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cion - 162 : 가면무도회 （Un Ballo In Maschera） （22） - 생사의 기로에서....




조금씩.... 내게로 다가온다.

조금씩.... 내게로....

조금씩.... 내게서....

조금씩.... 내게서 멀어진다....

희다. 온세상이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하늘과 바다, 산과 들까지 모두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실상
그런 것을 따질 수도 없을만큼 하얗게 물들어 있다. 눈은 아니었다. 눈이라면 차가워야겠지만 그것
은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리고, 빛이었다.

[따뜻해....]

일리오스는 자신의 몸이 환한 빛에 둘러쌓인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느
낌이 너무좋아 아무생각도 들지않았다.

[향기....?]

코끝으로 향기가 전해져온다. 봄날 붉게 피어나는 사르비아의 달콤한 내음이다. 어디선가 맡아본적
있는 향기.... 익숙하면서도 왠지 익숙하지 않은것이었다.

『깨어났네....』

다정한 목소리.... 일리오스는 단번에 그 목소리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반가움을 못이기고 소리친
다.

[너야?]

『응....』

마치 유령처럼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처음 나타났을때는 어둠뿐이라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두 번째 나타났을때는 자세한 모습을 볼 수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모습이 기억나지 않았고, 지금은
밝은 빛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나와 함께하지 않을래?』

빛속에서 무언가 사람의 형체같은 것이 만들어졌다. 하지만 자세한 모습을 나타나지 않았다. 단지
빛의 인간일 뿐이었다. 그 빛의인간이 손을 내민다. 일리오스는 주저하지 않고 그손을 잡았다.

[오랫동안 기다렸어.... 널 만나는 순간을....]

실제로는 몇 달뿐이었지만 일리오스의 마음속에서는 수십년이 흐른 것 같았다. 그사람없이 살아온
시간은 그사람과 함께했었던 시간보다 느리고, 지루하게 움직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일리오스는 그사
람과 함께했던 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느껴져?』

[응?]

『내가 느껴지나구....』

갑작스런 질문에 당황하는 일리오스 였으나 곧 그 질문의 의미를 간파할 수 있었다. 느껴지냐니?
이렇게 따뜻하고, 포근하고.... 어?

[안 느껴져....]

분명 따뜻하고 포근했지만 그것은 그사람의 감촉이 아니었다. 그냥 그가 서있는 그 공간의 느낌인
것이었다.

『나도야.... 느껴지지 않아. 널 보고싶은데 보이지도 않고....』

그사람은 무척이나 슬픈 것 같았다. 일리오스는 그사람을 감싸주었다.

[너와 함께있다면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지 않아도 행복해....]

그사람이 움찔거린다고 생각되었다. 빛이 파장을 일으키며 떨렸기 때문이다. 설령 느끼지 못한다
하더라도 자신의 말에 반응하는 모습을 보이니 기뻤다.

『넌 매번 마음에 없는 소리만 골라하는 것같아....』

이번에는 일리오스의 몸이 움찔거렸다. 정곡을 찔린것이다. 왠지 그는 항상 그래왔던 것같다. 정말
솔직한 것이 아니면 대부분이....

[아,아니야.... 정말 행복하단 말이야.]

『거짓말 하지마. 다 보이니까.』

[다 보인다고?]

『그래, 네가 거짓말을 하면 네 가슴속에 검은빛이 생겨나거든. 전부 보여....』

일리오스는 그 말을듣고는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그사람의 말대로 정말로 검은빛이 자리잡
고 있었다. 아무래도 이 공간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 같았다.

[솔직히 말해서.... 슬퍼.... 널 만져도 느껴지지 않고, 네모습이 자세히 보이지도 않고....]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네....』

[야! 아무리 내가 바보라도 들통날 거짓말은 안한다.]

『핏, 여지것은 잘도 해왔으면서』

왠지 꼬집어주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아무 느낌도 없기에 그저 빈 허공만 만질뿐이었다.

[아니라니까! 내가 언제 거짓말을 했다고 그래!]

『넌 거짓말쟁이야....』

빛의 인간이 말하고 있었다. 왠지 슬퍼보였다.

『넌.... 나와 함께하지 않았어. 나는 외롭고.... 널 그리워했지만 넌 아직도 내옆에 없잖아. 나 힘들
어.... 널 보고싶고, 널 만지고싶고.... 이젠 네 느낌을 거의다 잃어버렸어. 나.... 널 사랑했다는 사실
까지 잊어버릴 것 같아.... 두려워.... 네가 없어서 흔들리는 내가 두려워.... 네가 날 떠나기전에 내가
널 떠나버릴것만 같아서 두려워....』

일리오스는 하늘이 무너지는 충격이라는걸 제대로 맛보았다.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워지고, 힘
이없다. 하지만 그는 빛의 인간을 놓치지 않기위해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바보야! 몸이 멀어진다고 마음까지 멀어지면 어쩌냔 말이야!]

빛의 인간은 떨고있었다. 그보다 더 떨리는건 일리오스였지만....

『아니야.... 아니란말이야.... 난 널 사랑하고.... 보고싶고.... 그립단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네가
보이지 않아. 내곁에 없어서....』

[그래서 날 잊겠다고? 난 너 때문에 죽을만큼 아파도, 죽을만큼 상처입어도 살아남았는데 넌 단지
내가 옆에 없다는 이유로 날 버리겠다는거야?]

『아니야! 난 널 버리지않아.』

공간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이 차가워 지고있었다. 아무래도 이공간은 빛의 인간의
마음속 같았다.

[버리지 않는다고? 그럼 여지것 해온말은 무엇인데? 날 잊겠다며.... 나도 한가지 사실을 말해줄까?
난 네가 기억나지 않아. 네 모습도, 네 이름도, 정확히 네가 내게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지. 그
리고, 너와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아. 그냥 짐작할 뿐이야. 너와 내가 결혼할뻔
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지금내가 널 만나지못해 차마죽지도 못할만큼 사랑했다는 것을말이야.
그런데.... 그런데 넌....]

