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 화 - 토끼, 가출하다（1）


현실계로 돌아오자 마자, 현준과 에루루는 메피스토의 교회로 갔다.

어머니도 무척이나 걱정을 하시겠지만,

일단은 메피스토에게 보고를 하는 것이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겨우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는 끄덕 끄덕 거리며 현준의 말을 주의깊게 듣다가 가끔 한 마디씩 대꾸를 했다.


"꽤 귀찮은 일에 말렸었군... 그나저나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그런 식으로 응용하다니.."


"어설프게 머리를 써 본건데.. 전혀 통하지 않았습니다."


"아닐세, 기발한 생각이었어."


메피스토는 자기도 모르게 흥분되는 기분이었다.

마군의 대군사도 역임했었지만, 역시 제자를 가르치는 것이 가장 즐거웠다.

게다가 이런 똑똑한 제자라면 더욱 보람있는 일이었다.


"아무튼 일이 잘 해결 되어서 다행이군."


"네, 에루루도 이제 걱정 없이 지낼 수 있게 되었어요. 모두 선생님 덕분 입니다."


"내가 뭘 한게 있다고... 그나저나 저 아이는 어디에서 지내게 할 건가?"


"그게.."


그것이 걱정이긴 했다.

집에 데려간다면 난리가 날테고..그렇다고 계속 바깥에 지내게 할 수는 없다.

결국 지낼 곳은 메피스토의 집 밖에 없는데 현준의 입으로 그 말을 꺼내기는 좀 미안했다.


"지낼 곳이 없다면, 우리 집에 있어도 되네.."


"네? 그래도 되요?"


기대하지도 않았는데 메피스토가 먼저 그렇게 말해주자,

현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정말.."


"아닐세... 예진이도 혼자서는 너무 외로운 것 같고.. 늘 여동생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었으니까."


현준은 메피스토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현준을 훈련 시킬 때나 싸움에 임해서는 냉혹하고 잔인하지만,

정말 좋은 사람, 아니 악마다.


"그건 그렇게 하도록 하고... 데스 나이트가 준 목걸이가 이건가?"


" 네 맞습니다."


현준은 지그프리드에게 받은 목걸이를 끌러 메피스토에게 건네주었다.


"그거.. 왠지 불길해서.. 버리자니 그것도 찜찜하고.. 선생님이 맡아 주실수 없겠습니까?"


메피스토는 팬던트를 이리저리 돌려가며 유심히 훑어보더니, 고개를 젓는다.


"그럴 수야 없지, 자네가 받은 물건 아닌가..."


메피스토는 현준을 데리고, 교회 뒷편의 지하실 창고로 들어갔다.

예진이 어렸을 때 탔을 법한 세발 자전거부터 낡아 빠진 책들까지 온갖 잡동사니가 질서 없이 쌓여 있었다.


"어디보자.. 여기 어디 있을텐데..."


메피스토는 먼지가 수북히 쌓인 고문서 더미를 뒤적거리더니,

낡아빠진 검은색 표지에 어마어마하게 두꺼운 책 한권을 꺼낸다.

메피스토는 윗 옷 주머니에서 뿔테 안경을 꺼내 쓰고는 손가락에 침을 묻혀가며 책장을 넘겼다.


"그 책은 뭡니까 선생님?"


"아... 마계와 중간계의 보물을 나열한 책이라네, 이 책 자체도 보물이지만.."


"그런 보물을 이런 창고에 쑤셔 넣으셨어요?"


"사무실 책장에 놓아 둘 수는 없지 않는가. 목사가 이런 미신적인 책 같은걸 가져다 놓으면 신도들이 떨어진다구.."


그는 책장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드디어 찾았다는 듯이 환한 표정을 짓는다.


"여기 있네. 붉은 눈물의 펜던트. 현 소유자 장현준. 봐 여기 자네 이름이 있지?

자동으로 업데이트 된다네. 이 책 괜히 어마어마한 보물이라는게 아냐."


메피스토는 자랑 하듯이 현준에게 책을 보여주었다.


"아.. 신기하네요.."


이런 물건이 있다면 변두리 목사 노릇이나 할게 아니라,

보물 탐색을 나선다면 사랑하는 딸을 공주같이 키울 수 있을텐데..

현준으로서는 좀 이해가 안되는 점이었다.


"아.. 그냥 목걸이가 아니라.. 뭔가 쓸모가 있는 거군요."


"쓸모 정도가 아니지.. 자 보게.. 그 물건은 이 책의 3000 페이지에 나오지 않나.

이 책은 보물의 가치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는데..

윙 컷터 같은 명검도 마지막에서 열 페이지째에 겨우 이름을 올리고 있을 정도라네.."


