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좀 떠라, 이 멍청이들아!"

소년이 김씨를 처음 본 날은 동장군이 휘두르는 칼날이 코트를 관통하는, 말 그대로 '바람이 뼛속을 파고드는' 아주 추운 겨울날이었다.

얇은 셔츠 한 장, 그 위에 두꺼운 맨투맨 티셔츠를 걸치고, 조끼에 코트까지 걸치고 나서야 간신히 외출이 가능하던, 그리고 나서도 외출을 후회할 정도로 추웠던 겨울날.

지구 온난화가 거짓이라는, 개잡소리 같은 음모론마저 가능성 있게 느껴지는 그런 겨울날. 반팔 티셔츠 한 장과 '18'이 새겨진 축구 반바지만을 입고 밤거리를 전광석화처럼 질주하는 남자를 기억하지 못할 사람은 아마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 남자가 양 어깨에 건장한 사내 둘을 짊어지고 있다면야 더더욱.

짧은 순간이었지만, 소년의 눈에는 그 남자의 모습이 생생하게 각인됐다. 기괴한 옷차림 때문에? 적어도 70kg은 될 남자 둘을 두 명이나 짊어지고도 빠르게 달리는 엄청난 체력 때문에? 아니면 끊임없이 소리치는 남자의 목소리에서 묻어 나오는 다급함 때문에? 혹시 얼굴에 가득한 수염 때문에?

그와의 만남 직전까지, 소년은 무료한 일상의 회전목마 속에서 천천히 죽어가고 있었다. 물론 육체의 죽음은 아니었다. 규칙적인 생활습관과 균형 잡힌 식단으로 소년의 몸은 더할 나위 없이 건강했으나, '인간'이라는 종이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그 무언가'가 소년의 세계에서는 지워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김씨와의 만남에서-정확히 말하면 '김씨를 발견하면서'-소년은 어렴풋이 알아챘다. 알아챘다고 하기도 뭐했다. 그냥 원래 알고 있었던 것처럼 그 사실을 받아들였다. '저 사람이 필요하다'라는 간단한 사실을.

하지만 그것을 알아차리고 행동에 옮기려 했을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남자는 이미 시선에서 지워졌고, 흘긋 뒤를 바라보는 사람들과 바닥에 흩뿌려져 있는 핏자국만이 '무언가 지나갔다'라는 것을 보여줄 뿐.

따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약속 시간에 늦었다. 춥다. 내 속도로는 따라갈 수 없다.

여러 과정의 합리화를 통하여, 소년은 사내가 멀어진 곳을 등졌다. 수동적으로 살아온 17년의 세월이, 부모님의 압박이, 두려움이 감정을 무뎌지게 만들었다. 자신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잘 알면서도 그것을 가져오지 못했다. 해서 소년은 필요를 등졌던 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 뒤로 소년은 남자를 다시 보지 못했다. 추운 겨울날 반팔과 반바지만을 걸치고 외출해보기도 하고, 미친 듯이 달려도 보고, 어느 휴일 날은 저녁부터 그 다음날 저녁까지 그 거리를 지켜보기도 했지만 남자는 나타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만나고 싶었다. 대체 왜 자신에게 그 남자가 필요한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 남자라면 흔쾌히 답을 내려줄 수 있을 것 같았다. 조금만 가만히 있어도 바스라져 내릴 것 같은 지독한 무료함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열쇠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았다.

타는 듯한 갈증을 바닷물로 축이듯, 소년은 잠시라도 그 남자를 잊기 위해 무엇이든 하기 시작했다. 성적은 순식간에 전교 상위권으로 껑충 뛰어올랐고, 운동부에서 끊임없이 영입제의가 들어왔다. 인기도 많아지고, 어쩌다 보니 전교 회장까지 되어버렸다. 다재다능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고, 처음엔 질투였던 시선이 대신 경외로 바뀌고, 선생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학생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소년은 전혀 기쁘지 않았다. 항상 웃고 있었지만 전혀, 쌀 한 톨만큼도 기쁘지가 않았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바라 마지않던 부모님의 인정까지 받아냈건만 정말로 기쁘지가 않았다.

'그 남자가 가진 무언가'에 대한 타는 듯한 열망. 차라리 처음부터 몰랐으면 좋았겠다고 생각할 만큼, 그러면서도 '만일 그랬다면?'하는 생각에는 몸서리가 쳐지는,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되는 갈망.
그리고 소년이 매일 밤, 하늘에 울며 빌던 그 소원은, 그가 전혀 상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후우…….”

소년은 하늘을 쳐다봤다. 빛나는 것이라고는 달무리가 진 달 밖에 없는 어두운 보랏빛 밤하늘. 소년이 내뿜은 입김이 허무하게 허공에서 스러졌다. 소년은 흩어지는 입김을 따라 별을 찾아보았으나, 구름 가득한 하늘은 소년에게 별을 허락해주지 않았다.

밤하늘에서 눈을 뗀 소년은 당연하다는 듯 주머니에서 단어장을 꺼내, 희미한 가로등 불빛에 의지하며 단어를 외우기 시작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멍하니 있다 보면 옛날의 그 장면이 계속해서 생각났기 때문에 소년이 가지게 된 버릇, 아니 자기기만.

‘쉬지 않고 항상 무언가를 하는 것.’

