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4 장


"뭐라구!? 그게 정녕 사실인가!"

"예, 제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그란트 왕국, 로마즈 왕국에게 패해 거의 멸망 직전까지 간 처지가 되었지만, 그란트 왕국의
왕 케인 크레바츠 3세는 아직 건재했다. 애초에 상당한 국력을 자랑하고 있던것도 모두 강하고 현명한 왕 케인에 의한것이라고 봐도 무방할만큼, 그는 왕으로서의 자질과 실력을 갖추고있었다. 그럼에도 그란트 왕국이 로마즈를 꺾고 중립지역을 장악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뭐니뭐니해도 인재의 부족이었다. 왕은 뛰어난데 그를 떠받들고 있는 신하들이 너무도 부족했다. 이번에 함정에 걸린것도 신하들이 단체로 들고일어나 이번에야말로 중립지역을 차지할때라면서 왕을 부추긴 것이 컸다. 게다가 그란트 왕국은 신하들의 권력이 강해 왕 케인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할 기회조차 적었으니 최악이었다. 그러나 이번에 신하가 가져온 정보는 그야말로 최고급의 극비 정보였다. 경매장에 성녀로 추론되는 인물이 나타났다니...
하지만 극비라고 하기에 이미 너무나 많이 알려졌을것으로 생각되므로 케인은 더욱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국력이 약한 그란트 왕국으로서는 다른 경쟁 국가들을 이기고 성녀를 데려올 수 있을지, 설령 성녀를 데려온다고 해도 십분 활용하기도 전에 순식간에 깨져버리고 말지는 않을지, 여러 가지 걱정이 겹쳐 차라리 성녀가 출현하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 때 그란트 왕국의 유일한 공작인 클라우드 공작이 왕궁에 들어왔다. 현재 그의 권력은 거의 왕 케인과 비견될정도였고 검술실력도 매우 뛰어난 자였다.

"폐하, 클라우드 공작님이 오셨습니다."

"아! 왔군요!"

"클라우드 공작이 이곳엔 무슨일인가?"

"제가 모셨습니다. 실은 이번 일에 최고 적임자는 클라우드 공작님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클라우드 공작은 상당히 매서운 눈빛에 미남이라고 부르기는 어려운, 호남형의 얼굴이었다.

"폐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흐흠... 무슨일이지?"

"이번에 성녀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역시 대부분 알려졌군...'

"그래 쓸데없는말은 그만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가 가겠다는건가?"

"아닙니다. 저보단 제 아들을 보내고 싶습니다만..."

"자네의 아들말인가?"

"이번에 안그래도 수련여행을 보내려던 참이었는데 마침 이런일이 생겼으니 좋은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제 아들을 보내도 되겠습니까?"

클라우드 공작의 아들에 대한 소문이라면 케인도 귀에 못이박히게 많이 들어보았다. 분명 실력은 같은 나이의 사람들에게 피해 굉장히 뛰어남이 틀림없었고, 그 실력도 무시하기 힘든정도였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굉장히 성격이 안좋다는것이었다. 이제 나이가 24세지만 결혼은 하지 않았고,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예쁜 여자만 있으면 집요하게 쫓아다니고 말로안되면 권력을 사용하는데다가 여러모로 성격파탄자였다. 무엇보다 역사상 출현했던 네명의 성녀, 이번에 출현한 성녀를 포함하면 다섯이지만, 그녀들은 모두 대단한 미인이였다고 하는데, 과연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지나칠까 하는 우려가 있었기에 망설이게될 수밖에 없었다.

"흠...."

"폐하가 무엇을 우려하시는지는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서는 걱정할 일 없도록 제가 단단히 주의를 주겠습니다."

"알겠네. 그 일은 자네에게 맡기도록 하지."

"예 감사합니다."

클라우드 공작은 허락을 맡자마자 나갔고, 미리 보고를 하고있던 신하도 따라나갔다. 케인은 주변의 신하들을 전부 물러나게 한 후 시종을 불러 무언가를 지시했다.
약 5분 후 상당히 준수한 외모의 한 청년이 들어왔다.

"아버님, 부르셨습니까."

왕의 아들, 앤드류 왕자였다.

"음... 아무도 없으니 격식차릴거 없다."

"예, 그런데 무슨일로...?"

"이번에 출현한 성녀에 대한 이야기를 너도 들었겠지?"

"물론입니다."

"그 일을 클라우드 공작이 맡게되었다."

그 순간 왕자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아마 총명한 왕자는 케인의 말을 알아들었으리라.

