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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편] 자극적인게 필요해?
작성자 잭더든
번호 75373 출처 창작자료 추천 50 반대 0 조회수 2,240
IP 120.xxx.xxx.xxx 작성시간 2017-05-16 06:2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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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고 싶지만 볼 수가 없다는 말. 그래서 사무치게 아프거나 또는 슬프다는 말. 나처럼 명확하게 아는 사람은 또 없을걸.
뻔하게도 모든 감정은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니까.

가장 아름다운 로맨틱 코미디도, 멜로 영화나 드라마도 생략되는 것이 있다.
바로 ‘시선’이야.

얼마나 아름답고 절절한 사랑을 내용으로 했어도, 남자 주인공이 여자 주인공의 가슴을 훏는 시선 메이킹은
카메라에 안담는다. 그건 ‘아름답지’ 못하니까.
웃기는 소리다. 본다는 것, 시선에 대상을 담는다는게 가장 먼저다. 위선자들이 너무 많아.



그 순간, 컴컴하게 방전되어 있던 모니터에 불이 탁- 들어온다.
드디어 그녀가 귀가한 것이다. 카메라를 줌인한다.

남자를 데려왔네…

이리 비틀, 저리 비틀대는 걸음걸이의 그녀 이후로 대조적인 침착한 걸음걸이의 한 남자가 모니터에 보였다.
검정 티셔츠에 베이지색 치노팬츠, 짧게 빗어넘긴 머리 아래로 방안을 훏는 시선이 카메라에 조용히 잡힌다.
장비에 돈을 들인건 도움이 된다. 싸구려 카메라였다면 이렇듯 상대방의 눈동자까지 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들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아졌다.


생각대로다. 금요일 저녁이겠다. 혼자 살겠다.
술을 마다하지 않는 성격이겠다. 결국 그녀는 짐작대로 오늘 집에 남자를 데려왔다.

어디부터 이야기할까.

그래 거기부터가 좋겠다. 호감이란 감정이 자연스런 구애로,
그리고 구애가 연인간의 사랑으로 자리잡는 '일반적인 루트’가
해당되지 않는 남자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내가 그러하다.

일반적 사람들의 일반적 주행로로 달릴 수 없는 사람이 걷게 될
길이란 뻔하다.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물로비에서 그녀를 처음 본 순간 느낀 내 감정은, 진부하게도
사랑이었다. 혹은 그렇게 부르고 싶었다.

일반적인 남자들이라면 어떻게 그녀의 마음을 얻어낼까,
어떻게 그녀가 나를 바라보게 만들까 하는 고민이 자연스럽고도
부차적으로 따라붙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지레 포기해야겠다, 그리고 그 포기 후에
따라올 상실감과 여러번 반복되었지만 익숙해지지 않는
자기혐오의 감정을 또 어떻게 가라앉힐 것인가를 먼저 고민했다.

마음에 드는 여성을 목격하고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 그 미래를
자연스럽고도 불안하게, 그리고 설레이게 상상하고 실천으로 옮기는
기쁨은 내겐 허락되지 않은 것이니까.


그녀가 먼저 샤워실로 들어가는 광경을 조용히 쳐다본다.

여자 혼자 지내는 오피스텔 치고는 크다.
옷을 두는 방이 하나. 그리고 침대가 있는 침실 하나.
크지도 작지도 않은 거실. 그리고 화장실 하나.

그녀는 욕실에 공을 들이는 듯 하다.
여러 크기의 미용 용품이 마트료시카 인형처럼 선반에
즐비하다. 입욕제, 반식욕할때 쓰이는 것으로 보이는 로즈볼,

처음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그런 디테일이었다.

그녀의 집에 몰래 잠입해 카메라를 설치할 때는 볼 수 없었던 것들.
침착함이란 덕목은 타인의 집에 몰래 들어가 무언가를 설치할때는
발휘되기가 퍽 힘든 덕목이다.

발소리 하나에도 심장이 저 아래로 내려앉는 기분을 느끼며
선을 자르고, 공간을 마련하고, 렌즈를 은폐하는 내내
손 마디는 떨리고 식은땀이 줄줄 흐르니까.

욕실과 거실, 그리고 침실, 옷장 하나 하나 카메라를 몰래
설치하는 내내는 눈여겨 보지 못했던 그녀의 일상 생활의 세부들이
제 3자로써 모니터를 들여다볼때 비로소 발휘되는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처음 모니터로 목도하는 그녀의 알몸보다
나를 더 흥분시켰던 것은, 같은 공간을 점유하는 연인이 아니라면
목격할 수 없었던 그런 작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그런 연유로, 나는 욕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샤워를 시작하는 그녀를 보기보다 거실에 홀로 남겨져
소파에 앉아있는 그녀의 손님을 더 관찰한다.


내가 알기로 그녀가 교제하는 남자는 없다.

퍽 자유로운 삶이다. 주어진 것들을 충분히 누리고 있는 삶.
홍대나 합정, 때로는 이태원. 매주 금요일에서 토요일마다
동선을 달리하며 나이가 가지는 아름다움을 만끽하는 삶.
인생의 온갖 자질구레한 선택들을 한껏 뒤로 미루고

지금 그대로 가진 것들을 최대한 즐기는 삶.


평일 저녁이면 캔맥주를 한캔 사서 홀짝 거리며 티비를 보다가
잠들고, 다음날 부스스 일어나 출근 준비를 마치지만,
일주일에 두어번 정도 저녁을 즐기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의 패턴.


주어진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 그래서
금새 다른 선택지가 하루중에도 두서없이 마구 떠오르는 바람에
무언가 하나를 놓쳐도 그것에 대해서 고민하거나 애쓰는 것과는
거리가 먼 가치관의 삶.


어느 한가지 선택지가 떠올라도 금새 사라지거나,
혹은 선택할 여력이 없는 나같은 존재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녀가 데려온 남자를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해 한번 더 카메라를 확대한다.
여자가 남자를 고르는 취향이란 내가 제대로 알 턱이 없지만, 그녀가 몇 번 집에 데려온 남자들은
다 비슷 비슷한 느낌을 가졌다.

어려보이는 쪽은 기피한다. 항상 톤다운된 색깔의 깔끔한 면과 직물로 몸을 가리는 남자들이다.
호리호리한 쪽인가 하면 , 그건 또 아니다. 옥스포드 셔츠든, 면 티셔츠든,
정돈된 색깔과 단정한 핏 아래로 단단함이 느껴지는 남자들이었다.
이마가 드러나는 길이의 머리 스타일 아래로 작은 망치같은 턱을 가지고, 쌍꺼풀의 유무와 상관없이
무언가 날카로운 느낌의 눈매.

저런 남자들이라하면, 흔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은 부류들이다.
내가 관찰하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다음날 출근 걱정이 없는 날이면 바나 펍에서 대부분
자기와 눈이 맞는 여자 한 둘은 침대로 끌어들일 수 있는 타입들.

여자를 얻는 방법이란게 화려한 언변이 아니라, 센스있는 옷차림 아래 감춰진 조용함이란 걸,
의기양양하게 본인의 여성편력을 떠드는 내 주변의 얼간이들보다 두배는 더 확실하게 내게 알려주는 타입들.

대부분의 세상사가 그렇듯 외향을 그럴듯하게 갖춰놓고, 어느 선을 유지하는 범위에서
침묵을 유지하면 대개의 사람들은 그 빈 공간을 호의와 호감으로 채워넣는다.
실제로 그가 어떤 남자인가는 아무런 상관없이.

꽉 들어찬 명화보다, 적당히 빈 캔버스같은 남자들.
상대의 붓질과 터치를 긴장감 어린 침묵으로 기다리는 뷰류들.

남자는 조용히 티비를 켰다.

누차 말하지만 나는 저런 디테일을 사랑한다. 카메라 채널을 바꾸면 샤워하고 있는 그녀를 볼 수 있을테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벗은 몸을 보는것은 너무도 쉽다.

예능 프로그램이 스크린에 떠오르지만 남자는 전혀 관심이 없는 기색이었다.
볼륨을 높인다. 천천히 소파에서 일어나, 혼자 남아있는 거실을 천천히 거닐기 시작한다.

그녀의 침대 맡에 있는 엘이디 라인 전구를 찬찬히 들여다보다가, 냉장고를 열어보기도 한다.
캔맥주 하나를 꺼내 마개를 딴다. 치익-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다시 천천히 소파로 돌아와 조금씩 목을 축인다.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그 광경을 나는 조바심내며 지켜본다. 소파에 걸터앉은 남자는
가끔 맥주를 들이켜는 것 말고는 동작을 그만둔 내내 그대로 변함이 없었다.

욕실 문이 열리고, 가득찬 수증기가 윗 문턱을 따라서 넘실거리며 넘어왔다.
바디 타월로 몸을 가린 그녀가 젖은 발로 거실로 나왔다.
젖은 머리카락이 어깨 너비에서 조용히 흔들리는 그 광경을, 남자는 미동 없이 캔맥주를 마시며 쳐다보았다.

덜 마른 머리를 수건으로 마저 닦아내는 과정을, 나와 그 남자는 동시에 조용히 쳐다본다.

이 순간, 그녀는 저 이름모를 남자와 내가 같은 시선을 공유하고 있다는걸, 꿈에도 모를 것이다.

모니터 너머지만 내 숨이 가빠오는게 느껴졌다. 저 이름 모를 남자도 그럴까?
컴퓨터 앵글로 머리를 말리는 그녀의 윤곽으로 손을 가져다댄다. 흐트러지는 내 호흡과 달리
남자는 너무도 침착해보였다.

소파 옆에 그녀가 앉는 것을 신호로, 남자가 티비 전원을 끄는 것을 시작으로,
두 사람의 입술이 엉키기 시작한다.

자의와 타의로 벗겨지는 옷가지들이 침대까지 둘의 동선을 남기며 하나 둘 바닥으로 떨어지고,
이윽고 완전히 가릴 것 없어진 두 젊은 육체가 체액을 윤활유로 깊게 섞이는 그 과정을,
나는 은밀히 지켜보고 있다.

피가 몰리는 느낌이 아래로 묵직히 느껴진다.