그는 흐느끼고 있었다. 가슴이 아파서.... 너무아파서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제아무리 심한 상처라
도 그를 아프게하지 못했지만 그사람의 한마디 한마디는 그의 심장을 멎게할만큼 아팠다.

『미안해.... 이게 아닌데.... 내가 하고 싶은말은 이게 아닌데.... 보고싶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일리오스는 볼 수 있었다. 그사람의 가슴속에 피어오르는 검은것을. 온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 그
것을 절망이라 부르는 것 같았다. 일리오스는 그사람을 끌어안고 있는 손을 놓았다. 그리고 차갑게
말했다.

[넌 거짓말을 하고있어....]

『아니야!』

[다보여!]

빛의인간이 깜짝놀라 검은 것을 가린다. 하지만 그것은 가려지지 않는다.

『아니야.... 아니란 말이야. 난.... 난 다른사람을 사랑하지 않아.... 난.... 널 잊으려하지 않는단 말
이야....』

일리오스는 점점 작아지는 검은빛을 볼 수 있었다. 온몸이 무너지는 느낌.... 그사람이 나를 잊고있
다는 사실. 그리고 다른사람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

[너....]

차마 말을 잊지 못했다. 빛의 인간이 일리오스에게 다가온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란말이야.... 정말.... 미안해....』

일리오스는 그 빛의 인간을 감싸안았다. 그리고 절규하듯 말했다.

[미안해.... 다 내잘못이야. 널 찾았어야 했는데.... 그래서 네가 외롭지 않게 했어야 했는데.... 미안
해.... 다 내잘못이야.... 하지만.... 하지만 네가 날 떠나게하는건 허락할 수 없어. 설령 네가 날 놓는
다고해도 난 널 놓지 않을꺼야.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주겠니? 조금만.... 조금만 기다려준다
면 내가 널찾아갈꺼야. 네가 어디에있든간에 하늘꼭대기에 있어도.... 지옥 밑바닥에 있어도 널 찾아
갈꺼야. 이세상 끝까지.... 그러니까 나를 믿고 조금만더.... 조금만더.... 제발....]

『난.... 미안해.... 잘못했어.... 네가 너무 오랫동안 보이지 않아서.... 그래서.... 버림받았다고 착각
한것같아.... 미안해.... 널 잊지 않을꺼야. 널 지우려 애쓰지도 않을꺼야. 네가 보고싶으면 그리워하
고, 너 때문에 울더라도 난 널 기다릴꺼야. 나도 네가 기억나지는 않지만.... 너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사랑하니까.... 내 영혼은 널 기억하니까.... 그래.... 그때까지만.... 널 기다릴꺼야. 미안
해.... 널 아프게해서.... 내잘못이야. 다신 안그럴께....』

일리오스는 그사람이 울고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왠지 기억이 나는 것같기도했다. 조금 울보였
던 그사람.... 울지말라고해도 항상 자신 때문에 울곤했던 그사람....

[울지마.... 네 눈물.... 내가 가장 싫어하는 거잖아....]

빛이 파동친다. 일리오스는 다시 주변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응....』

[너 맨날 나 때문에 울다가 눈 팅팅 붓는거 아닌가 모르겠다. 안그래도 작은데 부으면 안보일꺼 아
니야.]

일리오스는 장난스레 말하며 눈가라 생각되는 부분을 손으로 매만졌다.

『이게정말! 아니라니까! 내눈이 어디가 작다고 그러는거야! 그러는 넌!』

소리치는 그 모습.... 보이진 않지만 귀여웠다.

[내가뭘? 후훗.... 옛날이야 분명 흠잡을곳이 많았다지만 지금은 내가 너보다 예쁠껄?]

『웃겨정말.... 왕자병 말기증세구만. 처음부터 정신교육을 다시 시켜줄까?』

[흥! 시켜봐라. 여기선 때려도 안아프다. 메롱....]

『아으.... 열받어. 너! 나 빨리 찾아라. 늦게찾으면 내가 너 찾아간다. 내가 널 찾는날엔.... 그날이
네 제삿날인줄 알아!』

[그러시던가요. 룰루....]

안맞는다는 사실에 너무 용감해져버린 일리오스. 훗날 정말 만나면 어쩌려는지 너무 배짱플레이를
하고있었다.

『너 이자식! 만나기만해봐! 아주 그 말버릇부터 싹 뜯어고칠꺼야!』

[마음대로 하세요.... 랄랄라, 랄랄라, 랄라라랄라랄랄라....]

『너 정말.... 계속 이러기야!』

[왜? 삐졌어?]

『몰라! 너랑 말도안할꺼야. 너 나 찾아오지마!』

[미안해에.... 내가 잘못했어. 한번만 봐주면 안될까? 응?]

그 사람이 화내는 모습을 보이자 다시 한수 접어주는 일리오스. 왠지 이런 분위기가 익숙하다는 생
각이 든다.

『저리가! 맨날 이런식이야. 자기 할말은 다해놓고 미안하다고하면 나보고 어쩌란 말이야!』

[아앙.... 잘못했어. 한번만 봐주라. 다신 안그럴께.]

『애교떨지마 쏠려!』

[흑.... 쏠린다니.... 나름대로 사과하는 거란말이야!]

왠지 기억이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그의 태도가 이렇게 된 이유가 생각나는 것같았다. 처음 그사
람은 자신에게 관심이 없었고, 그는 그래서 짓궂게 괴롭히거나 가시돋힌 말만했던 것 같다. 미운정
이라도 들게하려고 마음에도 없는말을 내던진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오랜시간이 흐르고 지금은 그
것이 아예 습관으로 굳어져 버렸다.

[흑.... 엄마....]

『울지말란 말이야! 남자가 그게뭐냐?』

[몰라.... 니가 나 막 싫다고 하니까 슬퍼....]

