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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환상괴담 어게인] 돼지 잡던 날 [1]
작성자 환상괴담
번호 78946 출처 퍼온자료 추천 28 반대 0 답글 1 조회 2,053
작성시간 2019-10-17 19: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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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아버지, 제가 저번 시험에서 두 문제 실수하는 바람에 미끄러진 거 아시잖아요.
이번엔 그때보다 더 열심히 했고, 혹시 몰라서 구급에도 하나 걸어놨으니까 보나 안 보나 합격했을 거라고 보셔도 돼요.
구급이 아니라 칠급도 노려볼 만 하다니까요? 남들이 뭐라는 건 신경 쓰지 마세요.
뉴스 보면 평균 이 년에서 삼 년 정도 걸린다는데요 뭘.
그래요? 오촌 동생이요? 걔가 벌써 붙었다고요?
걔 군대도 안 다녀왔는데 무슨 공무원 시험을 쳐요.
특성화고 전형? 아아, 그거구나….
그래요? 아-. 잘됐네요.
그래도 걘 군대 때문에 휴직도 해야겠네.
전 이번에 들어가면 딱 업무 한 길만 바라보고 쭉 달릴 거에요.
아버지, 겨울인데 새 잠바 하나 있으셔야죠. 바꿔드릴게요.
명품으로 딱 엄마랑 커플룩으로 맞춰드릴 테니까 기대하고 계세요.
올해 안에 진짜 고생 끝 행복 시작할 예정이에요. 요즘은 서른에 취직이면 늦은 것도 아니래요. '

불합격-.
우히히. 망할. 쓰으-발,
다섯 문제. 실수 하나..
개 같이 어렵게 나온 선택형 박스 문제에서 둘.
완전히 모르는 것 하나….
찍어서 틀린 거 하나.
그렇게 다섯 문제.
그 결과로 내게 주어진 건 탈락.
몇 번이고 경험해 본 그 이름은 탈락.
내 인생은 탈락 인생.
내 이름은 탈락자.
다른 말로 실패자.

칠전팔기, 딱 일곱 번째니까 여덟 번 일어서서 덤비라고?
여덟 번째에는 구제해주는 제도라도 있나?
망할 오촌처럼 군대도 안 다녀온 샛노란 병아리들 데려다가 투명인간 만들어놓는 '고졸 구제 제도'는 좋다 이거야,
나같이 병 얻어가며 사람들 잃어가며 일곱 번째 무너져내린 놈 구제하는 제도는 왜 없어.
내가 부족해서야?
내가 공부를 안 해서 그래?
필기 합격 후 면접에서 탈락도 해봤고,
큰 맘 먹고 전향한 7급 공채에선 몇 문제 차이로 미끄러지길 반복했지.
모의고사 풀어보면 내가 안 될 이유가 없는데.
나한테 물어보던 놈들은 실전에서 아는 문제만 만나셨는지 족족 붙어 학원을 빠져나가고,
나는 끝내 돈 때문에 집에 눈치가 보여 붙지도 않은 놈이 학원을 빠져나왔어.
강의 안 들어도 되느냐고?
매년 그 말이 그 말인데, 더 들어서 뭐해.
내 머릿속에서 강사가 중얼거려,
그 지겨운 면상이 가진 버릇마저 튀어나온다고.
안 들어도 들려, 안 봐도 보여, 그래서 나왔어.
내가 정신 똑바로 차리면 된다고 마음먹고 학원 그만뒀어.
인강도 필요없어 이제.
읽고,
샤프로 줄 치며 읽고,
모나미 볼펜으로 중요한 곳에 줄 치며 읽고,
형광펜으로 핵심에 표시해가며 읽고,
그러고도 모자라서 자주 틀린 대목엔 빨간 펜으로 동그랗게 강조해가며 읽어온 기본서들이 십 수권째.
대체 왜 떨어지는 거야. 왜!
떨어지려면 포기하기 좋게 과락이라도 뜨던지, 왜 희망을 줬다가 뺏어가는 거야.

