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날이 밝기 전 돌려보내 달란 황제의 전갈이 있었습니다."
"쟈벨린을 보내 두어라."
"아가씨께선……."
[아바디가 되어 주세요.]
[아빠 딸이라서 좋아요.]
'어떻게 너를 품에서 떼어 놓은 채 살았을까.'
"르블레인."
[이 아이가 당신에게 사랑이 얼마나 위대한 감정인지 알려 줄 날이 분명 올 테니까.]
당신이 맞았어, 리세트.
[그것 봐요.]
그래, 당신이 옳지.
당신은 늘 옳아.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나는 이 아이를 안아 줄 당신이 간절하다.
188화
"듀블레드 가의 르블레인 님 드십니다."
"꺄악-!"
후보자의 머리 위로 찻물을 부어버렸다.
후보자는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되어 부들부들 떨었다.
"이, 이게, 이게 무슨 짓-!"
"밖에서 듣자 듣자 하니까 별소리를 다 지껄여서."
"뭐, 뭐라고?!"
"이게 무슨 짓이오! 안나멜리사, 괜찮으냐. 응? 세상에, 이게 무슨 꼴……!"
"겁 없이 지껄인 게 영애만의 생각은 아닐 거야, 경."
"무, 무슨 말을……."
"듀블레드에 경고는 한 번뿐이야. 알량한 재산이나마 지켜서 입에 풀칠하고 싶으면 제대로 생각해. 그 많은 돈을 듀블레드에서 융통받은 주제에 허튼소리를 지껄이는 멍청함은 가풍인가?"
"분명히 말하지."
"이 사람한테 손대면 내가 돌아버려."
"가요."
"네……."
191화
"폐하께서 오늘 마음이 아프실 것 같았대요. 그래서 홀로 두고 싶지 않대요. 세실리아는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 줘요. 그러니까 황제 폐하의 마음도 치료해 줄 수 있을 거예요."
"감히 그따위 이유로 황족의 치부를 엿본 것이냐. 기가 막히는군. 이놈이나 저놈이나 짐을 우롱해."
'가요, 세실리아.'
"곁으로 가도 되겠습니까."
"짐을 우롱한 주제에."
"가고 싶어요."
"……."
"가겠습니다."
"자네는 비열해."
"예, 폐하. 저는 비열합니다."
"짐을 우롱한 주제에 가장 약한 순간을 파고들었어."
"예."
"빌어먹을. 곁에 있어 줘."
"……예."
205화
"이봐. 실험실엔 들어오지 말라고 했……."
"여긴 무슨 일이지. 테오도르."
"……뭐야."
"선대와 발루아의 서고에 있던 자료다. 네 실험에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확인해라."
"……당신이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푼다고? 해가 서쪽에서 떴나? 무슨 심경의 변화라도 있었어? 그래?"
"내 딸이 나를 사랑하니까."
"……뭐?"
"그 애가 원하는 건 뭐든 하고 싶거든. 빌어먹을 원수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쯤은 아무것도 아냐."
"살려라. 슈헤일 후작."
208화
"안 돼!"
'아프지 않아.'
"……영애."
"괜찮아?"
"……그래."
"르블레인-!"
"르블레인……. 제발 정신 차려. 정신을 잃으면 안 돼……."
"아, 의사, 의사를…… 누가, 제발-!"
"아, 아아."
"내가 구했어, 린다의 소중한 사람……."
"린다는 항상 나를 구해 줬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이번엔 린다의 소중한 사람을 지켰어."
"아가씨……."
"나, 린다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아가씨!"
209화
"결과가 전부이냐."
"네?"
"네게 생각과 뜻이 모두 있었으니 난 네가 이만큼 다친 것이 기특하다 여겨야 하는 것이냐."
"그게 아니라……."
"르블레인 듀블레드!"
"불구덩이에 뛰어들어도 다 뜻이 있으려니 생각해야 하는 게냐."
"빨리 잘못했다고 말씀드려!"
"르블레인."
"잘못했어요! 엉엉! 내가 잘못했어! 허어어엉-!"
"무엇이."
