딱히 몰랐던 건 아니긴 하지만 장남이란 게 대단하긴 대단한 거 같다.
우리 형은 직업이 항해사인데 매년 9월 초순-중순때쯤에는 입국을 했었거든.
그런데 이번엔 인맥파워를 다 끌어써도 어떻게 안 되었는지 입국하는데 실패했음.
그에 따라, 형이 하던 걸 내가 해야 했는데 완벽하게 실패했다.
뭐 대단한 건 아니고 명절이 평시에 비해 유독 힘들었다고 하는 게 맞겠지.
매년 이맘때쯤에 우리 형제는 서로에게 1회씩 져주는게 일종의 연례행사거든.
내가 친어머니에게 어려운 아들이다보니, 찾아 뵙기가 아무래도 껄끄러운데,
형은 명절에 친 어머니를 방치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거든. 그런데 어쨌든 나도 어머니 아들이잖아.
그래서 그런가 무슨 수를 써서든 나를 예쁘게 포장해서 어머니에게 끌고 가는 게 형이 매년 하는 일이야.
그렇다고 해서 내가 어머니 앞에서 재롱을 부리는 귀여운 아들이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지.
그...알런지 모르겠는데 약 20년을 항해사로 일하면 연봉이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거든.
우리 집이 선박업쪽으로 인맥이 있는 집이라서 형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 쪽 업계쪽으로 직업을 정한거야. 업계에서 인격자로 소문이 자자하셨던 조부님 덕분에,
내가 높은 사람을 알고 있지 않아도 그 높은 사람이 우리가 조부의 손주라는 것을 알고,
조부께서 우리 형제를 각별히 아끼셨다는 사실 덕분에 알게 모르게 누리는 특혜라는 게 있거든.
한 마디로 형제가 나란히 조부라는 동앗줄을 부여잡는 것을 선택한 거지.
그래서 내가 하는 일이라곤 그냥 형한테 한번 져주고
어머니를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는 게 전부야.
형이 준비한 "무뚝뚝하지만 그래도 어머니를 생각하는 차남"이 준비한 선물을
어머니께 전달하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 몇 마디 주절거리고 형이 준비한 고가의 음식을 먹고
형이 어머니께 부리는 재롱을 보면서 저 효자 짓거리의 1/4만 해도 아버지가 참 좋아하실텐데...
이런 생각이나 하고 어머니네 집에서 1박을 묵고 돌아오는 게 전부지.
즉 숨을 쉬고 있는 게 내 역할의 전부야.
그 다음에 내가 하는 일이 있는데 일단 형이 이 짓에 무조건 져줘.
그런 형의 멱살을 붙들고 대전역에 내려서 시외버스를 타고 아버지에게 가지.
그리고 아버지랑 식사를 하면서 무뚝뚝한 경상도 남자 3인+넌왜옴의 조용한 식사 시간을 보내고
경우에 따라 몇가지 일을 좀 더 하다가 그 다음엔 부산에 내려와서 볼일을 보는거지.
가능하다면 이렇게 따로 따로 식사하고 그러는 것 보다야,
가족 4인이 모여앉아 식사를 하는 것이 이상적인 그림이라는 건 나도 알지.
그래서 내가 형한테 져주는 거고, 형도 나한테 져주는 건데, 문제는 아버지가 져주질 않아.
그런데 딱히 아버지에게 원망을 품고 있다거나 그렇지는 않아. 아버지에겐 사정이 있으니깐.
그 사정이란 게 우리 형제가 어떻게 해결할 수 없는 "새로운 아내"의 남편이라는거지.
아버지 집에서 1박을 보내지 않는 이유도 계모와 우리 형제의 사이가 단순하게
사이가 나쁘다, 정도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쁘다는 게 한몫 단단히 하거든.