죽고 싶다, 진짜….
필기합격했던, 면접까지 갔던 기억들이 더는 내 자존감을 받쳐주질 못해.
안 붙으면 그냥 공시충이야! 충! 벌레! 벌레-!
구더기 같은 거 있지, 득실득실 거리고,
막 뭐 쪽쪽 빨아먹는 재주만 있고,
사회에 내놓는 거라곤 똥오줌밖에 없는 그런 존재라고!
아니야? 아프니까 청춘이신가?
오오, 고시원에 틀어박혀서, 이 사각 철창 안에서 햄스터처럼 웅크린 채 옆방에 들릴까
기침 한 번 맘대로 못 하면서 책과 연필을 들고 온종일 입으로 주문처럼 암기 공식을 외며 공부하는 이게 청춘이야?
내 청춘 별거 없네, 아프기만 하고.
좋아, 아파서 청춘.
그럼 청춘이 끝나면 안 아프냐?
아프다 아프다 보면 일찍 죽는 거밖에 더 돼?
짜증나.. 왜 불합격인데?
엄마한테 해놓은 이야기가 뭐가 되겠냐….
좀 도와줘. 나도 자랑 한 번만 해보자, 응?
누가 대통령이 하고 싶댔냐?
그냥 남들처럼 인재개발원에 들어가서 교육받는 모습도 좀 올리고,
무슨 과의 누구누구 주무관 업무는 무엇무엇이라고 인터넷에 검색만 하면 알 수 있고,
감사관이 무섭든 민원인이 무섭든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받다가도 올라가는 근무 연수를 보며
그래도 공부하던 시절보단 이게 좋은 거라고 스스로 끄덕여보고 싶다고.

그냥 공무원.
서민 공무원,
말단 공무원,
길바닥에 치이고 치이는 그 공무원!
대한민국에 공무원이 백만 명이래, 공무원 준비생도 그 정도 되려나?
흐흐. 난 왜 안 받아주냐..
나 진짜 하고 싶은데, 진짜 잘할 자신 있는데,
시켜만 주면 평생 봉사할 자세가 되어있는데ㅡ.
왜, 불합격이야?
아. 전화 왔네.
누구야, 짜증나 뒤지기 일보 직전인데.
엄마.
엄마네.
하..

' 여보세요? '

' 성제가? 밥 뭇나? '

' 어. '

' 목소리가 왜 그렇노? 기침했나? '

' 아니. 자다가 일어나서 목이 좀 잠겼나 봐. '

' 방이 추워서 그런 거 아니가? 전기장판 틀고 잤나? '

' 따뜻하게 잤다니깐. '

' 우짜든가 감기 조심하고. 오늘 발표였다매? 결과 나왔나? '

' … '

' 여보세요? '

' … 응? '

' 잘 안 들리나? 이상하네. 오늘 시험 결과 나왔나? '

' … 어어, 응. '

' 확인해봤고? '

' 그렇지 뭐. '

' 떨어졌나? 에구… '

' 아냐. 떨어지긴. '

' 그라믄? '

' 붙었어. '

' 어? '

' 붙었다니까. 칠급은 떨어졌다고 말했었고, 오늘 발표 구급이었잖아. 그거 붙었다고. '

' 어? 붙었다고? 근데 목소리가 왜 그렇노- '

' 아이, 쪽팔리잖아. 시험 몇 년 준비했는데 구급 겨우 붙은 거 가지고. '

' 아이고, 우짜긋노, 여보! 성제 붙었답니더! 전화, 전화 좀 받아보이소, 성제 합격했답니더! '

……

' 아- 여보세요, 성제가? '

' 예, 아버지. '

' 붙었다고? '

' 예. 9급인데…. 붙었어요. '

' 이야, 축하한다! 니도 그동안 고생 많았제? 우리도 네 걱정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