사운드를 키우지 않아도 그 번잡스러운 호흡의 강약과 악물린 이빨 사이로 새어나오는 아드레날린이
스피커를 가득 채우는 듯 하다.

누가 위에 있는지를 몇번이나 번갈아 바꾸는 격렬함 끝으로 둘은 절정의 끝으로 다다르고 있었다.
그때, 정지없이 점차 빨라지는 동작 가운데, 그녀가 남자의 손을 자신의 목으로 가져간다.
쾌락의 정상을 앞두고, 남자의 오른손을 끌어다 자신의 호흡의 가느다란 창구로.

몇개의 선과 윤곽으로 드러나는 남자의 잘 다져진 오른손이, 이윽고 그녀가 바라던대로
가느다란 목에 힘을 가하기 시작한다.

척추와 허벅지의 순환운동으로 조금씩 빨라지던 남자의 움직임이 더 가열차게 달궈진다.
단단한 남자의 오른손만이 방안에 유일하게 고정되어, 튼튼한 자물쇠처럼 그녀의 목을 조른다.

마치 내 목이 졸려오듯 나는 안절부절 의자에 앉아 있지 못하고 일어섰다.

빨갛게 질려가는 그녀의 얼굴을 클로즈업한다.

하얀 나신과 그녀의 얼굴이 점점 대비되어 간다. 붉게, 그리고 점차 검정색으로-

경련이 시작된다. 안구 위로 돌아가는 눈동자가 이윽고 사방을 쳐다보며 빙글 빙글 돈다.
거품 섞인 침이 왼쪽 입가로 흐르고, 제지를 원하는 손이 남자의 가슴팍을 두드리기 시작한다.

호흡을 간절히 원하는 그녀의 몸짓위로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남자의 움직임이 둔탁하게 내려 꽂힌다.

그녀의 손이 떨어진다. 맥없이 내려앉는 팔이 남자의 움직임에 맞춰 흔들린다.

어어, 하는 순간이 지나고 혹시? 하는 순간이 지나고, 그녀의 몸이 미동을 멈춘다.

완전히.


2.

몰래 카메라가 스너프 필름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사정을 마친 남자가 숨을 헐떡이며 조용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다.

한번, 그리고 두번, 조용히 여자를 흔든다. 목에 선명히 남은 보랏빛 멍이 미적 미적 흔들리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는 여자를, 가만히 다시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얼굴을 구기듯 감싸안는다.

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뭐라고 하고 있을까 짐작해 볼 수는 있다.
욕을 했을까, 혹은 탄식어린 한숨을 쉬었을까.

완전히 끝장난 본인의 인생과 교도소, 출소 이후에 완전히 바뀌어버린 인생의 판도를 내내 체감하며
살아가는 본인의 모습을 생각했을까?

본의아니게 살인의 순간을 목격한 지금, 나는 무슨 행동을 취해야할까.

살인이란건, 영화에서처럼 피가 튀거나 살점이 난무하는 그런게 아니었다.

너무도 순식간에, 그리고 자연스레 일어나서 한 광경의 일부처럼 섞여든다.

남자가 벌떡 일어나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한다. 피가 나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거칠게.

남자다움으로 무장한 세련된 수컷이 유아기적인 반응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는 내내, 나도 손톱을 물어뜯고 싶은
기분이다.

현실감각이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한다.

사람이 죽었다. 타인의 시선으로는 이해할 수 없겠지만, 연모하던 여자가.
그것도 아마도 내가 유일하고도 최초의 목격자일 것이다.

범인의 인상착의, 살해방법, 동기 모든 상황을 적나라하고도 훤하게 두눈으로 목격한 사람. 바로 나.

문제는 그 전에 내가 빌어먹을 도촬범이란 사실까지.

모든 파악은 더디게, 그렇지만 확실하게 뿌리를 뻗어나갔다.

경찰에 신고해야할까?

연모하던 여자가 죽는 광경을 목격했는데요.
네, 그 여자는 금요일밤 집에서 왠 남자와 섹스를 하다가 좀 더 가열찬 쾌락을 위해
목을 졸라달라는 신호를 보냈다가 제지가 안되는 남자에 의해 죽었어요.
사인은 기도 졸림에 의한 질식사 정도 될까요.
제가 이걸 어떻게 아느냐고요?
저는 사회부적응자에 여자랑 연이 없는 놈인지라, 마음에 드는 여자 집에
몰카를 설치해서 욕구를 대리충족하는 남자거든요.
우연찮게 반한 여자의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가 그 광경을 목격하게 된겁니다.
예, 예.

커리어랄게 있는 인생이 아니지만, 그래도 그 뒤에 닥쳐올 여파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나는 짝사랑했던 여자의 살인범을 체포할 결정적 단서를 제공하는 사람임과 동시에,
짝사랑하던 여자의 집에 몰카를 설치한 파렴치범이라는 모순적 타이틀을 거머쥘 수 있을 것이다.

교도소에 가게 된다면 기가 막힌 경험담을 가지고 있는 놈이라고 추켜세움 받을 수도 있겠지.

앞서 말했듯, 나는 영웅적인 면모와는 거리가 멀다.

선량함, 도덕, 정의 같은 단어와 어울리는 인생과 가치관을 가졌다면
독신 여성의 집에 몰카를 설치하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손바닥에 땀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결심이 구체화되고 이윽고 어떻게 행동해야할지가 머리속에서 입체감을 띄고 떠오르기 시작한다.

모니터를 바라보는 내내, 이후의 행동을 고민하고 있는 내내
여자를 죽인 남자도 왼손으로 턱을 괴고 시체를 내려다 보고 있다.
연모하던 그녀, 라는 여섯글자에서 시체, 라는 두 글자로 치환되는 과정이 내심 소름돋는다.
그래, 이제 저건 시체다.

그리고 남자도 마침내 그걸 깨달은듯 했다.
정사를 나눈 여자를 시체로 치환하는 과정이 나만큼밖에 걸리지 않다니. 저놈도 보통은 아니다.

잠시 욕실로 들어간 남자는 젖은 타월을 들고 나왔다. 흰색 수건에 물을 흥건히 적셨는지, 간헐적으로 물방울이 떨어졌다.

꽉 비틀어 짠 뒤, 꼼꼼하게 본인이 손댄 것들을 하나 하나 닦기 시작한다.

티브이 리모콘, 소파 가장자리, 테이블, 냉장고 손잡이…

무섭도록 냉정한 놈이다. 혹시나 남아있을 지문을 닦아내는 중간 중간에,

방을 둘러보며 혹시나 자기가 손을 댄 다른 부분이 있는가 돌이켜보는 듯 눈빛이 날카로웠다.

저놈도 인생을 종치긴 싫은 것이다. 하룻밤 상대를 대상으로 살인을 저질렀고, 돌이킬수 없는 한번의 행위로

본인 인생이 저당잡히는 걸 원치는 않겠지.

이 와중에 내가 설치한 카메라를 발견하지는 않을까 걱정되는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이 왈칵 들었다.

괜찮아, 렌즈는 아무리 들여다보아도 의구심이 들지않을만큼 철저히 숨겼고, 근 두달간 그녀를 도촬하는 내내
한번도 그녀의 눈동자가 내 모니터를 통해 나와 눈이 마주쳤던 적도 없으니까. 그만큼 완벽하게 숨겼다.

과연 놈은 방을 구석 구석 깨끗하게 닦아내는 와중에 한번도 내가 숨겨놓은 렌즈를 발견하지 못했다.

행주질을 끝낸 놈이 노란색 박스 테잎을 뜯어내 한바퀴 둘렀다. 먼지라도 떼려는 것일까, 생각하고 있는데

공을 들이듯, 느리지만 꼼꼼하게 바닥과 매트리스, 그리고 소파를 시간들여 찍어내기 시작한다.

혹시 떨어졌을지도 모를 머리카락과 음모, 피부 표피를 제거하는 것처럼 보인다.

남자의 일련의 행위를 쳐다보며 문득 문득 이 살인이 저 남자의 첫번째일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 시작한다.
여자의 죽음을 목도한 당황스러움은 이제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는다. 뭐하는 놈일까.

경찰? 어쩌면 그럴것도 같다. 다부진 인상이며, 저렇듯 꼼꼼한 뒤처리며.
바닥을 한면 한면 다 찍어내고, 매트리스 천에도 마찬가지로 시간을 충분히 들인 뒤, 남자는 방을
엉망진창으로 만들기 시작한다. 마른 수건을 감은 손으로 서랍을 열고, 옷가지를 뒤지고,
그녀의 지갑에서 현금을 빼들고, 차곡 차곡 그녀의 방 안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어수선해진 방 풍경은 이제 누가보아도 금품을 노리는 강도가 침입하고 난듯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더해지는 매트리스 위 그녀의 시체는 강도가 순간의 욕망으로 강간을 시도하다가 끝내는 살인으로 범죄를 맺는
자연스러운 이야기 흐름으로 굳혀지고.

미드를 보면 온갖 첨단 수사기법과 장비가 즐비하던데. 저런 것이 효과가 있을까.

살인부터 증거인멸까지, 대단원을 마친 남자가 휘휘 방안을 둘러본다.
꼼꼼히, 그리고 농밀한 시선으로. 십여분간을 한자리에 서서 조용히 하나 하나 집기와, 벽을
가만히 살핀다. 새 집에 입주하려는 세입자같다.

마지막 일분여는, 방안을 깨끗이 닦아내는 내내 미동도 없이 누워있던 그녀를 쳐다본다.

남자의 입이 움직인다. 다시 말하지만 카메라에 돈을 들인게 도움이 된다.

‘씨발’

소리없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남자는 재빠르게, 현관문을 열고 자리를 벗어난다.



3.

내 차례다. 해야할 일이란 뻔하다.

경찰에 신고? 웃기는 소리다. 내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카메라 회수다.

저 남자와 나의 차이란 죄의 경중 뿐이다. 살인과 도촬의 죄목 뿐이다.
다를게 없는 놈이라 이거다.

