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인 눈물이 흐르지 않는다.

방금 전 저녁을 먹을 때 토요일날 할아버지에게 다녀가겠다고 얘기했었는데, 조롱하듯 너무나도 갑작스럽게 연락이 왔다.


할아버지의 심박수가 떨어진다는 병원의 연락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하던 것 다 집어던지시고 바로 출발했다.

나는 벌벌 떨며 같이 가겠다고 했지만 아버지는 무너지실 자신의 모습을 자식에게 보여주기 싫으신 건지, 아니면 이번에도 나흘 전 그때처럼 곧 괜찮아지실 거라고 믿고 싶으셨던 건지 일단 집에 대기하라 하셨다.

어쩌면 시골에 잘 안 가던 내가 그곳으로 가는 것 그 자체가 할아버지의 영면을 뜻하는 거라 생각하셨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버지가 출발하신지 30분 후, 아버지가 도착하시기 30분 전 할아버지는 혼자서 떠나셨다.


한 달 전 할아버지 댁에 갔을 때만 해도 할아버지는 댁에 계셨다. 할아버지는 일어서는 것조차 힘겨워하셨다. 바다를 좋아하시기에 형이 근처 바닷가로 드라이브를 나가자고 했을 때 할아버지는 멋쩍게 웃으시며 일어서셨다가 넘어지셨다. 그때는 뒤에 있었던 내가 할아버지를 받았다.

다시 멋쩍게 웃으시며 이젠 집밖에 나가지 못하겠다고 말하셨을 때, 형언하기 어려운 느낌이 가슴팍에 맴돌았다.

그리고 다음날, 일과를 마치고 전화를 드렸을 때 할아버지는 아무렇지 않게 방금 할머니랑 같이 산책을 다녀오셨다고 했다. 걷기 힘드시지 않았냐고 묻자, 희한하게도 이날은 걷기 수월하셨단다. 늘 가시던 집 근처 참전용사 기념비에 다녀오셨다고 한다. 그분은 자기 이름이 적힌 그곳에서 묵상하시곤 하셨다. 다행이지만 무리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렸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할아버지는 마당에서 넘어지셨고 그 즉시 병원에 입원하셨다. 수술은 해야 되지만 그럼에도 이제 걷는 건 힘드실 거라고 했다.


곧 100세를 앞둔 연세이셔서 걱정했지만 할아버지는 거뜬히 받으셨다. 그 나이에 의연한 사람은 처음 봤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수술 후 경과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갑작스레 섬망이 생기시고 염증 수치가 치솟아 중환자실을 오가셨다.



수술 후유증으로 생긴 섬망 때문에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 못하셨지만 만나는 사람들에게 꼭 춥고 외롭다는 말씀을 하셨다.

단 한 번도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셨던 할아버지만을 기억했던 아버지와 형제분들은 그게 슬퍼 매일 방문했고, 집을 그리워 하시니 사흘 정도 퇴원을 시키신 다음 더 나은 환경의 병원으로 모시려 했다.

그런데 덜컥 코로나에 걸려버리셨다.

참 신기하다, 매일 같이 할아버지를 방문한 아빠 엄마 고모 큰아버지들 모두 음성이 떴는데 할아버지 혼자만 양성이 뜨셨으니. 왜 하필 할아버지가 걸렸어야 했나.

병원도 웃기다, 방역 때문에 면회에 30분 제한 걸어놓고 우리보고 나가라고 해놓고선 지들이 뚫려버리니. 어차피 뚫릴 거면 오래 뵙게라도 해주지.



수술 후유증으로 생긴 섬망 때문에 할아버지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 못하셨지만 나의 엄마 아빠랑 나만큼은 기억해주셨다.

한 주도 거르지 않고 매번 댁에 가서 자기 몸 상해가면서까지 열과 성을 다해 할아버지를 모셨던 아버지.

친딸처럼 할아버지를 돌보고, 할아버지를 위해 눈물을 흘려 할아버지가 기억하시는 유일한 며느리였던 어머니.

사촌들처럼 맛있는 음식이나 넉넉한 용돈이나 으리으리한 선물 하나 못 드리고 그저 할아버지의 옛 이야기만 들어주기만 했던 나.

그 강인하던 분이 병실에 들어온 나를 보자마자 내 이름을 부르고 눈물을 흘리셨다. 살면서 보리라 생각한 적 한 번 없는, 수십년 만에 처음 보는 할아버지의 눈물이었다.

나도 이제야 눈물이 흐른다.


할아버지는 한 달을 홀로 외롭게 보내셨다. 족쇄같은 보조기를 차신 것도 모자라 침대 바깥을 거닐지도 못하셨다. 늘상 똑같은 자리에 누워 똑같은 풍경만을 보셔야 했다. 그렇기에 더욱 할아버지의 외로움을 걱정하던 아빠는 마지막 순간 할아버지와 함께하지 못해 혼자 떠나시게 한 것을 한으로 여기신다.


미음이 혼란스럽고 무겁다. 각자의 고민으로 머리를 싸매는 친구들과 구심점을 잃은 가족들에게 내 속내를 말할 수 없다. 그저 웅크리고 눈물만 참을 수밖에 없다.

해가 뜨는 시간이 무서워진다. 할아버지를 모시고 계실 아빠를 뵈어야 하는 게 무섭다. 할아버지를 닮아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신 아버지는 요 한 달간 심신이 약해지셨다. 강인한 모습만을 보였던 아버지의 약한 모습을 뵙는 것이 두렵고 그분을 어떻게 지탱해야 할지 모르겠다. 사흘 간 내가 가족들 앞에서 눈물을 참을 수 있을까.

호흡기 문제로 같은 병원에 뒤이어 입원하신 할머니에게 할아버지의 영면을 어떻게 알려야할지 모르겠다. 늘상 할아버지와 투닥거리시던 할머니가 한 번만이라도 할아버지를 뵙고 싶다고 말씀해오셨던 것을, 병원에 입원한 후에도 매일같이 할아버지의 중환자실을 서성이시던 것을 아는데 어떻게 말씀을 드려야 할까.


우스갯소리로 지껄였던 원통하다는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올해가 되어서야 할아버지께서 그토록 염원하시던 온 가족이 모여서 사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보시면 행복해 하실 게 이리도 많이 남아 있는데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보시고 느껴야 했던 건 쓸쓸한 것들 뿐이라는 게 너무나도 원통하다. 그동안 받아온 은혜를 이제 더이상 갚을 수 없다는 게 너무나도 원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