' 아하하… 뭘요, 다 어머니 아버지가 뒷바라지해주셔서 부족한 거 없이 공부만 했는데 일찍 못 붙어서 죄송하죠. '

' 아이다! 그런 소리 마라, 우리는 니가 언젠가 되도 될 놈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뒷바라지를 해준기다.
내가 말 안 하드나, 니는 될 놈이다, 언젠가 되니까 딴 생각 말고 열심히 공부만 하라고 안 하드나.
봐라! 철썩 붙은 거! 하하하. 아이고, 내 정신 좀 봐라. 면접, 면접은 언제고? 저번에 보니까 면접에서도 떨어지는 걸 보면
아직 안심 못 하는 거 아이가. 면접학원을 댕기야 안 되긋나, 양복은 한 벌 있나? '

' 아, 양복 있어요. 괜찮은 거로 하나 있고 이번에 붙은 건 1명 선발에 1명 필기 합격했거든요? 특별히 결격사유 없으면
무조건 합격이니까 그냥 출석체크만 한다고 생각해도 되니까 돈 보내실 필요 없어요. 그냥 면접 질문은 인터넷에 찾아보면
많이 나와요. 알아서 할게요. 면접 열흘 뒤에 최종 발표인데, 이번에 필기 합격 명단을 보니까 그냥 선발 인원대로
뽑은 게 이대로 쭉 갈 것 같아요. '

' 아이다, 돈 오십만 원 계좌로 넣을 테니까 면접학원 하나 끊고, 그간 마음고생 했으니 학원 마치면 친구들 만나서
술도 한 잔씩하고 그래라. 끝까지 최선을 다할 줄 알아야 지난 세월을 보내주는 예의인기라. '

' 안 보내셔도 된다니까…. '

' 니가 붙었다카는데 우째 가만히 있긋노, 아이고, 고생했다. 고생했어. 진짜로 수고 많았다.
혼자 고시원에서 제대로 챙겨 먹지도 못 하고 밤까지 공부한다고… 니도 공부하면서 서러웠제?
그래도 사람의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인 모양이다, 앞으로 청렴하고 유능한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꾸준히 노력해라. 알겠제.'

' 예, 아버지. 그래야죠. '

' 그래, 돈 바로 넣어줄 테니까 면접학원부터 알아봐라! '

' 예…. '

' 시골에 돼지 한 마리 잡아가 잔치해야 안 되겠나? '

' 에이, 무슨 돼지를 잡아요. 그냥 가족끼리 식사 한번 하고 말지. 누가 보면 행정고시 붙은 줄 알겠어요. '

' 뭐라카노, 돼지 잡아야지! 경사는 베풀면서 알려야 좋은기다. '

' 아이, 참… 그럼 면접 끝나고 합격하고 나서 잡든가 가족끼리 식사하든가 하구요. '

' 그래야지. 성제야, 수고했다. 참말로 니가 자랑스럽다. '

' 이제 일 시작하는 건데요 뭘, 아버지. 이만 끊을게요. '

' 오냐. 면접학원 내일 바로 알아보고. 알긋제. '

' 네. 그럴게요. '

……

내가 방금 뭐라고 떠든 거야. 무슨 거짓말을 한 거야,
왜 그랬어, 미쳤어?
마지막 믿는 구석이던 9급마저 떨어져 놓고 뭐?
9급 붙은 게 아쉬워서 그랬어요?
아니야, 9급이라도 붙었으면 진작에 우와 소리 지르고 삼촌부터 이모한테까지 전화 돌렸겠지.
또 떨어졌다고, 일곱 번 째 떨어졌다고, 그 말 하기가 무서워서ㅡ
하지 말아야 할 거짓말까지 해버렸어. 뻔뻔하게,
발표가 안 났다고 하면 될 것이지, 붙었다고…
한술 더 떠서 아쉽다고…
미친 새끼….