방 마다 설치한 앵글이 몇개인지 가만히 헤아려본다. 욕실과 침대 부근에는 더 많다.
하나라도, 만약 단 하나라도 남겨두거나 가져오지 못한다면,

수사를 시작한 경찰은 내가 숨겨놓은 카메라를 발견할 것이고, 나는 순식간에 저 살인의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를 것이다.

아무도 의심하지 않겠지, 신문도 대서특필 할 거야.

사회부적응자 남자, 연모하던 독신 여성의 집에 몰래 카메라를 설치, 어느날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여자를 강간 살해.

어떤 반론도 떠오르지 않을만큼 완벽하다. 세상이, 모두가 내게 침을 뱉고 낙인을 찍을 것이다.
저놈이네, 저놈이야. 저놈이 그 여자를 죽였어. 쯧쯔, 세상 참 흉흉해졌어.

내가 필사적으로 해명하고 빠져나와도, 낙인은 여전히 날 좇을 것이다.

도촬범으로, 사회부적응자로서 얌전히 밑바닥에 쳐박혀있던 벌레 하나로 감내하던 경멸의 시선위로,
해서는 안될 짓을 저지른 범죄자로. 그렇게 평생을 날 끌고 다니고 좇을 것이다.
살인과는 관계없음이 밝혀져도, 내 인생은 끝날 것이다.

보잘것 없는 내 직장에서도 잘리겠지. 그나마 기능하던 사회의 작은 톱니바퀴로서의 자리조차 잃을 것이다.
이미 나를 바퀴벌레 보듯 하는 가족들도, 동정보다는 나와 같은 피가 흐름에 진절머리칠 것이다.

다시 손에 땀이 차오르고, 다리에 쥐가 날 듯 저리는 느낌이 발바닥부터 스멀스멀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완벽해야해.

실수따윈 없어야해. 사람을 죽이고도 저렇게 천진하듯 침착한 놈도 있는데. 난 카메라만 빼오면 되는거야.
그거면 돼. 아무도 모를거야. 그냥 저 방에 곳곳에 숨겨져있는 내 추악한 취미들의 증거를, 원래부터
그런것 따윈 있지도 않았다는 듯이 얌전히 가져오면 돼.

택시를 타선 안된다. 뭣도 모르지만 그래선 안될 것 같다. 동선이 드러나잖아.
흔해빠진 중고차 하나 없는 나인데, 어떻게 하지?

그래, 일단 택시를 타되, 그녀의 집과 도보로 20여분 이상 떨어진 곳에 내려야한다.

빠르게 이동해서, 그녀의 집으로 걸어가는거다. 옷은 검은옷이 좋겠지.
씨씨티비가 길거리 담배꽁초만큼 흔한 세상이니, 마스크도 필요할거다. 아니, 그게 더 의심을 사려나?
택시를 탈땐 마스크를 벗자. 옷은 검정색. 그래, 그렇게 하자.

욕실 청소할때 끼던 라텍스 장갑도 챙겨야해. 잊지말자, 카메라 싹다 가져와야해.

일생처음으로 대범해져야하는 순간이다.

어느것 하나 성공적으로 마쳐본 적이 없는 나지만, 인생을 걸고 성공시켜야하는 일이야.

끊은 담배가 간절히 생각나기 시작한다.
움직이자.

없는 옷장을 뒤적여 검정색 후드를 꺼냈다. 겨울용이라 두껍지만, 검정 옷이 이것 뿐이다.
상설매장에서 산 싸구려 정장 마이를 입을 순 없는 노릇이니까.

흰색 마스크를 찾고, 주머니에 라텍스 장갑을 쑤셔넣는다. 뻣뻣하게 마찰하는 느낌이 곤두선 신경같았다.

번개같이 해치우자. 아무것도 건드리지 않고, 숨겨놓은 카메라들만 회수해오면 된다.
오래 방에 남아있을수록 실수를 저지를 확률도 높아지겠지. 모든 일을 끝마치고
다시 나오기까지 아마 십분이상 걸리지 않겠지.

쉼호흡을 한다. 현관문을 나서기가 매번 두려웠지만, 이만큼 떨렸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현관을 나선다. 손이 축축하다.




택시를 내리고, 어두운 주택가를 마주하니 묘하게 심장이 요동친다.
박동이 일정치 않다. 기사가 나를 이상하게 보지 않을까 염려했지만, 온갖 이상한 손님 이야기를 시시콜콜 늘어놓는
꼴이 내게 전혀 관심이 없어보였다. 마른 신경에 대꾸하고 싶지 않지만,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며 마음을 가라앉혔다.

길거리에서 편의점을 지날때마다 담배를 사고 싶은 충동이 솟구쳤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자.

면밀한 계산으로, 그녀의 집에 다다르기 전까지 번화가를 통해 걸었다.

어두컴컴한 구석길로만 간다면, 오히려 내가 살피지 못한 방범카메라나 씨씨티비에 좋은 먹잇감이 될수도 있다.
사람이 적당히 있는 길로 걷는게 나을거다.

새벽시간이지만, 금요일 저녁인 까닭인지 적지 않은 사람들이 유흥가 주변에 있다.

여기저기 토사물이 있고, 안마방 팜플렛을 나눠주는 남자들과, 그날 함께 거사를 치를 수 있는 여자들을
찾는 남자들이 각각의 목적을 가지고 이곳 저곳 기웃대며 재빠르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그 사이, 누구보다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걷는 내가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많아지자 전과 다를 것 없이 위축되기 시작한다. 주저할 시간 없다. 어서 가야해.

매걸음마다 진흙으로 발이 빨려드는 기분이다.
십여분쯤 걷고나자 즐비했던 사람들이 하나둘 눈에 띄지 않기 시작하다가, 이윽고 주위에 아무도 없어졌다.

집이 가까워지며, 이상하게 호흡이 정리되기 시작하는게 느껴졌다.
심장의 박동이 점차 진정되며 가라앉기 시작한다.

어차피 해야만 할 일이다.

컴컴한 오피스텔 앞을 지나,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다.

걸음을 오르는 중간에 주머니에서 라텍스 장갑을 꺼냈다. 질기고 뻣뻣한 입구로 손을 들이밀고
당겨 끼는 와중에 현관에 다다랐다.

너무도 뻔한 비밀번호, 그녀의 생일. 네자리를 누르고 드디어, 집에 들어섰다.

스크린으로 보았던 그대로다. 엉망진창으로 변해버린 공간을 잠시 둘러본다.
침대에 누워있는 시신에 시선이 닿자 나도 모르게 흠칫, 고개를 돌려버렸다.

시체는 보지말자. 시체는 보지말자.

난생처음으로, 연모하던 여자와 한 공간을 점유하고 있다. 한명은 산채로, 한명은 죽은채로.

머리속으로 설치한 카메라의 개수를 천천히 헤아리기 시작한다.

라텍스 장갑을 꼈지만 혹시나 싶은 마음에 양 손을 바지에 한번씩 문댔다.

타일 사이, 환풍구, 못이 박힌 틈… 내가 빈 집에 들어와 조심스레 앵글을 숨겼던 곳을 하나 하나 되집기 시작한다.

가느다란 선과 메모리 탭, 그리고 소형 앵글. 공들여 감췄던 내 은밀한 치부들이 다시 한개씩 수거되는 과정에
운동을 싫어해 땀 한번 흘려본 적 없는 내 얼굴이 번들거리며 젖기 시작했다.

서두르되, 놓치는 것이 없어야한다. 그녀를 죽인 그놈처럼, 아니 그 반만큼이라도 침착하고 꼼꼼히 움직여야 한다.

마지막 앵글을 수거하고 나자, 나는 마라톤이라 완주한 사람처럼 기진맥진해 있었다.
손목 옷깃을 당겨 땀을 닦자 검은 후드가 더 까맣게 젖어 들었다.
겨울용 후드안은 온통 끈적거렸다.

머리 속으로 해체의 과정을 돌이켜보고, 비닐 봉지 안에 담겨진 앵글을 다시 확인한다.
맞다. 모조리 수거했어.

맥이 빠진다. 손끝에 몰렸던 피가 더디게 빠져나가는게 느껴진다.

침을 삼키고, 매트리스 위에 남겨진 그녀를 쳐다본다.
언제쯤 발견될까, 연락이 없으면 직장에서 신고를 할 것이다. 아니면 지인이 하던가.
날이 더우니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썩기 시작할 것이다.
아마 경찰에 발견될 때는 사람꼴이 아니겠지.

그토록 아름답고, 매혹적이던 여자가 순식간에 같은 부피의 부패하는 고깃덩어리로 바뀌다니.

조심스레 다가가 얼굴을 살핀다.

보랏빛으로 질려온 얼굴에 당황스럽게 치켜뜬 눈동자가 보인다. 얼핏 맺힌 눈물을 마주한 순간,
나는 힘없이 뒷걸음질하고 만다.

죽어간 여자한테도 손대지 못해. 나는 저 눈물 한방울을 닦아줄 여력도 없을만큼,
손한번 내뻗어보지 못할 운명이었던거다.

추적 추적 현관문을 나선다.

다시 내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아무도 없을, 그곳으로.
돌아갈 때는 버스를 이용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현관문을 당겨연다. 계단을 내려가는 와중에
라텍스 장갑을 벗겨낸다. 젖은 손때문인지, 올라가며 억지로 당겨끼웠을 때보다 수월히 벗겨진다.
뒤집어 벗어낸 장갑을 다시 주머니에 쑤셔넣고, 마스크를 다시 찬다.
해낸 것이다. 해냈다.

드디어 저 살인 사건의 현장에서, 나라는 사람의 흔적을 완벽히 지워냈다.
몇일간은 아마 신문과 뉴스를 눈이 빠져라 청취하게 되겠지. 경찰이 비공식 수사를 시작한다면 더 느려지겠지.
어느날인가 독신 여성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가 티비와 신문에 떠오르면,
몰래 카메라에 대한 언급이 한 줄도 없다는걸 확인하게 되면, 그 날부터는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다.

피로가 어마어마하게 몰려들었다.

십여분간의 시간동안 얼마나 몸이 긴장하고 경직되었는지 비로소 실감이 들기 시작한다.
뒷덜미와 간장 부근이 욱씬 욱씬 쑤셔오고, 젖어든 후드 안쪽의 몸이 오한이 일듯 오슬오슬 떨려오는게 느껴졌다.

