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라면 누구나 백마 탄 왕자님과 행복하게 사는 것을 꿈꾼다.

물론 대부분은 현실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그저 그런 어중이떠중이에 만족해버린다.

왕자를 만날 수 있는 건 공주뿐이니

못난 여자들은 결국 자신의 처지를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단순히 외모에 대한 자신감 때문만은 아니다.

난 내가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왕자님을 이미 만난 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무조건 돌아올 수밖에 없는 아주 확실한 인질이 있으니까.

“자, 이리 와봐. 어때? 너무 예쁘지?”

커다란 전신 거울 앞에 서서 손짓하자 7살 난 딸내미가 쭈뼛거리며 다가와 내 앞에 선다.

정성을 다해 꾸며둔 덕에 자기가 보기에도 예뻤는지 자그만 볼에 미소가 번진다.

역시 내 딸답게 떡잎부터가 다른 미모.

대신 눈매만은 제 아빠를 빼다 박았다.

모기업 재벌 2세인, 나의 왕자님을!



그이와 만난 건 클럽에서였다.

나의 최전성기였던 그때에는 VIP룸 아니면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괜찮은 사람 어디 없을까? 나에게 어울릴만한 완벽한 사람...’

그렇게 한참을 찾아 헤매다가 만난 것이 그이였다.

잘생긴 외모에 몸도 탄탄하고 돈이 많으면서도 결코 허세는 없었다.

자상하고 지적이지만, 필요할 땐 야성적으로 불타오르는 그런 남자.

그야말로 꿈에 그리던 그 사람을 난 어렵지 않게 유혹해 낼 수 있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그저 즐거웠던 하룻밤일지 모르지만,

다행히 난 기회를 놓치지 않고 제대로 된 수갑을 채워 버렸다.

나와 똑 닮은 딸로서.

혹여나 도망칠까 싶어 애가 태어날 때까지 꾹 참고 기다렸다가

연락이 되지 않던 그의 앞에 나타나서는 보란 듯이 안겨주었다.

머리를 쓴 덕에 복잡한 과정은 전부 넘겨 버릴 수 있었지만

그이는 시간을 조금만 달라고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위치가 있다 보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라 너그러이 기다리기로 했다.




다만 그 시간이란 것이 생각 이상으로 오래 걸려 딸이 벌써 7살이 되었다.

돈이 떨어질 때쯤 돼서는 그이가 다른 사람을 통해

양육비나 소식을 전해 오곤 했지만,

여전히 기다려 달라는 말뿐 더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대로 버려지는 게 아닐까?

어쩌면 정말 이렇게 같잖은 양육비나 받으면서 미혼모로 평생 살아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 불안감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날 괴롭혀 왔다.

당장이라도 기자들이건, 그이 부모님에게건 찾아가서

이 아이가 그 사람 아이라고 소리치고 싶은 욕구를 참기 힘들 만큼.

하지만 자칫 잘못했다간 미친 여자 취급을 받거나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될 수도 있다.

그럴 바엔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이가 우리를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예쁜 딸을 누가 모른 척 버려두겠어?”

거울을 보며 생긋 웃는 딸을 보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어지간한 아역배우들조차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예쁜 아이.

내가 죽어라 가꾸어낸 결실이 거울 속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저걸 외면할 수 있는 남자는 없다.

한 번이라도 이 아이를 안아 든다면 결코 도망칠 수 없다.




찬란한 미래를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들었을 때,

섬뜩한 기분이 스치고 지나갔다.

딸과 나란히 비치는 거울 속 나의 모습.

전성기 때의 그것만큼은 아니지만,

나이에 비해 동안인 외모에 군더더기 없는 몸매. 뽀얀 피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훌륭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다.

하지만 문제는 이 거울 안에는 다른 존재도 함께다.

그것도 할 말을 잃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작은 존재가.

이상한 감정이 들었다.

불안감도 있었고, 희미한 분노와 함께 말로 표현 못 할 감정이 섞여 들어왔다.

문득 딸아이를 안아 드는 그이의 모습을 상상해 보았다.

해맑게 웃으며 딸의 볼에 얼굴을 부비는 그 사람의 모습.

그리고 한 발짝 떨어져서 그 모습을 그저 지켜보고 있는 나.

다급히 거울에 바싹 붙어서서는 내 모습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철저하게 관리했지만 역시나 피부의 탄력이 많이 떨어졌다.