『아 진짜.... 왜 안어울리게 애교 떠냐구!』

일리오스가 갑자기 빛의 인간을 끌어안았다.

[니가 좋으니까....]

『너 진짜싫어. 맨날 장난만치고....』

[니가 싫어도 난 좋다니까....]

『몰라.... 으음....』

입을맞춘다 생각했다. 진짜 사람이라면 입술이 있어야 할부분. 일리오스는 그곳에 자신의 입술을
맞추었다. 따뜻했다. 그사람의 감촉이 느껴지는 듯했다. 일리오스는 행여 움직이기라도 하면 그 느
낌을 잊어버릴까봐 숨조차 쉬지못하고 있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생생하게 남아있는 감촉에 온몸이 붕뜨는 느낌을 맛보는 일리오스. 빛의 인간에
게로 안긴다. 약간 푹신하고, 따뜻한 느낌.... 원래라면 가슴이 있어야할 자리였기에 그런느낌이 나는
것 같았다.

[따뜻해....]

『근데 왜 조물락거려!』

[따뜻해.... 좋아....]

『아씨.... 간지럽잖아.』

[가만있어봐. 여기 정말 따뜻해....]

『너 진자 변태같어.... 그만만지란 말이야....』

[으음....]

『간지럽단 말이야.... 으으....』

일리오스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느낌에 잠이들것만 같았다. 왠지 자꾸만 느낌이 느껴지는 것 같았
다. 엄마품에 안긴 아이처럼 그사람을 느껴본다. 그사람이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을 느낄 수 있
었다. 양털속에 빠진것처럼 포근했다. 그사람의 가슴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온다.

『조금있으면 헤어져야해....』

[싫어.]

정말 싫었다. 얼마만에 맛보는 행복인가. 헤어진다니.... 이대로 영원히 그사람과 함께하고 싶었다.

『나도 너랑 함께하고 싶지만 이대로 계속있으면 넌 죽어....』

[죽어도 너랑 영원히 잊고싶어.]

정말 그러고 싶었다. 이대로라면 그냥 죽어도 상관없었다.

『바보야! 난 살아있단 말이야. 이렇게.... 널 만나고 있지만 난 살아있어! 네가 죽어버리면.... 그러
면 날 만나러 오지 못할거잖아.』

일리오스의 온몸이 떨린다. 그사람이 살아있다. 단순히 짐작이었던 것이 확실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면 가장 믿지못할 말이기도했지만 일리오스는 그사람이 하는말이라면 일체의 사심없이 받아들
였다. 게다가 지금은 검은빛도 생기지 않았다.

[그럼.... 여기서 헤어져야 하는거야?]

『그래.... 만나기 위해서. 진짜로 너와 내가 만나기 위해서 잠시동안 헤어지는거야.』

[싫어.... 너랑 함께하고 싶은데.... 조금만. 조금만더 같이있자]

일리오스는 그사람이 멀어지는 느낌에 가슴이 찢어지는 걸 느끼고 있었다. 빛의 인간은 그를 놓고
하늘이라 생각되는 곳으로 천천히 날아올랐다. 붙잡으려 했지만 이상하게 몸이 말을듣지 않는다.

[가지마.... 조금만.... 조금만더....]

『안녕.... 우리.... 꼭 만나자....』

[가지마.... 안돼....]

“가지마!”

정적....

“헉.... 헉.... 헉....”

거친숨을 몰아쉬던 일리오스는 자신을 바라보는 한쌍의 놀란 눈동자를 발견할 수 있었다.




“휴우....”

하나에는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을 손등으로 훔쳐내었다. 장장 일곱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거
친후에야 바닥에 쓰러진 일행들을 치료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마차가 부서지는 순간 정신을 잃었던
하나에가 정신을 차린후 가장먼저 발견한 것은 피투성이가되어 쓰러진 일행들이었다. 부서진 판자조
각으로 대충 바닥을 만든후에 그위로 상처입은 세사람을 올려놓은건 하나에 스스로 생각해도 기적
에 가까웠다.

히노는 갈비뼈가 4개나 부러져 있었다. 아주 부서지지는 않아서 건들지만 않으면 저절로 아물 수
있었다. 그나마 셋중에서는 가장 약한 상처였다. 롤은 가슴한 가운데가 쩌억 갈라져 있었다. 피가 내
를 이루듯 흥건히 고여있었고, 기식이 엄엄한 상태였다. 그나마 이렇게 살아있는것도 스스로의 엄청
난 체력과 하나에의 뛰어난 솜씨덕분이었다. 롤의 상처부위를 봉합하고 약초를 바른후 하나에는 가
장심각한 환자를 대면했다.

전신에 거미줄같은 혈선이 그어지고, 가슴한가운데에는 피구멍이 뚫려있었다. 창자가 꼬이고, 폐속
에 피가고여 호흡조차 곤란한 상태였다. 숨만 쉬지않으면 시체라고 불러도 딱좋을 몰골인 일리오스
때문에 하나에는 일곱시간중 다섯시간을 소비해야만 했다. 간신히 수술이 끝나고, 역한 피비린내가
주변을 진동했다.

하나에는 땀과 피로 범벅이 된상태로 녹초가 되어 주저앉고 말았다. 분명 이장소가 위험하다는 것
은 알고 있었지만 어떻게 피할방도가 없었다. 최소한 셋중 한사람이라도 깨어나야 나머지 두사람을
옮길 수 있는것이다. 게다가 시릴과 칼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이 변태는 왜 볼때마다 만신창이가 되어있는걸까?”

얼굴을 제외한 전신에 붕대를 감고, 죽은 듯 누워있는 일리오스를 보며 하나에가 중얼거린다. 이번
이 두 번째이다 그의 몸을 치료하면서 하나에는 그의 상처회복속도가 놀랍도록 빠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매번 그가 입는 상처는 얼핏보면 죽었다고 판명해도 될만큼 끔찍한 것들이었지만 그는
살아났다. 이건 몸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 당사자가 생의 의지를 잃어버린다면 그런 상처에서 살
아남을 수 없다. 변태라는 사실이 조금 걸리긴 하지만 어쨋거나 대단한 의지를 가진 사람같았다.

