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연휴도 끝나고 심심해서 내 썰하나 풀어볼까 함.


일단 본인은 귀에 문제가 좀 있는 사람임.
심각한 건 아니고 때때로 이명이 들리고 소리가 잘 들렸다가 안 들렸다가 하는 정도?


가끔씩 급성기 반응이 오기도 하는데 반응이 오면 어지럼증이 동반되면서 눈앞이 빙빙 도는데, 서 있기도 힘들 지경에 도달할 때도 있긴 함. 심할 경우 입원을 해야 할 경우가 오긴 하긴 하는데 이건 아주 가끔 일어나는 일이라 별로 상관은 없음.


아 물론 군대는 다녀왔다. 첫 신검 받으러 가보니까 7급 뜨더니 재검받으니까 3급만 3개 뜨면서 현역 갔다 옴 시발ㅋㅋㅋㅋㅋ


아무튼 몸뚱어리가 이런 상태라 살면서 여러 가지 애로사항이 많은데, 학교에서 수업 들을 때도 좀 불편한 점이 많음. 교수님이 중요한 부분을 강의하는 중에 이명이 들리기 시작하면 그 부분은 사실상 전부 놓치는 거나 다름이 없어서 나로서는 놓친 부분을 다시 복기하려면 수업을 녹음 하는 수밖에 없음.


그래서 학기 초마다 처음 들어보는 교수 수업이 있으면 그 교수님 연구실에 찾아가서 녹음 허락을 받는데, 그 이야기를 풀어볼까 함.


근데 요즘은 그냥 허락 같은거 안받고 대놓고 녹음하는거 같더라 ai 요약 같은것도 많이 쓴다며? 세상이 참 좋아진거 같음.



1. 당황한 교수

이 교수님은 이번 학기에 새로 부임한 젊은 교수였음. 나이가 아마 9X년생이었던걸로 기억함. 찾아가기 전날에 상담 같은 걸 하고 싶다고 메일을 드리고 찾아갔었는데, 내가 무슨 이유로 상담을 하는건지는 정확히 안 알려서 그런지 자리에 앉자마자 내가 다짜고짜 진단서부터 내미니까 많이 당황해하시더라.

진단서 내용 읊으면서 “이런저런 이유로 녹음이 필요합니다.”라고 하니까 교수가 어쩔 줄을 몰라 하시더라. “그래요. 그렇게 하세요.”라는 말만 반복하시면서 말을 저시기도 하고 계속 말을 얼버무리시는 데 이 자리를 빨리 빠져나가고만 하고 싶어 하시는 거 같더라.

요즘은 사회적 약자들한테 이상한 말을 하면 나락을 가는 게 사회 풍조가 돼서 그런지 단어 선택 하나하나가 매우 조심스러운 게 느껴졌었음. 그 뒤로 아주 사무적인 대화. “수업은 따라갈 만하냐.” “학교생활은 어떠냐.” 이런 영양가 없는 대화만 몇 개 주고받다가 상담이 끝났음.

마지막 말로 “힘내세요.”라고 말씀을 하시고는 나를 내보냈는데 사람 자체는 그래도 착한 사람인 거 같았음.



2. 신기해하는 교수

이 교수는 부임한 지 몇 년은 된 교수였음. 그래도 젊은 편에 속했는데 마찬가지로 연구실 찾아가서 진단서 보여드리니까 진단서를 여러 번 되짚어 읽어보시면서 세상에 이런 증상도 있냐고 아주 신기해하셨음.

진단서를 다 읽으시고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10초 동안 쳐다보셨는데 그 눈빛이 아직도 기억남.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 같기도 했고 나를 능멸하는 눈빛 같기도 했음. 10년 같기만 했던 10초가 지나고 교수가 딱 한 말은 “그래 알았다.”였음.

그러더니 교수가 “일단 녹음은 허락해 주는데, 만약에 너가 이 증상을 빌미로 계속 수업을 빠지고 병결, 조퇴를 한다면 나는 그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지?”라고 말했는데, 아마 진단서에 나와 있는 급성기 반응에 관한 내용을 주의 깊게 읽은 듯했음.

내가 “제가 나쁜 마음을 먹는다면 계속 병결을 하는 게 가능하긴 하겠지만... 그렇지만 저는...”이라고 말하며 말끝을 흐리니까 교수가 한번 웃더니 “그런 일이 생긴다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면서 나를 보내며 상담이 끝났음.

이 뒤로 난, 이 교수가 뭔가 무서워서 한동안 피해 다녔음.



3. 바람직한 교수

1번 교수와 마찬가지로 이 교수도 이번에 새로 부임한 젊은 교수였음. 이 사람은 진단서를 읽어보시더니 나를 불쌍히 여기는 듯했음. “그럼요! 당연히 허락해 줘야죠. 이거는!”이라면서 흔쾌히 허락해 주시더라. 그러곤 “귀가 안 좋으시면 수업을 잘 들으려고 맨 앞에 앉으시겠네요?”라고 물어보는데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하니까 되게 좋아하시더라.

곧이어 또다시 “수업은 따라갈 만하냐.” “학교생활은 어떠냐.” 같은 사무적인 대화가 이어졌는데 나는 이 사람도 이렇게 영양가 없는 대화만 하다가 상담이 끝날 줄 알았음. 근데 처음으로

“취미가 뭐예요?” 라는 소리가 들리더라. 지금까지 많은 교수들을 만났지만 이걸 물어보는 사람은 이 사람이 처음이었음.

아무래도 몸이 안 좋아서 격한 취미 같은 건 가지지 못하니 주로 가만히 할 수 있는 취미. 즉, 책 같은 걸 읽는 걸 좋아한다고 하니까 교수가 갑자기 화색 하더라. 자기도 책 읽는 걸 좋아한다면서.