"그렇군요.. 그런 대단한 물건을 왜 처음보는 저한테 줬을까요?"


"글세다.. 그의 마음 까지는 알 수 없지.. 아무튼 이걸 읽어 보자꾸나..

붉은 눈물의 펜던트는 옛날 적용의 왕을 사랑한 한 님프족 여자 정령사가 만든것다,

그녀는 붉은 용왕을 사랑했지만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지,

보자.. 이건 연애담이니 넘어가고.. 아무튼 그러던 중 왕이 큰 상처를 입고 죽어가고 있었던 모양이야..

그녀는 자신의 생명과 바꾸어 이 목걸이를 만들었지,

이 목걸이는 죽어가는 붉은 용을 소생시키고..

그 댓가로 영원한 우정을 맺을 수 있는 모양이야. "


"우정이요? 사랑이 아니구요?"


"글세다. 아마 사랑하는 마음을 강제하기는 싫었겠지.."


"그런데 정말 용 같은게 있나요?


"자네 연결계에 두 번이나 가서 별 것을 다 보지 않았나. 새삼스런 질문이군."


현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스스로도 날개 달린 악마이면서 새삼 신기해 할 것은 없다.


"아무튼.. 한 마디로 야생견을 때려서 반 쯤 죽인 다음에 개목걸이를 채우는 셈이군요."


"맞았네, 제작자는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한 친구를 위해 만들었지만,

그 이후의 소유자들은 보통 그런 용도로 사용된 모양이야.

[하지만 처음 이 목걸이를 만든 자가 죽은 이후에는, 성공한 예가 없다] 라고 되어있군..

아무래도 레드 드래곤을 찾아서 죽이려면 보통으로서는 불가능할테니까.

이 낮은 성공 빈도 때문에 감정가가 낮아진 모양이군."


"선생님이라면 가능 하신가요?"


메피스토는 말도 안된다는 듯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말했다.


"천만에. 드래곤은 우리 날개 달린 족속들이 나오기도 전에 창조된 존재들이라네,

원래 창조주는 그들을 이 세계의 지배자로 내정했지.

그렇게 되지 않은 이유는 그들이 너무 건방지고 독립적이고 게을렀기 때문이라네. "


"그렇군요.. 그럼 사실 이건 저한테는 무용지물 아닌가요?"


"부가적인 효과로.. 지니고 있는 것 만으로도 마력을 다소 높여 주고, 불에 대한 저항성을 준다는 군..

도움은 되겠지. 어쨌든 가지고 있게.."


"네.."


메피스토가 책을 덮고 다시 폐품 더미 속으로 집어 넣으려고 하는 것을 보며,

현준은 문득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생겼다.


"이 '보물'책 자체도 이 안에 들어 있습니까?"


"물론이지."


"이 보물 책 자체는 몇 페이지에 올려져 있을까요?"


"그건 읽는 사람에 따라 바뀐다네,

생각해보게, 예진이는 최근에 잡지에서 본 하늘색 여름 원피스를 가지고 싶어하지만,

내가 돈을 주지 않는 이상, 어디에서 팔고 있다는 것을 알아도 소용 없지 않겠나."


그 말을 하면서 메피스토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든 사주고 싶다는 마음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현준은 몰래 피식 웃었다.


"이 책에 수록된 보물들의 현재 소유자의 능력과 독자의 능력을 가늠해서 획득 가능성,

아, 물론 여러가지 변수가 생략된 간략한 계산이지만, 그걸 따져서 스스로 가치를 매기지."


"그렇군요... 하긴 누가 가지고 있는지 알아도 뺏을 수 없다면 이 책은 그냥 팜플렛에 불과하겠네요."


현준은 신기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누가 만들었는지 모르지만 대단한 마법사인 모양이다.


"보여 줄까? 자네가 이 책을 들고 있을 경우.. 아마.. 맨 뒷장을 펴봐야 할걸?"


흘끔 맨 뒷장을 펴보니 정말 그랬다.

마지막 장에, 이 책의 표지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그러고보니 이건 자기가 얼마나 강해졌나 가늠해 보는 척도도 되겠군..'

현준은 조금은 강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바닥을 헤매고 있는 수준이군.



"아 그렇게 실망하지 말게나..

이 책에 실릴 정도의 물건을 가진자라면 대체로 엄청난 유명인사들 뿐이니까.

옛날에는 신이였던 존재들도 즐비하네.

자넨 이제 겨우 걸음마를 뗀 셈이라네.."


"네.."


메피스토는 현준에게 목걸이를 건네주고,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나며 싱글거리며 말했다.


