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11살인지, 12살 때 겪은 일이다.
부모님께서 일 때문에 일본으로 떠났었다.
운이 좋게도 그때 그 즈음해서 여름방학이 되었고
나는 할머니와 한동안 지내게 되었다.
할머니가 어릴 적에는 마을에서 알아주는 벼락 부자였는데
이 후에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넓은 한옥 한 채만 남은 상태였다.
도착한 당일, 예상치 못 한 소식을 들었다.
할머니께서 갑작스레 쓰러지셨다는 거였다.
다행히 가까운 곳에 신부님이 계셨고
할머니는 가까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고 했다.
할머니는 카톨릭 신자셨다.
“걱정 말아라. 금방 나아서 돌아오실 거야.”
신부님께서 말씀하셨다.
신부님은 나를 할머니 집에 데려다 주고는 돌아갔다.
그렇게 나는 할머니 집에 혼자 남겨졌다.
낮에는 괜찮았다. 냉장고에 먹을 만한 것을 꺼내 먹고
집 앞 논밭을 혼자서 돌아다니며 놀았다.
저녁이 집으로 돌아오자, 집 안은 어둠으로 가득 차있었다.
집 안 벽에 걸린 할아버지의 사진이 나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다.
가끔 할머니가 가족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말을 흐리곤 했다.
잠을 청하려 누웠지만 쉽게 잠들지 못 했다.
방 안의 오래된 괘종 시계가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를 내었다.
현관문이 열린 것은 그 때였다.
“할머니?”
나는 할머니가 돌아왔다는 생각에 화색이 돌았다.
“그래, 은철아. 할미 왔다.”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나는 방에서 나와 현관으로 달려갔다.
할머니가 서 계셨다.
하지만 어딘가 달랐다.
평소보다 창백한 얼굴, 굽었던 허리가 꼿꼿이 펴져 있었다.
“할머니, 이제 안 아픈 거에요?”
“그래, 다 나았어. 우리 강아지 혼자 있을까 걱정 돼서 금방 나았지.”
말 내용과 다르게 할머니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어딘가 딱딱한 느낌도 났다.
나는 할머니가 피곤하셔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저녁 못 먹었지? 할미가 차려줄게.”
할머니는 부엌으로 갔다. 나는 그 뒤를 따랐다.
이상하게도 할머니는 주방에서 불을 켜지 않았다.
달빛만이 부엌을 비추고 있었다.
“할머니, 불 안 켜요?”
“아니야. 눈 시려서 불 켜면 안 돼.”
할머니는 냉장고로 가지 않았건만
어디선가 음식을 가져와 상을 차렸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할머니의 손놀림은 빨랐다.
식탁 위에 접시들이 놓여 졌지만
보기 만해도 구역질나는 것들이 올려져있었다.
“어서 먹으렴.”
나는 젓가락을 들 생각도 하지 못 했다.
그냥 보기에도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음식에서 어떤 냄새도 나지 않았다.
“할머니, 이게 뭐예요?”
“옛날에...특별한 날에 먹던 음식이란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갈라져있었다.
“배 안 고파요. 내일 먹을게요.”
할머니의 눈빛이 달빛을 받아 예리하게 빛났다.
“그럼 손님들에게 인사하러 나가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단다.”
“손님이요? 누군데요? ”
“친척들이란다. 손주가 왔다고 해서 보러 왔지.”
할머니는 현관문을 열었다. 그리곤 내 손을 덥석 잡았는데,
그 손이 어찌나 차갑던지 얼음덩어리 속에 손을 넣은 것 같았다.
“하...할머니. 저 안 갈래요. 무서워요.”
“안 돼. 이제 시간이 없어. 네가 가야만 해.”
할머니는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무서워서 오줌을 지릴 것 같았다.
“...진짜...우리 할머니 맞아요?”
할머니는 말이 없이 나를 억지로 끌고 집 밖으로 나갔다.
문을 나서자 집 앞에 있던 마당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있었고
어두운 숲길이 나있었다.
안개가 자욱했고, 나무들은 어딘지 사람 형상이 보이는 듯 했다.
나무 사이에는 길을 따라 호롱불이 매달려 있었다.
“이제...가자...”
할머니가 내 손을 세게 잡아끌었다.
어찌나 힘이 센지 나는 저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갔다.
숲길을 따라 들어가자 풍경은 시시각각 변해갔다.
나무들에서 보이던 사람 형상은
점점 또렷해져갔다.
상투를 틀고 한복을 입은 모습들이었다.
나무 속 사람들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할머니... 이 사람들은 다 누구에요?”
할머니는 그저 한기가 담긴 미소만 지었다.
땅바닥은 진창처럼 변해 갔는데,
물이 아닌 검붉은 액체로 걸쭉해져있었다.
걸음걸이마다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었고
신음소리가 뒤따라 왔다.
“할머니, 무서워요... 여긴 어디에요?”