하나에는 또한 일리오스와 포개져 있던 여인까지 치료했다. 치료했다기 보다는 그저 반듯이 눕혔다
고 보는게 좋을것이다. 피를 흘린 흔적이 있기는 했지만 하나에가 손댈곳은 없었다. 의식은 없었고,
호흡은 아주 조금있었다. 차림새가 특이하고, 머리색도 핏빛이었다. 그녀의 손가락 주변에는 타다남
은 나뭇가지 같은것들이 널브러져 있었는데 하나에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일리오스
가 덮치고 있길래 변태에게 당한 불쌍한 여자쯤으로 생각한 것이다.

하나에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았다. 그녀의 눈에 땅에 떨어진 장검이 보였다. 사용할줄은 모
르지만 만약을 대비해 옆에 두었다. 검의 무게는 생각보다 무거웠고 하나에는 그것을 두손으로 낑낑
대며 옮겨야했다. 더운날씨에 이런저런 이유로 완전히 녹초가 된 하나에 였지만 혹시나 모를 누군가
의 공격 때문에 제대로 눕지조차 못했다.

“어라? 저게 뭐지?”

주변을 살펴보던 하나에의 눈에 이상한 것이 보인다. 검은 안개같은 것이 동그란 돔형태로 놓여져
있던것이다. 크기도 엄청나게 커서 시선을 돌려야만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었고, 가까이 다가가기
에는 너무나도 기분나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로와 긴장감 때문에 자꾸만 눈이 감기는 것을 느낀 하나에는 장검을 지팡이삼아 간신히 몸을 일
으켰다. 하나에의 눈길이 죽은 듯 누워있는 히노에게 향한다. 쓰러져 있던 세 사람중 유일하게 무기
가 없던 그가 다쳐 있었다는건 상식적으로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하나에는 왠지 그가 싸웠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는 그만큼 용감했기 때문이다. 조금 무모해 보이기도 했지만 그런점이 평범하기
그지없는 히노를 평범해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주변을 두리번 거리는 하나에. 피냄새를 맡은 까마귀들이 머리위를 빙빙돌아 다닐뿐 사람은 없었
다. 서있는 상태로도 눈꺼풀이 감기려한다. 그때 하나에는 볼 수 있었다. 검은 덩어리에서 거창한 빛
무리가 솟아나오는 것을 말이다. 백색의 광휘는 덩어리의 한 부분에서 하늘로 치솟다가 갑자기 덩어
리 전체에서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밝은 빛의 폭발로 하나에는 눈을감았다. 한참후 눈부심이 없
어지고서야 하나에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시릴!”

검은안개 덩어리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시릴이 아슬아슬한 차림새로 칼의 품에
안겨있었다. 하나에는 반가움에 칼을 내던지고 시릴쪽으로 뛰어갔다.

“쉿.... 시릴님은 주무시고 계십니다.”

갑자기 입술에 손을대며 목소리를 낮추는 칼 때문에 하나에는 뒷꿈치까지들며 살금살금 다가갔다.
겉보기에 시릴은 말짱했다. 손에 꼭쥐고 있는 침묵의 열쇠도 그대로였다. 다만 옷차림이 조금 민망
할 뿐이었다. 하나에의 눈꼬리가 치켜올라간다.

“이애한테 무슨짓을 하신거죠?”

칼에게 따지듯 묻는다. 칼은 자신이 어떤오해를 사고있는지 정확히 알고있었다.

“아무일 없었습니다. 에스텔양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가장 근접한 것이라면 어깨를 빌려주는 것 정
도겠군요. 아니면 지금처럼 이렇게 안고 서있는다든지....”

부드럽고 능글맞은 태도에 하나에가 질린표정으로 말한다.

“정말이지 당신네들 사람은 하나같이 응큼하기 짝이없군요. 저 변태를 필두로해서 당신까지. 처음
봤을때는 안그래 보였는데 당신도 어쩔수 없는 그쪽패거리였군요,”

그쪽패거리 라는 말에 특히 힘을주는 것으로보아 칼을 완전히 일리오스와 동급으로 취급하는 모양
이었다. 칼은 웃고있었지만 눈썹이 약간 꿈틀거렸다.

“옷은 싸움도중에 사고로인해 찢어진 것이고, 어깨는 피곤하신것같아 잠시 빌려준것이고, 주무시는
것을 깨울 수 없어 안고나온 것입니다. 제가 무슨 오해살만한 일을 했습니까?”

조목조목 따지고드는 칼의 모습에 하나에는 적절한 반격을 하지못했다. 오히려 약간 미소짓는 그의
모습이 은근히 두렵기까지했다.

“하여튼 시릴을 이리내요! 내가 안고있을 테니까.”

“죄송합니다만.... 에스텔양도 그리 힘차보이지는 않는군요.”

“그래서 못내놓겠다는 거에요?”

뜻밖의 거절의사에 당황한 하나에였다.

“기운을 차리실때까지만 이러고 있겠습니다. 필요하시다면 시릴님께서 들고계신 침묵의 열쇠에 손
을 얹어놓으십시오. 금새 기운이 회복될 것입니다.”

시릴을 안고 주위를 둘러보는 칼.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에 시체처럼 누워있는 네사람과 화가난
듯 허리에 손을얹고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있는 하나에. 그리고, 자신과 시릴이 있었다. 칼은 타미에
의 낮선 모습을 발견하고는 하나에에게 질문한다.

“이분은 누구십니까?”

하나에가 타미에와 칼을 번갈아본다. 그리고 퉁명스레 대답한다.

“저기 다죽어가는 변태가 마지막까지 깔아뭉개고 있던 여자에요. 변태한테 당한 충격 때문에 아직
도 못일어나는 것같아요. 왜요? 그쪽도 같은패거리니까 관심있는 건가요?”