"벽에, 딸꾹! 벽에 뛰어들어서 다쳤어요…… 허어엉!"
"그리고."
"잘못했다고 안 하고 벼, 변명하고…… 허어어엉."
"또."
"또…… 또…… 어허어엉, 죄송해요. 모르겠어요. 허엉-! 잘못했어요, 잘못했어요!"
"저택의 누구 하나 네 걱정을 하지 않은 자가 없다."
"미안해……. 잘못했어요."
"너를 아끼겠다고 했던 나와의 약속을 어겼어."
"……죄송해요."
"약속해라. 다시는 모두에게 이런 기분을 느끼게 하지 않겠다고."
"네…… 네!"
"괜찮아? 린다, 에드거는……!"
"사고가 난 날. 공자를 데리러 후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짝이 다른 구두를 신고, 마차에서 허겁지겁 내리다 넘어지며, 무릎에서 피가 배어 나오는데도 공자가 무사한지 먼저 살피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겁니다."
"아아, 다행이다. ……다행이다, 내 새끼."
"린다……."
"저는 그것으로 됐습니다."
"아가씨가 계시니까 저는 되었어요."
211화
"당장 듀블레드 영애를 끌어내십시오!"
"가주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습니다."
"후작 부인."
"……그만!!"
"손님들께선 별실로 돌아가 주십시오."
"어리석은 생각……!"
"내가 영애를 택했습니다. 책임도 내가 집니다."
"가주께서 계시지 않은 본가의 주인은 나일세. 가신들은 본가의 명을 따르게."
"한 마디라도 더 해. 새끼가 절벽에 놓인 어미는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 내 친히 알려 줄 테니."
213화
"그러니까…… 음, 누구였더라?"
"예?"
"죄송합니다. 기억할 필요가 없는 자는 굳이 이름을 알아 두지 않거든요."
"제 아버지는 마르슈 공작 각하의 팔촌으로, 저는 이본느 황비님의 조카뻘 되는-"
"조카뻘……. 조카는 아니시다?"
"황비님께선 평소에 저를 무척 아끼시고, 오늘도 황궁에 초대를 받은-!"
"마르슈 공작님의 조카뻘 되시는 공자님. 중앙 귀족과 거리가 머신지라 예법에 무지하신 모양이니 친절하게 알려드릴게요?"
"무, 무슨……!"
"최종 간택에 이름을 올렸다고 해서 황족은 아닙니다. 저는 황제 폐하께 보주의 칭호를 받은 몸. 준황족인 제게 세실리아 님게선 예를 다 하는 것이 옳지요."
"그건-"
"공자님의 말씀대로라면 황족 예정자이신 세실리아 님의 앞에서 감히 출신 운운하는 불충한 말씀을 하신 공자님부터 사지를 찢어야 하는 게 아닌가요?"
"공자님은 생각이란 걸 하시는 게 좋겠어요. 입에서 나온다고 다 말인 건 아니랍니다."
"무례하십니다!"
"내가-!"
"내가 정말로 예의를 따지게 하지 마세요, 공자. 사문화된 규약의 한 줄까지 찾아내 공자께서 다신 제도에 발붙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은 내겐 귀찮은 일이랍니다."
"무, 무슨, 무슨 말씀을……."
"덤비려면 제대로. 유치하게 말꼬리나 잡지 말고 장갑을 던지세요."
"아."
"앞으로 어디서도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이건 경고예요."
'어, 어떻게 그런 말을……!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사람을 가려 사귀는 게 좋겠어요."
"뭐, 뭐라고요?"
"더는 나를 자극하지 마시고."
"오 분 줄게. 꺼져."
"……!"
"사교계의 시위입니다."
"투명 인간 취급 말야? 패륜이나 불륜을 저지른 자들이나 받는 사교계의 형벌이잖아."
"그렇습니다."
"진원지는?"
"……블레이크 아라벨이겠지요."
"치졸하네."
"아가씨."
"곧 자선 파티입니다. 이번 자선 파티로 최종 간택이 결정되겠지요. 시기가 좋지 않습니다."