"오늘 예진이가 해물탕을 해주기로 했네. 갈수록 음식 솜씨가 는단 말야.. 자네도 좀 들고 가겠나?"


마침 배가 고팠다.

어머니가 잔뜩 화나 있을게 분명하므로, 집에 가도 밥은 없을 것이다.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부엌에서는 예진과 에루루가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에루야! 괜찮다니까.. 가 있어.."


에루루.. 하면 사람 이름치고는 이상하니까,

현실계에서는 에루라고 부르기로 했다.

현준이 지어 준 것이지만,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성의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에로'라고 발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재밌어 보인다. 나도 할거다."


에루루는 예진이 요리를 하는 옆에서 한 몫끼려고 깐죽거리고 있었다.

예진의 태도로 보아, 도움이 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에루야! 우유는 넣지마!"


"왜? 이거 넣으면 맛있다."


"해물탕엔 우유 넣는거 아냐!"


키도 비슷하고, 티격태격 하는 폼이 꼭 친자매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현준은 피식 하고 웃어 버렸다.


"그럼 뭘 넣어야 하나?


"넌 아무것도 안 넣어도 돼."


예진은 성가시다는 듯이 어깨로 계속 밀어 내었지만,

에루루는 예진의 주위를 맴돌면서 그녀가 한 눈을 파는 틈을 타서 이것 저것을 넣었다.

그런 이유로.. 해물탕 맛은 좀 이상해졌다.


맛있는 요리를 내어 놓고 칭찬 듣는 것이 삶의 낙인 예진은,

저녁 식사 내내 잔뜩 뾰루퉁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너 나 때문에 화났나?"


"......"


"미안하다. 하지만 네가 그렇게 화낼 만큼 맛이 없지는 않다."


그건 에루루 혼자만의 생각인 듯 했지만,

메피스토와 현준도 예진을 달래기 위해 열심히 해물탕을 먹어 주었다.

희미하게 카페라떼 맛이 나는 것으로 보아, 우유에 이어 커피도 대량 살포되었나보다.

아무튼 뭔가 복잡 미묘한 맛이었다.


"예진아.. 먹을 만 해.. 그만 화 풀어.."


"네 누나. .맛있어요."


"봐.. 괜찮다고 하잖아. 너도 그만 화 풀어라."


"너라구 하지마, 언니라구 불러."


에루루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는다.


"언니? 너한테 언니라고 부르라고? 말도 안된다."


예진은 에루루가 자신을 놀리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토라져 버렸다.

한 마디만 더 하면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아버지를 바라 본다.

누나 노릇은 톡톡히 하려고 하면서 하는 짓은 아직 어린애였다.

'정말 생긴데로 노는군..'

현준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에루루에게 말했다.


"너 나한테 오빠라고 부르잖아. 난 예진 누나한테 누나라고 부르니까 너도 언니라고 불러야돼."


"꼭 그래야 하나? 난 싫다."


에루루는 딱 잘라서 말해 버렸고,

예진은 볼이 잔뜩 부어 있다.

난감한 것은 현준이었다.


"에루야. 언니라고 불러..."


현준이 거의 애원하듯이 말하자,

에루루는 조금 표정을 누그러 뜨리며..


"하지만.. 내가 아는 언니들은 모두 싫은 여자들이었다."


에루루는 '언니'라는 단어를 듣자 얼굴을 찌푸린다.

현준은 그제서야 에루루의 마음을 알 것 같았다.

그녀가 여태 껏 언니라고 불렀던 것들은 모두 끔찍한 여자들이었다.

그 호칭을 입에 담고 싶지 않은 기분,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 그럼...너도 누나라고 불러."


"누나?"


좀 엉뚱한 해결책이었지만,

두 사람의 이해 관계를 절충 시키려면 그 수 밖에 없을 듯 싶었다.

에루루는 계속 메피스토의 집에서 지내게 될텐데,

쓸데 없는 일로 티격태격 해서 좋을 것은 없다.


"싫어. 난 절대 누나 안해. 언니 할거야."


'윽... 예진 누나 오늘따라 유치하게 왜 그러지?"

예진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더 할 나위 없이 순둥이지만,

무언가 양보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끝까지 고집을 피운다.

현준은 난감한 표정으로 메피스토를 흘끔 쳐다 보았다.

하지만 그는 싱글벙글 웃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이 여자한테 언니라고 하지 않으면 오빠가 곤란한가?


현준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에루루는 괴롭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난 이 여자가 좋다. 그래서 언니라고 부르기는 싫다.

하지만 오빠를 곤란하게 하는 것은 더 싫다. 그래서 언니라고 부른다."


에루루의 말을 듣고 있던 예진은 갑자기 미안하단느 듯한 표정을 짓는다.

