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반가워.
본명을 밝힐 수는 없고.
이혼하고 재혼한 남자니까.
스스로를 말할 때 "이재남"이라고 할게.

며칠 전 어줍잖은 글을 올렸는데
너무 과한 관심을 받은 것 같네.
원래 쓰려고 했던 건 그게 아니었어.

웃대에 올라오는 글을 보면 이혼에 관한 글이 종종 올라오곤 하잖아.
주로 이혼을 해야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에 관한 글이 많았던 것 같아.

세상에는 사람 수 만큼의 만남과 이별이 있을거라 생각해.

내 작은 머리통, 짧은 식견, 그리고 좁은 마음으로 그 만남의 소중함과 헤어짐의 아픔을 어찌 다 헤아릴까?

헤어짐.
특히 이혼.
소중함과 행복을 쌓아가다가 어느 순간부터 무너져 내리면서
그것을이 미움과 무관심으로 치환되어
임계점에 이르면 결국 헤어지는 과정.

나는 다른 사람들이 결정하려는 이혼의 가부를 종용할 생각은 없어.
그럴 자격도 없고.
선택은 오롯이 본인들의 몫이니까.

다만 내가 부족한 글을 휘적휘적 적는 이유를 굳이 말한다면
이혼을 하려는 사람들이 잠시 돌아볼 수 있는 아주 작은 계기가 되거나
헤어짐의 아픔속에서 다시 일어서기 힘든 이들에게 다독임이 될 수 있기를 바라기때문이야.

저번 글과는 다르게 좀 많이 칙칙하고 어두운 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해맑고 싶은 사람은 뒤로가기.
긴 글 지루한 사람도 뒤로가기.
칙칙한거 노쌩유인 사람도 뒤로가기.

난 경고했다.

...

들어간다.

...

2006년 가을 어느 날 이혼 당일

한달의 숙려기간이 지난 확정기일 당일이었지.
정신이 없었던 것 같아.
회사에 연차 내고 늦지 않으려 한 시간 쯤 일찍 나갔어.

썰렁할 줄 알았던 가정법원은 월말 은행때처럼 사람이 바글바글 했다.
대기표를 뽑고 전처가 오기를 기다렸지.

그냥 멍 했다.
육체적으로 나는 숨쉬고 심장이 뛰고 있으니 살아있는게 맞는데
심정적으로는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무생물에 가까운 상태였던 것 같아.

전처가 왔어.
말 없이 한 칸 떨어져 앉더라.

차례가 왔고 가사 몇부라고 써진 방에 들어가니
커다란 책상에 몇명 앉아서
주민등록증으로 본인 여부 확인하고
"협의이혼 의사 확인하겠습니다. OOO씨 합의 이혼 동의 하십니까?"
"네"
"이재남씨 합의 이혼에 동의 하십니까?"
"예"

끝이야.
이혼절차의 끝이고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12년간 함께 했던 시간의 종지부였지.

법원을 나서며
"신고는 내가 할게."
라고 말했고
전처는 뒤돌아 보지도 않고 가더군.
급하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냥 어디 볼 일 보러 가는 것처럼...
그 모습이 너무 여상스러워서

이제 남이구나 했어.

바로 구청으로 가서 이혼신고를 하고
숙려기간 중에 계약하고 짐을 옮겨둔 오피스텔로 갔지.

널부러진 짐들을 대충 밀어 치우고
이불도 없는 맨 침대에 누워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퇴근하고 오피스텔에 왔는데
별 감흥이 없어서
이혼 별거 없구나 했지.

이혼하기 전에도 같은 집에 살았어도
서로 무관심해진 후에는 별로 다를게 없었거든.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나니까
이건 아니다 싶어서 짐들도 정리하고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아서
마트에 갔어.

필요한 건 많은데
다 하나씩만 사면 되더라.
컵도 한개
수저도 한벌
칫솔도 한개
슬리퍼도 한켤레

...

일상은 그다지 바뀌지 않았어.
출근해서 일하고 퇴근해서 책 보다 잠들고
그냥 그런...

일주일 지났을까?

칼퇴근하고
출출한데 시켜먹기는 질리고
오피스텔 옆에 반찬가게가 생각나서
된장찌게에 밑반찬 몇 가지 사왔지.