"내가 계속 따돌림당하면 아무도 세실리아의 파티에 오지 않겠네. 가뜩이나 이본느 황비가 세실리아를 견제하고 있으니."
"각하와 도련님들께 도움을 청하십시오. 적어도 쟈벨린 님 정도는 나서 주셔야 진화될 겁니다."
"큰일이네."
"가족들이 걱정하실까 봐 우려하시는 마음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닙니다만."
"아니."
"예?"
"이러면 정말로 봐주고 싶어지지 않잖아?"
"내가 또 개싸움에 재능이 있단 말야."
214화
"운명의 아이가 아닌 나는 평민에 불과하니 고귀한 피를 가진 귀족들은 나를 상대할 수 없다? 있지요. 영애, 저는 제도에 온 후로 그 평민 따위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었어요."
"어머나, 가여워라."
"왜 그런지 아세요?"
"출신 때문이겠죠. 영애, 너무 속상하게 생각하진 말-"
"아뇨. 그것밖에는 저를 공격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에요."
"……뭐라고요?"
"듀블레드 영애, 운명의 아이, 보주의 칭호. 모든 것이 저보다 못하니까 그것밖에 공격할 게 없는 거라고요."
"……자신감이 대단하시네요."
"그럼 말씀해 보세요. 영애가 저보다 나은 점이 뭔가요?"
"그런 질 낮은 비교는 하고 싶지 않아요!"
"내가 없을 때, 내 뒤에서 평민에 불과하다고 떠든 적 없어요? 정말? 그 외에 다른 말은 못 하지 않았나요?"
"이래서 출신은……!"
"그것 봐. 그것밖에 할 말이 없지."
"나도 이해는 해요. 영애가 신성력이 있어요, 운명의 아이길 해요? 번번이 사고를 해결하고 보주의 칭호를 받은 것도 아니잖아요? 귀족이라는 포장지를 벗기고 보면 그냥 내가 툭, 치면 쓰러질 가련한 어린 애일 뿐이죠. 사실은 내가 되게 무섭죠? 그렇죠?"
"이익-!"
"선빵은 네가 날렸어. 여기 사람들 다 증인이다, 응?"
"……뭐?"
짝!
"나, 날 때렸어? 감히-! 감히 평민 따위가 귀족을……!"
"글쎄 평민 아니래도."
"사람들이 다 그래. 넌 평민이라고! 운명의 아이가 아니라고! 네가 슈헤일 후작을 죽였어! 이 살인마! 운명의 아이가 아닌 넌 평민으로 되돌아갈 거야!"
"슈헤일 후작이 깨어났습니다!"
"……뭐라고?"
"썩은 다리가 완전히 회복했습니다. 운명의 아이가 치유에 성공했어요! 전무후무한 능력이라고요-!"
"치유에 성공했어? 그럼 정말 운명의 아이라는 거야?"
"하지만 레인 경이 운명의 아이가 아니라는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블레이크,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블레이크 아라벨은 듀블레드 공녀를 향한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린 바, 정식으로 황궁에 고발합니다."
"말도 안 돼. 사교계의 험담을 황궁에 죄 고발한다면 황궁은 일찌감치 마비되었을 거요!"
"듀블레드의 대응이 과하오."
"사람 모인 곳에서 입방아를 찧는 일이야 흔하지 않습니까. 소문 따위로 열넷밖에 먹지 않은 아리를 고발하다니요."
'하지만 이쪽에선 이번 일을 절대로 쉬이 넘길 수 없는 명분이 있지.'
"간택 참가자의 친족이 상대 참가자와 듀블레드 공녀님을 얽어 악의적인 소문을 퍼뜨렸습니다. 간택을 좌지우지하기 위한 뒷공작이겠지요."
"그건……!"
"저는 아라벨 영애가 퍼뜨린 헛소문으로 인해 추기경 레지날드 님께 추궁당했어요. 그들은 저의 신변을 신전에서 관리 감독하겠다고 했고, 제가 따르지 않는다면 신전의 신뢰를 흐린 책임을 물겠다고 했어요."
