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영화로 리뷰를 진행해볼까 합니다. 이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좋은 영화이니 혹시라도 아직 못 봤다면 꼭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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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동의 영화는 지금도 그렇듯,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 신이 올라갈 때 그 밀려오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있습니다. 그런 힘을 가진 영화는 영화를 다시 보기 불편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그 여운이 가시지 않아서 영화를 다시 볼 힘이, 엄두가 남지 않기 때문이죠. 그래서 리뷰를 쓰는 것도 영화를 단 한 번만 본 상태에서 쓰고 있습니다.

저는 때로 기차나 고속버스를 타고 멀리 가며 창밖을 바라볼 때면 마치 인생이 스쳐 지나가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나의 인생도 이런 길이 있겠지, 성큼 앞으로 와버린 길에 어느 한적한 휴게소에 들릴 때가 있겠지. 현재 나의 삶이 힘들더라도 이렇게 달리는 차처럼 우직하게 가다 보면 도달할 수 있겠지.. 뭐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힘들 때면 이런 기억을 떠올리면서, 계속 나아가자 그런 다짐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반대로, 지나온 여정을 되돌아보는 기차를 타게 해 줍니다. '김영호'라는 인물이 달려온 길을 되감아 '나 다시 돌아갈래'를 외치던 김영호가 어느 시점으로 되돌아가고 싶어 하는지 보여주기 시작합니다. 1999년으로부터 20년 전까지의 이야기로 돌아가기 시작합니다.


'김영호'라는 인물은 참 복잡한 인물입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나사가 빠져버린 듯한 행동만 일삼던 인물의 이야기는 점점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라는 탄식을 자아내는 인물로 바뀝니다. 바로 김영호란 인물은 시대의 흐름 속에서 그 인간성을 잃어버린 인물이었고, 타락한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쭉 거슬러 올라가서, 챕터 5~7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합니다.

1984년의 그는 경찰이 되었지만 선배의 권유에 결국 고문기술자가 되며 자신 내면의 폭력성을 자각합니다. '순수해 보이는 손'을 가진 영호지만 그의 내면의 순수성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되어버린 듯합니다. 순임이 아닌 홍자를 택한 채 그렇게 살기로 결심한 듯합니다.

1980년 5월, 김영호는 이른바 '화려한 휴가'에 동원된 이등병이었고, 진압 과정에서 다리에 총상을 입고, 위협사격을 가하던 중 민간인 학생을 총으로 쏩니다. 그 순간 김영호는 절규하고, 내면의 무언가를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신체적인 상처와 정신적인 상처를 동시에 입은 것입니다. 이후 영호는 극심한 갈등을 겪을 때마다 PTSD처럼 다리를 절뚝거립니다.

1979년 가을날 영호는 순수한 청년입니다. 20살의 청년 영호는 첫사랑 순임과 행복한 말을 합니다. 그런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상해요, 여기 내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옛날에 한 번 와본 데 같아요."
이후 마치 99년의 영호가 자신의 인생의 주마등에 끝자락에 도달한 것처럼, 햇볕이 내리쬐는 바닥에 누워 어딘가를 바라보기 시작합니다. 순수한 그 시절의 영호가 아닌, 다른 사람처럼 눈가에 눈물을 머금고 그렇게 영화가 끝납니다.

영화를 보며 의미심장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일종의 편집점이자 이야기가 거슬러 올라간다는 것을 암시하는 기차가 지나가는 부분이 일직선으로만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누어진 선로가 있다는 점입니다.

저는 이 부분을 영화가 80년대 격변하는 시기 속 그저 희생된 인물 김영호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김영호 개인의 '선택'의 문제까지도 끌어오고 싶어 했다고 느꼈습니다. 영화가 내내 김영호란 인물을 동정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 않고 있다는 점도 그렇습니다.

분명 후반부 챕터로 진행될수록, 내면의 상처가 곪아 터지게 된 이유를 알게 되지만, 전반부 챕터의 김영호는 참 재수 없는 인물입니다. 내면의 인간성, 순수성을 잃어버리기 시작한 김영호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냉소적이고 광기 어린 인물이 되어버렸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그래서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집니다. 내면의 순수함을 잃어버린 존재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역사와, 그 속에서의 개인은 괴로움에 몸부림치다가 잔혹한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잘못을 반복해버리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는 그런 비극으로 느껴집니다. 60년생 김영호 씨는 사실 그 개인이 아니라 지금 그런 역사를 가지고 살아가는 인물들의 이야기입니다. 모두에게 잔인했던 5월, 그 누구의 탓도 할 수 없는 개인의 삶은 차라리 서럽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이창동 감독은 영화 마지막의 알 수 없는 표정의 김영호 씨에게 한 줄기 햇빛을 내리쬡니다. 마치 구원처럼, 위로처럼, 그리고 그 시절 희생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을. 한바탕 울고 나면 그때는 속이 시원해지는 것처럼 그런 복잡한 감정이 엔딩 속에 남아있습니다.


'박하사탕'은 개인의 삶에 초점을 맞추지만 결국 지금 살아가는 그 시절의 사람들에게 바치는 위로와 같습니다. 분명 김영호는 모순된 사회 속에서 희생된 존재이긴 하지만, 그 인물에 대해 일방적인 연민을 보내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인물을 변호해주지도 않습니다. 강요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보여주고만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속에서 반복하지 말아야 할 역사가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이야기하고, 또 개인의 책임은 어디까지일까 고민거리를 던지게 합니다.

최근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82년생 김지영이란 책이 떠오릅니다. 참 비겁한 소설일 수밖에 없습니다. 비슷하게 개인의 삶을 잃어버리고, 차별당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면서 참으로 교묘한 얼굴을 감추고 있습니다. 교언영색, 사회의 분열을 조장하고 여성을 그저 당하는 존재, 수동적인 존재로만 그립니다. 니들이 그렇게 만들었으니 '어쩔 수 없다'라는 식으로요. 비겁한 작품입니다.

인물을 단지 동정과 연민의 대상으로만 그리는 것은 독자나 관객으로 하여금 그 감정을 쉽게 끌어올릴 수 있는 편한 방법이긴 합니다. '7번 방의 선물' 도 이런 방식을 통해서 대박을 쳤죠. 하지만 좋은 방법인가란 고민을 던져보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그저 관객의 감정을 끌어올려서 장애인에 대한 일방적인 편견, 연민, 동정심만 부여하는 작품이 정직한 작품이라곤 생각하기 어렵기 때문이죠.

'박하사탕'은 삶이 아름답냐고 묻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작품입니다. 정의로운 사회라고 이야기하는 작품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인간 내면에 대한 깊은 탐구와 존경심이 내재되어있는 작품입니다. 비록 김영호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고, 현실에는 또 다른 김영호 씨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창동은 그들에게 햇빛을 통해, 그 위로의 한 마디를 건네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