따듯한 물로 씻고, 집 근처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사서, 오랜만에 연기를 맘껏 들이마시며
긴장을 풀고, 이불로 꽁꽁 둘러쌓여 잠으로 빠져드는거다.

버스를 타고, 차창 정경을 바라보는 내내 행동을 천천히 복기한다.
실수는 없었는지, 내가 무언가 놓친것은 없었는지.

십여분간의 행동을 몇번이나 반복했을까, 골똘히 생각하는 바람에 내려야 할 정류장을 놓칠뻔했다.
허겁지겁 벨을 눌러 버스에서 내리자, 발이 녹진 녹진 쳐진다.
스스로에게 수고했다고 해야하나, 이제 걱정할 필요 없어.
누군가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으니, 이 무게감은 평생가져가야겠지.

편의점에 들어가 담배를 한갑 산다. 무심히 바코드를 찍어주는 알바생을 보면서도
어서 봉지를 뜯어버리고 한개비를 입에 물고 싶은 충동이 솟구친다.

편의점에서 나오자 밤공기가 더 선득하다.

땀에 젖은 후드를 서둘러 벗어던지고 싶다.
자연스레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빨라진다.

다음엔 뭘하지? 아,
라텍스 장갑은 태워버려야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 뻣뻣한 장갑을 꺼낸다.

그런데 이상하다.

장갑이, 한쪽밖에 없다.



4.


심장이 미친듯이 뛰기 시작한다. 어디지?

집 안? 길거리? 버스안? 설마 그 집에 떨어뜨렸나?

힘이빠져가던 다리가 정말로 주저앉을듯 요동치기 시작한다.

이런 멍청한 실수를 하다니. 장갑한쪽에 인생을 말아먹게 생겼으니.

만회할수 있어. 길거리 어딘가에서 떨어뜨렸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잠으로 빠져들고 싶은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멍청한 짓 하지마. 그게 집 안에 떨어졌으면 그대로 끝이야.
속 편하게 생각해버릴 일이 아니란거 스스로 더 잘알잖아. 좋게 좋게 생각하기엔,
걸린 저당물이 너무 크다. 아무리 보잘것 없어도 인생을 잃어도 좋진 않겠지? 다시 돌아가.

동선을 그대로 돌아가야 한다. 버스에서 떨어뜨렸거나 길에서 떨어뜨렸다면 다행인것이고,
하나 하나 왔던 그대로 움직이는 동안 발견되지 않으면 그건 그거대로 좋은 일이다.

청소부 아줌마가 치웠을 수도 있겠지. 길을 걷는 사람들 발에 채여 거리 구석 어딘가에 처박혔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그녀의 집 현관에 을씨년스레 떨어져있는 흰 장갑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따듯한 물도, 담배도, 침대에 눕는 것도, 모조리 미뤄졌다.

당장 튀어나가야해.

군대에서 비상상황에 걸렸을 때, 무장을 찾지못해 버벅대는 내 모습과,
쉴 새 없이 뺨을 두드려맞던 옛날이 생각난다.

난 무엇이든 빠르고 정확하지 못했지. 이번에도 이럴 줄이야.
다급하게 다시 집 밖으로 나온다.



돌아왔던 길 그대로, 다시 시체가 놓인 집으로 향하는 내내, 내 시선은 자질구레한 바닥에서 떨어질 줄 모른다.

거리가 좁혀지는 내내, 발견되지 않은 그 빌어먹을 장갑 한 쪽이,
내가 떨어뜨린 와중에 누가 치웠기를, 발에 채여 하수구에 처박혔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기분이란. 제발, 오 하느님.

타일 블록 하나 하나를 되집어가는 내내 나는 흰색의 무언가를 발견할 때마다 극도의 환희를 느꼈다가
다시 나락으로 처박히기를 수도 없이 되풀이했다. 빌어먹을 껌 껍질, 흰 휴지, 빈 담배곽.

마침내 다시 그녀의 집 앞에 도달했을땐, 눈알이 빠질 것 같이 피곤했다.

제발, 제발을 연신 내뱉으며 계단을 올라가는데

중앙 현관에 떨어져있는 흰 장갑이 눈에 띈다.

맥이 탁 풀린다.

서둘러 다가가 장갑 한짝을 집어든다.
가슴이 후련해지며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기분이다.

살인을 목격한 것에 이어, 내 흔적을 지우고, 끊은 담배를 다시 샀으며, 끝난다고 생각 한 일이 아직 덜됐다는 것까지
이 지긋지긋한 하루를 드디어 마칠 수 있는 거야.

장갑을 주머니에 쑤셔넣고, 몇번이고 다시 손을 넣어 확인한다. 꾹꾹 눌러 주머니 밑바닥에 처박히도록
힘주어 눌러 넣는다. 집에 가자마자 태워버려야지.

그때였다.

다시 서둘러 계단을 내려오는 찰나, 현관문 너머로 무언가 소리가 들린다.

걸음이 우뚝 멈춰세워진다. 저 방엔, 시체 뿐인데.

온 몸의 구석 구석을 고정시킨다. 때마침 동작 센서로 켜지는 복도 형광등이 뚝, 꺼진다.

고요하다.

온 몸을 긴장시키고 움직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쥐새끼 한마리 소리조차 들리지 않게끔.
윗집이나 아랫집일지도 몰라. 저기서 소리가 날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절망처럼, 다시 부스럭- 소리가 현관문을 넘어 들려온다.

대체 뭐야. 오늘 날인가?
이성은 현관문을 열고 저 방에서 소리를 내는 것이 무언인지 당장 확인하라고 명령하고,
본능은 장갑을 회수했으니 다른 모든 것은 신경쓰지 말라고, 어서 당장 네 집으로 돌아가 담배를 물어피우고
오늘 하루 일은 다 잊어버리라고 제 각각 소리지르고 있다.

죽은 사람이 도로 일어나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것이 아니면,
저 빌어먹을 살해현장에서 소리가 날 아무 까닭이 없잖은가.

몰카를 설치하고 난 뒤, 그녀가 일주일에 한번 남자를 데려오는 날이 아니면
그 어느 누구도 그녀의 집을 찾은 적이 없다.

가족도, 친구도 없다. 외로우면서도 그렇지 않은 삶이다.
젊음을 무기로 심리적 공백을 메우는 예쁜 여자의 삶.

한번 들려온 소리는 야속하게도 계속 들려온다. 불꺼진 차가운 아파트 복도에서 숨을 죽이는 있는 내내.

발걸음을 최대한 죽여 현관문을 향해 접근한다. 한걸음 한걸음 사이의 간격이 길게 몇분을 공들인 끝에
카메라를 수거해온 그 집 현관에 다다랐다. 조용히 귀를 가져다댄다.

밤 공기가 차갑에 식혀놓은 현관이 얼굴에 닿자 뺨에 소름이 오른다.
퉁, 퉁, 부스럭. 부스럭. 실낱같이 들리던 소음이 명백하게 전해져온다.

잘못들었을지도 몰라. 잘못듣긴 말도 안되는 소리하지마. 이 와중에도 계속 소음이 들려온다.
점차로 선명하고, 보다 커다랗게.

그때,

문이 열린다.

모든게 멈춘다.

껌껌한 복도에, 열린 문만큼의 빛이 굴곡지게 쏟아져 들어온다.
고개를 가져다댄 자세 그대로, 정지해있는 내 모습을 환히 밝힌다.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 그 모습 그대로,
눈동자만이 간신히 돌아가 문을 살핀다.

눈물로 얼굴이 온통 젖은 퉁퉁한 남자가, 나만큼이나 경악하여 못박혀 서 있는게 보인다.

군인인가 싶을 만큼 짧은 숱없는 짧은 머리카락이, 나이에 비해 빠르게 온 탈모를 감추지 못하고
두피가 듬성 듬성 드러나보였다. 얼굴이 온통 눈물로 젖어 번들거리는 턱살이, 유일하게 파들파들 떨린다.
퉁퉁한 남자와 나 모두, 자세를 바꾸지 못했다.

그리고, 갑자기 손을 내밀어 내 머리를 붙잡고 현관안으로 끌어들였다.

그 축축한 손이, 내 목덜미와 머리카락을 움켜잡는 동안에도 나는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나보다 족히 30kg은 더 나갈듯한 비만이었다. 평균보다 한참 미달체중을 가진 나는 도리질당하는
빨랫감처럼 그대로 현관 안으로 당겨져 내동댕이쳐졌다.

내팽겨쳐진 나를 뒤로하고, 남자가 현관문을 탁, 닫았다.

울음을 멈춘 퉁퉁한 남자가 연신 손등으로 얼굴을 훔치며 말했다.

“당신을 알아”

머릿속에 온통 복잡히 뒤섞여 온다. 충격과 충격. 물음표와 느낌표. 과거의 온갖 인물 사전 속에서
짧은 머리가 숭숭 빠져나간 비만의 이 남자를 대조해보지만 어디에서도 떠오르지 않는다.

“당신은 날 모르겠지만, 난 당신을 안다구”

대체 이 뚱뚱한 남자가 날 어찌하여 아는지. 이 살인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리려던 내 시도는 어떻게 되는건지.
나를 안다면 내 이름, 내 직업, 내 거주지까지 모조리 알고 있다는 것인지. 그걸 빌미로 평생 내게 무언가를
요구하겠다는건지. 느릿하고 어벙한 내 성격이 무색할만큼 온갖 생각이 머리속에서 두서없이 떠올랐다가
사라져간다.

“날… 안다고?”

“그래, 당신은… 어떻게 그럴 수 있지?”

간신히 대답한다. 저자의 말이 맞다면, 저 사람은 날 알고,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
압도적으로 불리하다. 나는 얌전히 저 사람의 처분아래 놓인 것이다.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은 어느 상황에서든 불리하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나를 어떻게 안다는거에요?”

뚱뚱한 남자의 살찐 얼굴이 건포도처럼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어떻게, 그럴수가 있지? 그래도… 좋아하는 여자가 죽었는데도 어떻게 그럴수 있냐고?