수업 시간에는 모든 힘을 다해 수업에 집중했다. 쉬는 시간에도 항상 자투리 공부를 하거나 아이들과 시끄러운 대화를 했다. 밥 먹을 때도, 화장실에 있을 때도, 하교할 때도, 심지어는 자기 직전 까지도 소년은 ‘무언가를 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외우고, 떠들고, 계산하고, 살펴보고, 해석하고, 가르치고, 배우고, 질문하고, 이해하고, 고민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그때 그 장면을 잊어버리기 위해, 떨쳐버리기 위해 생각을 멈추지 않았지만, 그 장면은 이미 일 년이나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잊혀지기는 커녕 머릿속에 뿌리를 내리고 소년의 빈틈을 먹어 치우며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고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추위 때문인지 사람도 몇 없던 밤거리. 하얀 반팔 티셔츠와 ‘18’이 선명하게 새겨진 축구 반바지. 그의 어깨에 걸쳐져 있던 두 명의 건장한 사내, 그리고 그들에게 다급하게 소리치는 남자, 핏자국…….

철렁, 하는 느낌과 함께 소년은 걷던 발걸음을 멈춰 섰다.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에 옛 기억에 다시 빨려 들어갈 뻔한 것이다.

소년은 외우고 있던 단어장을 주머니에 넣고는, 차갑게 식은 오른손을 이마에 가져다 댔다.

선득한 느낌이 이마를 타고 온몸을 가득 채운다.

차가움으로 열망을 식히려는 듯 손의 차가움을 느끼던 소년은 어디선가 느껴지는 기묘한 시선에 이마에서 손을 떼고 주위를 휘 둘러보았다.

소년은 얼마 가지 않아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어디서 나온 것인지 알아챘다. 누군가 자신을 감시하거나, 미행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무심코 멈춰선 곳이, 거지가 구걸하던 벤치 바로 옆이었을 뿐이었다.

당연하게도, 시선은 거지의 것이었다.

“젠장.”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읊조린 소년은 주머니에 손을 넣어 지갑을 꺼냈다. 원래 거지에게 돈을 주는 인성을 가지고 있진 않았지만, 거지 앞에 멈춰 선 이상, 그리고 거지가 기대에 가득 찬 눈길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이상 무언가를 해야 마땅했다.

‘하필 이럴 때 동전이 없네.’

소년은 지갑의 동전 주머니를 파내듯 뒤졌다. 이윽고 소년의 손가락 끝에 차가운 동전이 하나 만져졌고, 소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동전을 꺼내들었다.

“좀 더 쓰지, 꼬마?” 거지는 불만이라는 투로 내뱉었고,

“네.” 소년은 동전을 집어넣고 대신 지폐를 건넸으며,

“고맙다. 굿밤.” 거지는 합당한 감사를 표했고,

“어?” 소년은 의문을 표했다.
소년이 무언가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거지는 바스락 소리가 나는 무언가를 자신의 품속에 집어넣으며 돌아누웠다. 얻을 건 얻었으니 이제 관심 없다는 투였다.

소년이 자신의 지갑에서 만 원이 사라진 것을 깨달은 것은 아주 잠시 뒤였다. 거지에게 주려던 동전이 그대로인 것을 알아챈 것이다.

“아니, 잠깐만요? 아저씨?”

“어우, 누가 이 야밤에 이렇게 떠들어, 예의 없게…….”

소년은 지금 이 상황이 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겠고, 정확히 말해서 ‘뭔가 일어났다’는 것조차 이해가 가지 않았다. 마치 기억에서 지워진 듯, 건넨 기억도 없는 만원이 거지의 품안에 들어가 버린 것이다.

“아저씨, 아저씨!”

“신이 우리들에게 절망을 보내는 것은 우리들을 죽이려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가운데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예? 뭐라고요? 아저씨, 잠깐 좀 일어나 봐요!”

소년은 거지를 붙잡고 흔들었다. 하지만 거지는 마치 바위처럼, 소년의 손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근히 운동에도 조예가 있던 소년으로서는 충격적인 결과였다.
아무리 힘을 줘 봐도, 발로 밀어도, 끌어도, 당겨도, 거지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아니, 무슨 사람이 이렇게 무거워……!”
소년은 말을 씹어뱉으며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팔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것은 결국 거지의 목소리뿐이었다.

“뭐가 이렇게 무거워, 응? 제발, 좀!”

이가 갈리고 팔이 뻐근하게 당겨왔다. 입김이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였지만 소년은 이미 날씨 따위는 까맣게 잊은 뒤였다. 열이 돌기 시작했는지 손부채질을 몇 번 하던 소년은 이를 악물더니 최후의 방법을 사용했다.

“이래도 안 일어나나 보자, 사이클론 킥!”

소년의 발이 거지의 몸에 정통으로 꽂혔다. 완벽하게 계산된 입사각, 타격점, 무게 분배. 여타 다른 사람이었다면 맞는 순간 비명을 내질렀겠지만, 소년이 간과한 것이 딱 하나 있었다.

“강한 신념에 의해서 강한 인간이 태어난다. 그리고 그것은 한층 더 인간을 강하게 한다.”

바로 상대가 영 좋지 않았다는 것.

“아아악! 내 발!” 소년의 외침이 허공에 산산이 흩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