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요, 그 자식이 오늘 밥을 먹는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퉁명스러운 여자의 음성을 그는 침대에 누워 웃으며 듣고 있었다. 그는 지루하면 방 안의 초침이 가는 소릴 들으며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내는데 전화를 하고 나서부터는 그런 시간이 많이 줄어들었다. 맞장구를 쳐주기도 했다. 그녀가 늘 얘기거리로 내미는 것은 권태기가 온 남자친구 얘기였다. 듣다 보면 그녀가 잘 못 한 것도 있는 것 같은데 그는 묵묵히 들어주었다.

사실 3주 전만 해도 그와 그녀는 서로 이 세상에 있는 지도 몰랐던 남이었다. 그 당시에 그는 구직이 잘 안 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우울증까지 가지고 있었다. 살을 에는 바람은 그에게 어딘가로 가라고 손짓을 했는데 그 곳은 집 근처의 강이었다. 수심이 깊지는 않지만 길이는 어디에서 끊어지는지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었다. 그는 강에 들어갔다. 발목까지 물이 차오를 뿐이었다.

'떠내려갈까.'

그냥 강에 누워 힘을 풀어버리고 싶었다.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 싶었다. 아, 이게 현실도피구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늘을 올려다 보니 때는 노을이 질 때라 주황빛을 띄고 있었고 새가 한 쌍 울면서 지나갔는데 그는 그것이 자신을 비웃는 거라 생각해서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게 자신의 발목이 얼어붙을 것 같은 감각을 외면하고 멍안히 현실도피에 취해있을 때였다.

"이봐요!"

뒤돌아 보니 정장을 입은 그녀가 그가 있는 곳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그는 뭐가 찔리는지 그녀가 다가올수록 뒷걸음질쳤다.

"추운데 왜 이러고 있어요. 여긴 자살도 안 된다구요."

"아, 저기..."

"됐구요. 그 쪽도 기분 안 좋아 보이는데 술 한 잔 어때요?"

처음 보는 남자에게 술을 권하다니, 당돌한 여자였다. 거절하려 하는데 생각해보니 요근래 술이란게 속으로 들어간 적이 없었다. 그는 말했다.

"가죠."

근처 포장마차에 들어가 술이 서로 몇 잔이 들어가니 그녀 먼저 속풀이를 시작했다. 그와 똑같은 처지였다. 구직이 잘 안 되고 있었고 이번에 본 면접도 느낌이 좋지 않다며 떨어질 게 분명할 거라 말했다. 남자친구도 요즘 그녀의 마음을 이해해주지 못 한다 그랬다. 처지는 비슷했지만 외롭지는 않았다. 그는 어디에서 용기가 나왔는지 입을 열었다.

"번호 줘봐요, 그 쪽 얘기 지금 말고도 언제든지 들어 줄테니."

그녀는 당황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이내 미소 짓고는 폰을 내밀었다. 효주라는 이름을 가진 그녀는 다음 날에도 그를 기억하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술로 인한 하룻밤의 환상이 아니었다. 서로에게 힘내라고 의미심장하게 얘기를 할 때도 있었다. 그는 여태껏 느껴보지 못한 것이 가슴 속에서 피어나는 걸 알아냈다. 통화를 할 때마다 초침 소리가 그에게 무의미해져갔다.

때는 지나 겨우 잡은 어느 작은 회사의 면접이 끝날 때였다. 평소라면 전화가 올 때가 아닌데 전화를 한 그녀는 아무 말도 않고 울기만 했다. 그는 발걸음을 바삐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좌절했다. 한 마디를 꺼내기가 어찌나 힘들던지. 10분 간 더 울음소릴 듣고야 겨우 말을 꺼냈다.

"어디에요? 갈 게요."

살을 에는 바람이 그의 정면에서 불어 왔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