그녀가 그렇게 처참하게, 응? 처참하게… 아름다웠던 사람이 이렇게 비참하게 죽어버렸는데도,

어떻게 제 살길만 찾겠다고 그렇게 이기적으로 행동할 수 있어?”

머리속이 아득해지기 시작한다. 저 사람은 내가 그녀를 마킹했다는 걸 알고 있다. 어떻게 알았는가는 모르겠지만,
말의 내용으로 미루어보아 내가 그녀의 집에 몰카를 설치했다는 것도 알고 있으리라.

“그건… 그녀가 죽은건…”

“당신한테 그녀는 그저 눈요깃거리였나? 그냥… 자위하기엔 포르노가 자극이 덜해서?
주변에서 보는 여자의 나체가 궁금해서? 그냥 그랬나?”

이 로맨틱한 뚱보가 대체 어떻게 내 은밀한 취미를 알았을까. 하다가 번개같이 머리에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다.

“당신은 어떻게 아는거죠?”

검붉게 달아올랐던 뚱보의 얼굴이 아까보다 훨씬 더 붉어진다.
내 짐작이 맞다.

“당신도 나랑 똑같군. 그래. 당신도 이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한거야”

뚱보로부터 반론이 나오지않자, 내 목소리에 점차 더 힘이 실리기 시작한다.

“나보다 먼저였겠군, 왜냐면 내가 카메라를 설치한 이후로 당신이 이 집이 들어오는걸 본 적이 없거든.
나보다 먼저 이 여자를 보고, 집에 들어와서 몰카를 설치한거야. 그래서 내가 무얼했는지 훤히 꿰는거고…”

이 세상 모든 루저 남자들의 공통점, 나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상대 앞에서 별안간 자신감이 샘솟는 거.
그래도 파들파들 떠는 저 거구의 퉁퉁한 주먹은 나보다는 쓸만 할 것이다. 자극하지 말아야한다.

“똑같은 짓을 저지른 사람끼리 훈계는 그만둡시다.”

그리고 초장부터 실패했다.

별안간 뚱보가 달려들어 나를 마구 때리기 시작한다. 보기보다 완력이 별 볼일 없지만,
살덩이가 나보다 더 붙은 그 무게감은 나를 힘없이 나가떨어지게 하기 충분하다.

내가 엊어맏는 내내 뚱보는 짐승처럼 소리질렀다.

“똑같은 사람? 똑같은 사람? 날 너랑 똑같이 취급하지마!
맘에 두던 여자가 죽어도 제 할일만 들키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너같은 놈이랑 나는 다르다고!”

눈덩이가 찢기고 코피가 흐르는 동안 나도 어설프게 반격을 시작한다.

평생 운동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두 남자의 처절한 몸짓이 얽힌다.

허공에 팔다리를 허우적거리고, 할퀴고, 앞으로 내질러지기보다는 둥글게 원을 그리는 우스꽝스런 주먹질이,
방안을 가득 채우다가 이윽고 우악스럽게 내 목을 걸고 조이는 로맨틱 뚱보의 축축한 겨드랑이와 헐떡임이
내 행동을 조여 없앤다.

숨이 점점 막히고, 팔다리에 힘이 빠지기 시작한다.
방바닥에 널브러져 비계로 두툼한 팔이 내 호흡을 차단하는 동안, 나는 필사적으로 손을 위로 뻗어올려
뚱보의 눈구멍을 찾았다. 땀으로 젖어 미끄러운 얼굴을 더듬는 내 손가락이 눈이 있음직한 곳을 노리고 찔러들어가자
비명과 함께 결박이 풀렸다.

앞으로 허겁지겁 기어가 뒤돌아보니 한쪽 눈을 움켜쥔 뚱보가 헐떡이며 나를 보고 있다.

“말로 합시다.”

“…”

연적이라고 하면 미친소리고, 아무튼 한 여자를 좋아했다는 것, 그리고 좋아하는 여자의 집에 몰래카메라를
설치했다는 걸 빼면 공통점이라는게 하나도 없어보이는 비쩍 마른 남자와 뚱뚱한 남자 사이에 내뱉어진 말은
꽤 구차했다. 나도 말하고 나서 민망함이 적막과 함께 내려앉는게 느껴졌다.
아, 공통점 하나 더 추가. 아마도 둘 다 루저.

죽어버린 서로의 그녀가 매트리스 위에 누워있는 상황에,
두 남자는 호흡이 가라앉을 때까지 서로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담배 피워요?”

뚱보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끊었는데… 집에가서 사놓고 한대도 못태웠습니다. 한대만 줄래요?”

젖은 눈동자 속에서 미묘한 갈등이 느껴진다. 평생 눈치보며 살아온 이류남성에게 자연스레 길러지는 것. 눈치.
지금 이 타이밍에 이 기류를 풀지 못하면 이 상황이 더 복잡하게 꼬여가리라는 확신이 들었다.
계속해서 말을 건다.

“한대만 태웁시다. 형씨도… 갑갑할거 아뇨. 이 상황에 다른 대책있어요? 담배나 한대 주세요”

뚱보가 주섬 주섬 주머니를 꺼내 담배곽을 꺼냈다. 주저주저하며 다가가 한개비를 받아들었다.
담배가 왜 소통의 창구가 되는지, 흡연자만 아는 작은 사실이 있다. 불을 붙여 줄때 서로 거리가 좁혀진다는 거다.
사내들끼리 신체가 그렇게 붙는 경우가 그것 말고 또 있을까. 사람은 아무리 진화했어도 동물이다.
지척까지 접근하고 지근거리에서 담배를 나눠태우는 동안 긴장감은 장초만큼 빠르게 사그라든다.

“내가 왜 왔는지 아세요?”

뚱보가 고개를 절레 절레 젖는다.
나는 장갑을 꺼내 달랑 달랑 흔들어 보였다.

“이것 때문이에요. 카메라로 다 봤을테니까, 딴 말은 안해도 아시겠지. 저…”

나는 고개로 흘끗 침대를 가리켜보인다.

“저 사람 죽는거 보고나서, 카메라 치우러왔다가, 이걸 어이없게도 흘렸지 뭡니까.
집에 가서야 알았어요… 허겁지겁 다시 뛰쳐나온거지. 길바닥 샅샅이 훏으면서…
그랬다가 현관 앞에서 발견한 겁니다. 그랬다가 형씨도 이렇게 만난거고”

침대를 같이 쳐다봤던 뚱보가 미동없는 그녀의 시신을 보고 다시 울먹거리기 시작한다.

“아무런 고민도 안들어? 사람이 죽었다고… 그것도 맘에 둔 여자가…
당신이나 나나 떳떳하지는 못했어도… 그래도 그러면 안되는거 아니냐고…”

말없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이 등신같은 돼지새끼. 도촬범이 저런 지고지순함이라니.
이해받을 수 없다는건 피차 마찬가지지만. 뚱보의 연정 앞에서 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저 여자 어떻게 알던 사이에요?”

연신 눈물을 훔치는 뚱보가 간신히 대답하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창이야…”

“나보다 훨씬 오래 됐네. 나는 저 여자 근무하는 회사 아랫층에 카메라 수리기삽니다.
엘리베이터에서 처음 보고… 이렇게 됐어요”

“난… 한번도 같은 반이었던 적이 없어… 복도에서만 마주쳤지.
말 한번 걸어본 적도 없어. 3년 내내… 쳐다만 본거지”

“고등학교땐 어땠어요?”

한번도 제대로 지칭한적 없지만, 뚱보는 단박에 알아듣는다.

“그때도 예뻤어. 나같은 건 쳐다보기도 힘들었지… 학교 선배며, 후배며, 동갑내기들이며
다들 접근하지 못해 안달이었어… 늘상 얻어맞고… 무시받는 나같은건… 어림도…”

“그렇게 좋아했었으면 말이라도 붙여보지 그랬어요”

“당신이나 나나 잘 알거아니야… 우리 같은 놈들은… 저런 여자들은 좋아한다고 티 낼수도 없잖아…”

묘하게 기분이 나빠오지만, 가슴 깊은 곳에선 수긍이 든다.

“잘생겼으면… 나도 잘생겼으면… 이딴 짓은 안했을거야”

뚱보가 코를 킁 마셨다.

“당신이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누군가 싶었지… 아는 남자인가 하다가, 그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나랑 비슷한 부류구나 하고 느꼈지… 쟤가 여지껏 집에 데려온 남자들이랑 하늘이나 땅만큼 다르니까…”

점차로 기분이 더 나빠졌지만, 말 자체는 사실이다. 나나 저 뚱보나 아주 ‘주체파악이 잘 된’ 루저들인 것이다.

“카메라 설치하는거 보고… 열받았지만… 어떻게 하겠어. 화를 내? 내가? 나랑 똑같은 짓을 한건데…
알릴 수도 없고… 막을 수도 없었어… 내가, 내가 무슨 근거로?”

살인과 도촬은 엄연히 다르지만, 내 범법 행위를 저 뚱보는 까마득히 먼저 목격한 것이다.
내가 의도치않게 그녀가 죽는 광경을 목격한 것처럼. 무슨 기분이었을지 생각하니 복잡해졌다.

“그 다음부턴… 내가 보는 모든 것을 당신도 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이상했지.
벗은 몸도, 다른 남자와 몸을 섞는것도 말이야… 모조리 공유하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내가 일어나 조금더 다가앉자, 뚱보는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담배 하나만 더 빌립시다…”

아까보다는 덜 망설이는 기색으로 뚱보가 한개비를 더 내민다.
그리고 이번에는, 자신도 한개비 물어 불을 붙였다.
켜주는 라이터불로 담배 불을 붙이고, 다시 앉은 자리 그대로 돌아와 앉았다.

“저 여자는 이렇게 죽어선 안돼… 그렇게 예쁘고… 빛나던 여자였는데…”

담배를 끼워든 손이 다시 뚱보의 퉁퉁한 얼굴을 덮었다. 어깨가 들썩이기 시작한다.
한모금을 빨아들이며 내 머리가 잽싸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래서… 어쩔겁니까? 어쩌려구요. 저 여자 저렇게 된거, 나나 당신같은 사람이 이렇게 말하는건 웃기지만,
나도 가슴 아파요. 딴 사람들은 이해 못해도, 형씨는 알거 아닙니까. 아까 형씨가 말했지만,
나나 당신같은 사람들? 그래요, 저런 여자한테 말도 못붙여. 고백은 엄두도 안나고요”

뚱보가 젖은 눈을 훔치고 다시 담배를 한모금 빨이 피운다.

