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의 다 왔네."

창백하고 주름진 얼굴로 왠 노인이 시열을 이끌고 언덕 위를 올라가고 있었다. 몹시 더운 날이라 그런지 시열은 언덕을 오르는 동안 계속해서 굵은 땀 방울을 흘렸다. 하지만 노인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이 더위를 즐기는 듯 쉽게 쉽게 다음 발을 내딛고 근처에 있는 나무를 집고 언덕을 올라갔다.

" 선배님."

갑자기 뒤에서 자신을 따르던 시열이 멈춰서서 부르자 노인은 뒤를 스윽 돌아보았다. 잠시 쉬자고 하는 것일까? 아니다. 비록 땀은 장대비처럼 흘리고 있지만 쉬자고 할 놈은 아니었다. 그는 혹독한 훈련을 치르고 직업군인이 되어 무공훈장까지 받은 특출난 놈이니까.

" 그런 짓이 소용이 있을까요."

노인은 시열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지 눈치 챘다. 노인은 껄껄 웃으며 시열에게 다가갔다. 시열은 가쁜 숨을 몰아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 어차피 때가 되면 민주화가 되겠지 않습니까."

" 자네 민주주의란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 예?"

노인은 주름진 얼굴을 더욱 더 구겼다. 하지만 기분 나쁜 표정은 아니었다. 많은 세월을 살아온 이의 특유의 고동어린 쓴 웃음정도.

" 민주주의가 백성이... 아니, 요즘 말로는 국민쯤 되겠군. 국민이 나라의 주인인 것이 민주주의인 것 같은가?"

" 맞지 않습니까?"

" 하하, 자넨 뭘 잘못 알고 있구만. 세상에 민주주의가 들어설 것 같은가?"

노인은 나무에 걸터 앉았다. 그리고 그는 품에서 물통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시열은 곰곰히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 미국과 영국 모두 민주주의의 선두주자가 아닙니까?"

노인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선 시열을 쳐다보았다. 그는 물통을 품에 다시 넣은 뒤에 껄껄 웃었다.

노인은 다시 자리에서 일어섰다.

" 그건 민주주의가 아니야. 차라리 요순시대야말로 진정한 민주주의랄 수 있겠지."

" 그건 왕정（王政）이지 않습니까?"

" 요순이 뭐라고 했던가? 나라의 주인은 백성이라고 했네. 그것이 민주주의 아니겠는가?"

" 요즘 세상 또한 국민이 주인인..."

" 틀려. 세상에 민주주의란 나타나지 않을것이야. 나라의 주인이 국민이라고? 웃기는 소리 하지 말라고 하게. 나라의 주인은 바로 저 서울 한복판에 있지."

시열은 그제서야 노인의 뜻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다시 궁금증이 일었다.

" 하지만 말입니다. 우리 나라는 군부독재라서 그렇지, 다른 나라는 민주화가 잘 되어 있지 않습니까?"

" 미국이라고 독재가 아니라고 보는가? 미국도 어차피 일부 사람들만의 나라일 뿐이야. 전통적인 앵글로섹슨과 유태인들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미국이지."

" 그럼 선배님께선 어째서 그걸 묻으러 가시는 것입니까?"

시열이 가리킨 것은 바로 왠 두툼한 상자였다. 노인의 오른손에 꽉 쥐여져 있는 것이었는데 금속으로 만든 것인지 꽤 값져 보였다.

노인은 씨익 웃더니 바닥에 내려놓았던 나무지팡이를 다시 왼손으로 집어 들었다.

" 몇 백년이 흐르고 나면 민주주의가 세상에 나올지도 모르겠지. 붉은 꽃과 푸른 물결이 서로 어울어질 때만이 비로소 민주주의가 탄생하지. 아니 그런가?"

" 붉은 꽃과 푸른 물결이라니요...? 그게 무슨 말이십니까?"

" 난 그걸 레드 앤드 블루라고 부르네. 아직은 그것을 논하기가 어렵지. 지금은 아직 민주주의국가라는 이름을 걸기조차도 부끄러우니까. 언젠간 이것을 보아줄 사람이 있을 걸세."

노인은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열은 궁금한 것이 무척 많았지만 노인이 정확히 대답해주는 것을 꺼려하자 어쩔 수 없이 다시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얼마나 올랐을까. 슬슬 다리가 아파오고 옷이 땀에 절여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 노인은 멈춰섰다. 노인은 굉장히 큰 나무 아래에서 멈춰섰다. 그 나무는 은행나무였는데 몇 백년을 살아왔는지 그 끝이 안 보일 정도로 높았다.

시열은 발에 무언가 계속 밟혀 아래를 들춰보자 굉장히 많은 양의 은행들이 밑을 구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밟혀 으스러진 은행에서는 독특한 은행향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 바로 여기네."

노인이 가르킨 곳에는 굉장히 큰 규모로 땅바닥이 파헤쳐져 있었다. 몹시 깊었는데 조선시대 왕릉을 보는 것만 같았다. 시열은 노인의 옆에 다가가 꺼진 땅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넓었다. 마치 초가집 한 채를 넣어도 될 듯 하였다.

" 이걸 만드느라 몹시 힘들었지. 돈도 많이 들었고. 삽질 꽤나 했다네. 하하."

" 굉장하군요."