가시돋힌 말로 칼을 공격한다. 칼은 가볍게 무시하고 타미에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를 유심히
살펴본다.

“훗....”

칼의 손에 들린 크레아논의 창날이 타미에의 목에 닿았다.

“뭐하는 짓이에요!”

하나에가 깜짝놀라 소리친다.

“이번 사태의 원흉입니다.”

칼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리고, 그의 창날이 조금앞으로 움직인다. 묵철빛을 띈 날에 가느다
란 번개줄기가 흐른다.

“뭐라구요?”

하나에가 되묻는다.

“이 여인은 저와 싸웠던 악마의 동료입니다. 한마디로 악마이지요.”

칼은 차갑게 말했고, 하나에의 몸이 떨린다.

“악마라고요?”

“그렇습니다.”

잠시 망설이는 하나에.... 하지만 망설임의 시간은 길지않았다.

“그게 무슨 대수죠? 이사람은 내 환자에요. 난 내환를 죽게 내버려둘 수 없고요.”

하나에는 다부진 표정으로 말했다. 칼의 눈동자에 이채가 감돈다.

“의사신가요?”

“네.”

그는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미소지었다.

“그래도 악마는 살려둘 수 없습니다. 만약 이 악마가 깨어나게 된다면.... 우리 모두가 위험에 빠지
게 됩니다.”

크레아논의 창날이 밝게 빛난다. 칼의 손이 천천히 움직인다.

“멈춰요!”

하나에가 달려와 그의 손을 붙잡는다. 그의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빈약한 저항이었지만 조금 성가시
기도했다.

“놓으십시오. 이럴수록 서로만 피곤해질 뿐입니다.”

“못놔요! 이 사람은 내 환자란 말이에요!”

“당신은 지금 잘못된 선택을 하고 계십니다.”

“내 선택은 내 자유에요. 난 내 환자를 지킬꺼에요!”

한참 그들이 실랑이는 하는바람에 칼의 품속에 있던 시릴이 깨어났다. 시릴은 칼의 품속에서 뒤척
이며 눈을떴다.

“으음.... 언니? 칼님하고 뭐하는거에요?”

하나에는 뭐라 대답하기전에 자신에 손에 잡혀있던 칼의 창이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
은 언제 겨누어 졌냐는 듯이 세 개로 분리되어 칼의 허리에 얌전히 매달려 있었다. 하나에가 멍하니
가만히 있자 시릴이 팔을뻗어 하나에의 이마를 만진다.

“언니 어디아파?”

“응?”

아프냐는 말에 화들짝 놀란 하나에가 소리치다시피 말한다. 시릴이 이상한 눈초리로 쳐다보자 하나
에가 어설픈 웃음을 짓는다.

“아,아프긴 누가 아프다고 그래.... 너야말로 아무일도 없던거야?”

“응.... 칼님께서 잘 보살펴주셨어.... 저기.... 저좀 내려주세요.”

말을 하면서도 살짝 붉어지는 시릴의 두뺨.... 하나에는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아무일도 없었다는 말
에 안심하였다. 칼은 시릴을 바닥에 내려주었고, 약간 휘청이면서도 똑바로 서는 시릴이었다. 시릴
은 하나에에게 보석을 건내며 말했다.

“이걸 쥐고있으면 금새 힘이날꺼야.”

하나에는 보석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부서진 마차파편에서 짐가방 몇 개를 찾아 시릴의 옷을 꺼내
든다.

“저기요. 어디 멀리 가던지 아니면 뒤돌아서 눈이라도 감아주실래요.”

“알겠습니다.”

칼은 뒤돌아 눈을감았다. 사라락거리는 소리가 이상하게 크게울려 퍼진다. 하나에는 시릴의 옷을
갈아입히며 정말로 아무일도 없었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옅은 남색계통의 반팔 원피
스를입은 시릴은 갈아입느라 벗어두었던 칼의 옷을들고 조심스레 그에게로 다가간다.

“저기요.... 옷 고마웠어요. 그리고.... 지켜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수줍게 인사하는 시릴과 살짝 미소짓는 칼. 칼은 시릴이 건네준 옷을 걸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 자리는 조금 위험한 것 같군요. 일행들을 안전한 곳으로 옮겨야 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칼은 부서진 마차에서 나온 판자조각들을 잇고있었다. 주변에 널려진 망가진 옷가지
나 기사들이 남겨놓은 허리띠 등을 이용하여 대여섯명은 충분히 누울 수 있는 썰매를 만든것이었다.
하나에나 시릴로써는 도대체 뭐가 뭔지 알 수 없을만큼 빠른손놀림이었고, 사실 썰매라기에는 모양
새도 좀 이상했다.

칼은 썰매에 세사람을 눕힌뒤 하나에와 시릴을 바라보며 말했다.

“두분도 이위에 올라타시죠.”

“정말 매정한 사람이군요.”

하나에가 두눈가득 독기를 품으며 말했다. 칼은 쓰러진 타미에를 그대로 방치해 두었기 때문이다.
하나에는 끙끙대며 그녀를 썰매위에 올려놓았다.

“그대로 데리고 가신다면 분명히 후회하실 겁니다.”

약간 쌀쌀맞았지만 시릴이 깨어나기 전보다는 부드러웠다. 하나에는 그를 바라보며 앙칼지게 쏘아
붙였다.

“난 내판단을 믿어요. 설령 그것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다친사람을 치료하는게 내 사명이에요.”

“후회는 아무리 빨라도 늦는법이지요....”

칼은 살짝 조롱 비슷한 말을 던지고는 썰매에 연결해둔 끈을 어깨에 걸쳤다. 쓰러진 네명과 하나
에, 시릴을 합쳐 여섯명이 올라탄 육중한 썰매를 신음소리 한번 내지 않고 끌어당긴다. 하나에는 설
마 움직일까 하고 생각했지만 평상보다 조금 빠른걸음으로 움직이는 칼의 모습에 놀라움을 금치못
했다. 온통 메마른 황무지 뿐이고 간혹가다 돌맹이 몇 개만 있는 땅인지라 썰매는 그럭저럭 잘 움직
였다. 게다가 칼은 앞에 바위가 있더라도 절대 돌아가는 성격이 아니었다.