“그래도… 산 사람은 살아야 할 거 아닙니까. 저 여자 직장에서든, 아니면 오래 연락이 안된 가족에서든,
결국 이상하다고 신고할거고… 그럼 경찰들 올거고… 카메라 남겨뒀다가는 빼도 박도 못하게 우리가 범인이요.
그래요 진범이 잡힐수도 있겠지. 그러면 우리는 무죄된답니까? 예? 몰카범이에요 우리도”

담배를 빨아들이는 뚱보의 퉁퉁한 얼굴이 미미하게 떨렸다.

“형씨도 가족 있을거 아닙니까. 부모님도 있을거고. 자식이 도촬범이면, 것도 살인사건이 얽히면
어찌 되겠어요. 내가 나만 살자고 이러는거 아닙니다. 직장도 있어요? 그렇겠지. 나도 보잘것 없지만
밥벌이하려고 직장 다닙니다. 거기서도 잘릴겁니다. 당연하게두요. 형씨 이거 다 뒷감당할 수 있겠어요?”

뚱보는 말이 없다.

“나는요. 카메라 수리기사에요. 가진 능력도 없고, 머리도 안좋습니다.
서른 중반 훌쩍 넘어서 하고 있는게 이거에요. 도촬범 꼬리표 달리면 난 끝입니다.
카메라 팔고 수리하는 놈이 도촬범? 말도 안되는 소리죠... 형씨는 직장이 뭐에요?”

“공무원이야… 9급 공무원”

씨발. 살만한 놈이 이딴 범죄는 왜 저질렀대? 내가 9급 공무원이면 아무리 못나도
내 여자 하나는 꿰차고 살겠다. 병신같은 놈. 내심을 숨기고 침착하게 담배를 한모금 더 빨아문다.

“형씨가 더 심각하네요. 공부도 오래했을텐데. 살기 힘든 세상에 공무원이면 그거 밥그릇 귀한겁니다.
내 친구 놈들도 노량진에서 몇년씩 썩는 놈들 많아요”

거짓말이다. 연락할 친구 한 놈 없다. 그래도 뱉어본다.

“공무원이면 이거, 바로 잘릴겁니다. 시험 재응시도 불가능할거고요.
나야 공부밥 먹은적 없어서 잘 모르겠지만, 형씨도 합격하려고 꽤나 고생했을것 아닙니까.
얼마나 공부했어요?”

뚱보가 킁 소리를 낸다.

“3년…”

“보아하니까 나보다 나이는 어린 것 같은데… 대단하시네. 스물 후반에 그마만큼 투자해서
그럴듯한 직장 잡았으면, 아깝지 않아요? 그 고생을 생각해보시라 이겁니다.”

동요가 느껴진다. 이럴때 치고 들어가야한다.

“나도 부끄럽습니다. 서로 말못할 처지지만, 저 여자 저렇게 된걸 그냥 나몰라라 하려던 내가 부끄럽다구요.
떳떳하지 못했어도, 난 형씨처럼 눈물 흘리고 그러지도 않았단 말이요. 그래서 나도 생각이 좀 바뀌었다 이말입니다.”

뚱보가 젖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본다.

“그럼… 어떻게 하자는 건데…”

“카메라 일단 뺍시다. 형씨도 살길 찾고, 나도 살고, 그리고 여자 죽인 살인범만 딱 잡히게 하는겁니다.
주변에 씨씨티비 없는 야외 공중전화 부스를 하나 찾자고요. 그리고 몇시경에 어느 집에서 여자가 죽었다-
살인범은 이러저러하게 생겼고, 어떻게 하다가 여자를 죽였다- 그렇게 익명으로 신고하고는 전화 딱 끊는겁니다.
경찰에 단서제공도 될거고, 생긴거며 옷차림이며 다 말해주니까 걔네도 범인 잡기 쉬울겁니다.
거기까지만이에요. 우리 둘은 빠지고, 저 살인범만 잡게하는 거에요. 이해 가십니까?”

뚱보는 젖은 얼굴로 곰곰히 생각을 계속한다. 이럴때 필요한게, 바로 마무리다.

“왜 이렇게 말을 못알아들어요!”

고함을 지르자 뚱보가 움찔, 하는게 보인다.

“그래, 본인이 한일 다 밝힌다 칩시다. 형씨가 할 수 있는게 뭔데! 익명으로 신고하는거나,
내가 도촬범이요, 자수하고 밝히는거랑 뭐가 다르냐고? 우리가 직접 잡을 것도 아니고,
이래나 저래나 수사단서 제공밖에 더해요? 미련한 사람아. 본인 삶도 아까운줄 알아야지…
떳떳하지 못했어도, 자기 삶 귀한줄 알아야되요. 범인만 잡으면 되는거 아뇨?”

“그놈들이… 경찰들이… 잡을 수 있을까…?”

“아마 그럴겁니다. 한국 경찰이 무능하니 뭐니 말이 많아도… 검거율 높답니다. 세계적으로도요.”

“나는… 그놈들 안믿어… 학교 다닐때 내내 괴롭힘 당했어도… 찾아가도 아무것도 해결 못해주던 놈들이야…”

“어차피 나나 형씨가 할 수 있는 일이란게 없어요… 계속 말하지만 서로 직접 걸어들어가든,
익명으로 신고하든, 범인이 이리 생겼습니다. 이거 밖에 없다구요.”

거의 넘어왔다. 이제 먼저 움직이면 따라올 것이다.

“형씨는 카메라 어디에 숨겼어요? 그것도 궁금했거든. 내가 나중에 설치했지만,
숨길데는 다 고만고만한데 서로 겹치지 않았다는게 말이에요. 어딥니까?”

내가 일어나 부산을 떨기 시작하자, 뚱보가 무거운 몸을 천천히 일으켜세웠다.

“용산 바닥 뒤져서… 겨우 몇개 안돼… 당신은 카메라쪽에서 일하니까 훤했겠지만…”

뚱보가 걸려있던 액자를 둔한 손짓으로 벗겨내자, 그림의 검은색 부분이 펜으로 뚫어놓은 것처럼
둥그렇게 뚫려있는게 보였다. 그리고 액자 뒤에 걸린 소형 렌즈와 메모리를 꺼냈다.
구식 버전이다. 감이 좋은 여자였다면 메모리에서 간혹 들리는 소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돈도 얼마 투자하지 않았군. 걸리지 않은게 용해. 저 뚱보의 몰카를 여자가 눈치챘다면 나도 딸려들어갔을테지.
이래나 저래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위기를 많이도 넘겼군 그래.

스프링 쿨러 옆, 그리고 욕실에 샤워기 거치대, 숨기긴 좋지만 구도가 영 좋질 않아서 영상의 결과가
썩 따라오지 않는 곳들이다. 초심자의 선택이란게 그렇고 그렇다.

“세개 뿐입니까?”

“응… 세개가 전부야”

뚱보는 전선과 메모리, 앵글을 한 손에 들고 커다란 펭귄처럼 애처롭게 서있었다.
당장이라도 이 현관을 박차고 나가고 싶지만,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는 바보짓은 하지 말자.

“카메라는 챙겼고, 이제 마무리하고 밖에 나가서, 공중 전화를 찾아보자고요.
인상착의는 형씨도 나도 봤으니까… 누구든 전화해서 신고하면 끝납니다 이제.”

나지막히 말을 거는동안, 다시 뚱보의 얼굴이 눈물로 얼룩 덜룩해지기 시작한다.

“자, 다 끝났어요. 우리가 신고하면 다 잘 마무리될 겁니다. 아주 명확하게 살인밤에 대해 제보할 수 있잖아요.
잡히는건 시간문제입니다. 아예 모른척 해버리려던 내가 잘못생각했어요. 형씨 만난게 아주 잘된일 같다고”

슬쩍 다가가 조심스레 뚱보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나랑은 비교도 안되게 오래 봤으니… 형씨 심정이 어떤지 나는 죽어도 이해못할겁니다.
신고해서, 그 놈 벌 받게 해야죠. 울지만 말고…”

“그렇게… 그렇게 예뻤는데… 아직 나이도 어린데… 죽, 죽어버렸어…”

“자, 자 이봐요. 진정하고…”

뚱보를 다독인다. 눈물 젖은 얼굴이며, 축축한 겨드랑이며, 어깨를 들썩이는 이 덩치큰 남자의 모든 구멍에서
습기가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드디어, 오늘 밤이 마무리 될 것 같다.
그렇지만 그건 내 착각이었다.

현관문 도어락을 여는 비밀번호 소리가, 선명하게 네 번, 울린다.


5.



뚱보와 내 손이 동시에 굳는게 느껴졌다.

살인자는 살인현장에 반드시 다시 나타난다, 는 오래되고 낡은 격언이 바야흐로 맞아떨어지는 순간이다.

베이지색 치노가 보이고, 검정색 공구 가방을 든, 그 놈. 여자를 죽인 그 놈이 현관문 앞에 턱- 서있는게 보였다.

놈도 당황을 감추지 못한게 보인다. 왜냐하면, 공구가방을 떨어뜨렸으니까.
우루루, 톱, 망치, 칼, 끌 등의 인부가 가지고 다닐법한 자질구레한 도구들이 현관문 안쪽 바닥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쏟아져내렸다.

놈은 역시 우리보다 침착하다. 얼어붙은 뚱보와 내가 미동도 못하는 사이,
눈빛이 날카롭게 바뀌며 안쪽으로 걸어들어와 문을 잠갔다.

“니들 뭐야”

뚱보와 난 자세 그대로 아무말도, 아니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뭐냐고, 니들”

입모양으로만 유추가능하던 남자의 말이, 음성이 또렷히 귀를 거쳐 들려왔다.
낮은 중저음이다. 자연스레 움츠러들만한, 무거운 음성이다.