몸매도 20대 때와 비교하면 그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머릿결도, 손도, 그리고 다른 모든 것들이 전부

내가 나이를 먹고 있다고, 못나지고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그렇게 예뻤는데 내가 어쩌다가 이 모양 이 꼴로

딸년 머리나 묶어주고 옷이나 입히는 식모가 되었을까?

복잡한 감정들이 휩쓸 듯이 온몸을 훑고 지나가고

결국 남은 것은 딸에 대한 원망과 분노. 그리고 질투였다.

여전히 거울을 보며 생글거리는 딸을 거칠게 잡아 방으로 밀어 넣었다.

“이제 그만 가서 옷 갈아입어. 거울 보면서 실실 웃지도 말고.

내가 너만 할 때는 그거보다 열 배는 예뻤어.”

놀란 눈으로 방에 들어간 딸을 뒤로하고 다시금 거울 앞에 서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대로는 안된다.

적어도 저 어린것이랑 나란히 섰을 때 볼품없어 보이면 안 된다.

그이가 나 대신 딸에게 정신이 팔리게 해서는 안 된다.

예쁜 것을 만들고 키우는 몸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나 스스로가 주인공이 되려면 더 노력해야 한다.





운동시간을 늘리고 피부관리에 돈을 쏟아붓기 시작했다.

육아, 가사에 마냥 얽매이다간 완전히 아줌마가 되어버릴 테니

나 자신의 가치와 품격을 높이기 위해 투자해야 한다.

나를 가꾸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딸애의 모습은 변해갔다.

얼룩진 못난 옷에, 머리는 엉망이고, 눈곱도 떼지 않은 볼품없는 모습.

우습게도 그 모습이 내게 큰 위안을 주었다.

이제는 거울 앞에 나란히 서도 내가 가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럽고 하찮아 보이는 딸과 달리

내 모습은 훨씬 세련되고 또 우아하고 격조 높아 보인다.

그것을 확인하자 안도감이 몰려왔다.

이 정도라면 이제 그이도 날 바라봐 주겠지.

이대로만 유지하자.

이대로만.

다시금 이 지독한 기다림을 버틸 힘을 얻었다.




“엄마! 나 머리 묶어주세요!”

머리 고무줄을 들고 해맑게 다가오는 딸에게 약간의 불쾌감을 느꼈지만

잠자코 건네받아서는 얌전히 머리를 묶어주었다.

그 전같이 예쁘고 화려한 기술 따윈 없다.

그냥 거슬리지만 않게 대충 모아서 묶을 뿐.

하지만 딸애의 머리칼을 만지던 중 다시금 섬뜩함을 느껴야 했다.

어떻게 이렇게 부드럽지?

최근 들어서는 특별히 딸애 머릿결을 케어해 주고 있지 않다.

오히려 각종 트리트먼트와 영양제로 내 머리에 정성을 쏟을 뿐.

하지만 갈수록 푸석해지는 나와는 달리 딸애의 머리카락은 부드럽고 건강했다.

이거에 비하면 내 머리는 짐승의 털과 다를 바 없었다.

이번엔 명확한 단 하나의 감정만이 느껴졌다.

질투.

내게 없다면 이 쪼그마한 계집애도 가질 자격 없다.

난 곧바로 머리 고무줄을 던져버리고 주방에서 가위를 꺼내왔다.

“엄마 왜 그래?”

딸애가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난 딸애의 머리칼을 잡아 들고

숭덩숭덩 잘라내기 시작했다.

딸애는 갑작스러웠는지 전혀 반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울음을 터트리며 몸을 빼내려 했다.

“얌전히 있어! 이렇게 더럽게 하고 다닐 바엔 다 잘라버려!”

거칠게 머리채를 쥐어 잡아 꼼짝 못 하게 만들고는 가위질을 멈추지 않았다.

투박하게 잘려 나간 머리카락들로 바닥을 가득 채우고 나서야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다.

거울에 엉망으로 잘린 짧은 머리를 한 채 울고 있는 못난이의 모습이 비치자

비로소 진정하고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가서 씻어. 더럽게 그러고 있지 말고!”

딸애를 욕실로 밀어 넣은 뒤, 거울을 보며 내 머리를 쓸어보았다.

아무래도 내일은 헤어샵에서 제대로 관리를 받아야 할 것 같았다.




시간이 제법 많이 지났다.

여전히 그이는 나를 데리러 오지 않고 있다.

하루라도 더 빨리 와야 조금이라도 더 예쁜 나를 볼 텐데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불안감이 커져갔다.