“언니.... 나 피곤해....”

“여기, 언니 무릎....”

하나에는 무릎을 베고 눕는 시릴을 바라보며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 주변 상황으로 미루어 굉장한
일이 일어났던 것 같은데도 소란피우지 않고 얌전하게 있어주는 것만 하더라도 고마웠다. 그런데 하
나에는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혹시.... 시릴이....’

하나에의 무릎을 베고 누운채 눈을 감지않은 시릴. 시릴의 푸른 눈동자 속에는 칼의 무너지지 않을
것만같은 뒷모습이 하나가득 담겨있었다.




칼이 끄는 썰매는 밤이되서야 30여호의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는 촌락에 도착했다. 특이하다
못해 기괴한 그들의 등장에 마을 입구에서부터 잔뜩 경계하는 눈치였다. 칼의 허리에서 삼등분되어
매어있는 크레아논의 섬뜩한 빛 때문에 감히 말을 걸려는 사람이 없었다.

“혹시 이 마을에 촌장님이 계십니까?”

칼은 크지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나에와 시릴까지 모두 잠들고 깨어있는 사람은 그 혼자였기 때
문이다. 횟불을 든 마을사람들 사이에서 허리가 약간 구부정한 노인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제가 이마을의 촌장입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노인은 전형적인 농촌 토박이였다. 억양이 조금 거친 산스레일지방의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고, 피
부는 햇볕에 검게 그을려 있었다. 깡마른 몸이었지만 오랜 농삿일로 뼈대가 굵었고, 면도를 한지 얼
마 안된 듯 수염은 없었다. 희끗희끗한 머리를 쓸어넘기던 노인의 눈동자속에는 낮선사람에 대한 두
려움이 담겨있었다.

“저희는 여행자 입니다. 보시다시피 동료들이 큰 상처를 입어 치료할 장소가 필요한데 빈집이 있다
면 잠시 빌려주시겠습니까?”

칼은 그들이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최대한 정중하게 부탁했다. 한니르 지방에사는
대부분의 사람들과는달리 산스레일의 사람들은 귀족에게 시달리는 것이 일상생활이기 때문에 낮선
사람을 경계한다.

노인은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다. 횟불을든 마을사람들중 몇 명이 노인의 주변에 모여 무어라 이야
기를 나눈다. 노인은 나머지 마을사람들에게 들어가라는 신호를 보낸다. 마을사람들이 각자의 집으
로 돌아가고, 노인이 다시 칼에게 다가왔다.

“마을에 쓸만한 빈집은 없지만 일행분들의 상태가 심각한 것이라면 마을에서 공동의사당으로 쓰는
건물이 하나있습니다. 그곳이라도 괜찮으시겠습니까?”

“호의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곳으로 안내해 주시겠습니까? 그리고 몇분만 저를 도와주십시
오. 먼길을 오느라 썰매가 망가져 더 이상은 끌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횟불을 들고있던 사람중 세명이 앞으로 나왔다. 칼은 하나에와 시릴을 깨
웠고, 도와주러나온 마을사람들과 함께 세명의 환자를 옮겼다.

마을의 의사당이라는 건물은 작은 마을이라기에는 꽤넓었고, 따로 숙소까지 마련되어 있었다. 게다
가 건물이며 가구가 모두 새것이었다. 침대숫자는 꽤나 널널해서 다친사람을 모두 눕히고도 네 개가
남았다. 칼과 하나에, 시릴까지 모두 누워도 하나가 남았다.

함께왔던 마을사람들은 모두 돌아가고 하나에와 시릴은 지친나머지 침대를 보자마자 쓰러져 잠이
들었다. 남은 것은 칼과 촌장노인 뿐이었다.

“베풀어주신 호의는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보시다시피 저희 일행들의 상처가 심한관계로 한동안은
신세를 질 것 같습니다. 혹시 댓가를 원하신다면 말씀하십시오.”

칼은 공손히 말했다. 촌장노인은 그보다 한참 연장자였기 때문이다. 굳이 그렇지 않더라도 칼은 적
을제외한 모든사람에게 높임말을 사용했다.

“사례라.... 사양하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오래 머무는 것은 불가능 할 듯 보입니다. 보시다시피
이곳은 여행객을 위한곳이 아니기 때문에 사실 이렇게 당신들을 들여보내서도 안되는 곳입니다.”

노인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어떤 이유라도 있는 것입니까?”

칼이 노인에게 묻는다. 이런 마을에 정기적으로 묵어가고, 따로 건물까지 필요한 일이라면 평범한
사람은 아닐 것 같았다. 노인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저희는 귀족이 아닙니다. 오히려 귀족에 반대하는 사람들 이지요.”

칼의 말에 노인이 약간 놀라는듯한 표정을 보인다.

“귀족에 반대하신다니....”

“저희는 이땅에 자유를 가져다 주기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으음....”

노인이 진중한 침음성을 흘린다. 너무 빨리 일행의 정체를 밝히는 감이 있었지만 칼은 개의치 않았
다. 귀족에게 시달림받는 산스레일 지방의 사람들은 그러한일을 함부로 발설하지 않는다. 신경질적
인 귀족들은 신고한 당사자까지도 기분나쁘다는 이유로 죽이기 일수였기 때문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노인이 칼의 눈을 마주하고 이야기한다.

“귀한 손님이셨군요.... 그렇다면 사실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곳은 크라우에 폰 가리발디의 영지
입니다. 여지까지 한번도 찾아온적없는 크라우에 공작이 얼마전부터 갑자기 영지순회를 한다기에 저
희마을에서도 준비를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 건물도 그 때문에 얼마전에 새로지은 것입니다.”