하루가 지나고, 이틀, 삼일, 거짓말은 풍선처럼 부풀어가.
가짜로 붙은 공무원 시험 덕분에 가짜로 등록한 면접학원,
가짜로 만난 면접 선생과 스터디 조원들까지 생겼네.
부모님 밝은 목소리를 들으면 이제 와서 사실 거짓말이었다고 말하지도 못하겠고,
이미 친척들은 전화며 문자로 축하한다고 알려오고,
쪽팔린 건 구급이 아니라 팔년차 장수생이 될 예정인 내 신분이라 친구들에게 털어놓지도 못하겠고,
그럴 친구도 없고.
오십만 원에 잔액 얼마가 더 해졌을 돈은 그대로 박혀있는데,
인터넷으로 알아본 면접학원 금액을 대충 둘러대고 이십만 원 남았다고 얘기했지.
차라리 떨어졌다고 얘기하고 받은 생활비였으면 치킨에 맥주라도 원 없이 마셔버리고
하루 펑펑 울고 한 번만, 딱 한 번만 더 일어서보는 건데….
이제 어떡하지, 열흘 조금 뒤면 들통 날 이 거짓말들 다 어떡하지.
면접 불합격? 그, 그렇구나.
맞다! 맞아! 면접 불합격이 있잖아, 아버지, 저 면접에서 탈락했어요.
면접 불합격도 있느냐고 하시겠지, 저번에도 면접에서 탈락했으니 뭐 별다를 일은 없잖아.
아. 정원에 맞게 뽑았다고 했지.
에이씨, 거짓말 잘못했네…
그 순간을 모면하려고 되는대로 떠드는 게 아니었는데.
그냥 두 사람 뽑았다고 하고 그것 때문에 우울하다고 할걸.
이제 와서 돌이킬 수도 없는데 어떻게 둘러대야 면접에서 탈락하지?
배가 아파서, 맞아. 배가 너무 아파서- 그 날 면접에 못 갔다고.
전화해서 순서를 뒤로 돌릴 수도 있잖아, 그건.
그럼 진짜 뭐 상한 걸 먹어볼까, 확 식중독이나 장염에 걸리면…
교통사고? 차도에 적당한 속도로 오는 차를 봐서 급해서 못 본 척 뛰어드는 거지,
그리고 죄송하다고 제 잘못이라고 하고 대신 전치 몇 주쯤 되는 진단서 한 장만 받으면?
면접에 참여 못 하고 침대에 누운 비운의 합격생이 될 수 있겠지?

…그만하자. 쓰레기 같은 놈아.
잉여인간이야, 너. 아니, 나 말이야.


내가 지금 뭘 검색하고 있는 거야,
하던 대로 수험서나 몇 권 더 구매하려고 들어온 건데.
자살, 별로 고려해보진 않은 결말인데.
이거 참.
혹시나 싶어서 자살이라고 검색만 해도 별의별 따뜻한 말이 다 나오네.
당신은 소중해요, 당신은 멋져요, 삶은 한 번이에요, 살아있다는 건 축복,
지-랄, 지이-랄들 하세요-오.
나 안 멋져.
한 번뿐인 삶에 그저 살아있는 거야.
혹시나 올해는?
그 안일한 마음, 이기적인 마음이 지탱해온 썩은 뿌리란 말이야.
도려내야 할 인생을 들키기 싫어서 거짓말을 하던 내가 무서운 게 뭔지 알아?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는 주제에 얼마나 몰입했던지 혀를 놀리는 동안 진지하게 궁리하고 있었어.

