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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단편] 살인마 활용법 [8]
작성자 rkgnl99
번호 78430 출처 창작자료 추천 35 반대 0 조회수 2,948
작성시간 2019-05-15 15: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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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마 활용법

부제: 누구나 쓰임은 있다.

[저는 지금 여섯 번째 사체가 발견된 현장에 나와 있습니다. 갈대숲을 붉게 물들인 혈흔이 그 날의 잔혹했던 참상을 말해주는 듯합니다.]

[범행은 대부분 인적이 드문 교외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열여섯 소녀부터 일흔 살 노인까지, 피해자는 모두 힘없는 여성이었습니다.]

[시체에 칼집을 내 특수한 형태의 문양을 새긴다. 상대적으로 제압하기 쉬운 여성들만을 표적으로 삼았다. 저는 이 부분에서 범인이 쾌락추구형 연쇄살인마의 전형성을 드러냈다고 봅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이런 부류는 대체로 자신의 행위를 과시하려는 욕구와 비뚤어진 우월감으로 가득 차 있죠. 행위가 거듭 될수록 수법이 교묘해지고 폭력의 강도 역시 강해질 겁니다. 그리고 절대... 스스로 멈추지 않습니다.]

[일주일 간격으로 벌어지던 연쇄 살인이 멈춘 지 벌써 열흘, 살인마의 범죄행각이 멈추자 시민들은 일단 안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경찰은 혹여 드러나지 않은 추가 피해가 있을지도 모른다 판단하고 수사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 * * *

“넌 살인자다.”

무언가 들렸는데 정신이 몽롱해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머리는 망치로 두들기는 것처럼 아프고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살아있기는 한 건가? 어떻게든 정신 줄을 붙잡고 일어나려 했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때 깨달았다. 묶여 있구나, 내가 앉아 있는 것은 차가운 철제 의자고 굵은 밧줄이 나를 옭아매고 있다. 당혹스러운 마음에 급히 주변을 돌아봤다. 어둡다.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다. 지하실일까? 아니면 창문 하나 없는 어떤 창고? 불안하고 두려웠다. 그때 돌연 내 앞의 어둠이 출렁이며 무언가가 움직였다. 그리고 그게 말했다.

“이 살인자! 악마 같은 새끼!”

남자였다. 굵고 격정적이며 적개심 가득한 음성이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목소리는 들리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서였다. 약간의 기대감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누구든 붙잡아 놓고 자초지정이라도 들어야겠단 생각이었다. ‘저벅 저벅’ 다행히 그가 어둠을 뚫고 다가왔다. 처음엔 온통 흐릿하기만 했는데 어둠에 익숙해진 눈이 금세 사람의 윤곽을 분간해 냈다. 헌데 어딘가 꺼림칙하다. 검은 모자와 검은 옷 그리고 검정색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사내다. ‘이렇게 어두운데 뭣 하러?’ 애먼 참견이 하고플 만큼 공들여 자신을 지우고 숨긴 모양새였다. 하지만 괴상한 차림새 따위는 곧 기억에서 사라졌다. 그가 쏘아붙인 신랄한 악담 탓이었다.

“천하의 못 된 놈! 쓰레기! 인간 말종! 생긴 건 멀쩡해가지고... 왜 죽였어! 앙?”

당황스러웠다. 다짜고짜 욕지거리를 내뱉는 것도 그렇지만 느닷없이 뺨을 얻어맞았기 때문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난 놀란 토끼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벌레, 눈을 마주친 순간 느꼈다. 강한 적개심과 혐오감이 그의 눈빛에서 넘실댄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도 숨겨지지 않는 분노와 떨림이 전해진다. 무언가 항변하고 싶었는데 때마침 그의 손이 내 턱을 움켜쥔다.

“말해! 어서!”

‘이런 개념 없는 인간이 있나‘란 생각을 했다. 말하라며 턱을 움켜쥐는 어처구니 없는 행태도 그렇지만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그의 질문엔 육하원칙이 완벽히 결여되어 있어 어떤 답도 내어 줄 수 없었다. ‘당신 지금 무슨 소릴 하냐?’ ‘여긴 어디고 당신은 또 누구냐’ 응당 일련의 물음들이 선행되어야 옳다. 하지만 내 의문들은 번번이 그의 손에 가로 막히고 말았다.

“하나도 아니고... 죄 없는 사람을 여섯이나 죽여? 이 나쁜 놈! 천하의 몹쓸 놈! 네가 사람 새끼야?”

“아아악”

그가 우악스런 손길로 내 머리칼을 쥐고 흔들었다. 음성은 점차로 격앙되고 호흡도 거칠어져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그를 응시했다. 머리가 아닌 본능의 경고 탓이었다.

‘이 인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은데?’

느닷없이 뺨을 때리질 않나, 머리채를 휘어잡질 않나. 심지어 정신병자마냥 이상한 소리까지 지껄인다. 게다가 그는 나와 달리 손과 발이 자유롭다. 이유야 어쨌든, 묶인 놈이 안 묶인 놈 성질 건드려봐야 좋을 것 없다는 생각이었다.

“왜 답답해? 미치겠지?”

