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

나이를 좀 먹어버렸더니 섣불리 나이 밝히기가 꺼려지네

원래 20살 넘던 그 시점부터 나이먹는게 진짜 싫었는데 군대가 거기에 가속도를 붙여줬어.

다른게 아니고, 난 이과야. 생물학과.

어렸을때부터 과학자가 정말 하고싶었어. 최초의 내 꿈은 남들 다 하는 대통령같은게 아닌, 우주선 설계나 연구를 담당하는

우주항공 과학자라는 구체적인 꿈이 있었지.

근데 중학교 2학년, 그러니까 피타고라스의 정리를 접하면서부터 난관에 부딪혔지.

난 수학을 좋아했어. 언제나 정해진 문제에는 정해진 답이 딱딱 떨어져 나왔으니까.

비록 그 과정은 조금씩 다를지라도 말이지.

근데 심화과정으로 들어가서 두 개 이상의 지식이 적절히 활용되지 못하면 풀이가 불가능한 문제들이 나오기 시작하자 내 수학에 관한 흥미는 급격히 떨어지기 시작했어.

당장 눈 앞에 닥친, 그것도 '쉬운' 과제는 즉각즉각 해결할 줄 알았지만, 이렇게 쌓은 과거의 지혜를 바탕으로 새로이 해결법을 찾아내야 하는 일을 나는 잘 하지 못했어.

한마디로 응용력이 없는거야. 

그래서 난 수능 공부도 수능에 나올법한 유형의 문제들을 닥치고 존나게 풀고 오답노트를 만들어 풀이 방식을 통째로 외워버리는 식으로 공부를 했지.

그렇게 해서 수리 가 형（이과용）을 10월 평가원에서 2등급까지 끌어올리는 기적을 이뤄냈지. （내가 처음으로 수능수학 기출문제를 풀어봤을때 얻은 등급은 6등급이었어.）

하지만 긴장했던 탓일까? 10월 모평에서 각각 1/2/4/1/1 （순서대로 언어, 수리, 외국어（영어）,생물I, 생물II）에 달했던 성적은,

정작 수능 당일 4/4/4/3/4로 박살나버리고 말았어.

이대로라면 내가 바라던 지거국은 꿈도 못꾸는 성적이었지.

하지만 재수라는 선택은 내게 여의치 않았어. 어느정도 철이 들기 시작하자 우리 집안 사정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거든.

난 초등학교때 왕따를 겪어서 부모님이 무리하게 빚을 내서 위성도시 쪽으로 이사를 간 경력이 있어.

이때 은행 대출로 생긴 빚은 대학생이 되어 다시 우리 가족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오면서 판 집값으로 딱 떨어졌어. 지하철이 생겨서 집값이 두배 이상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은행 대출은 작년, 그러니까 내가 막 상병 달았을때 다 갚았다고 하더라.

재수에 들어가는 비용을 부모님이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멋대로 단정지은거지.

그래서 내가 갈 수 있는 지잡대중에 그래도 제일 이름 있는곳으로 갔지.

하지만 여기도 미칠듯한 학기당 등록금때문에 차라리 재수하는게 나았어.

그래서 낸 결론. 난 대학을 그만두더라도 최대한 빠른 독립을 생각하고 있어. 그 대책 중 하나가 바로 공무원이야.

9급 공무원중에 운전직이라는 직렬이 있어. 1종 대형 면허가 있고 어느정도의 경력만 있으면 난 그 조건에 부합하는 상황이야.

그런데... 여기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해.

부모님은 시장에서 장사하면서 날 먹고 살리셨지. 그래서 당신과 같은 고생은 내게 절대 시키지 않겠다며, 기술직이나 상인같은 노동자로 분류될법한 일을 정말 싫어하셔.

덤으로, 돈이 안되는 예체능 계통은 정말 밀어주지 않으려 하시지.

그래서 난 어쩔 수 없이 대학을 가기로 한고, 생물학자라는 거짓 꿈을 만들어버리기에 이르렀어.

이게 거짓꿈이라고 스스로 인정한건 군대에 가고 난 뒤에야. 그 이전엔 나 자신조차 철저히 속이면서 합리화를 하고 있었지.

어렴풋이 눈치채기 시작한건, 생물 II를 선택해서 혼자 공부를 할 때.