'난 이 여자가 좋다' 라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나 보다.


"너 있잖아... 내가 좋아?"


예진은 소심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응. 여러가지로 성가시기는 하지만 좋다."


'성가시다니, 누가 누구한테 할 소리를...'

현준은 그 말에 예진이 또 삐지지는 않을까 걱정 되었지만,

예진은 이미 '난 이 여자가 좋다'라는 말에 마음이 빼앗긴 모양이다.


"만난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내가 왜 좋아?"


"모르겠다. 그냥 좋다."


에루루는 부모의 얼굴도 모른채 떨어져 나와 공작원으로서 훈련을 받아왔다.

같은 처지의 동료들이 있다고 해도, 서로 생존 경쟁을 하는 사이였다.

주변에 정을 주는 사람은 물론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예진 역시 부모의 얼굴도 모른채, 메피스토에게 입양되었다.

양부가 잘해준다고 하지만, 어머니나 형제 자매의 자리는 채울 수 없었을 것이다.


동생 뻘의 여자아이가 혼수상태로 누워 있을 때,

예진은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며 곁을 떠나지 않고 간호해 주었다.

물론 머리를 가지고 장난치는 등 귀찮은 짓은 좀 했지만..


"음...너 언니라고 부르는게 그렇게 싫어?"


예진은 이제 기분이 풀어졌는지, 평소의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한다.


"그렇다."


"그럼 '언냐' 라고 불러."


"언냐? 그거면 괜찮나?"


"응. 불러봐.."


"언냐."


"그래 착하다."


둘은 어느새 마주보며 빙긋 웃고 있었다.

'어째서 저딴 식으로 협상이 이루어 지는 거지?'

여자들의 심리란 도무지 알 수 없다고 생각하는 현준이었다.


-*-


소울힐러의 소식을 수소문하고, 펠센스타우트 수도원까지 찾아 간 것이 대략 열흘,

그녀와 만나 웨스턴 게이트까지 이동한 시간,

그리고 그 난리가 있었던 마지막 삼일까지,

현준은 현실계 시간으로 따져도 꼬발 이틀 이상 말도 없이 집을 비운 셈이었다.

물론 학교도 빼먹었다.

현준은 잔뜩 긴장해서 대문을 열었다.


"어디갔다 이제 오는거냐."


노심초사 서성이고 있던 현준의 엄마는,

걱정에 지쳐 쓰러질 것 같은 표정으로 현준을 바라 보았다.


"아.. 저.. 그게.."


현준은 무언가 변명을 하려고 했지만, 어머니는 냉정하게 잘라버렸다.


"학교에는 아파서 누웠다고 해뒀다. 늦었으니까 그만 들어 가서 자."


현준이 말도 없이 어디를 다녀 온 일은 한 번도 없었다.

하다 못해 학교 끝나고 철식이네 집에 갈 때 조차 전화를 하는 아들이었다.


"엄마.. 죄송해요."


아들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은 잔뜩 충혈되어 있었다.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핼쓱해져 있었다.

어머니는 현준이 나간 뒤로, 한 숨도 잠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현준은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했다.


"어..엄마 사실은.."


"나중에 이야기하자. 피곤하구나."


어머니도, 무슨 일인지 짐작은 하고 있었다.

그 착한 아들이 말도 없이 이틀이나 집을 비운 것은 분명 보통일이 아니다.

사실은 얼마 전 부터 아들의 방에 누군가 찾아든다는 것도 눈치 채고 있었다.

문 고리를 잡고 열어 볼까 말까 고민했었지만,


아버지의 일을 알려주기로 마음 먹은 것도 그녀로서는 엄청난 고민이었다.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얼버무렸지만...

아들의 태도는, 이미 무언가 알고 있는 듯 했다.


꼬치꼬치 캐묻는다면 현준은 분명 거짓말을 해야 할 것이다.

만약 솔직하게 대답 한다 하더라도, 떠올리기 싫은 것을 떠올려야 한다.

인정하기 싫은 현실, 하지만 현실이었다.

누구보다 사랑하는 아들이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아들이기도 하다.


자신으로서는 해 줄 수 있는 일이 더 이상 아무 것도 없을 지도 모른다.

16년전 눈 앞에서 남편을 보냈던 것 처럼...

어머니의 마음은 찢어지는 것 같이 아파왔다.


"주무세요.."


"그래.."


현준은 쭈뼛쭈뼛 방으로 돌아왔다.

작고 낡고 익숙한 가구들이 눈에 들어오자, 이제야 집으로 돌아왔다는 실감이 들었다.


"어라.."


책상 위에는 쪽지와 못보던 노트가 놓여져 있었다.