서랍처럼 열어 빼는 식탁 위에
반찬 몇개 올리고 보니
된장찌게가 너무 차네.

작은 냄비에 된장찌게 부어 올려서 가스렌지를 켰지.

따따따닥...

물끄러미 된장찌게를 바라봤어.
가지런히 썰린 호박하고 두부...

첫 된장찌게는 굉장히 짜고 맵고 텁텁했지.
서투른 칼질로 손이라도 베일까 뒤에서 조마조마하게 쳐다보고 있으니
창피하다고 TV나 보고 있으라고
다 되면 부른다고 그랬어.
삐뚤빼뚤 썰린 호박이 왜 그렇게 이뻐보였는지 모르겠다.
그 된장찌게가 전처의 첫 된장찌게였고
나에게는 세상 맛 없지만 가장 행복한 된장찌게였어.

그렇게 무너졌다.
나는 무너져 내렸어.

아침에 일어나
양치하려 손 뻣으면
칫솔은 하나뿐이야.

퇴근하고 오피스텔에 돌아오면
슬리퍼는 한 켤레.

커피 좀 타 마시려면
컵은 한개.

일상이 이어지지 않아.

12년동안 함께하며 축적되었던 일상의 조각들이
모든 순간 겹쳐지더라.

그 조각들이 너무 예뻐서
오장육부 애간장에 하나씩 와서
날카롭게 박히더라.

그래.
그건 그렇다고 치자.
추억 하나 없는 사람 어디있겠냐.
이렇게 되버렸으니
이 악물고 버텨야지.

...

정말 최악은

정말 미쳐버릴 것 같은 건

전처를 슬프게 했고, 화나게 했고, 섭섭하게 했던 모든 머저리 같았던 나의 말과 행동들이
별거 아니어서 잊혀진 것 같은 그 모든 하나 하나가
사진처럼 선명하게 기억에 떠올라서
내 마음을 죽게 한다는거야.

기억 속의 이 머저리 같은 새끼는

소중해서 평생을 함께 하자던 여자를
무안하게 하고
화나게 하고
슬프게 해.

그게 너무 미안해서
그제 정말 사무치게 후회되서

미안하다고 말해도
들어줄 사람이 없다.
받아줄 사람이 없다고

항상 옆에 있던 사람인데
이제는 없다.

기억 속에 그 새끼를 죽여버리고 싶었지.

그런데 그게 나야.

그렇게 자기혐오에 빠지게 되더라.

배가 고파.
밥이 넘어가냐 미친놈아.

TV를 보다 웃음이 나와.
웃을 자격이나 있다고 생각해?

몇 달을 그렇게 보내니까
폐인처럼 되버리더라.

그러다 친구가 찾아오더라.
전화도 안받고 문자도 씹고
사회생활은 출근말고는
두문불출하던 내가 죽었는지 걱정이라도 되었는지
오피스텔 주소 어찌어찌 알아서 찾아왔다.

이런 나라도 찾아와준게 고마워서 문 열어줬더니
내 몰골 보고는 멱살 잡고 끄집어 내더라고.

대포집에 츄리닝 바람으로 끌려가서
친구 앞에 묵묵히 죄인처럼 앉아있었다.
따라주는 소주 어거지로 두어잔 마셨지.

술이 약해 얼굴이 화끈거리더니
뭐가 망가진 것 마냥
눈물이 줄줄 흐르더라.

내가 친구한테 처음 한 말이

살려줘...였다.

퉁명스러운 말 한마디에 서운해 하던 전처의 표정이
몇번을 불러도 대꾸가 없어 화내던 얼굴이
무심한 말에 서럽게 울던 그 모습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아.
죽을 것 같아.
살려줘.
이런 뜻이었는데

친구에게는 다르게 들렸나봐.
한참 설교를 들었다.
주량을 넘게 술을 먹고 기억도 잘 안나더라만은
그날 친구 마지막 말은 기억에 남는다.

"후회되면 ....어쩌구...시불시불....궁시렁.... 그럴 용기...없으면...저쩌구...허우적대지 말고...아줌마 여기 소주 한병!!!...궁시렁... 애도 아니고. 스스로 일어나라. 시펄늠."