"그럼 저에게 맡기실일은..."

"아마 굉장히 힘들거다.... 정체를 밝히지 않고 클라우드 공작보다 먼저 성녀를 모셔야한다.
무엇보다 비밀리에..."

"예!"

"그리고 무엇보다 적은 그들만이 아니야... 이미 성녀에 대한 소문은 전 대륙에 퍼져있다. 모두 쉬쉬하고있지만 모르는 사람이 없을거야, 공공연한 비밀이지... 꼭 조심해라..."

"걱정마십시오 아버님."

"그래... 나도 전선에서 뛰면 좋을 것을...."

"그런 말씀 마시고 건강을 잘 챙기셔야합니다. 그럼 전 물러가서 채비를..."

"그래... 부탁한다."

일국의 왕자를 홀로 내보내는건 어찌보면 미친짓이였다. 하지만 케인에게는 달리 믿는바가 있었으니... 앤드류 왕자는 대륙의 모든 인구중 1%를 넘지 못하는 '기운'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여전히 숲속에 작은 공터, 모닥불이 꺼진 자국이 남은곳에 마리가 커다란 늑대를 베고 자고있었다.

"킁..."

늑대는 이미 깨어있는지 때때로 몸을 뒤척이기도 하고 하품을 하기도 하며 시간을 보내고있었다.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하지만....

"으... 저려... 저기... 마리님~ 저 힘든데요..."

한 마리만은 평화롭지 않은것같다.

"어쩌다가 이런 자세로 잠든거야..."

"쿠.....ㄹ"

"응?"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조심스럽게 마리를 내려놓고 어디론가 훌쩍 뛰어나간다.
...
지글지글
킁 킁

"?"

"맛있는냄새다아~"

"마리님 일어나셨어요?"

"응? 듀란이네~? 뭐해?"

문득 모닥불을 바라보니 알 수 없는 고기가 꼬챙이에 꽂혀 구워지고 있다.

"이거 무슨고기야?"

"토끼고기요. 아무래도 눈앞에서 잡아서 가죽벗기고 먹으려면 비위가 상하실까봐 미리 잡아와서 굽고있어요."

"에구... 기특해라.~"

"다 구워졌으니 드세요."

꼬챙이를 하나 잡고 고기를 입에 가져가던 마리는 순간적으로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으음....뭐지?'

냠!

"와아~! 토끼고기는 처음먹는데 되게 연하다!"

'냠... 고기는 맛있지만 이 알 수 없는 위화감은 대체......'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마리는 모닥불에 물을 뿌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개울가에 갔다가
돌아왔다.

"이제 어디가지?"

"돈도 없고 무기도, 식량도 옷도 아무것도 없잖아요..."

잠시 생각하던 마리는 너무 도쉽게 결론에 도달했다.

"복수하러가자!"

"네?"

"내가 납치당할 때 분명히 여관주인이 협조했다구! 바로 어제일인데 기억 못하겠어?"

"그제일인데요."

"응?"

"마리님이 잠든 상태에서 하루가 갔어요."

"어쩐지 배고프더라... 그런데 여긴 어디야?"

"그냥 그 마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숲이에요. 마을로 가는 길은 제가 아니까... 갈까요?"

"좋아! 아, 그리고 그렇게 커다란 늑대로 있지 말고 처음처럼 작은 강아지가 어때?"

"마을에 가면 너무 튀니까 변신하라는거죠?"

"아니, 귀엽잖아."

"..."

약 10분후, 범죄의 온상에 강아지를 앉은 소녀가 나타났다.

"근데... 마리님."

"응? 왜?"

"눈 색을 어떻게 바꾸는게 좋을것같아요."

"어째서?"

"너무 튀기도 하지만 더 중요한건 황금색 눈이 거의 성녀의 상징정도로 굳어버렸거든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예언서때문인것도 있구요, 무엇보다 저번에 경매장에서 너무 사건을 크게 일으킨바람에 아마 어느정도 알려졌을거라고 생각되요."

"그럼 어떻게 바꿔?"

...

범죄의 온상에 하나밖에 없는 여관, 덕분에 여행자들에게 바가지를 씌워도 별 말없이 돈을 지불하는터라 상당한 부를 축척하고있던 여관 주인은 오늘도 바가지 씌울 여행자가 없나 가게 앞을 서성이고있었다.

"응? 저 사람은..."

거대한 대검을 뒤로 차고 로브를 뒤짚어쓴 사람이 여관의 간판을 바라보면서 다가오고있었다.