분명 내가 혼자 기출문제를 풀 때는 1등급을 놓치지 않는데, 정식으로 학교에서 실시하는 모의평가때는 항상 2등급~4등급 사이를 요동쳤지.

이후 대학에 가서도 내가 생물학 점수가 그럭저럭 나왔던건 단순히 응용력이 필요없고 외우기만 해도 되는 거였기 때문이라는게 밝혀졌지.

대학 수준의 생물학은 항상 B^- 이상으로 올라가질 못했으니까. 공부를 열심히 했다 안했다 문제가 아니라 그냥 이해가 안됐어.

고등학교때처럼 통째로 외우는 방법은 너무나 많은 양과 함께 다른 교양과목의 존재（교양과목은 대체로 암기지?）로 인해 비효율적이어서 사실상 선택 불능이었지.

포기하자는 생각이 처음 든건 이때였어.

군대에서 해외 파병을 가는걸로 이 빚을 어떻게든 갚아드리려고 해봤지만, 담당관의 지랄맞은 성격으로 퇴짜만 맞았지.（파병 자체를 부대, 나아가 자기 자신을 배신하는 행위로 여겼어.）

다시 공무원 이야기로 가 볼까.

군인인 나는 지금 나는 운전병으로 복무중이지만, 운전을 하지 않고 있어. 내가 복무하던 중 수송 담당관이 한번 바뀌었는데, 전 수송관이 자기가 기분이 나쁜 상태에서 내가 면전에서 하품（그나마도 예의를 최대한 지켜서, 얼굴을 숙이고 입은 손으로 가렸지.）을 했다는 이유로 주특기 교육의 기회를 완전히 박탈해버렸어. 내가 시켜달라고 사정사정을 해도말야.

남들 운전교육 나가면서 기량을 올릴때 나는 매일매일 삽질의 연속이었지.

덕분에 수송 담당관이 바뀌기 전까지 나는 그 어떤 차량도 타보질 못했어.

바뀐 수송 담당관도 아무래도 자신의 월급에 직접적인 타격이 오다 보니（사고가 난다면 말이지.） 운전대를 한번도 잡아보지 못한 나를 차에 태우려고 하지 않더라고.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주특기 훈련을 요구해서, 약 9개월의 기간동안 총 12번의 운전교육과 3번의 실전 운행을 나갔어.

알아. 터무니없게 적은거.

심지어 실 운행 3번중 2번은 아까 위에서 언급한 응용력의 부재로 인해 사고가 날 뻔했어.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이 되면 크게 긴장하고 불안해 하는거지.

그런 이유때문에 수송 담당관은 내 면허를 갱신시켜주려고 하지 않아.

중형차량 운전병이 내 보직인데, 중형차량은 사회면허로 갱신해도 1종 보통밖에 안돼.

근데 운전병의 지원 요건이 1종 보통 소유자야.

그래서 난 꾸준하게 담당관에게 대형차량으로 면허 갱신을 요구하고 있지만, 주특기 기량 A급 판정을 받고 4,000km 이상을 주행하지 않으면 갱신 요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갱신은 해주지 않고 있어.

그럼 1종 대형이라는 사회면허를 따고, 또 경력을 쌓기 위해 위험을 감수해야하는 거지.

이렇게... 또 9급 공무원 운전직이라는 내 이상적인 진로중 하나가 희미해졌어.

근데 내가 왜 9급 공무원에 집착할까? 위에 말한 공부를 못한다는 이유 뿐만 아니라 많은 이유가 또 따로 있어.

항상 TV나 학교와 같은데서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이 훌륭해진다고 하지.

난 현대문학이나 수필, 자기계발서나 각종 지식 전달용 서적 뿐만 아니라 서브컬쳐에 속하는 만화책, 라이트노벨 등등 아주 가림 없이 폭넓게 책을 읽는 편이야.

그래서 한때는 글을 써보려고도 했지. 하지만 병영문학상 15회에서 입선도 못하고 탈락하는 것으로, 거기에도 재능이 없다는걸 깨달았어.

응모 시작 한 달 전부터 매일매일 연등해가면서 손으로 쓰고 수정하고 타이핑하고, 중간에 낀 훈련 사이사이 짬 내서 힘들게 썼는데도 말이야.

참고로, 여기서부터 내 안의 재능이라는 정의가 바뀌기 시작했지.