그간 예뻐지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내가 빛날 수 있게, 아니 오직 나만 빛날 수 있게

난 비싸고 고급진 옷을 입었고 딸에게는 거적때기나 다름없는 옷을 던져주었다.

난 큰돈 주고 머리를 꾸몄고, 딸애는 여전히 선머슴 같은 꼴이다.

내가 철저한 식단관리를 하며 피부관리, 몸매관리에 힘쓰는 동안

딸에게는 알레르기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개 사료나 다름없는 음식을 주었으니

발진과 두드러기로 엉망이 된 피부에 처절하게 쌓이는 살로 추해져 가고 있었다.

이제 나란히 서면 그 누구도 이 작은 계집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 오랜 시간을 버티고도 여전히 아름다운 나.

스포트라이트를 받아 마땅한 나에게 모두의 시선이 머문다.

준비는 완벽하다.

그리고 마침내 검은 양복을 입은 몇몇이 집으로 찾아왔을 때

난 흥분감 대신 고고하고 기품있는 태도로 그들을 맞이했다.

이건 꿈에 그리던 그 날이 찾아온 게 아니라

당연히 받아야 할 대우를 받는다는 듯이.

하지만 그들이 내게 건넨 말은 뜻밖의 것이었다.

“도련님 지시로 찾아왔습니다.

아무래도 그간 심적으로 많이 힘드셨던 모양입니다.

도련님 역시 긴 시간 동안 전력으로 설득하셨고,

회장님께서도 이제 슬슬 허락하려 하셨지만,

최근 들어 보여주신 불안정한 육아 모습을 회장님께서 알게 되신 탓에...

도련님께서 유감을 표하시며 입원 치료를 지시하셨습니다.

국내 최고의 정신과 의료진이 준비되어있습니다.

따님은 도련님의 양녀로써 입양되어 올바르게 키워질 것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저택이 아니라 병원으로 모신다니?

딸애만 데려가겠다니?

그것도 양녀로 입양이 된다니?

아니 그럴 리 없다.

이렇게 완벽한 나를 이렇게 예쁜 나를 그냥 버릴리는 없다.

나를 버리고 저 더럽고 못난 계집애만 데려갈 리 없다.

난 악에 받쳐 소리쳤다.

“왜? 왜 내가 아니라 이년이야?

그렇게 어린 게 좋아? 잘 가꾸면 나보다 예뻐질 것 같아서?

웃기지 마!

이 더러운 계집애만 데려가고 난 병원에서 늙어 죽으라고?”

역시 내가 너무 안일했다.

나를 닮은 미모는 고작 이 정도로 죽일 수는 없다.

보다 확실한 조치가 필요하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을 만큼 혐오스럽고 더러운 꼴로 만들어야 한다.

난 다급히 방안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그고, 자고있는 그 계집을 잡아 일으켰다.

“그래. 이거로는 부족하다 이거지?

나보다 이년이 더 예쁘다 이거지?

두고 봐 이년 얼굴이 어떻게 되나.”

마침 눈앞에 거울이 보였다.

거울에 비친 너무도 완벽하고 아름다운 나.

그리고 버려진 쥐새끼보다 못한 꼴로 눈물 콧물 쏟아내며 잡혀있는 계집애.

누가 더 예쁜지. 누가 더 대접받아야 하는지, 확실히 할 시간이었다.

분노를 담아 거울에 주먹을 휘둘러 제일 큼직한 조각을 집어들었다.

대략 일곱번쯤 난도질 해 버리면 충분하겠지.

번들거리는 유리날을 들이밀자 딸년은 그야말로 짐승같은 울음을 질러내었고,

나약한 버둥거림이 내 몸을 자극해 왔다.

“그래! 울어! 그렇게 못난 얼굴을 해야 내가 더 빛나니까!”

날카로운 유리 파편에 손에서 피가 나고 있었지만 고통따윈 없었다.

마침내 유리조각이 그년의 피부에 닿으려는 그 순간,

우직하고 문이 부서지며 검은양복들이 들이 닥쳤다.

“이거놔! 나한테 이러면 안되지! 저년이 아니라 날 데려가!!”

한참을 발악해 봤지만 소용없었다.

허탈감과 억울함에 기운이 빠져 축 늘어진 채 끌려나가며

마지막으로 고개를 들고 반쯤 깨져나간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미줄처럼 갈라진 거울 속에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버린 짐승만이 있을 뿐이었다.



By. neptunus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