화려한 모습의 자신들보다,
웨이먼드와 조이가 있어 행복한 자신의 인생을 긍정한다.
그리고 온 멀티버스를 경유하며 만났던 주위의 인연들까지도 그들의 방식으로 응원을 전한다.
마지막에 내린 에블린의 결단은, 영화 내내 타인의 선택을 이해하지 못하고（혹은 이해하려 들지 않고） 선택이 가져온 결과만을 바라보며 서로 싸우던 모든 등장인물들의 행동과 정면으로 대척된다.
타인의 삶, 자신의 삶을 부정하고 허무에 빠져 있는 인물들에게 에블린은 다가간다.
설령 절벽에서 떨어지더라도, 나는 당신과 함께할 것이라고.

알빠노와 누칼협의 시대에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는 하나의 도덕 교과서와도 같은 영화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시종일관 빠른 템포의 편집과 마법 같은 각본으로 이 영화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도덕 교과서가 된다.
이 교과서는 이 시대에, 그리고 우리들의 삶에 적용되는 너무나도 낯간지럽고 뻔할 정도의 진리를 아름답게 환기해 준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는, 어떤 가능성을 선택하더라도 내 옆에 있는 당신이라서 좋다는 따뜻한 유대감과,
누군가의 입장에 서 보는 선의를 통해 그 사람의 삶을 이해하고 긍정하려는 태도가 제일 중요하다는 진리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