'고발에 명분이 생긴 거지. 그리고-'
"각하께선 소문과 관계된 자들에게도 역시 이와 같은 수준으로 대응하시겠노라 말씀하셨습니다."
"단, 소문에 관련된 제보를 하는 자들에겐 관용을 베풀 거예요."
"저희는 제도에서 나고 자라 사교계를 겪은 자들의 상황이 이처럼 크게 번지리란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번질 상황을 충분히 예상하였음에도 한때의 재미와 개인적인 욕망을 위해 입을 놀린 자들은 용서하지 않을 생각이에요."
"결코."
"에콰도르 공자, 필리아 공녀, 루시테리알 공자."
"다음을 기약하죠."
"가자."
"예!"
217화
"입 놀리는 데에 재미 붙인 것들은 공포로 다스리는 것이 지당하지요."
[폭군들이 그랬지요. 제가 살던 세계에서도 말입니다. 꼭 난세에 저렇게 민초들의 입을 막고……!]
'그래. 우리 세계에도 폭군들이 꼭 그래. 아니까 조용히 해.'
[저들이 선량한 민초는 아니지만, 황족이란 사람이 저렇게 공포로 백성을 다스려도 됩니까. 예?!]
'당연히 안 되지.'
[알면서 도우신 겁니까?]
'내가 이걸 도와서 우리 영지민이 올해 겨울을 훈훈하게 날 수 있었어.'
'소문에 눈 벌건 제국 귀족이야 알바야? 우리 영지민이 이번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는데.'
'그럴 수만 있으면 난 더한 짓도 할 수 있어.'
'물론 살아남고 싶다는 개인적인 욕망도 있지만.'
230화
"미안, 르블레인. 우리 팀이 이제 시간이 없어서."
"시간이 없는 건 우리도 마찬가지인데."
"앨런과 산드라는 집안 때문에 꼭 A반에 들어야 한대. 나는 조장이니까 우리 팀원들을 위해 뭐라도 해야 해."
"그래서?"
"결투하자! 이긴 사람이 그동안 구해 놓은 인질을 모두 데려가는 거야. 어때?"
"내가 왜?"
"어?"
"싫은데. 우리 조가 너희 조보다 월등히 점수가 높잖아. 이대로 평가가 종료되어도 1등은 우리 조인데 왜 결투를 해야 해?"
"결투 신청을 물린단 말야!? 기사도를 모르는 거냐!"
"그러는 너는 기사도를 알아서 다른 조가 고생해서 모은 인질을 결투 한 번에 다 차지하겠다는 거야?"
"뭐, 뭐라고?"
"피하는 거야? 질까 봐 두려워서?"
"있잖아, 미나."
"그래, 말해."
"너는 내가 손가락 하나만 튕겨도 죽어."
"……뭐라고?"
"정말이야."
"네 안에 신의 힘이 전부 다 들었어도 너는 내게 못 이겨. 왜냐면 너는 그 힘을 쓰는 법을 모르니까."
"그건 네 생각이잖아. 겨뤄 봐야-"
"13년이야."
"나는 네가 상상도 못 할 세월 동안 죽을 힘을 다해 수련했어."
"나는-"
"나와 승부 하고 싶으면 이런 평가를 걸지 말고 더 값진 걸 걸어."
"그래야 내가 목숨 걸고 수련한 세월이 우습지 않잖아."
"무엇을?"
"에트왈이라면 어때?"
"에트…… 뭐?"
"신전에서 보관 중인 성물. 진짜 운명의 아이에게 내려질 그것."
232화
"르블레인, 네가 양보하지 그래? 미나 쪽이 더 급한 볼일이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붙잡지 않았으니, 양보할 일이 아니지."
"그래서 못 보내 주겠다는 거냐?"
'이게 진짜.'
"야."
"야? 상스럽게 평민들이나 하는 호칭을-"
"편 갈라서 미나의 호의를 사려는 건 상스러운 행동이 아니고?"
"뭐라고?"
"여기서 네가 미나를 정말 생각한다면 내가 아니라 아드리안에게 시간을 내달라고 했어야지. 그런데 너, 왜 날 물고 늘어지니?"