솔직히 이건 계모와 내 책임인데, 계모와 계모 아들놈이 날 하도 무시하길래,
충청도에서 내려온 놈이 부산 토박이에게 깝죽거리면 어떤 경험을 하게 되는지를
내가 아주 상세하게 알려줬거든. 그래서 계모의 아들은 경남지역 친구가 아예 없어.
나는 그냥 아는 동생들에게 몇대 쥐어박아주라고 이야기했는데 잘못 알아들어서...
내가 상황을 전해듣고, 사태를 수습해 보려고 나섰을 때는 이미 늦어 있었어.
이미 따돌림이 너무 심해진거야. 내가 친하게 지내라, 라며 사태를 수습하려 해도,
왕따가 은따로 변할 뿐이지, 이미 무리에서 배척된 놈이 다시 일진이 될 순 없었는데...
생각해 보면 여자한테 술 먹인 다음 관계를 갖던 놈이니깐 별로 동정심은 안 드는데,
뭐가 어찌됐든 방아쇠를 당긴 건 나고, 손에 건 파우더가 묻어 있는 놈 역시 나인거지.
아는 동생을 협박해서 무슨 일들이 있었는지 들어 본 결과 어쨌든 내가 과했어.
애당초 내 계획을 듣고 그렇게까지는 하지 말라고 반대했던 형의 말을 들었어야 했지.
왜 부산 토박이 집안 출신인 아버지가 충청도에 계신지, 단번에 이해가 가지?
그에 대한 원한인지 계모가 식사자리에 항상 따라 나오거든. 이게 문제가 되는거지.
한번은 형이 져주려고 했었단 말이야. 자기가 만나고 있는 여자가 있는데 만나보실 의향이
있으신가하고 물어본 적이 있어. 바다에서 생활하는 놈이 어떻게 육지여성을 꼬셨는진 몰라도.
그런데 계모가 그때 이렇게 말했어. 그 잘난 니 어미한테나 보여주라고.
아마 그 자리에 내가 없었으면 형은 9시 뉴스에 나왔을거야.
참치집에서 중년 여성을 때려죽인 30대 남성 A씨 뭐 이런식으로...
벌떡 일어나선 병을 잡길래 그거 안 놓으면 나는 내년부터 어머니한테 안 간다, 라니깐
바로 놓고 앉더라고. 이 문장이 우리 형 한정으로는 치트키 같은거라서...
이런 점에서 보면 참 단순한 인간이라고 해야 할지... 형은 어머니가 삶의 이유니깐.
뭐... 분위기는 화기애애하게 참치나 먹을 수 있는 분위기가 아니게 됐지만...
그런데 정작 계모 아들딸이랑 나랑은 사이가 나쁘진 않거든. 충청도로 이사를 간다길래,
그 쪽으로 이사한 친구놈한테 내 동생이니 잘 좀 봐달라해서 남은 2년의 학교 생활은
지나칠 정도로 편안하고 안락하게 지낼 수가 있었거든. 계모딸 역시 마찬가지고.
물론 술 먹이고 여자한테 이상한 짓거리나 하던 버릇 또 하면 또 이사를 가야 하게 만들거라 했지.
그거 범죄거든. 항거불능 상태에 놓인 상대에 대한 준 강간이라고 해서 강간과 동일한 처벌을 받어.
어쨌든 계모가 식사 자리에 함께 앉아 있으면 형이랑 아버지가 화해를 할 수가 없거든.
형이 져주는 건 나한테 져주는 것이지, 아버지나 계모에게 져줄 의사는 전혀 없으니깐.
정확히는 미약하게나마 아버지에게 져줄 의사가 있긴 했는데 계모가 없애 버렸지.
그러니깐 아버지가 우리한테 한번만 져주고 딱 한번만 계모를 떼고 본인만 나오시면,
우리 형제의 형편없고 소박한 동경을 이룰수가 있는거야. 뭐 대단한 것도 아니야.
그냥 중국집에 4인 가족이 둘러앉아 시시껄렁한 이야기나 나누면서 짜장면 먹는거지.
