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0일만에 헤어졌다. 모솔로 26년 동안 살다가 정말 우연한 기회로 사귀게 됐는데 헤어졌다.

입시 준비한다고 1년 동안 홍대 앞 학원에서 20 30분 밥만 먹고 헤어지고, 집 앞에서 10분만 보면서도 행복했었는데 솔직히 악으로 깡으로 버텼던 것 같다.

대학 붙으면, 부모님한테 공개적으로 연애한다고 밝히게 되면 지금보다는 낫겠지 싶어서 남들은 왜 그런 븅1신같은 연애하냐고 했는데도 1년을 꿋꿋이 버텼다. 여자친구도 나한테 미안해했고, 내년에 행복하게 해주겠다고 했기에 버텼다.

그리고 원하는 대학 붙고, 여자친구 부모님한테도 인사드리고 공개적으로 연애해서 진짜 행복했다.

근데도 쉽지가 않더라.

아르바이트 하고 있을 때였다. 걔가 술에 잔뜩 취해서 비트윈을 보냈길래 봤더니 헌팅포차에서 남자들이랑 놀고 있다더라. 남자랑 손 크기도 대보고 자기보고 재밌다고 해줬다더라. 야마가 돌아버려서 4시간 넘게 연락도 안보고 잠수탔다가 울면서 미안하다고,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하겠다고 하길래 헤어지려는거 참았다.

근데 한 번 엇나간 마음이 돌아오기 쉽지 않더라.

독서실 총무 일 끝나고 독서실에 쌓여있던 내 책들 정리해서 여행용 캐리어에 담아서 눈보라 치는 날씨에 집까지 끌고 오던 날이었다.

힘들어죽겠다고, 집가서 김치찌개 먹고 싶다고 하소연하는데 내 알 바냐고 이죽대던 그 말에 또 빈정이 상해버렸다. 입이 문제라고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다짐하길래 또 참았다.

장거리 연애였으니까, 나는 너가 사는 자취방까지 내려갔다.

연구실 랩미팅이 끝나고, 저녁 8시 기차를 타고 너를 보러 내려갔지만 너는 갈 때마다 피곤하다, 친구들이랑 술 마셔서 오빠랑 못 놀겠다고 퇴짜를 놨다. 이럴거면 다음에 오라 하지. 왜 오라했냐 하니까 왜 그렇게 말을 하냐고 하더라.

거기서 끝냈어야 했다.

어제 같이 지하철 타고 대학로 가던 길에 내가 말했다. 나 오늘 저녁에 친구들 만나. 그랬더니 왜 나랑 안 노냐. 난 오늘 오빠랑 놀 생각 뿐인데 왜 이중약속을 잡냐고 하더라. 평소처럼 조곤조곤 말하는 게 아니라 싸우자는 식으로 말하는 게 위화감이 들더라.

예전의 나였다면 미안하다고 말하면서 파토를 냈겠지. 여자친구도 그랬다. 왜 평소처럼 미안하다는 말 없이 약속을 잡냐고 성토했다.

나도 변했구나. 너무 많이 변했구나.

지하철에서 내려서 2시간은 싸운 것 같다. 헤어지고 싶은 마음 절반, 그렇지 않고 싶은 마음 절반이었다. 근데 왠지 모르게 헤어지는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더 이상 이렇게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싶지 않다, 내가 사는 곳에 자주 올 수는 없는 거냐, 내 희생이 당연한 거냐고 물었다.

그리고 부모님 눈치보면서 서울에서만 놀고, 어디 멀리 나가 놀지도 못하고 단조롭게 연애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너는 이렇게 말했다.

나중에 더 좋아질수도 있겠지만, 이쯤 정리하는게 맞는 것 같다.

나는 진즉에 풀었던 팔찌와 시계, 반지를 내밀었다. 너는 내가 선물해준 애플워치, 디지털카메라를 내밀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모든 사진과 연락처를 지웠다.

후련했다. 가는 길에 잘 살고, 수고했다고 인사했다. 내심 가뜩이나 눈물샘 약한 너가 날 잡아줬으면 했는데 드라마처럼 극적으로 일이 흘러가진 않더라.

집에 오는 길에 친구랑 술 한 잔하면서 헤어진 얘기를 했다. 고생했다고 말해주더라. 소주 2병에 짬뽕탕 먹은 속이 메슥거려 집 오는 길에 게워냈다. 이렇게 술 먹는 날이면 습관처럼 나 집가고 있다고 전화했는데, 이제 못하네.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울적해졌다. 뻘건 토를 눈으로 치워내면서 슬퍼졌다. 집에 들어와 너와 찍은 사진, 선물 받은 옷 같은 것들을 재활용 봉투에 담았다. 헤어지면서 선물받은 것들은 택배로 보내주겠다고 한 터였다. 얼마나 많은지 두 봉투가 나오더라.

책상 위에 올려져있던 사진을 불태웠다. 잘 태워지지 않았다. 모든 걸 정리하니 집이 허전해졌다.

오늘 아침, 너한테 와야할 연락이 오지 않았다. 당연했다. 당연한 건데도 울적했다. 차라리 내가 미안하다 말하고 친구와의 약속을 파토냈다면 괜찮았을까.

그래도 사람은 좋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퍽 안기는게 좋았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걸까.

작성자 전여친 오지마... 나 힘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