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사실 꽤 긴 기간 준비해온 시험이 있었어요

준비를 선언한 것은 오래 전이지만

정말 준비를 시작한 건 3개월..

찔끔찔끔 공부했던 기간도 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하루에 공부를 1분조차 하지 않은 채로

정말 오랫동안 허수생 생활을 이어왔습니다.



매년 시험이 다가오면

설레는 척, 떨리는 척

시험 보고 나온 직후에는

잘 보고 나온 척

합격자 발표 이후에는

정말 아쉽게 떨어진 척

실제로는 지난 1년간 단 1분도 공부를 하지 않았기에

합격이란 것과 어울릴 수 없음을 잘 앎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매년 연기를 해왔어요.

매년 불합격하는 것보다, 연기를 하는 것이 더.. 싫었어요.



더 거슬러 올라가 볼까요..

그러고 싶은 새벽이니 말이에요.

기억나는 유년기의 대부분을
동네 수영장 지하에 갇혀 보낸 이야기는

아무리 새벽이라지만 글이 너무 길고 어두워질 것 같으니
하지 않도록 하겠고요

딱 20대 초반까지만.. 거슬러 올라가 볼게요..

군대에 있을 때, 전역을 2주쯤 남기고 행군을 하고 있었어요.

정말 힘든 와중에 저~멀리 밝게 빛나는 도시가 보이더라구요

곧 사회의 품으로 돌아갈 저를 향해 두 팔을 벌려 환영하고 있는 것만 같았어요.

그러나 크게 벌린 두 팔의 의미가

환영이 아니라

‘너는 거기까지.‘ 였음을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다시 시험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저는 사실 살면서 져 본 적이 없어요.

재수 없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정말 그랬어요.

언제나 이겼어요.

노력하지 않아도, 이긴다는 것은 제게 너무나 당연한 행위였어요.

그러나 제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겼던 싸움에서

가장 큰 패배를 맛보았고

꽤 오랜 세월 동안 그 패배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네요.

사실 아직도 완전히는 헤어나오지 못했을 지도 모르지요.

23살, 군 복무를 마치고 사회로 돌아온 저는

너무나 무력했고

여전히 너무나 패배감에 절어 있었어요.

모든 것이 미웠고, 그 중 가장 미웠던 것은 저였어요.

그 한 번의 패배가 저를 거의 죽일 뻔 했으니

정말 죽다 살아난 셈이네요.

딱 그런 상태에서 시험을 준비하기 시작했어요.

당연히.. 앞서 적었다시피
대부분의 기간 동안 조금도 준비하질 않았지요.

물론 그러고 싶어서 그랬던 건 아니었어요.

저도 열심히 살고 싶은데

너무너무 그러고 싶은데

불가항력적인 무언가가 그걸 가로막는 듯한 느낌을 받았어요.

물론 진짜로 그랬단 건 아니고, 비유일 뿐이지만요..

매일 밤 제 스스로를 원망했어요.

‘내일은 다를 거야.‘ 라는 생각을 매일 밤 했어요.

그렇게 열심히 후회로 벼려낸 밤은
무언가를 해내기에도, 저를 찔러 죽이기에도
부족할 정도로 날카롭지를 못했어요.

그런 제가 너무너무 미워서

정신과에 갔어요.

정말 제 스스로를 죽여버리기 직전에도
가질 않았던 정신과에

이번에는 살고 싶어서 갔어요.

성인 ADHD 검사를 받았고

증세는 심하지 않지만 원한다면 약을 주겠다기에

약을 받아 먹었어요.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한심한 매일은 다시 매일 반복됐어요.

그러던 어느 날

알바 사장님이 그러시더라고요.

‘XX씨, OO고 나왔다며? 공부 엄청 잘했다던데?‘

놀라서 되물었어요.

“누가 그러던가요?“

사장님이 대답했어요.

‘손님이 말해주던데?‘

예전에 손님 중 저를 조금 아시는 분이 계셔서
얘기를 잠깐 나눴었는데

사장님은 그 손님에게서 저에 대해 들은 모양이었어요.

그리고 사실 저는 어지간히 친한 사람 아니고서야

꼭 해야 할 상황이 아니라면
고등학교 얘기를 하는 것을 꽤 싫어합니다..

좋은 고등학교를 나온 것은 맞지만

그게 최종 학력이니까요.

학력 컴플렉스라기보다는..

좋은 대학 나온 걸 자랑해도 한심해 보이는데

좋은 대학도 아니고 좋은 고등학교 나온 걸 자랑스레 말하기에는 너무 창피했고요

항상..

‘엥? OO고 엄청 좋은 고등학교 아니에요? OO고 나왔는데 왜 대학을 안 갔어요?‘

라는 말이 돌아오곤 했으니까요..

그 말을 들으면 옛날 생각이 나서 너무 아팠어요..

일생의 목표였던 대학을 포기하기까지 제가 겪은 일들과 그로부터 비롯된 고통을 설명하기도 싫었구요

아무튼..

사장님의 말에

“다 옛날 얘기에요.“

라고 답했더니

‘XX씨가 우리 저기 고등학생들 오면 무료로 과외좀 해주면 안되나?‘ 라고 했어요.

놀랍게도 실화입니다.. ㅅㅂ럼

“제가요?“ 라고 하니

‘왜? 그럴 실력이 안되나?‘ 라고 하더라구요

그렇게 자존심을 긁으면 제가 뜻대로 움직여줄 줄 안 모양이에요

“아뇨? 실력은 되는데요, 제가 왜요? 그건 제 일이 아니잖아요.“ 라고 했더니 대답 없이 수긍했어요.

