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됐다. 하렌바라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밤을 보내기는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인지 긴장도 되고, 또 반대로 들뜨기도 한다. 내가 집이 아닌 다른 곳에서…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마을에서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 잠을 자게 되다니… 하하, 색다른 경험이야.

우린 이름 모를 숲 속에 있다. 세니 누나는 어떻게 해서든지 여관을 찾아서 편하게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했지만 이 근처에는 어떤 마을도 없다. 황량한 벌판의 연속이고, 가끔가다가 그렇게 울창하지는 않은 숲이 나올 뿐이다. 그렇다고 벌판에서 모닥불을 피우고 자자니, 그건 꺼림칙하다. 혹시 방금 전과 마찬가지로 지나가던 관병이나 산적이 들이닥치면? 우린 지금 치외 지역에 있다. 공권력이 닿지 않는 곳… 이제 장난은 통하지 않아. 최대한 안전한 곳을 골라 가야 한다.

세니 누나는 여전히 궁시렁 거리면서 마지못해 마법으로 모닥불을 피웠다. 저런 모습을 보고 있으니 마법사라는 직업은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인다. 그저 눈길 한 번 만으로 불씨를 낼 수 있다니. 이래서 마법사가 귀하다는 건가?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는 나무기둥에 걸터앉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앨런을 쳐다보니 지도를 보며 우리의 여정을 확인하고 있는 듯 했다. 할아버지는 아까 전 병사들과 마주친 이래로 아무런 말씀도 없으시다. 그저 조용히 모닥불 근처에 앉아 온기를 쐬며 검을 닦고 있었다. 아무런 문양도 없고 장식도 없고 단순한 검. 아마도 우리 마을에서 구하신 검인가 보다. 포스트도 역시 검을 닦고 있었다. 녀석의 검은 할아버지의 일반적인 검과는 달리 굉장히 길고 크다. 물론 저 정도의 덩치를 가지고 있는 놈이 저런 무지막지한 검을 휘두른다면 엄청나게 경악스럽다. 일단 소리부터 다르다. 나나 할아버지의 검은 휘둘러봤자 휙, 휙 거리는 소리만 날 뿐이지만 저 녀석 같은 경우는…

두우우웅

그래 저 소리. 아무래도 다 닦고 나서 식후 기분 전환 겸 휘두르는 것 같다.

오늘 저녁은 앨런이 만들어 온 팬케이크로 때웠다. 아니, ‘때운’ 게 아니라 나름대로 진수성찬이었다. 이런 야외에서 뭔가를 기념하려고 먹는 만찬과는 약간 거리가 멀지만 사뭇 다른 기분에서 먹으니 색달랐다. 더 감칠맛이 난다고 해야 하나…

“헉, 헉. 넌 검 안 닦냐?”

멀찌감치 서서 연신 상하좌우 베기, 찌르기를 반복하던 포스트가 숨을 헐떡이며 내게 물었다.

“닦을 필요 없어. 피를 묻힌 것도 아니고. 괜히 검만 상하게 할 뿐이야.”

“안 닦으면, 헉, 헉. 이제 여름인데. 습기 차지 않을까?”

“상관없어. 지금까지 따로 관리 한 적 없는 검이야.”

나는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답했다. 그러자 포스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연습을 하기 시작했다.

부웅. 부우우웅.

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요란하다. 마치 검이 일부러 바람 소리라도 내듯이… 그만큼 포스트의 검술은 과격하다 못 해 광적이다. 그저 힘으로 상대를 누르는 검술. 비록 내가 가르친 검술이긴 하지만, 나와는 정 반대의 길을 걷는 검술이다.

일부러 저 녀석에겐 저런 검술을 가지게 했다. 저렇게 근육질이 탄탄하고, 더 대성하면 오우거라도 따라잡을 녀석에게는 저런 것이 어울린다. 괜히 무비루스 같은 쾌검을 알려줬다가는 속도도 못 낼뿐더러, 특유의 힘도 못 쓰는 법이다. 이렇게 말하니 왠지 내가 선생님이 된 것 같네.

“하훔. 졸려. 나 먼저 잔다.”

“잠깐. 비번을 정해야지.”

“난 좀 제외해줘. 오늘 낮에 나 덕분에 별일 없었잖아.”

“그럴 순 없어. 그런 것 하나 하나 다 따지다간 다음에도 또 그러고 그 다음에도 또 그런단 말이야.”

“아이, 진짜. 나 너무 졸려. 먼저 잔다.”

“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그렇게 잘 수는 없지이이이이이이이!”

이렇게 여행을 떠나면서 앨런의 새로운 면모를 참 많이 본다. 앨런이 저렇게 장난을 쳤던가? 아니. 진지하고 언제나 침착한 앨런이 저렇게 아양을 떤다고 해야 하나… 아무튼 저렇게 가벼운 모습을 보이다니. 도대체 저 두 명. 그리고 아버지는 얼만큼 친했던 걸까.