"뭘까..."


유심히 살펴보니 그것은, 태희가 남긴 메모였다.


[다 큰 남자애가 왜 비실비실 아프고 그래~

걱정되어서 와봤더니 어머니가 병 옮는다고 못 들어가게 하시더라..

뭐야 도대체 무슨 병에 걸린거얌? 혹시 도움 될까 싶어

학원에서 만난 너네 반 애들한테 물어서 오늘 진도 나간 부분 노트 복사해 왔어..

근데 너 어차피 필기 안하지? ㅋㅋ 빨리 나아 *^_^*


-태희-


PS.나 의리가 김두환 급이지?]


"아.. 태희가 다녀 갔었구나.."


현준은 복잡한 생각을 잠시 잊었다.

가슴이 두근 두근 뛰는 느낌이었다.


"태희도 혹시.. 나를.."


현준은 황홀한 기분에 젖어서 잠시 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럴리가 없지..'

현준이 알고 있는 태희는...

친구라고 생각되는 누구에게라도 이 정도 호의를 베풀 것이다.

어차피 학원 가는 길이니.. 떡볶이를 먹으려고 들렸을 수도 있고,

노트 복사해주는 것 정도야, 시험 기간이면 늘상 하는 일이기도 했다.


[PS. 나 의리가 김두환 급이지?]

이 추신만 봐도 알 수있다.


현준은 대충 이부자리를 펴고 누워서는 몇 번이고 반복해서 쪽지를 읽었다.

동글동글하고 차분한 글씨체.

내일가면, 고맙다고 하면서 캔커피라도 사 주어야 겠다.

그럼 또 그 밝은 웃음을 보여주겠지..

빨리 학교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것은 처음이었다.


-*-


다음날, 현준은 1교시가 끝나자 마자 매점으로 가서 캔커피를 샀다.

오전 내내 태희를 세번이나 마주쳤지만,

（7반 교실을 일부러 왔다갔다. 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무언가에 바쁜 듯 정신없어 보였기 때문에 말을 걸 수 없었다.

주머니 속의 캔커피는 현준의 체온 때문에 따뜻해졌다.


오후 첫 시간은 체육 이었다.

어제 아파서 결석한 것으로 되어있는 현준은 교실에서 쉬라는 제안을 받았지만 밖으로 나왔다.

혼자 교실에 앉아 바깥을 보는 것은 어쩐지 바보같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고,

더군다나 오늘은 7반 애들도 운동장에 나오는 날이다.


"선생님! 오늘은 그냥 축구 하면 안됩니까?"


반 애들의 열망에 부응해 반장인 정석이 제안했다.

마침 땡볕에 서서 애들 가르치기도 귀찮았던 체육 선생은 못 이기는 척 부탁을 들어 주었다.


"그럼 남자애들은 축구하고 여자애들은 발야구해.

땡땡이 치는거 걸리면 죽음이다.

그리고 틈틈이 알아서 철봉 연습해와. 다음 시간에 테스트 해보겠다."


"넵!!"


8반 애들이 공을 들고 신나게 몰려가자, 7반 쪽에서 원성의 소리가 터져 나왔다.

7반을 맡은 선생은 8반 선생 쪽을 뭐하는 짓이냐는 표정으로 돌아보았지만 8반 선생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결국 하는 수 없이 애들을 풀어 주고 두 사람은 그늘 쪽으로 가버렸다.

8반 애들이 막 편을 가르고 축구를 시작하려는데, 태희가 다가온다.


"야 박정석. 우리반 애들이 너네랑 축구 붙자는데?"


정석은 훗.. 하고 웃으며 대답했다.


"너네같이 존.만.한 것들 하고 해 봤자 무슨 재미가 있겠냐?"


태희한테 '존.만.한' 이 뭐야.. 현준은 얼굴을 찌푸렸지만,

정작 그 말을 들은 본인은 표정 하나 안 바뀌었다.


"그 말 그대로 전하지."


태희는 다시 자기반 애들 쪽으로 뛰어가더니 무언가 말한다.

7반 애들의 흥분한 표정으로 보아 혜란은 태희의 말 한 그대로를 전달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결국 아이스크림 내기가 되어 버렸다.


"좋아 우리반은 누가 나갈래?"


운동 잘하는 애들 11명을 뽑다보니, 현준은 자연스래 뒤로 밀리게 되었다.

덩치도 작고 그렇다고 몸이 민첩한 편도 아니었다.

그냥 노는 것이라면 모를까,

반의 자존심이 걸린 내기 시합에서 현준을 내보내자는 의견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물론 현준 자신도 나갈 생각은 없었다.