크라우에라는 이름을듣자 칼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노인
은 갑자기 냉풍이 불어닥치는듯한 분위기에 몸을떨었다.

“제가 실수를.... 크라우에가 어떤이유로 영지순회를 하는지 아십니까?”

공작, 그것도 헬-나이 전역에 그 위세가 당당한 가리발디 대공작가의 인물을 어린애 이름부르듯 부
르는태도에 노인은 깜짝놀랐다. 하지만 칼의 눈빛 때문에 그저 대답만 할뿐이었다.

“그게 사실은.... 하인을 구하기 위해서랍니다. 모종의 이유로 공작의 저택에 있는 하인들이 몰살을
당했다고 하더군요. 워낙 희한한 일이라서 유명한 일입니다. 어쨋거나 그일 때문에 집안일손이 부족
해진 공작이 자신의 영지를돌며 하인들을 구한다고 하더군요. 저희 마을도 그에대비해 준비를 해두
었습니다. 아직 결혼하지않은 젊은이들은 결혼을하거나 아니면 모종의 장소에 숨겨두었습니다.”

그리 자세한 설명은 아니었지만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조금 인물이 되는 처녀는 강제로 능욕
하고, 남자역시 강제로 하인으로 만든다. 모진 매질이나 가족을 협박하는 방법이라면 충분히 가능했
다. 평생 농가에서만 자란이들은 저항이란 단어를 잘몰랐다. 가혹한 폭정일지라도 변변한 목소리한
번 내지못하고 묵묵히 참아낼 뿐이었다.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이 크라우에와 같은 방법으로 하인을
만들곤 하지만 가리발디 대공작가, 특히 크라우에 가리발디는 그정도가 대륙제일이라해도 과언이 아
니었다. 꼭 처녀가 아니더라도 인물이 되는 여자는 유부녀의 경우에도 대낮의 길거리에서 능욕하고,
혹시라도 반항을한다면 그가족을 몰살하는 것을 취미로 삼고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가학적인 변태성
욕자인 그에게 걸린여인은 하룻밤을 넘기고나면 초주검이 되곤한다.

인간적으로 보아도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드는게 없는 인물이 크라우에 가리발디였다. 게다가 이
땅에 공화정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없에야하는 인물이었다. 이로보나 저로보나 죽어마땅한.... 반드시
죽어서 없어져야할 인물인 것이었다.

“흠.... 그렇군요. 그렇다면 혹시 그가 이마을에 언제올 것인지도 알고계십니까? 아무래도 저희는
오래있어야 할것같습니다.”

노인은 그의 저의를 읽을 수 있었다. 도저히 평범해 보이지 않는 이사람에게 무언가 기대같은 것이
생겨버렸다.

“그리 오래걸리지는 않을것입니다. 빠르면 이틀.... 늦어야 사나흘정도 후라면 이마을에 도착할 것
입니다.”

“그렇군요. 감사합니다. 이것은 사례입니다. 좋은 숙소에대한 사례와 좋은 정보에대한 사례를 동시
에 하는것입니다.”

칼은 탁자위에 주머니를 올려놓았다. 노인이 사양하려 했지만 억지로 노인의 손에 쥐어주었다. 노
인이 주머니를 풀어보니 상당한양의 금화며 은화가 들어있었다. 이정도라면 마을전체의 한달 수익과
도 맞먹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너,너무 많습니다.”

노인이 당황하여 돌려주려한다. 칼은끝까지 사양했다.

“좋은 정보에는 그만한 댓가가 따르는 법입니다. 돈은 어려운 사람들과 골고로 나눠가지도록 하십
시오. 그렇다면 저는이만 들어가 쉬도록 하겠습니다.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칼은 노인에게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노인도 마주 인사한다. 노인의 감격한듯한 눈빛을 뒤
로하고 칼은 돌아섰다. 그의 눈빛이 칼날처럼 서슬퍼렇게 빛난다.

‘크라우에.... 세상을위해 널 처단하겠다.... 아니, 아르히나를 위해서라도....’

가슴속에서 솟아오르는 불길 때문에 도저히 진정할 수가 없었다. 일행이 쉬고있는 방으로 향하던
칼은 발걸음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했다.

“잠깐만요.”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다. 바라보니 방문앞에서 하나에가 부르는 것이었다.

“왜그러십니까?”

칼은 조금 가까이 다가가서 이야기했다. 하나에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긴다.

“피검사좀 받으셔야겠어요.”

“네?”

말이 끝나기도전에 하나에가 그의 팔목을 걷어붙이고 흰솜으로 문지른다. 알콜냄새가 알싸하게 풍
겨온다. 그리고, 어디선가 나무바늘을꺼내 그의 팔목을 찌른다. 살짝피가 흐른다.

“잠깐만요 따라들어오세요.”

반강제로 방안으로 들어온 칼은 하나에가 하는양을 지켜보았다. 하나에의 침대옆에 놓인 탁자에는
투명한 접시몇개와 처음보는 이상한 기구가 있었다. 하나에는 칼의 팔을찌른 바늘을 접시에 조심스
럽게 문지르고 이상한 기구아래 접시를놓고 관찰한다. 한참을 쳐다보던 하나에의 얼굴에 화색이 돌
았다.

“맞아요! 둘이 피가맞는다고요!”

“네?”

칼은 너무나도 좋아하는 그모습에 약간 얼떨떨했다. 하나에가 침대위에 놓인 커다란가방을 뒤적거
린다. 그것은 그녀의 보물로써 몇 년동안 필사적으로 지켜온 그녀의 의료도구였다. 학부에서 끌려나
올때도 절대로 손에서 놓지않았고, 제아무리 다급해도 항상 챙기곤하던 것이다. 그안에 들어있는 각
종 기구들은 원래 있던것과 하나에가 근래에 마련한것들로 모두 사람들을 치료하는데에 쓰였다. 대
부분이 원래 있던것인데 아무래도 하나에의 수입으로는 엄청난 가격의 의료기구를 살여력이 되지않
았기 때문이었다. 하나에는 그 가방에서 특이하게 생긴 것을 꺼냈다. 주사기는 주사기였는데 호스에
연결된 바늘이 두개가 달렸고, 이상한 구멍도 뚫려있었다. 하나에는 칼에게 다가와 말했다.