출근은 언제부터일까,
첫 인사는 어떻게 할까,
무슨 일을 할까,
애인은 언제 생길까,
결혼은 해야 할까,
신혼집은 어디로 할까,
진급 욕심 좀 부려볼까,
붙은 자들만이나 할 수 있는 그런 궁리를 하고 있었단 거 아니냐.
심지어 기분도 조금 들떴어.
부모님이 잘했다, 수고 많았다, 이제 걱정 끝이다- 하고 바람 좀 넣어줬다고 어깨가 으쓱 올라가고,
얼른 벌어서 효도해야겠다, 이런 생각을 하는데, 그 순간에는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어.
뻔뻔하지.
완전히 미친 놈이지.
구라를 치면서 지도 구라인지 아닌지 헷갈렸나 봐.
자살, 이거 어쩌다 검색했지, 이럴 때가 아닌데.
나 이 정도로 우울하진 않아.
아하. 그런가.
어쩌면 이 말도 거짓말인가.
솔직해져. 제발.

매듭은 끝.
풀리지 않아야 하니까 당겨볼까.
팽팽하네. 좋아.
이걸 좋다고 해야 하나.
웃기네. 아니지. 이게 웃긴 일은 아니야.
의자에 바퀴가 달려서 불안한 걸, 조심.
목이 잘 안 걸려.
매듭을 너무 작게 했나 봐.
꼭 공시충 한 마리 보는 것 같네.
어떻게든 바늘구멍만 한 틈을 넘어보려고 안간힘을 쓰던 벌레 한 마리.
징징- 윙윙 날아갈 거다.
멀리멀리.

지금이라도,
거짓말했다고,
고백하면,
돌아갈 수 있을까,
그렇지만,
돌아가도,
여덟 번째,
자신 없어,
아홉 번째,
싫어,
가능성의 발견,
좋아,
가능성의 불확실성,
가증스러워,
난,
내가,
싫다,
더는,
살고 싶지도,
않다,
방황한다,
생각이,
살고 싶어한다,
심장이,
빨리,
의자를,
걷어차,
지금,
목이 걸려있는 때ㅡ.

케윽, 끄윽, 아그으윽… !
돼지 한 마리 없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야ㅡ,
그래도 난,
멋지게 한번 살아보고 싶었어,
그래서 꿀꿀 짖으며 똥밭을 굴러도 살아있었어,
살아보고 싶어서,
한 번만 더 거짓말해도 될까?
딱 한 번만 더,
사실은 살고 싶다-, 미치도록…


2
' 인마 이거 와 전화도 안 받고 그라노, 전화 한 통 하고 올라갈라 했더만. '

' 아이고, 학원에 있을 애한테 전화는 뭐한다고 겁니꺼. 고마 문자 한 통 넣어놓고 출발합시다. '

' 내 생각에 이번에 성제는 확실히 붙을기라. 지가 그카더라고. 한 명 뽑는데 지 혼자 붙었더라 안 하나. '

' 진짭니꺼? 아유, 잘 됐다…. 서른에는 되야 할긴데- 되야 할긴데, 얼마나 고민했는지 모릅니더. '

' 면접도 걱정할 건 아닌데 고마 학원 댕기라고 했다. 지도 예전 일이 있어가 내심 불안할기라.
그리고 요새 큰 사건 이후로 공무원들에 대한 요구 수준이 엄청나게 올라갔다고. 안일하게 있으면 될 것도 안 되는 기야.
고마 지도 학원 댕기면 시간도 잘 가고 마음도 편하지 않겠나? 맞제? '

' 맞습니더. 트렁크에 귤하고 반찬하고 챙겼지요? '

' 다 실어놨다. 출발하자. 참, 돼지 밥 줏나? 살 좀 찌라고 많이 먹여놔서 하루 이틀 굶긴다고 큰일은 없을긴데 그래도
잔치 며칠 안 남았는데 잡을 때까진 잘 먹여야 안 되긋나. 앞으로 성제 잘 봐달라고 하는 축제인데 돼지가 말라서야 되나. '

' 돼지 밥을 안 줏네, 내 정신머리야. 잠시만 기다리이소. 후딱 갖다올게요. '

' 같이 가자. 내가 사료 가져올게, 아마 새것 한 포 뜯어야 될기다. 이제 저 돼지 잡고 나면 돼지고 닭이고 키우지 말자.
정 붙일만하모 멱 따가 삶아 묵는데 묵고 나면 한동안 그 자슥 없던 자리가 얼마나 허전한지 모른다.'