"7반 화이팅!! 동수야! 뛰어!! 승준아 뭐하는 거야!"


열심히 응원 하고 있는 태희를 흘끔 흘끔 쳐다보면서 현준은 왠지 우울해졌다

오늘 벌써 몇 번이나 마주쳤지만, 그녀는 아는 척을 하지 않았다.

하긴 사실 현준이 먼저 말을 걸면서 고맙다고 해야 할 일이다.

어쩌면 자신의 호의가 무시당한 것이라 생각하고 기분 나빠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정석은 드리블해서 세명을 제치고 적진까지 파고 든 다음,

골키퍼를 속이는 멋진 패스를 찔러 주었다.

공을 받은 녀석은 툭 차서 선제골을 기록했다.

여자애들은 발야구를 할 생각도 안하고 축구장 옆으로 몰려들어 환호성을 질렀다.


"야 박정석! 너 반칙 아냐!!"


태희가 흥분하며 소리를 쳤으나 정석은 어깨를 으쓱 할 뿐이었다.


"반칙은 무슨, 7반 반장은 돈이나 걷어"


8반 뿐 아니라 7반에서도 "박정석 너무 멋진거 아냐?" 하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응원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정석은 멋진 중거리슛으로 한 점을 더 뽑았다.

이제 7반 여자애들은 자기가 몇 반이라는 것을 완전히 잊은듯 박정석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어쩌니 저쩌니 해도 한강고 최고의 인기인이었다.


"박정석 화이팅!!"


"야! 너네! 몇 반이야? 응?"


7반 여자애들을 말리는 것은 태희 뿐이었지만,

그녀도 정석의 플레이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었다.


현준은 상상했다.

태희가 보는 앞에서 멋지게 드리블해서 강슛을 날리는 모습을...

그럼 태희는 잔뜩 골난 표정으로 다가와서..

'야 장현준 치사해!' 할테지.. 그럼 뭐라고 대답할까?


멍하니 딴 생각에 빠져서 헤벌쭉 웃고 있는 현준은,

갑자기 날아오는 축구공을 안면에 정통으로 맞고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눈 앞에 별이 왔다갔다 한다.

'제길..'

아픈 것도 아픈거지만, 무진장 쪽팔렸다.

주변에 서 있던 애들이 작은 소리로 키득키득 거린다.


"야! 얼른 공 이리로 줘.. 임마!"


드로인을 하러 나온 7반 아이가 크게 소리쳤다.

두 점을 뒤지고 있어서 말이 거칠어졌다.

현준은 공을 주으며 흘끔 태희 쪽을 바라 보았다.

그녀도 현준 쪽을 보면서 웃고 있다.

'제길, 이런 개망신을.'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빨리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정신이 없어서 방향을 보지도 않은데다가, 흥분한 나머지 잔뜩 힘을 줬기 때문에,

공은 엉뚱한 곳으로 날아가 버렸다.


"야! 어디로 차는 거야! 시간끌어?"


열받은 7반 애들이 크게 소리쳤다.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치사하게 시간을 끈 것 처럼 보일 것이다.


공은 놔두면 한참 멀리까지 날아갈 것 같았다.

일부러 차도 저 만큼 공을 날린 적이 없었다.

'하필 이럴 때 공이 잘 맞을 건 뭐람..'


"불신지옥."


현준은 자기도 모르게 주문을 읇조렸다.

더 이상 공이 멀리 가버린다면, 주으러 다녀 오는 내내 시선을 받아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엉겹결에 마법을 써 버린 것이다.


"어? 어?"


그러자 공은 갑자기 엄청난 커브를 그리며,

상대편의 골대 모서리를 아슬아슬하게 통과했다.

물론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엄청난 묘기를 보여준 셈이 되어 버렸다.


"이이건.. 베컴 슛 이다.. 아니 카를로스 슛이야.."


운동장에 서 있었던 애들은 모두 어안이 벙벙해져서 골대와 현준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일을 더 크게 만들어 버렸군.'

현준은 땅이라도 파고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하 봤냐. 쟤가 나오면 너네가 불쌍해 지니까 쉬어 준거야."


기고만장하게 떠들어 댄 것은 박정석이었다.

7반 선수들은 우연이라고 떠들어 댔지만..

구경하고 있는 애들은 그렇지 않았다.


"그러게.. 잘하는 애들 다 내보내지 않고도 2-0이네.."


"우리반 남자애들 너무 못하는거 아냐?"


다시 게임이 시작되자, 자기반 여자애들의 대화를 듣기라도 한 듯이,

8반 선수들도 분발해서 금새 두 골을 따라 잡아 2-2 동점을 만들었다.

