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평은 흩날리는 머리털을 가까스로 가지런히 진정시키며 김대중에게 인사했다.

" 그럼, 가겠습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탐탁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차에 타려는 김평을 잠자코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 어찌 그리도 소극적이십니까."

그러나 김평은 그런 자극적인 말에 그리 신경쓰지 않았다. 그가 매일 들어왔던 말이고, 또 자신도 그것은 인정하고 있으니까.

" 저는 할 만큼 했습니다. 서울 구경 잘 하고 갑니다. 세월이 많이 흘렀군요."

" 선생..."

" 혹여 반평단이라는 것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김대중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자 김평은 씨익 웃었다.

" 제가 아는 민주화단체입니다. 아마 큰 도움을 드릴 것입니다. 한 번 알아보시지요."

" 지금 서울에 있습니까?"

김평은 고개를 끄덕였다.

" 예. 어딘가에 숨어서 반정부 집회를 준비 중일 것입니다."

" 선생."

김평은 김대중의 눈빛의 의미를 알았고 따라서 그는 고개를 무겁게 저었다. 그러나 김대중은 물러서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김평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김대중의 눈길을 외면하지 않았고 오히려 당당하게 그 눈빛을 받아내었다. 이윽고 김대중은 김평의 확고한 결심을 인정 할 수 밖에 없었고,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 김대중 선생. 저는 그저 힘 없는 소국민일 뿐입니다. 제게 너무 큰 것을 바라지 마시지요."

" 하지만..."

" 선생. 사필귀정（事必歸正）이라 했습니다. 이제 유신체제가 거의 붕괴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각지에서는 데모가 일어나고 이 나라의 경제는 말이 아닙니다. 이래가지고선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을 것입니다."

" 이럴 때에... 선생께서 지하에 숨어 계시겠다, 그것 아닙니까?"

김대중은 마지막으로 김평을 자극해 보았다. 그러나 김평의 반응은 관조적이었다.

" 예. 그런거죠."

혀를 내두른 김대중은 그제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 알겠습니다. 이해하도록 하지요."

김평은 차에 탔다.




미리내는 당황 속에서 시열을 바라보았으나 시열은 그녀를 돌아보지 않았다. 시열은 온 정신을 한 가운데에 집중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는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 따위는 없었다.

미리내는 시열이 조준하고 있는 목표점을 찾았고, 그 목표점이 '김대중'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것을 깨닫자 다시 한 번 놀랐다.

그녀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는 시열의 등을 향해 말했다.

" 저, 저기. 양시열씨?"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미리내는 미간을 잔뜩 찌푸린 뒤에 다시 한 번 소리내었다.

" 양─시─열─씨─!"

갑자기 시열의 신형이 움찔했다. 미리내는 약간은 먹혔다고 생각하고선 다시 한 번 소리쳤다.

" 그─만─둬─요─!"

" 안됩니다."

" 예... 에?"

그녀는 이제는 두 손을 양 뺨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시열은 그녀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고 미리내는 그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지에 대해서 심각한 고민에 빠져들려고 하고 있었다.

" 내가 원하는데도?"

엉겁결에 뱉은 말에 미리내는 스스로 놀랬다. 그녀가 알기로 자신의 성격은 이렇지 않았다. 하지만... 사태가 사태인 만큼 농도 짙은 극언을 시열에게 뱉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시열의 손이 떨렸다. 저격수에게 생명인 침착성이 흔들렸다는 증거다. 단 한 방을 노려야 하는 저격수에게 있어서 정신집중은 필수였고, 만약 산만해질 시에는 저격을 안 하는 만 못 하다.

그래서 그는 총을 거두었다.

" 후우... 후우..."

난간에 기대서 심호흡을 하는 시열을 바라보며 미리내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이제 조금만 더 잘만 한다면 완전히 거두게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봐요. 그만 두세요. 민주화의 태양을 쏠려고 하시나요?"

" 민주화의 태양이라고요?"

" 그래요. 그가 없었으면 지금쯤 완전한 독재가 이루어졌을걸요. 그나마 이만큼이라도 된 것이 다 김대중 선생의 덕택이죠."

시열은 실소를 터뜨렸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지은 뒤에 다시 총을 꽉 잡았다.

" 스승님께서 말씀하셨죠."

시열은 안전핀을 풀었다.

" 불꽃이 되어야 할 이는 그 어떤 것에도 굴복하지 않고 자신을 태우며 나아가 모든 것을 태워야 한다고. 그리고 마침내 남는 것이 재 뿐일지라도, 붗꽃이 살아있는 한, 사람들에게 빛을 줘야 한다고."

미리내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열은 그녀의 눈길쯤은 이미 무시하고 있었다. 그에겐 더 중요한 일이 있기에.

" 그런데 제 눈에 저 사람은 불꽃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모자란 점이 많군요. 저건 그저 사람이 만들어낸 인위적인 빛일 뿐. 그저 빛을 낼 뿐이지 태우진 않아. 불꽃... 진보란 자신을 태워야돼."

시열은 다시 김대중을 조준했다. 그리고 낮게 중얼거렸다.

" 그리고 나 또한 불꽃이기에, 김대중을 죽임으로써 전국의 학생과 불꽃들을 일으킨다. 나 하나를 죽임으로써, 주위에 있는 모든 불씨들을 일으킨다."

미리내는 다시 한 번 하얗게 질렸다.

" 인위적인 불 따위는 새장 속에 갇힌 새의 눈을 현혹시킬 뿐이야."

시열이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종근은 막 걸려온 전화 내용을 받아들여 궁정동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