그렇게 갑자기 상담 자리가 독서 토론 자리가 되어 버렸음. 서로 좋아하는 작가나 감명 깊게 읽은 책 같은 걸 말하면서 책 이야기를 굉장히 많이 했음. 교수는 헤르만 헤세를 좋아하고 금각사를 재밌게 읽었다고 하더라. 나도 감명 깊게 읽은 책 제목을 말하니까 교수가 처음 들어보는 책이라면서 자기도 나중에 한 번 읽어보겠다면서 메모지에 적기까지 하셨었음. 거의 1시간 동안 떠들었었나? 나도 꽤 재밌는 시간이었음.

아무튼 상담이 다 끝나고 교수가 오늘 재밌었다고 다음에도 이렇게 책 이야기 좀 하자면서 가끔 자기 연구실로 놀러 오라고 했음. 이때는 그냥 하시는 말씀인 줄 알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는데.

상담을 하고 이틀 뒤에 그 교수 수업이 있었다? 그 수업 쉬는 시간에 교수가 내 앞으로 다가오더니 잠깐 자기 좀 따라와 보라는 거야 그래서 따라갔더니 자기 연구실로 데려가더라고

그러고는 연구실 책장에서 책 3권을 뽑으시더니

"그때 책 읽는 거 좋아한다고 했죠?"라면서 자기가 재밌게 읽은 책이라고 한번 읽어보라면서 그 책을 나한테 주시는 거야. 그러곤 다 읽으면 책 돌려주고 돌려주면서 감상평 좀 말해달라고 하더라고.

책을 읽는 건 문제가 아니긴 한데... 교수랑 학부생이 이런 행동을 많이 하나? 뭔가 이거 아주 잘못 걸린 거 같다는 느낌이 들더라. 이런 경험은 처음 해봐서 많이 당황스럽고 부담스럽기도 했고... 책은 다 읽었고, 책도 돌려드렸고 돌려드리면서 감상평은 나중에 말씀해 드린다고 했는데, 다시 찾아가는 일은 없었고 졸업할 때 까지 그 교수님 피해 다녔었음... ㅋㅋㅎㅎ!



4. 기분이 좋은 교수

이 사람은 나이가 좀 있는 교수였음. 역시 관록이 있는지 나를 딱 보고는 “내가 너 1학년 때도 봤던 거 같은데, 왜 지금 와서 이제야 말하는 거냐?”라고 하시더라. 그때는 사실 내가 수업을 잘 안 들을 때라 그냥 말을 안 했던 거거든? 근데 이걸 그대로는 말할 수 없으니.

“교수님은 발성도 좋으시고 목소리도 크고 발음도 좋으셔서 그때는 굳이 녹음할 필요성을 못 느꼈었습니다. 근데 지금은 증상이 좀 심해져서 어쩔 수 없이 교수님 수업도 녹음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니까 교수님이 존나 좋아하시더라.

“내가 목소리가 좋긴 하지! 하하하!” 아주 기분이 좋으셨는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막 하시더라고. 자기가 군 생활을 할 때 동기 중에 나 같은 사람이 한 명 있었다는데 걔도 사격 훈련은 다 열외 받았었다. 그때 쓰던 소총은 카빈 소총이었었는데 너무 똥총이라 제대로 쏴도 잘 안 맞았었는데 자기는 그런 악조건 속에서도 항상 만발을...그렇게 교수님의 궁금하지도 않은 군대 썰을 30분 가까이 듣기만 하다가 상담이 끝났었음... 이런 씹.



5. 검열 교수

이분은 정년퇴직까지 몇 년을 안 남긴 사람이었음. 그리고 처음으로 대놓고 달갑지 않음을 표시한 사람임.

진단서를 보여드리고 녹음 좀 해도 되냐고 물어보니까 그건 안된다는 뉘앙스로 “그건 좀 곤란하다”면서 불쾌함을 표시하시더라.

호의적이지 않은 사람들은 많이 봤지만, 대놓고 불쾌해하는 사람은 처음 봐서 나로서는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었음. 진단서까지 보여 드렸었는데. 이게 안 통하는 사람은 처음이었거든.

내가 중요한 부분을 놓치면 큰일 난다고 녹음이 꼭 필요하다고 더 말해보니까 이번엔 교수님이 그러더라. 혹시 녹음본을 중간중간 자를 수가 있냐고.

내가 가능하긴 한데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자기가 수업 중에 학생들을 많이 꾸중한다는 거야. 혹시라도 내가 그걸 녹음해 어디에다가 유포할까 무서워하시는 거 같더라고. 내가 그런 건 당연히 가능하다고 하니까, 그럼 녹음본을 검열하는 조건으로 수업을 녹음하는 걸 허락해 주셨었음.

뭐, 수업 중에 꾸중이야 하실 수도 있는 거고 그 정도야 뭐 아무것도 아니지 라고 생각 했었는데.

이 교수님을 오티만 들어보고 찾아갔었던 거거든? 본 수업 들어가 보니까 그냥 미친놈이 따로 없더라.

수업 제대로 안 듣거나 졸고 있는 학생 있으면 이름 부르면서 혼내고 인격 모독은 기본에 부모님 얼굴에 먹칠하는 거라면서 부모님 이름까지 들먹이고 중간중간 문재앙이가 뭐시기... 이죄명이 뭐시기... 라면서 정치 이야기까지 서슴지 않으시더라.

그러면서 쉬는 시간마다 나한테 와서는 “아까 내가 했던 말. 지우는 거 알지?”라고 꼭 한번 씩 말하는데. 이 사람 수업을 더 들으면 진짜 정신 나가 버릴 거 같아서 드랍해버렸음.

이런 씨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