“오늘 날인가? 미쳐버리겠다 진짜… 계집년이 뒤지질 않나, 왠 병신같은 두 놈이
그 집에 떡 박혀있질 않나… 대답 안할래?”

놈이 허리를 숙여 공구가방에서 떨어진 망치를 집어든다. 작은 못을 박는 앙증맞은 망치가 아니다.
대못을 박거나 목조 건물을 해체할때 쓸법한 우람한 머리를 가진 망치였다.
무거운 머리의 쇳덩이를 가볍게 다루는 모양새를 볼 때, 영상으로 보았듯 근력이 뛰어나다는게 한눈에 보였다.
한손으로 여자를 목졸라 죽인 놈이다.

상황이 예기치않게 전개되기 시작한다. 부들 부들 떨던 뚱보가, 눈알을 뒤집고 놈에게 달려든것이다.

“우, 우아아아…!”

그리고, 한눈에 우리는 어쩌지 못할 상대입이 입증되었다.
놈은 조금도, 정말로 개미 좃구멍만큼도 당황하지 않았다. 달려드는 뚱보를 노려보다가,
허리를 숙여 거리내에 든 뚱보의 발등을 망치로 찍어내렸다.

비슷한 발음을 찾기 힘든 어떤 비명이 방을 메웠다. 쓰러져 버둥대는 뚱보가 오른발을 움켜잡고
꺽 꺽 대는 동안 놈은 야생동물 같은 얼굴로 머리를 쓸어올렸다.
뚱보의 하얀 스니커즈가 거짓말처럼 검붉게, 콸콸 물들기 시작했다.

놈이 버둥대는 뚱보에겐 눈길 하나도 주지 않고 나를 마저 노려보았다.
그러더니, 흘끗- 뚱보가 놓친 전선, 렌즈, 메모리칩을 보고 알았다는 듯이 징그럽게 웃어보였다.

“벌레 같은 새끼들이네, 이거. 니들 몰카범이지?”

영상으로 보며, 경찰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던 놈의 치밀함과 냉정함이 다시 뇌리에 떠올랐다.
그리고, 망치를 찍고도 아무런 흔들림없는, 소름끼치는 비명에도 반응조차 없는 모습을 보자,
저 여자가 첫 살인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던 생각이, 무섭도록 확신에 가깝게 변해갔다.

“그러면 내가 한 꼬라지도 다 찍혔다는건데… 골치 아프게 됐네”

몸이 덜덜덜 떨기 시작한다. 오줌을 지릴 것 같다. 창피하게도, 감추고 싶은 다리의 요동이
가식없이 놈의 눈 앞에서 주체할 수 없게 드러났다.

“니가 올래? 내가 갈까?”

놈이 쿡쿡 웃더니, 망치 끄트머리로 관자놀이를 문질러 긁었다.

“걱정마, 안죽여. 니들이 찍은거 다시 회수해야지. 일만 조금 귀찮아졌을 뿐이야.
죽이는건 그 다음에 생각해볼게”

놈이 망치를 왼손으로 옮겨잡고, 오른손 목을 빙글 돌려 손목을 풀었다. 무리가 간 모양이었다.
그리고 입에 거품을 물고있는 뚱보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프지? 나도 알아. 요샌 생활하다가 나가겠다고 하면, 망치로 발등을 찍거든.
손가락 자르는건 좀 촌스럽잖아. 야쿠자 따라하는 것도 아니고. 많이 봤는데, 다 너같아.
아무리 터프해도 똑같더라고. 억지로 딛고 일어날 생각하지마, 그러면 병신되서 영 못걸어”

놈이 유유자적 걸어오는 동안, 나는 떨기만했다. 병신같이. 저 뚱보처럼 달려들 요량 한번 못내보고.
발이 박살나는건 싫다.

망치가 내 뺨을 지그시 눌렀다. 녹슨 쇠냄새가 훅 끼친다.

“넌 저 비계보다 그래도 사리파악이 되는것 같으니까 말할게. 녹화한거 어딨어?
그거만 회수하면 아무도 더 안다쳐. 저 뚱보가 저런건, 저 놈이 먼저 달려들었다고. 자기방위 차원인거지”


“지,집에 있어요… 이십분 정, 정도 걸립니다. 제, 제발요…”

“이십분? 어쩐다…”

놈이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동안, 나는 속으로 빌었다. 제발 보내줘, 집에 가서 가져오라고 해.
일단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다. 그것만 된다면… 제발.


“너 이새끼. 일단 나가고 보자, 이런 생각인 거지?”

심정이 철렁 내려 앉았다. 뺨에 밀착된 망치가 심장으로 옮겨간 것 같이.
놈이 내 오금을 걷어찼다. 후들거리던 다리 맥없이 무너진다.

그대로 공구상자로 되돌아간 놈은 덜그럭 거리며 무언가를 찾기 시작한다.

“그래, 좋은 수가 있지”

뒤돌아선 놈의 손에, 정원용 가위같은 절삭용 절단기가 보인다.

“이것 저것 챙겨오기 잘했네. 직업병이라고. 생활하던 놈들 대부분 트렁크에 연장 싣고 다니거든”

다가오는 내내 이보다 더 떨릴수 있을까 싶던 몸이 경직될 것처럼 부들 부들 떨리기 시작한다.
오른발로 팔꿈치를 즈려밟자 자연스레 내 입에서도 비명이 나오기 시작했다.

“움직이지마, 다친다”

선뜩, 무언가 내 손에 닿는듯 하더니, 불이 붙은듯 뜨거워졌다. 고래 고래 비명을 질렀다.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을 정신없이 당겼다. 내 엄지 손가락, 삼십년 넘게 달려있었던 내 엄지손가락.
선혈이 손바닥을 타고 마치 물감처럼 줄줄 흘러내렸다.

내 엄지를 집어든 놈이 자연스레 냉장고로 걸어가, 비닐팩에 얼음을 옮겨담기 시작했다.
가득 채워진 비닐팩에 내 엄지를 톡, 떨어뜨린다.

“신경 죽을때까지 대충 이십분이야. 얼음에 넣었으니 좀 더 길거고.
삼십분 내로 돌아오면 병원가서 접합 수술 받을수 있어. 아니면 영영 손병신으로 살던가.
어때?”

덜덜 떠는 내 앞으로 놈의 운동화가 다가와 서는게 보였다.

“할 수 있겠어? 준비- 땅. 이라고.”

내 앞으로 흰색 붕대가 툭 떨어졌다. 감아, 하고 내뱉은 뒤 놈은 천역덕스레 소파에 앉았다.
오늘, 여자가 살아있을때 앉아서 캔맥주를 마시던 그때처럼.


“허튼 짓 하지마. 니들이나 나나 똑같이 범죄자야”


잘린 부분을 움켜잡고 덜덜 떨고 있자니 이 방의 모든게 지독한 거짓말같아졌다.
공구함을 들고 온거보니, 아마 시체를 처리하러 온거겠지. 썰어서 내다버릴 작정인가.
그토록 꼼꼼히 뒤처리도 했으면서, 그걸론 모자라다고 생각이 들었나.
바닥에서 내뒹구는 저 뚱보도, 매트리스 위의 죽은 그녀의 시체도, 그리고 태연하게 소파에 앉은 저 놈도,
모든게 거짓말이야.

손가락? 내가 하드를 통째로 들고 온다고 저 놈이 날 살려줄까?
사람을 죽이고도 저리 태연하며, 사람의 발등을 망치로 내려찍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게 손가락을 자르는
저 놈이?

“뭐야, 저새끼”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들자, 인상을 찡그리며 뚱보를 쳐다보는 놈이 눈에 들어온다.
시선을 따라가자, 거품이 끓어오르는 입을 허공으로 하고 대자로 뻗어 미동없는 뚱보의 모습이 보였다.
호흡이 없다.

“가지 가지 한다… 진짜”

놈이 소파에서 일어나 뚱보를 향해 다가갔다. 무릎을 구부려 고개를 들고 이리저리 돌렸다.
손짓에 따라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는데도 뚱보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
목덜미에 손가락을 가져다대고 뚱보를 면밀히 관찰하는 찰나,
뚱보가 튕겨올랐다. 죽자살자 달려드는 통에 놈이 엎어진다. 순식간이다.

악다구니가 펼쳐진다. 밀쳐지는 바람에 놈이 놓친 망치가 멀찍이 튀어나갔다.
몸무게로 손에 힘을 싣고 놈의 목을 조르려고 시도하는 뚱보의 오른손을 놈이 움켜잡는다.

일촉즉발의 순간, 내가 해야 할 일이 순식간에 명확해진다.
피가 흐르는 손으로 바닥을 딛고 일어나 악다구니 속으로 끼워들어간다,

놈의 손을 잡고 바닥에 정신없이 내리친다. 뚱보가 목을 조르는 동안 서서히 주변 공기가 가열되기 시작했다.
붉게 졸려들어가는 놈의 얼굴을 보며 뚱보가 짐승같은 흐느낌을 내뱉기 시작한다.

순간 내 입에서 비명이 튀어나온다. 놈의 오른손이 잘려진 내 엄지 부분을 꽉 잡아쥐었다.
내가 나가 떨어지자, 놈이 아래에 깔린 상태에서 뚱보에게 주먹을 휘둘러 얼굴을 강하게 쳤다.
옆으로 기울어지는 뚱보가 보인다.

이대로 가면, 죽는다. 저 망치가, 발등이나 손가락이 아니라 머리위로 떨어질게 뻔했다.

뚱보를 향해 연신 무게가 실린 주먹을 휘두르는 놈의 등 뒤로 다시 기어들어가, 있는 힘을 다해 목을 조르며 등에 달라붙는다.
평생동안 이렇게 힘써본 적 있을까, 싶을 정도로 온 몸의 근육을 쥐어짠다.
강한 저항이 느껴진다. 단단한 놈의 등 근육이 꿈틀거리며 내게서 벗어나려는게 느껴진다.
놓치면 죽는다. 놓치면 우린, 죽는다.

양발까지 동원해 간신히 놈을 붙들고 목을 조르는 동안, 연거푸 얻어맞은 주먹에 겨우 정신을 차려가는 뚱보가 보였다.
헝클어진 머리 아래로, 부산히 움직이는 눈동자가 살의에 차있다.