' 당신도 그렇습니꺼, 내도 개, 돼지 그기 뭐라고 정이 들어가 처음 없어진 날에는 마음 한구석이 막, 뭐라카노,
당신 말마따나 허전하다 캐야 되나, 그래예. '

' 아이고, 돼지가 밥 안 줏다고 꿀꿀 울어샀는다. 저 봐라. 사료 가올꾸마! '

' 오늘따라 유난히 꿀꿀거리노. 아이고, 야가 와 이라노. 성제 아버지예! 일로 함 와보이소! '

' 와? 뭔데? '

' 돼지가 눈물을 뚝뚝 흘려예. 사람 맹키로. '

' 그게 무슨 대수라고 껌뻑 놀라노. 가만 있으봐라, 사료 들고간다. '

' 사료 좀 있다주고 저거 보이소. 돼지가 펑펑 운다니까예. '

' … 왜 저카지? 진짜로 사람 울 듯이 울어샀네. 눈물 자국이 말라붙어가 엉망이네. '

' 아이고, 그렇구나, 저기 잔치라고 지 잡힐 줄 알고 미리 예감을 했는갑다. 그렇지예. '

' 소도 도살장 갈 때 눈물을 줄줄 흘린다카더만, 돼지 이것도 짐승이라지만 지 운명이 처량한 모양이다.
아가, 미안하다- 니가 무슨 죄가 있긋노, 니는 죄 없다, 착하제- 세상이 나빠가 그런기다, 울지 마라.
사는 동안에 먹고 싶었던 사료 맘껏 묵그라, 다음 생에는 훌륭한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름도 떨치고 해라,
우리 아들 잘 좀 봐주고- 부탁한다, 돼지야. 자자, 이거 묵으라. '

' 한 포 다 줍니꺼? '

' 주야지. 오늘 가서 언제 올지 알고. 날도 추워서 썩지도 않는데 고마 부어놓고 댕기와야지. '

' 맘대로 하이소 그럼. '

' 아이고, 걸신 들린 듯이 쭐쭐 잘 쭈묵네. 눈물 흘리는 거 보니 마음이 아프다.
좋은 일로 잡는 긴데 와 이래 불쌍노. 마음 약해지그로. '

' 갑시다. 돼지 우는 거 더 봐서 뭐하겠습니꺼. 성제한테 가입시더. 더 본다고 살려줄 것도 아닌데. '

' 가자. 가자. 차 타라. '

' 안전띠 매고. 출발할끼다. '

' 밟으소. 가입시더. '

' … '

' … '

' 아무래도 돼지 우는기 신경이 쓰이네, 우째 그리 서럽게 사람처럼 우노. '

' 아- 그만 하이소. 돼지 잡자는 말을 말든지. 새끼도 못 치는 돼지 놀리가 뭐합니꺼, 고마 잊어삐소. '

' 돼지가 돈벌이 안 해준다고 돼지가 아닌 건 아이다이가. '

' 그럼 돼지를 모시고 살던지. 동물보호단체 회장이라도 되는 줄 알겠네. '

' 좋은 일로 잡는건데ㅡ, 마음이 불편하다- 그 말이지~ '

' 알아들었어예. 지 눈 좀 붙입니다. 새벽부터 반찬 한다고 피곤해죽겠심더. '

' 잘끼가? 알았다. '

………
……


ㅡ 돼지 잡던 날, (2014) 환상괴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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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eForelle
참 재밌니더. 자주 올려주이소.
3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9-10-18 17:35:52
상대방에 대한 배려는 네티켓의 기본입니다.게시물에 상관없는 댓글이나 추천유도성 댓글을 달지 마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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