다음날 숙취에 머리가 깨질 것 같은데
스스로 일어나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마음에 와서 박히더라.
시펄늠하고.ㅋ

뭔가 해보려는 최소한의 노력도 해보지 않은 것 같아서 부끄러워지더라.
기억속에 갖혀 허우적 거리며
상심한 내 모습이 가여워서
자기혐오가 아닌 자기연민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치가 떨리더라.

뭔가 해보려고 원래 좋아하던 책에 더 매달리고
운동도 시작했다.

하루 아침에 추억과 미안한 마음이 정리되지는 않더라.
그게 되면 사람이겠냐마는
친구놈 말마따나
옆에 없는 사람은 이제 지우고 있는 사람들 생각해야지.

사실 뾰족한 방법은 없었어.
지나간 기억에 멈춰질 때

이를 사려물고 버텼다.

전처에게 다시 연락할 마음이 들지 않았던건 아니야.
용기가 없었지.
이혼 전 서로의 무관심이 흘러 패인 골이 너무 깊어 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리고 다시 연락하지 않은 것을
한편으로는 정말 잘한 일이라고 생각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으니까.

...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내가 주변에 조금씩 마음을 돌리게 되니
일상에서 멈춰지는 순간이 조금씩 줄어들었지.

이제는 말야.

그때 기억들은...

아침에 출근할 때 들고간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다.

두어모금 마시고 책상 위에 올려놓고
일하느라 한참을 깜빡하고 있다가
무심하게 손을 뻣어 한입 마셨는데
얼음 다 녹아서 밍밍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말야.

세월이 흐르니까 그다지 달달하지도 않고 그렇게 쓰지도 않아.
얼음 다 녹은 아아 같다는 말이지.

그때는 세상 다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아니야.
세상은 잘 돌아가.
내가 무너진거였지.

그래서 스스로 일어나지 않으면 안되는 거였나봐.

...

혹시 비슷하게 아파하는 웃대 친구들아.
결국 일어나지더라. 그럴 수 밖에 없어.
너무 아파하지마라.

...

그리고 이혼이나 헤어짐을 준비하는 웃대 친구들아
곁에 있을 때 최선을 다 해봐.
그 마지막이 이별이라 하더라도
할 수 있는건 해봐.
이건 정말 충고야.
헤어져서 아픈건
추억보다 상대방을 아프게 했던 내 모습때문이었다.

헤어지게 되면 그런 모진 행동들이 고스란히 돌아와서
마음을 죽이게 된다.

스스로 후회를 남기지 않게 최선을 다하길 바래.
부디 그러길 바란다.
그거 정말 힘들거든.
감당 안된다.

...

마치면서

시 한수 읊어 줄게.

바위라는 시야.

맑은 햇살, 눈부신 봄날에도 몸 풀어 웃지말기.
세찬 바람, 사나운 폭우에도 젖어들지말기.
그렇게 살다가, 마침내 커다란 마음, 무거운 중심되기.

물론 나는 차가운 도시 남자에 눈물도 별로 없어서
시 따위 창작하지 않해!

이건 대학시절 도서관 담벼락
음담패설과 잡스러운 낙서 사이에 적혀있던 시야.
누가 지었는지 모르지만
그 후 계속 마음에 남더라.
혹시 누가 지은 시인지 알면 좀 알려주라.

힘들 때 내 멱살 잡아 캐리해준 글귀였어.

그렇게?
살았는지는 모르겠다.
와이프가 헤실헤실 웃으면 나도 저절로 우헤헤헤 하게되. 넘므 예쁘니까.
세찬 바람? 사나운 폭우? 어후 세.상.왜.이.렇.게.빡.세!!!!!!!!!!! 이런다.
커다란 마음도 아직 먼 것 같고
무거운 중심은 좀 되는 것 같아.
마흔 넘어서 살이 좀 찌네. ㅋ

뭐 획기적인 결말이 아니어서 미안하다.
하지만 사는게 다 그렇잖아.
결국은 추스려 일어나게 되더라.

아!!!
그리고 혹시
주변에 이재남씨 있다고
"니가 그 새끼야?"
하지말어.
장담하건데 그게 나는 절대 아닐거야.
나는 본명을 밝힐 수 없다고 이야기 했고
"이"혼하고 "재"혼한 "남"자
이재남인거야.

다음에는 그 후에 연애하고 결혼한 이야기 적어볼게.
근데 이건 와이프 허락을 받아야 하니까 못 올릴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