'럭키! 손님이군.'

가게 안으로 뛰어들어가 카운터에 자리를 잡고 잠시 기다리자 손님으로 짐작했던 사람은 역
시나 여관 안으로 들어왔다.

"어서오십시오! 1인실로 준비...응?"

로브를 뒤집어 쓴 사람이 여관 주인과 눈을 마주치자 순간적으로 상인의 예리한 감각이 위험신호를 보내왔다. 마치 피처럼 붉은, 하지만 굉장히 탁한 색의 눈은 어찌보면 매혹적으로 보일수도 있었으나, 지금 여관 주인에게 느껴지는 감각은 공포 하나뿐이었다.

"성녀가 이곳에서 발견됬다고 들었다."

대검을 보고 남자라고 생각했던 상대에게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가냘픈 미성이였다.

"...예? 무, 무슨?"

"맞아! 여기야! 아하하 드디어 찾았다!"

"어차피 이 마을에 여관도 이곳뿐인데 찾았다고 그렇게 좋아할것까지야..."

"시끄러워! 난 길치라구!"

갑자기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운 소리.

"... 나중에 다시오지."

그리곤 로브를 뒤집어 쓴 여자는 바로 나가버렸다.

"휴우... 살았다."

"앗!! 저사람이야!"

"응?"

갑자기 자신을 손가락질하며 다가오는 여자아이를 보자 여관 주인은 평소처럼 영업용 스마일을 하며 늘 하던 대사를...

"컥!"

해야했지만 들어온 소녀가 다짜고짜 멱살을 잡고 흔드는바람에 하지 못했다.

"이..이게 무슨짓입니까!!"

"당신이 나 납치될 때 협조한거 다 안다구!!"

"컥.. 컥.. 우선 이건 놓고..."

"흥."

소녀가 멱살을 놓자 여관 주인은 드디어 상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게되었다.

'응? 어디선가 본것같기도 하고 아닌것같기도 하고...'

"아! 그때 그 손님이군! 근데 그때는 눈 색이 황금색이었던것같은데..."

"흥 잘 아는군, 근데 그렇게 태연해? 내가 만만해?"

"흐흐 안그래도 네가 도망갔다고 찾느라 고생좀 했는데 제발로 들어오다니 바보군?"

여관 주인이 가볍게 손짓을 하자 주방에서 한 남자가 걸어나왔다.
주방에서 나온 남자는 어디선가 본듯한 인상의 낯익은 남자가 몽둥이를 들고 뛰어나온다.

"앗! 너는! 더러운 얼굴에 더러운 목소리!"

다시보니 경매장에서 사슬을 잡아끌던 덩치큰 남자다.

"뭐라구!? 이 년이 아직도 버릇을 못고쳤군, 이번에는 막아줄사람도 없겠다 각오해라!"

무식하게 생긴 몽둥이를 휘두른다.

"잠깐!"

"뭐냐?"

"설마 그걸로 때리려구?"

휘익 쾅!

"앗!"

갑자기 몽둥이가 날아오자 얼떨결에 피한 후 바라보자

"헉... 바닥이 파였다."

드디어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는 마리였다.

"듀란! 빨리 싸워!"

강아지의 모습으로 옆에서 지켜보고만 있던 듀란이 나지막히 한숨을 내쉬었다.

"결국 아무 생각없이 들어왔군요..."

푸념섞인 대사를 내뱉은 듀란의 몸에서 갑자기 밝은 빛이 쏟아져나와 주변의 사람들의 눈을 마비시켰다. 약 5초 후 시력이 돌아와 보이기 시작했을 때 이미 작은 강아지는 사라지고 거대한 흰 늑대 한 마리가 서있었다.

"헉!"

갑자기 커진 영향으로 가게가 거의 난장판이되었다.

"흐흥... 그럼 나한테 몽둥이를 휘두른 너부터!...응?"

몽둥이를 들고 마리를 내리치려던 남자는 사라져있었다.

"크릉..."

"저런 근성없는 인간을 봤나... 자, 그럼 내 물건을 돌려주시지요?"

지금 보니 여관 주인은 이미 기절한것같다. 눈살을 찌푸리며 그 모습을 바라보던 마리.

"깨워."

덥썩!

듀란이 기절한 남자의 다리를 문다.

"으악! 사람살려!"

"제대로 물지두 않았다구요... 그럼 내 가방이 어딨나 말을 해보시죠?"