"그건-"
"아드리안과 미나가 정말로 둘만 있는 건 싫은 거잖아. 내가 자존심 상해서라도 아드리안을 보내 주지 않기를 바라는 거고."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
"그런 생각이 없으면 그냥 날 무시한 거겠지. 안 그래? 제국의 황자이자 엘리시아노 클래스에서 회장 대행 중인 아드리안은 무서우니까 대신 날 공격하는 거잖아."
"하……."
"새로운 운명의 아이에게 밀리는 르블레인. 엘리시아노 클래스 입반 때문에 이미지 관리하느라 제대로 대항도 못 할 터. 제국에선 새로운 운명의 아이에 관한 소문으로 벌써부터 떠들석하니, 미나의 줄만 제대로 잡고 있으면 너도 함께 부상할 거라고 생각했겠지."
"내가 네 양팔, 양다리를 부러뜨려도 아카데미에서 퇴출될 뿐이야. 그런데-"
"퇴출당하고 나면 나는 그냥 르블레인이 아니라 듀블레드 영애일 거야. 그때의 나를 네깟 게 감당이나 할 수 있겠니?"
"제국에서의 내 별명을 알려 줄까?"
"미친개."
"내 인내는 여기까지야."
"까-불고 있어."
233화
"안녕, 르블레인. 오늘 무척 아름답-"
"귀인의 안녕을 빕니다."
"어?"
"예법은 제대로 알아 두는 게 좋겠어, 미나."
236화
"괜찮은 거니?"
"……예, 감사합니다."
"동생을 걱정한 건 알지만, 남의 물건을 훔치는 건 나쁜 짓이야. 다음부터는 그런 짓은 하지 마, 응?"
"받아. 그리고 이젠 일을 찾아서-"
"르블레인?"
"주지 마."
"아, 걱정하지 마. 이건 내 돈이야. 신전이라는 곳에서 나를 지원해 주기로 해서……."
"네 돈이니까 주지 말라는 거야."
"뭐?"
"어려운, 아니, 그러니까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에게 나눠 주는 게 뭐가 어떻다는 거야? 누군가 돕지 않으면 이 아이는 내일도 모레도 옳지 않은 일을 반복해야 해."
"네가 돈을 주는 게 이 아이들을 돕는 것 같아?"
"뭐?"
"오늘은 이걸 먹고, 내일부터는 빈민 구제소로 가."
"빈민 구제소는 1관문 쪽에 있다고 들었어. 아이 걸음으로 오가려면 하루가 꼬박 걸릴 거야."
"그래도 빈민 구제소로 가. 멀다고 훔치지 말고."
"르블레인!"
"얼른 가."
"대체 뭐야. 왜 가여운 아이를 돕는 것까지 방해해. 르블레인, 나는 애들 말대로 정말로 네가 나를 싫어해서 사사건건 방해하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
"그래, 미나. 난 네가 싫어."
"……뭐?"
"네 짧은 생각이 싫어. 선한 일을 행하면 뭐든 해결될 거라고 믿는 오만이 싫어. 단지 뻣뻣하기만 한 네 신념이 싫어."
"말이 심하잖아. 못된 냄새가 나더라니 넌 정말로 못된-!"
"저대로 아이들이 돌아가면 어떻게 될 것 같니?"
"무슨 말이야?"
"네 말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아이들이야. 그런 아이들 손에 큰돈이 떨어졌어. 그럼 어떻게 될 것 같으냐고."
"……사람들이 돈을 노리고 아이들을 해하기라도 한다는 말이야?"
"르블레인, 세상은 그렇게 어두운 곳만은 아냐. 악의를 가진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더 많아. 어려운 사람을 지나치지 못하는 사람들, 자원봉사하는 사람들, 사람의 선의를 믿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 말야."
"그래, 악의를 가진 사람은 분명히 존재해."
"내 말은 그런 게 아니라-"
"그 악의를 가진 사람이!"
"방금 저 남매가 돈을 받는 것을 본 사람들 중에 악의를 가진 사람이 없다는 걸 어떻게 확신해?"
"뭐?"