15분 정도 남았을 무렵, 드리블해 들어가던 정석이 거친 태클을 맞고 쓰러져 버렸다.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보아 발을 접지른 모양이었다.


"정석아~ 안돼!!"


여자애들은 안타까운 비명을 질렀다.

평소에 그렇게 티격태격 하던 태희마저도 걱정스런 표정이었다.


"윽... 더 이상은 못 뛰겠다."


지혁은 부축을 받아 다리를 절뚝 절뚝 하며, 운동장 밖으로 나왔다.

생각보다 많이 삔 모양이었다.


"야. 현준아 프리킥 차."


정석은은 운동장 가의 벤치에 털썩 주저 앉아서 얼굴을 잔뜩 찡그리며 그렇게 말했다.


"응? 나?"


"그래.. 아까 보여준거 있잖아. 그거 또 해봐."


현준은 덜컥 겁이났다.

동점 상황인데 혹시 실수라도 하면.. 어쩌지..


"그건 우연이었어.."


정석은 태희 쪽을 흘끔 쳐다보며 내뱉듯 말했다.


"야 니 깔이 보고 있잖아. 뭐 하나 보여줘야지"


태희 앞에서 멋진 모습을 보여 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현준은 쭈뼛 쭈뼛 프리킥 위치로 나갔다.


"야! 시간 끌지말고 빨랑 나와!"


수비들은 벽을 쌓고, 모두 현준을 주목했다.

8반 애들은 반신반의 했다.

아까의 멋진 슛을 본데다가, 정석의 추천이니 만큼 말리지 않았지만, 애정어린 충고는 해 주었다.


"장현준. 잘차. 개발질 하면 죽는다."


현준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생각 해보면, 못 할 것도 없어 보였다.

힘껏 후려 찬 후, 적당히 마법을 걸면 될지도 모른다.


"얍.."


현준은 도움닫기를 해서, 있는 힘껏 공을 후려찼다.


"얌마! 어디다 차는거야?"


공은 허공으로 치솟았다. 골대 위로 날아갈 것 같았다.


"아 씨 이럴 줄 알았어, 왜 나서? 차지도 못하는게."


현준은 공을 노려보며, 낮은 목소리로 읇조렸다.


"불신 지옥"


그러자 공은 날카로운 곡선을 그리며 방향을 꺽어 골대 쪽으로 향했다.

골키퍼가 있는 힘껏 뛰어 보았지만,

손끝에도 스치지 않고 공은 골대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대 성공이었다.



"앗! 들어간다!


마법같은 커브슛이었다.

뭐 마법을 썼으니까 마법 같아 보이는 것은 당연하지만.


"와! 이 자식 너 그런건 어디서 배웠어?"


방금 전 까지만해도 원망하던 애들은 현준의 주위로 몰려들어 앞 다투어 하이 파이브를 청했다.

현준은 그야말로 기분이 째졌다. 분명 태희도 봤겠지...


다시 역전을 당하자, 7반 애들은 갑자기 살벌해졌다.

수비 측에서 공을 몇번 돌리더니 박정석 만큼이나 덩치가 커 보이는 녀석이 현준의 앞으로 드리블을 해 왔다.


"현준아! 막아!"


반 애들이 소리쳤지만, 현준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허둥지둥 대다가 녀석의 어깨에 부딪혀서 나동그라졌다.

녀석은 그대로 드리블해 드러가 멋진 스루 패스를 해 주었고,

그것은 동점 어시스트가 되었다. 8반 녀석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야! 장현준! 왜 그래 임마! 안 봐줘도 돼."


주눅이 들다 보니, 안 그래도 축구를 못하는 현준은 움직임이 더욱 위축 되었다.

어쩌다가 공이 와도 헛발질을 하거나 상대에게 패스하기 일수였다.


"현준아! 힘내!!"


태희는 반 애들한테 "뭐야 태희 너야말로 몇 반이야?" 하는 쿠사리를 먹으면서도

현준의 쪽을 보면서 손을 흔들며 응원을 해주고 있었다.


"아.. 태희야.."


현준의 얼굴이 확 달아 올랐다.

원래 남 신경 안 쓰는 성격인 것은 알지만,

저렇게 대놓고 이름을 부르며 응원하니 역시 민망하다.

부끄러움을 잊기 위해 이제 공과 상관 없이 마구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현준이 공과 상관 없는 곳에 있으니, 오히려 공격은 잘 풀렸다.

8반은 쉴새없이 공격을 퍼부었지만 골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았다.

골키퍼의 펀칭으로 3분여를 남겨 놓은 시점에 코너킥을 얻어냈다.


"현준아! 니가 차!"

"임마! 삽질 한거 보상해!"