"이...이 앞 보석상에..."

"그 가방이 왜 거기있는데!"

"그, 그 보석상 주인이 경매장 관리인중 한명이라구요."

"그래? 얘기 잘들었어~ 앞으론 바가지 그만씌우고 착하게 살라구."

끄덕

가게를 나가다가 한마디 던지고간다.

"운 좋은줄알아."

뒤따라 늑대가 따라나가면서 문을 박살낸다.

"..."

"휴우... 또 살았다."

여러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는 날이었다.
마리는 가게에서 나가자마자 바로 건너편의 보석상으로 뛰어들어가려고했지만 여관 앞에 늘어선 방해꾼들덕분에 발을 멈추게되었다.

"이건 또 뭐야?"

자세히 살펴보니 아까 도망간 거구의 남자가 함께다. 대충 살펴보니 우락부락한 사내들이 대여섯정도 늘어서있는것같다. 그리고 다들 무식하게 생긴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있다.

"흐흐, 절대 무사히는 못보낸다."

"아 그거 되게 질기네! 짜증나게!"

"크르릉..."

시키지도 않았는데 듀란이 뛰어나간다. 순간적으로 경매장처럼 잔혹한 광경이 펼쳐지지 않을까 눈을 감으려던 마리는 의외로 순둥이같은 듀란의 공격에 가만히 서서 지켜보게되었다.
듀란은 날카로운 송곳니를 사용하는 대신에 앞발로 강하게 후려치는 방식으로 착실하게 사내들을 제거해나갔고, 덕분에 마리는 아무 수고 없이 보석상에 입성（?）할 수 있게되었다.

"응? 아무도 없잖아, 도망갔나?"

힘들게 보석상에 들어온 마리는 허전한 가게를 둘러보며 중얼거렸고, 덩치큰 듀란은 여관에서처럼 문을 부수고 들어갈까 생각하다가 그냥 문 앞에 머물렀다.
한참을 뒤적뒤적하다가 작은 쪽문을 발견한 마리.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곳의 창고인듯한 장소가 나왔다. 안에는 여러 가지 보석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있었고, 자신이 던젼에서 가지고 나온 검들도 몇 개 보였다.

"아! 저기있다!"

길다고 말할 수 없는 수색 끝에 가방을 찾아내자 마치 10년전에 헤어진 가족을 만난듯한 표정이 되었다.

"혹시 안에서 뭐 꺼내간건 아니겠지?"

뒤적뒤적

잠시 뒤적거리다가 돈을 제외한 모든 물건이 그대로 들어있는걸 본 후, 주변의 자신의 검 세자루를 챙기고 나오다가 주변을 둘러보곤 중얼거렸다.

"이녀석이 내 돈을 전부 훔쳐갔으니... 몇 개 가져가도 되겠지?"

보석이란걸 제대로 구경해본적이 없는 마리였기에, 어떤 보석이 비싼지 알 리가 없었다. 이것저것 챙기고있는데, 익숙한 기운이 느껴졌다.

"뭐지... 이 답답한 느낌은..."

주변을 살피다가 금새 원인을 찾아낸 마리. 자세히 보니 동그란 구슬에서 어두운 기운을 흘리고있었다. 경매장에서 본 기운과 비슷했다.

"듀란에게 물어봐야지."

답답하긴 하지만 가방안에 집어넣은 후, 문득 옆의 진열대로 시선을 돌리자, 거의 아기 주먹정도 크기의 커다란 보석이 진열대에 홀로 전시되있는게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크기도 컸지만 굉장히 아름다웠다. 보석에 대해서 잘 모르는 마리였지만,
척 보니 다른 보석에 비해서 굉장히 세세하게 수공되어있었고, 처음보는 동물의 무늬가 새겨져있었다. 무엇보다 특이한건 붉다고 생각하면 붉게보이고 푸르다고 생각하면 은은하게 푸른빛이 감도는 특이한 색이었다.

"비...비싸보이네..."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마리는 그 보석을 조용히 가방안에 넣고 여러 가지 더 챙긴 후에 빠져나왔다.

"왜 이렇게 늦었어요?"

보석상에서 나와서 둘러보니 듀란 혼자 멀뚱멀뚱 서있고, 몽둥이를 들고있던 남자들은 아까와 같이 죄다 쓰러져있었다.

"그냥... 이것저것 챙겨왔지. 그럼 얼른 빠져나가자!"

처음과는 달리 듀란 위에 자연스럽게 올라탄 후 지체없이 마을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