재능이란

무언가를 잘 하도록 타고나는 게 아니라, 어떤 목표를 향해 정진할 때, 그 효율이 타인보다 비정상적으로 좋은 것이라고.

사실 글에 관해서는 병영문학상 말고도 다른 좌절의 계기는 몇번 있었어.

조아라, 문피아같은데서 연재를 해봤지만 인지도는 커녕 조회수가 세자리를 넘어본 적이 없지.

모 커뮤니티에선 단순히 조리사 일을 하다가 심심해서 써본 글이 조리사 급여보다 많아서 바로 갈아탄 사람도 있던데 말이야....

아재들이 좋아하는 판타지 갑질물이 아니라서 그런지도 모르지만. ㅎㅎ

지금 내 꿈은 만화작가야. 하지만 중학교때 어머니가 만화같은건 절대 안된다고 절대 금지 선언을 한 뒤로, 나 혼자서 공부를 해야했어.

그런데 고등학교에 올라가자 도저히 내 머가리 수준으로는 학교 공부와 그림공부의 병행이 안되는거야.

결국 그때 가짜 꿈을 좇아 그림을 포기했고, 이때 방치된 내 그림은 여전히 모작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부모님은 군대를 전역한 뒤 어떻게는 날 대졸로 만들 생각이야. 그것도 단순한 의무감으로.

자신들에겐 부모로서 자식이 최소한의 교육을 받게 해 줄 의무가 있다고 하면서 말이지.

하지만 난 최소한이 중등교육과정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해. 괜히 대학이 '고'등교육과정이겠어?

그냥 학교를 그만두고 적성에 맞던 안맞던 철밥통 하나 차서 안정적인 생계를 마련하고

그때부턴 내 의지로, 내 벌이로 스스로를 개발하고 싶은게 지금 내 바램이야.

그런데 걱정돼. 이미 내가 지금까지 많은 목표를 정하고 달려왔지만 처참하게 실패만 해 왔다는거지.

지금 이 글을 쓰는 계기도 웃자의 공시생 만화를 보고 철렁, 해서 쓰는거야.

그나마 가능성이 있던 9급 운전직이라는 루트도 원점으로 돌아간 이 시점에서

어떤 직렬을 선택하든 또 실패하지 말라는 법이 없지. 

이제 내게 있어서 그런 실패는 재기 불능의 치명타가 될지도 모르는데 말이야.

사람이, 죽기 전에 못먹은 밥이 생각날까, 못 이룬 꿈이 생각날까?

꿈이겠지.

비록 지금은 여전히 부모님 집에 얹혀사는 신세라 꿈을 좇을 수 있지만...

이제 내가 가고 싶은 길을 가려면 그것만으로도 많은것을 내려놓고 험한 길을 개척해 나가야 해.

그런데 그 개척의 길이 어떻게 될 지는 미지수를 넘어서 오히려 파멸에 가까워 보여.

내 꿈 이야기 해서말인데, 내 꿈인 만화작가에 관해서 한가지 썰이 더 있어.

내가 초등학생 시절에 날 따라다니던 H라는 여자애가 있었어.

얘는 뚱뚱하기도 했지만, 전형적인 암걸리는 스타일의 여자애라서 난 무척이나 얘를 싫어했어.

내가 뭐만 하면 거의 스토킹 수준으로 따라붙고, 내가 하려는건 모두 따라하려 하는거야.

얘를 떼 내는데는 약 4년의 시간이 걸렸지.

오랜만에 휴가를 나와서 어머니께 들었는데, 얘가 지금은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그림 커미션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

실력은 본 적이 없지만, 자기 용돈벌이를 그걸로 하고 있대.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지 얼마나 됐을지는 알지 못하지만, 어릴때부터 일단 알고는 지낸 만큼 이 아이의 그림실력을 내가 잘 알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나보다 못그렸지.

그런데 어느새 이렇게 추월당하고 말았네.

안그래도 부대에서 매일같이 크로키 연습을 해도 도통 늘지가 않아서, 야간 경계근무때마다 스멀스멀 자살충동이 올라오는데.

쟤는 여자로 태어나서 타고난걸까 싶기도 하고（통계적으로 여자는 예술적인 스탯을 남자보다 더 많이 타고 난다고 하더라.）, 군대 올 필요 없이 사회에서 계속 연습, 공부할 수 있어서 부럽기도 하고...

난 어떻게 해야 좋을까?

어디를 향해야 좋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