그리고 짜증나서 담배를 피우러 나갔어요.

오랜만이었습니다. 고등학교 때의 생각을 깊게 하는 것이요.

고등학교 친구들은 모두

최상위권 대학교에 진학해

이 취업난에도 졸업 직후 칼취업에 성공하고

sk, 현대, 삼전, kt, 엘지같은

대기업에 다니거나

의대생이거나

전문직 자격증을 취득했는데

나는 저딴 요구나 듣고 앉아 있다니..

출발선은 같았는데.. 아니, 내가 조금 더 앞서 출발했는데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저 것들이 전부 내 것이 될 수도 있었어요.

하지만 제가 거머쥐지 못했을 뿐이었어요.

집에 돌아와 불이 꺼진 방 안에서 음악도 없이 혼자 춤을 췄어요.

누군가가 본다면 대단히 기괴하다고 느끼겠지만 괜찮아요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을 테니까요

감정적으로 힘이 들 때면 늘

이렇게 춤을 추곤 했어요

춤을 잘 추진 못하기에

춤이라기보다는 그저 몸을 꿀렁꿀렁 움직이는 것에 가까웠지만

적어도 춤을 추는 동안에는 기분이 괜찮거든요



그리고 다음 날 저는 다시 공부를 시작했어요.

시험까지 남은 기간은 3개월

제가 준비중인 시험이 전문직 시험에 비해
어려운 시험은 아니지만

알바 연애 공부를 병행하며 3개월 내에 붙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누구에게 묻든 ‘불가능‘이라는 답이 돌아올 법 했어요.

설상가상으로, 모든 상황들이
마치 저를 죽이고 싶어 안달난 듯 나빴습니다.

사방에서 온갖 것들이 제 목 하나 따보겠다고 덤벼드는 기분이었어요.

처음엔 ‘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들어 집중하지 못했어요.

하지만, 지금껏 제가 해낸 것들 중

‘할 수 있겠다.‘ 라는 확신을 갖고 덤벼든 것은 없었습니다.

해내야 했기에 덤벼들었고, 결국 이겼던 것이었어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해낼 수 있을 지는 잘 몰라요.

그치만 해내야 했어요.

그러고 싶었어요.

정말 미친 듯이 공부했어요.

물론 앞서 적었다시피, 상황이 좋지 않았기에

많이 힘들었어요.

지금껏 업보를 선불로 많이 청산했다고 생각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늘은 저를 굽어살펴줄 뜻이 없어 보였습니다.

온 세상이 저를 움켜쥐고 이리저리 흔들어댔어요.

그치만 좀 흔들리면 어떤가요

그 흔들림에 맞춰 춤을 추면 되는 것이었어요.

늘 그랬듯

불 꺼진 방 안에서

혼자

음악이 없어도 괜찮아요

딱 맞춰 춤 추기에 좋을 정도로 흔들리고 있으니까요



시험 직전

그토록 저를 옭아매왔던,
어린 날의 패배의 정체를 알게 됐어요.

저는 항상 이겨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제 스스로를 이긴 적은 한 번도 없더라구요.

저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제 스스로에게 졌던 거였어요.

뜬금 없지만, 저는 스스로에게 편지를 종종 쓰곤 해요.

먼 훗날 읽어보면 과거의 제 자신과 마주 앉은 기분이 들거든요.

보통 내용은.. ‘나 너무 힘들다. 왜 힘든가? 내가 ㅂㅅ이기 때문이다. 그냥 뒈저버리는 게 맞겠다. 언젠가 이 편지를 읽을 때에도 ㅂㅅ이라면 걍 뒈저버리길 바란다. 그게 맞다.‘

이런 내용이에요.

저는 항상

‘누구보다도‘ 저를 가장 미워했고
누구보다도 ‘저를‘ 가장 미워했어요.


하지만 시험 전 날에는

‘내일 어떤 결과를 내더라도, 너는 최선을 다 했다. 이번만큼은 져도 괜찮다. 난생 처음 스스로를 이겼으니까 괜찮다. 고생 많았다. 쉬어라. 사랑한다.‘

라는 편지를 쓰고 펑펑 울었어요.

드디어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거에요.




이 시험을 준비하기 전 봤던 단편 만화가 있어요.

이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이 그린 만화였던 것 같은데

겉으로만 준비하고, 실제로는 펑펑 노는, 소위 말하는 ‘허수생‘의 비참한 말로를 그려낸 만화였어요.

한 때 저는, 저도 그렇게 될 것이라 믿었어요.

그럴 운명이라고 생각했거든요.

운명은 언제나 저를 집요하게 괴롭혔어요.

제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상황을

어떻게든 제 앞에 데려와 앉혀 놓았어요.

아무리 피하려 애써도, 소용 없었어요.

지금도 저는, 제가 그 비참한 말로를 맞은 허수생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 운명이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제 제가 너무 강해져서

운명조차도 제 눈을 마주치면 길을 비켜 주게 되었어요.

제가 걱정하는 사이

걱정하면서도 매일 했던 노력은
이미 저를 합격선을 아득히 넘어선 곳에 데려다 두었습니다.

차석과 꽤 큰 점수 차로 수석이에요.

결국 제가 또 이겼네요 우하하

저라서 해낼 수가 있었읍니다.












추천.. 제발 하지 말아주세요.. 웃자 가기 너무너무 싫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