남들은 숨쉬듯이 당연히 하는 그거 있잖아. 가족이랑 모여앉아서 밥 한끼 먹는거.
원래는 할머니를 포함해서 5인 가족이 모여앉아 식사를 하는 게 동경이었는데
할머니는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자리는 공석이 되어버렸단 말이지.
얼마전에 웃대에 적었지만, 세월이 흐르다 보면 사람이란 건 후회라는 형태로 남게 돼.
우리 형제가 나이를 제법 먹었기 때문에 이 동경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은 제한적이거든.
어머니가 지병으로 당뇨를 가지고 계시기도 하고 아버지도 마냥 건강하지는 않으시니깐.
아무튼간에, 장남인 형이 공석이었던 올해는 어머니를 찾아뵙는다라는 첫 단계에서부터
스텝이 꼬여서 엎어져 버렸거든. 어렸을 적부터 생각한 거긴 하지만 형은 참 대단한 거 같아.
난 내가 싫은 걸 할때면 얼굴에 다 드러나는데 형은 전혀 내색하지 않을 수가 있으니깐.
가끔은 이 인간... 마음속에 응어리가 풀어진건가, 싶은데 형도 자리가 파하면 바로 티를 내.
형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고 강렬하게 부정하는 말이지만 형은 딱 아버지를 닮았거든.
이것도 참 웃긴 이야기지.
어머니와 서먹서먹한 내 성격과 외형은 어머니 쪽을 많이 가져온 건데,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은 형의 성격은 그냥 아버지 리즈시절 그 자체거든.
언젠가 아버지가 드시고 싶다하신 대방어를 먹으면서 형한테 좀 져줄 순 없냐 그러니깐,
이 새끼는 대체 왜 따라 나온건지 알 수 없는 계모 아들내미가 그러더라고.
자기 어머니가 돌아가시지 않는 한 형（나）이 생각하는대로 잘 풀리지를 않을거라고.
아무튼간에 이번 명절은 좀 힘이 들더라. 싫어도 가족인 사람들과 같이 보내던걸
인터넷과 함께 보내고 있으니깐 좀 짜증이 나더라고. 그 사람들 잘못은 1도 없는 건 아는데,
마치 모든 사람들이 명절을 가족들과 화목하게 지내는 것처럼 인사하고 있는 매스미디어가
좀 매스꺼웠다고 해야 하나? 뭐, 근데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할 순 없잖아.
"아직, 가족과 사이가 서먹하신 분들께는 유감이지만 다들 행복한 한가위 되세요~."
사실 명절에 이에 관련된 글을 수십번이나 적었다가 지웠다가를 반복했어.
괜히 잘 지내고 있는 사람들 기분까지 잡칠 필요는 없는데 도저히 유쾌한 척 마무리를 못해가지고.
근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순 있는 곳은 딱 3개 뿐이야 AA모임, 친구, 웃대...
근데 AA모임에는 이미 써먹었고, 친구는 십여년을 내가 명절날 뾰루퉁해 있는 걸 알고 있으니깐
웃대에다가 적으면서 내 가슴에 응어리질만한 걸 풀어내 보는거지.
이게 내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자 트라우마를 극복하는 방법이거든.
꼭 웃대여야 할 필요는 없어. 어딘가 적거나 누군가에게 말하면서 풀어내는 거야.
일종의 방어기제지. 나는 이걸 타인에게 가감없이 이야기 할 수 있다.
그러니깐 이건 사실 별 것도 아닌 이야기다.
이해가 안 될수도 있지만 말하는 것보다 적는 쪽이 훨씬 더 잘 해소가 돼.
나는 글을 잘 적지 못 하는 사람이라서 여러차례 수정하는 인간이다 보니깐,
이걸 여러차례 수정하고, 정리해가며 적다보니깐 더 잘 풀리는 거 같아.
그나저나, 제법 쓸만한 라임이라고 생각하지 않아?
매스꺼운 매스미디어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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