" 그래? 고맙구만. 이 정도면 경치도 좋지 않은가?"

시열은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고생하며 올라온 보람이 있었다. 선선한 바람이 긴 머리를 흔들어주고 상쾌한 숲내음이 코를 찔렀다. 그리고 펼쳐진 장대한 덕유산의 허리가 굽이굽이 펼쳐 보였다.

" 날 좀 내려주겠나?"

문득 고개를 돌려 보니 노인이 구덩이 안으로 들어갈려고 애쓰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 높아 못 내려가고 있었다. 시열은 노인을 업고선 미끄러지듯이 구덩이 안으로 내려갔다.

" 고맙네."

노인은 시열의 등에서 내려서고선 깊게 심호흡을 하였다. 그리고 그는 몇 발자국 앞으로 걸어가더니 가지고 온 금속상자를 내려놓았다.

" 나는 민주투사도 아니요, 그렇다고 군사 독재 옹호자도 아니며 대부호니, 권력자도 아니네."

시열은 노인이 하는 말을 깊이 새겨들었다. 노인은 시열이 가장 존경하는 이 중 한 명이었다.

" 선배님, 제가 구덩이를 메울테니 이제 내려가십시오. 산에선 해가 빨리 저뭅니다."

" 언젠가는... 통일이 일어나고 민주주의라는 글자를 나라의 이미지로 걸을 수 있을 때가 된다면 이 상자를 열고 누군가 나의 존재를 깨달아주었으면. 누군가 내 생각을 이해하고 동조해주었으면. 그리고 연구해주었으면 하는 것이 내 마지막 소원이요, 의지네."

노인은 상자 옆에 앉아 가부좌를 틀었다. 시열은 눈살을 찌푸리고선 아무 말도 않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흙 냄새가 굉장히 지독했다.

" 시열군. 내 하나 물음세."

" 예, 선배님."

" 물이 불을 이길까, 아니면 불이 물이 이길까? 자네는 아는가?"

시열은 더욱 더 인상을 찡그렸다. 왠지 흙 냄새가 더욱 더 쾌쾌해졌다. 이상한 비릿한 냄새도 나는 듯 하였다.

" 당연히 물이 이기질 않습니까. 물은 불을 끄니깐 말이지요."

" 하지만 물도 불로 끓이면 증발하지 않는가?"

" 그렇기는 하지만..."

" 그래, 역시 아직은 일러. 아직도 국민은 물이 불을 이긴다고 생각하는구만. 실상은 둘은 서로를 상호보완하는데 말이야. 하하하..."

흙 냄새는 점점 더 비릿해져만 갔다.

" 저... 무슨 이상한 냄새 나지 않습니까, 선배님?"

" 피 냄새일게야."

" 예? 아... 선배님!"

노인이 갑자기 가부좌를 튼 채로 뒤로 쓰러졌다. 시열은 그제서야 노인에게서 피가 흘러나와 흙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노인은 눈을 감고 있었다. 시열은 노인이 직접 칼로 찌른듯이 보이는 배의 상처를 지혈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인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시열의 치료의 손길을 뿌리쳤다.

" 그러지 말게, 시열군. 난 살만큼 살았고, 그리고 때를 잘못 타고 났어."

" 선배님, 하지만!"

" 아직 우리 한국에는 불이 설 곳은 없는 듯 하군. 그렇겠지. 아직도 저 군부놈들은 물만을 고집하고 불은 빨갱이로 몰아세우니까 말이야. 물과 불이 서로 합일해야만이 민주주의가 들어서는 데 말이야... 하하하..."

" 선배님, 제가 업겠습니다!"

" 됐...네. 이제 숨이 가빠오는군... 하아... 마지막으로 하나 말해줌세..."

" 선배님!"

" 내가 예상하기로... 절대로... 우리나라에... 진정한 물과... 진정한 불은 들어오지 않을 것이야... 레드 앤드 블루... 진정한 붉은 원색과... 푸른 원색은 절대로... 나타나질 않을 것이야... 알아 듣겠는가?"

"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선배님."

시열은 흐느끼기 시작했다. 몸은 저절로 부르르 떨리고 손은 차가워져만 갔다. 시열은 급히 노 선배의 두 손을 꽉 잡았다. 그러나 차가운 것은 노인의 손도 마찬가지였다.

" 그래... 하지만 명심하게. 한 나라에... 민주주의를 표방하여... 물만이 있을 경우...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목을 조를 뿐이야... 물이 가득 차면 말이지... 숨이 막혀 죽을 뿐이야... 불이 있어야 해... 그것도 진정한 레드인 불이 말이야... 진정한 블루인 물도 필요..."

노인이 말을 멈췄다. 그리고 영원히 눈을 감았다. 시열은 눈물을 흘렸다. 그는 눈을 꽉 감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구덩이를 빠져나왔다. 올라올 때는 일반적인 구덩이었지만 이제는 한 노인의 무덤이 되어버린 곳을 쳐다보며 그는 눈시울을 붉혔다.

시열은 구덩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착 깔린 음성으로 조심스레 말했다.

" 마지막까지... 아버지란 말을 해드리지 못 했습니다. 아버님... 저는 그만... 끝까지 아버님을 선배라고 불렀군요... 죄송합니다... 아버님..."

노인은 시열의 생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