아까의 멋진 프리킥을 본 애들은, 이론의 여지 없이 현준에게 코너킥을 맡겼다.

현준은 코너 쪽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생각했다.

골대 정면이라면 모를까 코너에서 골대로 차 넣기는 힘들었다.

불신지옥은 아래 위로 움직이게 할 수는 있지만, 옆으로 꺽어 들어가는 것은 배운 적이 없었다.


"음.."


[불신 지옥 예수 천국]의 원리는 땅의 마나를 비정상적으로 집중 시키거나 희석 시키는 것이다.

생각 해보면 측방운동도 가능 할 것 같았지만, 지금은 모험을 할 수가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현준은 일단 뻥 하고 공을 날리고, 불신지옥을 사용했다.

노리는 곳은, 골대 앞에 서 있는 8반 공격수의 머리였다.


머리에 맞추는 것은 골대에 넣는 것 보다 훨씬 어렵다.

현준은 최대한 신경을 써서 마나의 흐름을 조절했다.

마법을 쓰는 사람에게는 기본 중의 기본이었지만, 현준으로서는 첫 시도였다.

여태까지는 강약과 시차 조절도 없이 단지 주문을 외우고 나서는 아무 신경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우와아!"


공은 멀리 날아갈 것 처럼 보였지만, 커브를 틀며 내려와 골대 앞으로 떨어졌다.

하지만 같은 반 녀석의 머리에 맞추는 것은 실패였다.

역시 그 정도로 미세한 조정은 지금의 현준으로서는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 공은 운 좋게도 공격수의 발 앞에 떨어졌다.


"어랏?"


8반 공격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살짝 밀어 넣어 골을 기록했다.


"나이스!"


7반 아이들은 완전히 기가 꺽여 버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끝나는 종이 울렸다.


"이겼다!"


8반은 월드컵에라도 우승한 듯이 기뻐 날뛰었다.

7반 애들은 억울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진 것은 진 것,


"야! 김태희! 아이스크림!"


"알았어 알았어."


종례가 끝나고, 7반 애들이 약속대로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왔다.


"야 우리반 40명이야! 아이스크림은 반 밖에 없잖아!"


"쌍쌍바 잖아.. 나눠 먹어!"


"와.. 얍삽하게.."


태희는 현준 쪽으로 다가와서 입을 삐쭉 내밀며 말을 걸었다.


"너 축구 잘하던데.."


"뭘..."


현준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엄청난 반칙을 쓴 셈이니, 조금 찔리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어제.. 고마웠어."


현준은 겨우 말을 꺼낸 것이었지만,

태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대답한다.


"응? 뭐.. 아 그거? 후후 덕분에 떡볶이 공짜로 먹었어. 어머니가 주시더라."


"그랬어?"


"종종 결석해 줘~"


태희는 빙긋 웃으며 바이바이를 하더니, 교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역시 별 의미는 없이 한 행동이었군,..'

현준은 조금 실망스런 기분이었다.



-*-



그 후로 거의 매일 점심시간마다 8반은 다른 반들의 축구 도전을 받아 주어야 했다.

절묘한 드리블과 뛰어난 운동 신경을 가진 정석과, 가공할 중거리 커브슛의 현준의 소문은 금방 전교에 퍼졌다.

급기야 토요일 오후에는 3학년들 까지 연합팀을 조직해 도전할 정도였다.


"너 봤어? 2학년 8반 베컴인가 뭔가하는 놈 커브킥? 엄청나지 않냐? 완전 유도 미사일이야."

"아 알지.. 근데. 킥 말고는 완전 초짜던데.."

"그러게.. 그것 참 희안하네."

"그리고 그 새끼 슛 쏠 때마다 무슨 미친 놈 처럼 '예수천국 불신지옥' 하고 중얼거린다며?"

"푸하하하 골 때리는 놈이네 그거..."


이런 이야기가 교내 전체에서 회자 되었다.

있는 듯 없는 듯 하던 애였던 현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명인이 되어 버렸다.

처음에는 부담스러웠지만, 싫을 리는 없었다.

재미가 붙은 현준은,

메피스토의 수업이 끝난 후에도 근처 학교 운동장에 가서

밤 늦도록 축구공으로 할 수 있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연습했다.


땅볼로 가던 공이 하늘로 치솟는다던가 포크볼 처럼 뚝 떨어진다던가 하는 것은 쉬운 편에 속했지만,

그것은 완전 마구처럼 보일테니까 사람들 앞에서 쓸 수는 없었다.

적어도 인간이 할 수 있다는 인상은 줘야한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노력을 하다보니,

현준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미세한 마법 운용에 대해서 깨달아가고 있었다.


"이런 걸 몰랐었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