뚱보가 엉금 엉금 걸어가더니, 발목을 부숴놓았던 그 망치를 집어든다, 어? 이게 아닌데. 그게 아니야. 아니, 그게 맞는건가?
팔 다리가 굳어버릴 정도로 힘을 쓰고 있는 내 입에서, 뜻모를 흐느낌이 울컥 울컥 터진다.
뚱보가 기괴한 소리를 내지르며 달려온다. 목덜미와 가슴에 살덩이가 흔들거리며, 둔중하게 뛴다.

나는 선명한 파열음을 바닥에 깔린채 들을 수 있었다. 놈의 얼굴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귀 뿐만 아니라
감싸안고 있는 내 온몸으로 한번, 두번 계속해서 전해졌다. 단단한 무언가를 부수는 것 같았던 소리는 점차
고깃덩이를 내려치는 듯한 축축한 소리로 변해갔다. 그와 동시에, 완강히 저항하던 놈의 온 몸에서
내려쳐지는 망치질 한번에 힘이 썰물처럼 쭉- 쭉- 빠져나가는 것도 느껴졌다.

핏물이 내 얼굴이며 목으로 뜨듯하게 흐르는게 느껴진다.

이성을 잃은듯 망치를 내려치던 뚱보가 이내 자신이 한 짓에 경악해하며 망치를 떨어뜨렸다.

혹여 나를 내려칠까 한숨도 움직이지 않던 내가 멀찍이 놈의 시체를 밀쳐버리고 뒤로 기어갔다.

“아니야… 아니야… 이게 아니야…”

뚱보가 바닥으로 주저 앉는다.

“안죽였으면 우리가 죽었을겁니다… 못봤어요? 형씨 발등 내려치고 내 손가락 자른거…”

이 지긋지긋한 밤을 끝내고 싶다.

“경찰에 신고할 필요는 없어졌어요… 죽어도 싼 놈이었어요. 공구 들고 온거 봤죠?
시체 처리하러 온거라고요… 썰어서 내다 버리려고! 우리도 그렇게 될 뻔했고요…”

잘린 손가락에서 흐르는 피 때문인지, 점차 어질 어질해지기 시작한다.
몸도 으슬 으슬 떨려온다.

“욕실로 들어가서, 씻어요… 그 다음엔 내가 씻고… 이거 뒷정리해야 되요”

뚱보는 엎어진채 연신 눈물을 쏟으며 손으로 훔치고 있다.

“욕실로 들어가라고!”
목소리를 높이자,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킨다.

“우리 흔적 다 지워야되요… 너무 일이… 커졌어요. 피 닦고, 공구함 치우고, 지문 정리하고…
이대로 우리 둘만 깨끗하게 정리하고 나가면 아무 일도 없을 겁니다. 조금 일이 꼬였지만…
어쨌든 오늘 밤 일 끝내자고요. 나 지겹습니다… 괴롭고요…”

뚱보의 동공이 서서히 명확해지기 시작한다.

“먼저 씻어요, 그러니까…”

욕실 문이 닫히고, 물소리가 켜진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방에 나 혼자 서있다.
수건이 필요해. 내 피며 뚱보의 피가 남았을 수도 있다. 반쯤 적신 수건으로 지문도 지워야되고,
테이핑도 다시 해야할 거야. 그 악다구니 속에서 체모가 떨어졌을 수도 있어.
뚱보 카메라도 챙기고. 해야 할 일은 하나 하나 주워섬기는 내내 놈의 피가 서서히 바닥에 번져
내 발 밑까지 다다랐다. 슬쩍 발을 치운다.

손가락, 내 손가락도 챙겨야지. 집을 떠나기 전에 가져가자, 그 전엔 냉장고 안에 그대로 넣어두는 편이 낫겠지.

끝났다. 이제, 정말로.

정말 끝일까?


6.


시간이 지났지만, 뉴스 기사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
경찰이 비공식 수사로 진행중인가보다, 짐작했지만- 아무것도 알 수는 없다.

아직도 꿈 속에서 가끔 그 장면이 나오곤 한다.

그녀가 깨끗한 그녀의 방에서 환하게 웃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기도 하고,
망치질에 얼굴이 으깨진 그 놈이 소파에 앉아서 캔맥주를 들고 있기도 한다.

어찌된 일인지 이름한번 물어보지 못했던 그 로맨틱한 뚱보는 한 번도 꿈에 나오지 않는다.
씻고 흔적을 치우는 내내 서로 말 한마디 건네지 않았던 기묘한 내 파트너는 그대로 영영 볼 수 없었다.
사는 곳도, 이름도, 나이도, 서로 아무것도 묻지 않았으니까.

질 나쁜 악마가 안배한 악몽처럼 아득한 그 날밤을 함께 거쳐나온 기묘한 동료애인가,
나는 가끔 그 뚱보를 떠올린다.

컴컴한 내방에서 가만히 있다가 초인종에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뚱보도 이렇게 살고 있을까?
제복을 입은 경찰이 이인조로 수첩을 들고 현관에 서있는 장면을 상상하며 문을 열면,
정수기 판매원이나 기독교 전도사가 있는 광경에 안심하며 심장이 아득해지는 일을, 겪고 있을까?

태워버린 장갑과 공구들은 재가 되어 사라졌지만,
이 기억들을 얼마나 오래갈지 짐작이 되지 않는다.

아무것도 모르는 치매 노인이 되었을때, 가족 하나 없이 외로운 늙은이가 되어 국비 요양원에서 똥오줌을 지리며,
그때 있었던 일을 주섬 주섬 주워섬겨, 피곤에 찌든 요양 관리사들이 경악한 표정을 짓게 하진 않을까?

경찰은 찾아 오지 않는다. 반년째. 안심해도 되는 걸까.
강력범죄의 검거율은 첫 삼개월이 가장 높다. 그 이후부터는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잘렸던 엄지 손가락은 말을 잘 듣지 않는다. 서툴게 접합된 가구처럼, 삐뚤빼둘한 그 선을
모니터 불빛 속에서 희미하게 발견 할 수 있다.

내가 지금 뭘 하려는걸까?
어쩌면 미친 짓이겠지.

일생일대 아무도 겪지 못했을, 누군가에게 절대 털어놓지 못할 그날의 기억을
조심스레 남겨두고 싶은 욕망이 자라난지는 꽤 오래다.

어리석다는 걸 안다. 빼도박도 못할 증거가 될 거라는 것도 안다.

세상 모든 남자들에게 외치고 싶은 내 저열한 욕망일 수도 있다. 야, 사실은 니들도 똑같은거 아냐? 이렇게 말이야.
니들도 바지 내리잖아. 니들도 자위하잖아. 니들도 이쁜 여자를 보면 치마속을 상상하잖아.
어? 니들도, 더럽잖아.
이렇게 말이야.

그게, 지금 내가 마스크를 쓰고 모자를 쓰고, 온 몸을 칭칭 싸매고 시골 피씨방 구석에 앉아있는 이유다.

그녀가 섹스하던 모습, 그녀가 목욕하는 모습.
세상 수컷들이 너도 나도 달려들고 싶어할 만큼 탐스러운 모니터 속 그 광경을 보며, 정액을 뿜어낼 상상을 한다.

목 졸려 죽은 보랏빛 얼굴도, 망치로 으깨진 얼굴도 모르겠지. 니네는 거기다 대고 정액을 뿜을거야.
그녀의 사타구니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면서 꿈에도 모를걸. 피투성이 위에다 사정하는지 말이야.

클라이맥스만 보고서 말이야.

업로드가 끝났다. 이름만 대면 알법한 피투피 사이트에, 위조 주민번호로 가입된 아이디로,
그 날의 거세된 기억을 올린다. 추억이 될거야.

파일 제목을 올리라는 창이 떠오른다.
망설임 없이 써내려간다.

잘린 엄지 손가락의 삐뚤한 단면이 어두운 모니터 빛에 희게 빛난다.



[야, 자극적인게 필요해?]



fin.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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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글
베스트1
토로레
미쳤네 쩌러따쩌러따.. [1]
5 0 추천 반대 댓글
[이동]
2017-05-16
[07:25]

223.xxx.xxx.xxx
토로레
미쳤네 쩌러따쩌러따..
5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7-05-16 07:25:18 223.xxx.xxx.xxx
잭더든
재미있게 봐주셔서 고맙슨다 토로레님
20 추천 반대 삭제 신고 2017-05-16 08:32:07
110.xxx.xxx.xxx
물어봐요
재밌게 보고 가요^^.
4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7-05-16 17:21:12 211.xxx.xxx.xxx
잭더든
아이고 감사합니다!
00 추천 반대 삭제 신고 2017-05-17 21:14:09
175.xxx.xxx.xxx
환상괴담
자주 자주 뵈요. 추천 누르고 갑니다.
2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7-05-16 21:55:26 121.xxx.xxx.xxx
잭더든
환상괴담님 고맙습니다!
00 추천 반대 삭제 신고 2017-05-17 21:14:22
175.xxx.xxx.xxx
she부럴
시간가는줄모르고 읽었내ㄷㄷ 좌왕굿!!(우왕굿의 우를 좌,우로 해석한 고오오급개그입네다^^~)
2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7-05-17 06:32:04 115.xxx.xxx.xxx
잭더든
ㅋㅋㅋㅋ 고맙습니다!
10 추천 반대 삭제 신고 2017-05-17 21:14:33
175.xxx.xxx.xxx
불알을긁으며
글 잘읽었습니다. 헌데 마지막에 남자가 올린건 여자의 어떤 동영상이죠?
0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7-05-17 21:06:34 223.xxx.xxx.xxx
월곡동
와....쩐다ㄷㄷ 추천
1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7-05-18 02:47:27 117.xxx.xxx.xxx
황금올리브
ㅇㄷ박고갑니다 품번좀요 ^^
0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7-05-22 08:42:15 119.xxx.xxx.xxx
나비에게길을묻다
오져따리오져따... 팬되겄다...
0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7-05-22 19:57:45 210.xxx.xxx.xx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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