"저 아이들이 위험에 빠지지 않을 거란 걸 어떻게 믿지?"
"너야말로 왜 악의를 가진 사람이 있을 거라고만 생각하는 거야."
"그래야 하니까. 최선의 경우보다 최악의 경우를 떠올려야 하는 사람이니까, 너와 난!"
"네 말대로 권리엔 의무가 있어. 내가 누리는 것들엔 모두 의무가 있단 말야. 귀족은 평민을 지키다! 지켜야 하는 사람은 언제나 최악을 먼저 떠올려야 해. 부모가 자식을 걱정하듯이!"
"그래서 악인들보다 더 악독한 결과를 떠올려야 하는 거야. 그건 신전에서 지원받는다는 너도 마찬가지고."
"……너와 난 정말로 다른 사람이구나."
"일어나지 않은 최악이 무서워서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아니, 난 뭐라도 할 거야. 내 호의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할 생각이야."
"그래서?"
"나는 네가 이 세상의 운명의 아이라고 생각했어. 난 돌아갈 사람이니까 이곳을 지킬 사람은 너라고. 그런데 이제 보니 아냐. 넌 그냥 겁쟁이야, 르블레인."
"서론은 됐으니 본론만 말해."
"이 세상을 네게 맡길 수 없어."
"난 이제 내 의무에 최선을 다할 거야."
"그럼 난 최선을 다해 너를 막아 주지."
"죽을힘을 다해야 할 거야, 미나."
237화
"정말로 수상한걸."
"자격을 갖추지 못하고 학교에 들어왔으니 시험이 두려웠겠지. 네 능력이 까발려지면 어떻게 학교에 있을 수 있겠어? 그러니 시험지를 훔쳐 내라고 한 거야."
"웨스트를 감싼 것도 이상하지 않아? 일면식도 없던 상태에서 웨스트를 지키기 위해 뛰어들었잖아. 그게 어떻게 가능하겠어?"
"이런 상황을 노리고 웨스트를 지켜 준 거지."
"멍청한 웨스트. 그런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좋다고 졸졸 따라다녔으니."
"수인족이 가엾군. 저런 멍청이를 백랑 왕자라며 따르다니."
"수인의 몰락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겠어?"
"그만해! 미나는 잘못하지 않았어! 난 바보가 아냐!"
"역시 형만 한 동생이 없는 거야. 봐, 제 잘못도 모르고 흥분하는 꼴을. 제 형 덕에 엘리시아노에 들어 간 멍청이. 엘리시아노의 명예를 실추시켰어."
"이스트가 가여워. 저런 동생을 두면 나라도 죽이고 싶었을걸."
"꺄아아악-!"
"수인화다!!"
"웨스트!!"
"상황은?"
"수인화했어."
"꼬맹이의 목적이 이뤄졌네."
"뭐, 뭐야. 네가 수인화를 노리고 이 상황을 만들었어?"
"노린 건 맞지만, 내가 한 일이라곤 앙리의 사람에게 '정말로 수상한걸' 딱 한 마디 시킨 것뿐이야."
"그럼 저건 대체 뭐야?"
"사람들의 질투 폭발이지 뭐."
"뭐……?"
"난데없이 등장한 운명의 아이. 신성력은 교황보다 더 강하다고 하고, 자격 없이 학교에 들어왔어. 지금까지 숨겨 왔지만, 기회를 잡자 질투가 폭발한 거야.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웨스트가 공공의 적이 된 미나를 옹호해.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
"웨스트도 적이 되겠지."
"그래, 내가 너를 감사서 공공의 적이 된 것처럼."
"그렇지만 웨스트를 수인화시켜서 뭐 하게? 설마 너……."
"이스트와 웨스트에게 대화의 장을 마련해 줘야지. 갇혀 있는 이스트가 갈 수 없다면, 웨스트가 갇혀 있는 곳으로 가게 해야 하잖아?"
'그러면 두 아들 모두 포기할 수 없는 수인족의 왕과 왕비가 내게 얼마나 고마워하겠느냐고.'
"넌 정말 사악한 애야."
"칭찬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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