“내가 비번을 서겠소.”

대답은 엉뚱한 곳에서 나왔다. 할아버지가 검을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검 손질도 다 했고…. 늙어서 잠도 없구려. 내가 하겠소.”

“하지만 어르신. 그런 건 정정당당히 정해야지…”

“아니, 아니. 내가 계속 비번을 선다는 게 아니라, 내가 처음을 하겠단 말일세. 그리고 계속 돌아가면서 하면 되는 거지.”

“정 그러시다면….”

앨런은 코끝을 찡그리며 앨런 누나를 쏘아보았고, 누나는 혀를 쏙 내밀며 침낭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참.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인데 저러는 걸까. 쯧쯧.

“그럼 어르신. 부탁드리겠습니다.”

“피곤했을 텐데 어서 자게.”

할아버지는 살짝 미소를 지으면서 돌아섰다. 그리고는 아까부터 짚고 계시던 검을 쥐어 들었다.

“포스트 군.”

거친 숨소리와 바람소리를 내며 연신 검을 휘두르고 있는 포스트에게 할아버지가 다가갔다. 무슨 일이지?

이미 침낭 속으로 들어가 나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누나를 제외하고 나와 앨런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할아버지를 주시했다. 할아버지가 부르는 소리에 포스트는 하던 것을 멈추고 가쁜 숨을 몰아쉬며 그를 쳐다보았다.

“하아, 하아. 예?”

“나와 겨뤄보겠나?”

“예, 예?”

“오랜만에 검을 들어서 그런지 영, 감이 안 잡힌다네. 자네가 도와준다면 굉장한 도움이 될 것 같은데….”

“헤엑, 헤엑. 하지만 전, 할아버지와는 상대가 안 될 걸요? 듣자니, 블랙 테일의 간부셨다면서요. 하아, 하아. 블랙 테일이 뭔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명한 군대였다면서요? 걸어가시는 폼이나 분위기, 자세 같은 것만 봐도 알 수 있어요.”

“하하. 내가 자네를 죽이기라도 하겠는가? 그저 연습 상대를 원하는 것뿐이란 말이야.”

“하아. 이제 좀 괜찮아졌네. 전 하랑 외에는 싸워보지 않아서… 괜찮으시겠어요?”

“그럼. 자네는 한 눈에 보아도 무골이야. 조금만 더 갈고 닦는다면 친위대에도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뛰어난 힘을 가지고 있네.”

“치, 친위대요?”

“그래. 황실의 속하 군대지.”

“지, 진담이세요?”

그러자 할아버지는 껄껄 웃으셨다.

“당연하지. 내 눈을 믿게나.”

음, 진심으로 하시는 소리일까. 뭐, 하긴 그렇긴 하다. 저 정도 몸집이면, 그 덩치만으로도 당당히 군대에 지원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건 내가 보증할 수도 있다. 그만큼 저 녀석은… 도대체 얼마만큼 운동을 했길래 저렇게 되는 거지?

“그럼 나와 한 번 겨뤄보지.”

“감사합니다!”

순진해서일까, 아니면 무식해서일까, 그도 아니면 착해서일까. 저런 칭찬 몇 마디에 그냥 넘어가버리는 포스트다. 할아버지가 의외로 사람 구슬리는 재주가 있으시네.

앨런은 재미있는 볼거리라도 생긴 것처럼 흥미로운 눈길로 둘을 바라보았고 나도 건포를 뜯어먹으며 그들을 지켜보았다.

“긴장하지 말게. 얼어붙어 버리면 제 실력이 안 나오니.”

“예, 옙!”

틀렸어. 저 녀석 항상 나하고만 싸워 보다가 다른 사람, 그것도 블랙 테일의 간부, 탈주병과 싸우게 되니 어깨에 엄청 힘이 들어가 버렸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검 끝이 올라가고 그렇게 되니 시선도 올라가서 상대의 하체를 보고 있지 않다. 내가 저 녀석에게 누차 말했지만, 그걸 이렇게 까먹어 버리냐! 강한 상대와 싸울 때는 검을 보기 보다는 하체를 주시하라고 했는데….

“먼저 공격하시게.”

“그럼, 먼저 가겠습니다!”

이미 몸이 풀려 있는 포스트라고는 하지만 상대는 블랙 테일의 간부였던 사람이다. 상당한 배테랑… 에이, 이게 뭐 목숨을 걸고 하는 싸움도 아니고. 포스트, 이렇게 싸워서 배우는 게 있겠지.

두 손으로 검을 바닥에 끌며 포스트가 치고 들어간다. 할아버지는 여유로운 자세를 취하며 검을 두 손으로 마주잡는다.

역시. 포스트는 할아버지의 바로 앞에 서는 순간, 반동을 이용해 검을 아래에서 위로 쏘아 올렸다. 저렇게 바닥에 검을 끌고 가면… 할아버지가 예상하는 게 당연하잖… 설마!

“하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