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젖어있는 손으로 바닷물을 참방거렸다. 머리를 돌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바라봐도 보이는 건 없었다. 진한 남색의 바다와 알루미늄 맥주캔. 그게 그가 볼 수 있는 전부였다.

두 시간 전만해도 그는 호화로운 크루즈선의 승객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튜브 하나에 의지한 체 바다위에 떠있는 신세다. 크루즈선이 한순간에 침몰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거대한 배가 어째서 그렇게 한순간에 침몰해 버렸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다. 만약에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은 지금 물 속 깊은 곳으로 배와 함께 가라앉는 중일 것이다. 어쩌면 생선튀김과 함께.
그는 배가 가라앉기 바로 직전까지 어떤 여자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크루즈선의 칵테일 바에서 만난 여자였는데, 얼굴도 몸매도 모두 나쁘지 않았다. 나이도 스물다섯으로 그와 비슷했다. 서로의 공통점은 거의 없었지만 그와 그녀는 꽤 오랜 시간동안 대화를 나눴다. 재즈와 스윙에 대해서, 영미문학과 일본문학에 대해서, 독일 철학과 프랑스 철학에 대해서. 그녀가 주로 대화를 이어갔고, 그는 머리를 끄덕거리거나 추임새를 넣으며 그녀의 말을 들었다. 조금을 일방적일지도 모르지만, 그는 그 정도의 거리감이 편했다. 너무 밀접한 관계가 되면 쓸데없는 말까지 해버릴게 뻔하다. 그러고는 분명 후회하겠지. 그는 그런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았다.
“나를 캐롤이라고 불러줘.” 그녀가 말했다. 조금은 뜬금없는 타이밍이었다. “언제까지나 ‘너’ 나 ‘당신’ 이라고 부를 수는 없잖아.”
“그렇긴 하지만……” 그는 당황하며 답했다.
“물론 본명은 아니야. 난 분명 한국인이고, 가족 중에 외국인도 없어. 부모님이 지어주신 이름도 나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어. 하지만 말이야, 외국에 나가는 때면 사람들은 대게 나의 이름을 뭐라 불러야 할지 꽤 진지하게 고민하더라고. 발음하기도 불편하고, 순서도 헷갈린다면서. 개중에는 이름의 첫 글자만 따서 이니셜로 부르는 사람도 있었어. 그건 아무래도 기분이 나쁘잖아. 안 그래?”
“그런가?”
“분명 그렇다니까. 이건 당해보지 않으면 몰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꼬았던 다리를 풀고는 그의 이름을 물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말해줬다.
“누가 너를 꾸준히 LSW라고 부른다고 생각해봐.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LSW! 어디 있어요! 라며 큰소리로 찾고, 관광지를 구경하는데 LSW. 정말 멋지지 않아요? 라며 초를 치고. 당장에 반응하지도 못해. LSW? 그게 누구지? 한참을 고민하다가 겨우 본인이란 걸 깨닫고는 뒤늦게 대답하곤 한다니까. 반면에 캐롤은 간단하잖아.”
“왜 하필 캐롤인거야?” 그가 물었다.
“조금은 흔하면서 개성 있고 간단한 이름을 원했거든. 엘리스나 마야 같은 이름은 흔하지만 개성이 없지. 반면 파트리샤나 하이스미스는 너무 길어. 그래서 캐롤이야. 크리스마스 캐롤의 그 캐롤.”
“음…… 크리스마스 캐롤을 좋아하는 거야?” 그가 머리를 기울이며 물었다.
“바보. 그런 것과는 아무 연관도 없다고.” 그녀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배가 가라앉은 건 그녀와 대화를 한 지 1시간쯤이 지난 뒤였다. 갑자기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배가 크게 흔들렸고, 그는 상황을 알아보기 위해 선박으로 올라갔다. 실내방송으로는 선장이 아무런 문제도 없다면서 승객들을 안심시켰다. 처음엔 동요하던 승객들도 선장에 말에 곧 평화를 되찾고 다시 크루즈 여행을 즐겼다. 그녀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선박 위에서는 흰색 재복을 입은 선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뭔가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는 그들 중 한사람을 붙잡고 방금 전의 소란에 대해 물어봤다. 하지만 별다른 답을 듣지는 못했다. 선원이 영어를 거의 하지 못하는 인도인이었기 때문이다.
선원의 표정은 크게 일그러져 있었다. 큰 소리로 그에게 뭔가를 말했지만, 그는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선원은 그의 어깨를 양 손으로 강하게 붙잡고는 주황색 구조용 튜브를 그의 몸에 억지로 쑤셔 넣었다. 그러고는 다시 큰 소리고 뭐라 말을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그때, 다시 한 번 배가 크게 흔들렸다. 선박에 있던 풀장의 물이 넘쳐흘러 그를 덮쳤다. 그는 풀장의 물을 정면으로 맞고는 그대로 바다 속으로 날아갔다. 정말 한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그는 재대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순간 붕 뜨는 느낌을 느꼈지만 그건 잠시 뿐이었다. 곧 바다 속으로 떨어졌고, 그 충격에 잠시간 정신을 잃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때 보이던 건 칠흑같이 검은 바닷물과 크게 휘청거리는 크루즈선 뿐이었다. 선원들은 갑판에 붙어 나를 보고 있었다. 난 그들을 올려다보며 소리쳤다. 이봐요! 여기요! 하지만 들릴 까닭이 없었다.
그는 온 힘을 다해 크루즈선으로 헤엄쳤다. 그러나 거리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았다. 선원들이 뭔가를 준비하는 듯 분주하게 움직였다. 배 옆에 붙어있는 작은 보트를 바다 쪽으로 끌어 내리고, 구명조끼를 차래로 준비했다. 선장은 여전히 아까와 비슷한 뉘앙스의 방송을 반복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이다. 선박 안에서 대기하라. 전혀 신빙성이 없는 말이었다.
크루즈선은 그 방송이 나온 뒤 잠시 후 바다 속으로 가라앉았다.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검은색 연기가 피어올랐다. 크루즈선의 푸른색 몸체가 산산이 조각나고, 무수히 많은 조각들이 바다 위로 떨어졌다. 시끄럽게 반복되던 선장의 방송도 더는 들려오지 않았다.
의문의 폭발 때문에 생긴 거대한 구멍으로 끝없이 바닷물이 들어갔다. 얼핏 보고 있으면 그 구멍이 바닷물을 빨아들이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의문의 양자 핵실험 때문에 생겨난 블랙홀처럼.
선박은 단숨에 왼쪽으로 몸을 뉘이더니 거대한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는 그 물보라에 휩쓸려 몇 백 미터를 그대로 떠내려갔다.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바닷물의 짠 맛이 느껴졌다.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끔찍한 경험이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정면을 바라보자 선박은 온대간대 없이 그대로 사라져있었다. 혹시나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서 머리를 돌려 주변을 둘러봤지만 역시 선박은 보이지 않았다. 보이는 건 침몰한 선박에서 떨어져 나온 정체를 알 수 없는 플라스틱 조각과 수없이 많은 맥주캔 뿐이었다.



아주 오래전에 썼었던 글입니다. 썩히기 싫어서 가져와봤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