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어색하지도 않네.’

눈을 감고 걸어도 도착할 것 같은 익숙한 아파트였다. 다 벗겨진 아파트 페인트와 이미 운명한 아파트 입구의 전조등. 눈을 감아도 그 장면들이 모두 그려진다. 물론 이 아파트를 올 때마다 쏟아지는 이 빗줄기마저 말이다.

‘이런 날에 판촉 한다고 하면 이상하게 보려나?’

그 생각은 금방 흩어졌다.

‘요즘 세상에 뭔 걱정이람…….’

어디까지나 정장차림으로 온 것은 들켰을 때 판촉을 위해서 왔다고 둘러대려는 요량일 뿐. 게다가 요즘 비 오는 날에서 판촉 하는 사람이 많은 편이다. 워낙 살기 힘든 세상이니까. 조금이라도 팔려고 발버둥치는 것이다.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며 우산을 접었다. 어찌나 비가 많이 쏟아지는지 우산이 묵직해질 정도였다. 우산을 털며 그 묵직함을 털어냈다.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에서 판촉 종이를 하나 꺼내들고 천천히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어갔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정말 찝찝한 곳이라니까.’

만약 조금이라도 담력이 약한 사람이 이곳에 온다면 귀신이라도 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보니 여기서 사람이 죽은 건 사실이니까 귀신이 나와도 이상하진 않겠네.’

그런 시답지 않은 생각을 하며 또 다시 13층을 향해 올라갔다. 미세한 멀미를 느끼며 천천히 위로 향했다.
손에 쥐고 있는 판촉 종이를 천천히 읽어보고 있는데 갑자기 주변이 어두워졌다 밝아졌다를 반복했다.

“여기도 맛 가려고 하네.”

엘리베이터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연신 깜박거렸다.

‘하긴 관리인이 없는데도 이렇게 꾸준하게 살아있는 것도 대단하지.’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13층에 도착했다. 익숙한 붉은 디지털 글씨가 나를 반겼다.

‘그리고 보니 13이라는 숫자가 썩 좋은 숫자는 아니네.’

13시에 저주라든지 13일의 금요일이라든지……. 13은 기분 좋은 숫자는 아니었다. 물론 나는 그런 미신을 믿지 않는 주의다.

‘아니지, 실제로 여기에 살인마가 살았으니까 완전히 미신은 아니네?’

그렇게 생각하며 슬그머니 주머니에서 이어폰을 꺼냈다. 참고로 이번에도 역시 도청기를 준비했다. 저번에 옷장에 도청기를 넣어두긴 했지만 분명 배터리가 다 됐을 거다. 문구점에서나 파는 싸구려 도청기다 보니 수명이 그리 길지 않았다. 어차피 천 원짜리 도구들이라 큰 부담이 없긴 하다. 그 만큼 제대로 된 소리를 들을 순 없지만 전문적으로 준비할 만큼 금전적인 여유가 있진 않았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전에 썼던 도청기에 연결된 이어폰을 들고 와봤지만 역시나 아무런 노이즈조차 잡히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하나 뒀으니 저번처럼 들어가면 되겠지.’

1308호로 바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이러면 판촉사원으로 보이지 않을 것 같아서 일부러 가는 길목에 있는 집 벨들을 다 눌렀다.

“계십니까.”

과거 판촉 했을 때의 경험을 되살려 문을 두드렸다. 아파트 벨은 적어도 2번은 눌러야만 한다. 가끔 영화나 음악 감상을 하다 못 듣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1308호로 다가갔다. 지금은 택배원이 아니다. 어디까지 우유를 팔기 위해 온 사원일 뿐이다. 그렇게 되뇌며.

‘마지막 집이다.’

1307호의 벨을 누르자, 이번에도 역시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 그럼 드디어 1308호.’

1308호의 벨을 눌렀다. 여기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역시 아무도 없는 건가.’

하긴 그런 살인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남아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집보다 벨을 2번 정도 더 눌렀다.

“계십니까~”

없는 것 같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보고는 문고리를 잡았다.

‘좋아, 이대로 들어가면…….’

원래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문고리를 돌리고 들어가야만 했다. 하지만…….

끼익.

“누구세요.”
“우악!”
“꺅!”

나도 모르게 뒤로 넘어가서 엉덩방아를 찍고 말았다. 손에 쥐고 있던 우유판촉 전단지도 완전히 바닥에 뿌려졌다. 귀에 꼽고 있던 이어폰도 바닥에 떨어뜨렸다. 말 그대로 완전히 다 쏟았다.
내 비명에 문 너머에 있던 여자도 놀란 모양인지 짧게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잠시 주춤하더니 이내 이상한 눈빛으로 넘어진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 사람이 있었어?’

총이라도 맞은 것처럼 머릿속은 혼란으로 가득 찼다. 어째서 이곳에 사람이 있는 건지, 혹시 이 사람은 그 종교 단체의 사람은 아닌 건지, 그럼 어색하게 행동해서는 안 되는 건지……. 그런 생각들이 마구 뒤섞여 말을 제대로 잇지도 못했다.

“아, 아아아, 안녕하세요! 태, 택배기사입니다!”
“택배요?”

그녀는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그제야 내가 택배원 차림이 아니라 정장차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아, 아아!! 그게 아니라 우유판촉 사원입니다!”

여전히 수상하다는 눈빛을 거두지 않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거짓말을 하면 더욱 오해를 살 뿐이었다. 어느 정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후, 인기척이 없어서 당연히 안 계신 줄 알고 있다가 너무 놀랐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그럴 수도 있죠. 괜찮아요?”

그러면서 그녀는 나에게 손을 건넸고, 아직 혼란스러운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엉덩이의 먼지를 털어내며 그녀를 살폈다.
짧은 단발과 큰 눈에 하얀 피부. 그냥 솔직히 말하자면 미인이었다. 거기다가 집 안에서 흔히 입는 핫팬츠에 흰 나시까지……. 남자로서 그런 복장에 눈이 가지 않으면 이상할 거다.

‘무슨 생각하고 있는 거야.’

격하게 고개를 흔들며 잡념을 털어냈다. 이 여자는 그 종교 단체의 사람이다. 전의 대화 내용으로 봤을 때 이 집은 이미 그 사이비 종교에 속해있는 곳이니 그녀도 그렇다고 봐도 무방할 거다. 그런 그녀를 보고 이상한 마음을 품는 것 자체가 미친 짓이었다.

‘좋아, 조금 계획이 이상하게 됐지만 정면 돌파다.’

나는 마음을 다 잡으며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혹시 마시고 계신 우유 있으신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