“우리의 업보...죄과...”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러 목소리가 겹친 것 같았다.
숲길이 갑자기 끊기며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사람 형상을 하였지만 완전히 사람 같지는 않았다.
피부는 회색에 눈자리엔 거대한 검은 공동이 있었다.
일부 사람들의 복장은 제복 같은 것 입고 있기도 했다.
손에는 칼을 쥐고 있기도 했다.
그들이 나를 가리키며 읊조렸다.
“우리...피...”
“돌아왔다...”
“우리의 자손...”
그들은 공토 가운데의 커다란 구멍을 둘러싸고 있었다.
구덩이 속에서는 불이 타오르고 있었고
안에는 사람들이 고통스럽게 몸부림 치고 있었다.
비명소리에 귀를 막아야했다.
그들 위에는 제복을 입은 노인이 서 있었다.
집에서 보았던 할아버지 사진 속 인물과 꼭 같았다.
“네 핏줄...네 피 속에...이어진다...”
할머니의 말은 불분명했다. 그러니 의미는 점점 명확했다.
내 조상이 저지른 일에 관한 것이었다.
구덩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았다.
핏발이 선 눈엔 구덩이에서 올라온 불꽃이 비쳐보였다.
그들은 어느새 모두 칼을 들고서 나를 향해 다가 왔다.
“이제...시간이 되었다...”
나는 할머니의 손아귀에서 벌어나려 했다.
소용이 없었다.
할머니는 나를 억지로 구덩이로 끌고 갔다.
가까워질수록 열기가 느껴지고
무서운 사람들의 열망이 느껴졌다.
“이거 놔요! 왜 나한테...”
“피는...숨길 수 없다...”
손아귀의 힘은 점점 강해졌다. 내가 고개를 들어 할머니를 보자
할머니의 얼굴은 완전히 변해 있었다.
피부는 거의 떨어져 나갔고, 뼈가 드러나 있었다.
구덩이에서 노인이 걸어 나왔다.
온 몸에 피를 묻힌 모습이었다.
“이리...오너라...”
그의 목소리가 기괴하게 울렸다.
다른 이들도 속삭였다.
“대가를 치르리라...”
“피의 기억을...”
“영원한 책임...”
나는 마지막 힘을 내어 손을 당기자, 뼈만 남은 할머니의 팔이
통째로 떨어져 나왔다.
나는 필사적으로 달렸다. 뒤에서 무언가가 쫓아왔다.
나무들이 뿌리를 뻗어 발목을 잡으려 했다.
땅 속에서 손들이 튀어나왔다.
“돌아와...끝내야한다...속죄를...”
소리가 가까워졌다. 뒤돌아보니 할머니는 사라지고
검은 옷을 입은 그림자 같은 것이 다가오고 있었다.
“안돼!”
비명과 함께 나는 벽에 부딪혔다.
침대 아래였다.
나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방 안을 둘러 보았다.
창문을 통해 아침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꿈이었구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꿈이라는 생각에 안도감이 들었지만
동시에 불안해지기도 했다.
할머니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꿈에서 본 장면들은 무슨 의미일까?
현관문이 열리는 벨소리가 들렸다.
“은철아, 할미 왔다!”
할머니의 목소리였다. 순간 나는 얼어붙었다.
간밤의 악몽이 떠올랐다.
조심스레 현관으로 가보자 할머니가 서있었다.
구부정한 허리, 주름진 얼굴, 따뜻한 미소.
할머니였다.
그 옆에는 신부님도 있었다.
“병원에서 검사 결과가 좋아서 퇴원했단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할머니에게 달려가 안겼다.
“할머니, 이상한 꿈을 꿨어요. 너무 무서웠는데...”
할머니는 잠시 굳은 표정을 지었다가 이내 안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나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은철아, 이건 할미의 부적이란다. 무서운 걸 쫓아 줄거야.”
손 위에 있는 것을 보니 처음 보는 물건이었다. 둥그런 동전 같은 모양의 물건이었다.
뒷면에는 한자와 날짜가 새겨져 있었다.
“이게 뭐에요?”
할머니는 꿈속에서 봤던 눈빛을 내며 말했다.
“과거의 흔적이란다. 언젠가 알게 될 거야.”
할머니는 내 손에 그것을 꼭 쥐어주었다. 금속의 차가움이 내 손에 파고들었다.
내가 이 물건이 훈장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한참 후의 일이었다.
우연하게 본 신문 기사에 게재된 사진을 보게 되었는데
거기서 난 충격적인 사실 알게 되었다.
이 훈장은 독립 운동가들을 밀고한 자들에게 수여된
훈장이었던 것이다.
밀고한 대가로 많은 돈을 받은 것은 두 말할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밤이 되자, 나는 다시 훈장을 바라봤다.
달빛 아래 훈장이 붉게 빛나는 것 같았다.
멀리서 희미하게 비명 소리가 들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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