“이사람을 빈침대에 옮기고, 당신도 그옆에 누워주세요.”

칼은 시키는대로했다. 하나에는 조금 고집불통이어도 실력은 있는 의사였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롤과 히노의 상태가 눈에띄게 좋아져 있었다. 다만 일리오스는 원래입은 상처가 워낙 엄청난 것이어
서 회복이 느렸다.

“무슨일을 하는것입니까?”

제아무리 똑똑한 칼이라지만 의학쪽에는 문외한이라해도 좋을만큼 상식이 없었다. 하나에가 하는
일련의 행동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질문을한다. 그리고, 자신이 모른다는 사실을
엄청나게 부끄러워하는 그였다.

하나에는 그의 색다른모습에 조금 놀라면서도 설명해주었다.

“수혈을 해야해요. 지금 이 변태가 깨어나지 않는이유가 너무 많은 출혈때문이거든요. 피라는게 한
순간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서 침묵의 열쇠도 소용이 없어요. 부족한피를 공급해야하는데 일행중
에는 맞는 것이 없더군요. 당신만 유일하게 이 변태에게 수혈해 줄수있어요. 뭐 내 짐작이지만 둘의
피성분이 비슷하거나 같을꺼에요. 역시 그쪽패거리는 피로 엮인사이였군요. 어쩐지 닮았다 싶더라
니.... 이걸로 팔꿈치 안쪽을 문질러요.”

설명을 하는동안 굉장한 열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리고, 칼과 일리오스를 같은인간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거의 나체나 다름없는 시릴을 안고나타난 것 때문인 모양이었다. 해명하기도 귀찮
아진 칼은 그저 하나에가준 붉은솜으로 팔을 문지를 뿐이었다.

“됐어요. 이제 누워서 팔을 대봐요. 아참, 눕기전에 편한차림으로 누워요.”

칼은 시키는대로했다. 하나에는 그의 팔에 천을 감은후 유심히 살펴보더니 호스에 연결된 바늘하나
를 꽃았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일리오스에게 꽃는다. 바늘의 크기에비해 통증은 덜했지만 왠지
꺼림직한 기분이었다. 그래도 일리오스를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었기에 칼은 말없이 하나에가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수혈하는동안 이거 쥐고있어요. 수혈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니까 가급적이면 움직이지말고, 잠도
얌전히 자야해요.”

칼이 그녀의 설명에 집중하는동안 하나에는 기습적으로 주사기를 당겼다. 호스를 따라 붉은피가 빠
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그 피는 주사기에 모였다가 일리오스가 꽃고있는 바늘까지 빨려들어간다. 칼
은 모르지만 주사기의 바늘은 칼쪽이 좀 작고 일리오스쪽이 컷다.

하나에는 둘사이에 작은 탁자를 놓고 그위에 주사기를 올려놓았다. 주사기는 한번 당겨놓으면 자동
으로 수혈을 하는 장치인 모양이었다. 신기하기도했고, 몸속에서 피가빠져나가니 말로 표현할 수 없
는 느낌이든다. 칼은 하나에가준 침묵의 열쇠를 바늘이 꼽히지 않은손에 쥐었다. 보석으로부터 따뜻
한 기운이 밀려들어와 금새 기분이 호전되었다.

“그러면 나도 이만 쉬어야 겠어요. 진짜.... 졸립단 말이에요....”

칼은 대답대신 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졸렸기 때문이다. 하나에나 칼이나 둘다 엄청난 고생
을 했기 때문에 피로가 극한까지 쌓여버렸다. 하나에가 옷도 벗지못하고 침대에 엎어지고, 칼도 눈
을감고 잠이들었다.




“가지마!”

칼은 갑자기 들려오는 일리오스의 외침에 눈을떴다. 워낙 갑자기 일어나는 바람에 칼의 팔에 박혀
있는 바늘이 요동쳤고 일리오스의 팔에 박혀있던 바늘은 빠져버렸다. 칼은 자신의 팔에 있던 바늘을
뽑았고, 소란을 피운 일리오스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조금 화가나기도 했지만 칼은 정중히 물었다.

일리오스가 침대에서 몸을일으킨채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우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 사람이.... 날 떠났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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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 오늘도 재미없는 글을들고 찾아온 아티입니다.

이글의 표면적인 주제인 로맨스가 부각되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드는군요....
아이린하고 카인하고는 지금쯤 진도가 얼마나 나갔을지 흐흐...
게다가 써놓고보니 아이린과 시릴이 동갑이더군요....
（그런데 쓰고있자면 시릴이 무지무지 동생같은 느낌이....）
히노와 하나에도 수상하고....
시릴과 칼은 더 수상하고....
근데 정작 일리오스만은.... 차인건가?
-_-....
실버레인양이 등장하는것도 이제 얼마 안남았습니다.
2부 1기가 중반을 넘었군요. 연재속도를 빨리하려하는데 잘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리메이크 작업중입니다. 백업파일이 날아가버려서 다시 작업중이고,
동시에 연재할 생각입니다.
（리메이크는 조아라에;;;）
늘쌍 노래부르던 이글 앞부분의 문제점을 고치는게 엄청 힘들더군요....
오늘안으로 리메이크판을 손봐서 올리고....
그나마 가장편한게 드림워커네요....
거긴아직 진도가 안빠져서 비축분올리면 되니까요....
-_-....
하여튼 이래저래 바쁜 아티였습니다.

삼류글장이 아티는 이만 퇴장합니다.
（목표는 추.천100개!）
그럼 이글을 읽어주시는 여러분의 행복한 하루를 기원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