그의 말 대로였다. 여기가 어딘지, 왜 여기에 있는지, 이유도 사정도 모른다. 주위는 온통 시커먼 어둠뿐이고 도움을 줄 사람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나는 묶여있기까지 하다. 흡사 죄수처럼 말이다. 확인할 수는 없지만 몸 상태 역시 좋아 보이지 않았다. 팔 다리는 물론 허리와 목까지 전신이 다 욱신거렸다. 하지만 제일 걱정되는 부위는 머리였다. 뭘 어떻게 한 건지 연신 찌릿한 통증이 머리통을 파고들어 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무언가 뜨끈한 액체가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다. 피 일까?

그런 생각으로 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자니 놈이 거듭 소리친다. 그것도 기차 화통이라도 삶아 먹은 양 여간 목청이 좋은 게 아니다. 귀가 다 멍멍할 정도였다.

“네 놈은 사람 새끼가 아니야! 악마지!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어린 애들이었잖아. 살날도 얼마 안 남은 노인네도 있었어! 그 불쌍한 사람들을 왜! 왜 죽였어! 응? 이 나쁜 새끼야!”

그는 줄기차게 소리쳤다. 그것도 까닭 모를 소리만 골라 했다. 흡사 웅변하듯 소리치는 모습을 보며 나는 틀림없이 그가 미쳤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무언가 크나큰 착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그를 모르는데, 그는 흡사 나를 잘 아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리곤 마치 내가 큰 죄라도 저지른 양 끊임없이 획책했다.

나로선 본 바도, 들은 바도 전혀 없는 그런 일들을 말이다.

전혀 기억나지 않는...

아니, 그러고 보니 갑자기 모호하다.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는 내 얼굴조차도...

“씨팔!”

갑자기 호흡이 거칠어졌다. 당혹감 탓이었다. 빽빽하게 적힌 답안지인줄 알고 집어 들었는데 점 하나 찍혀 있지 않은 새하얀 백지를 본 기분이다. 놀라울정도로 모든 기억이 공허했다. 손을 움찔댔다. 얼굴을 만져보고 싶었다. 하지만 빡빡하게 묶인 밧줄 탓에 움직이기는커녕 피도 잘 통하지 않아 찌릿한 감각만이 전해진다. 그제야 지끈대는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 하나가 파고들었다.

‘설마 나 진짜 살인자야?’

‘그것도 여섯이나 죽인?’

그 이유라면 단박에 미스터리가 풀린다. 내가 붙잡힌 이유도, 모진 수모를 당하는 것도, 하지만 의문은 남았다.

‘근데 왜? 내가 왜 그런 짓을?’

도움이 필요했다. 지금 이 상황을 속 시원하게 풀어 줄 누군가가 필요 했다. 그럼에도 나는 쉽게 입을 열지 못 했다. 그 적임자가 코앞에 서 있었음에도 말이다. ‘설명은커녕 쓸 데 없는 소릴 지껄였다고 또 뺨이 얻어맞는 거 아냐?’ 불길한 생각만 들었다. 그래서 일단 그를 달래기로 마음먹었다. 흥분한 그를 진정시키면 뭐든 앞뒤 전후 사정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 탓이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선생님 일단 노여움을 좀 푸시고요. 헤헤헤 일단 자초지정을 먼저...”

“죄송? 노여움을 풀어? 이제 와서? 늦었어 이 못 된 놈아! 넌 천벌을 받아야 해!”

역시나 그에게선 노골적인 적개심만이 느껴졌다. 하지만 왤까? 새삼 그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그는 대체 왜, 무슨 이유로 내게 이런 짓을 하는 걸까? 그때 지극히 평범한 모범 답안 하나가 머리를 스쳤다.

‘혹시 경찰?’

그럴 듯하지만 요상한 위화감이 사라지지 않는다. 복장도 말투도 이상하지만 장소와 취조방법도 흔히 알고 있는 경찰의 그것과는 사뭇 동떨어져 있다. 그래 맞다. 수갑대신 밧줄로 죄인을 묶는 경찰은 이 세상 천지에 없다. 만약 그가 경찰이라면 멀쩡한 취조실을 놔두고 왜 나를 전등 하나 없는 이 어두컴컴한 곳에 가둔단 말인가.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그렇담 뭐지?’ 계속된 고민에 머리가 지끈거리던 찰나, 갑자기 섬뜩한 가설 하나가 내 심장을 두드렸다.

‘피해자 가족?’

하마터면 ‘악’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고 등줄기가 서늘하다. 만약 내가 진짜 살인자고, 그의 아들 혹은 딸을 죽였다면, 그래서 그가 날 잡아둔 목적이 처절한 복수라면, 결말은 불을 보듯 뻔하다. 아마 난 살려달라는 말 대신, 고통 없이 죽여 달라며 사정을 해야 하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상상들이 연이어 머릿속을 붉게 물들였다. 섬뜩함에 무어라 말도 못 하고 조용히 눈치만 살피고 있자니, 이게 웬일인가? 돌연 그가 바닥에 주저앉아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하... 하진아... 크흐흐흑... 우... 우리 하진이... 아... 아빠가.. 아빠가... 미안해... 지켜주지도 못 하고... 널 이렇게 먼저 보내서... 아빠가... 아빠가 미안해!”

‘젠장’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점쟁이도 아닌데, 하필 제일 불길한 예감이 적중하다니, 그의 울음이 마치 장송곡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억울했다.

‘빌어먹을 기억도 안 나는데... 어휴...’

지금의 나는 과거의 일이 떠오르지 않는다. 기억나지 않으니 당연히 죄책감도 없다. 흡사 남의 죄를 대신 뒤집어 쓴 것 마냥 억울하기만 할 따름이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헌데 그 순간 그가 말했다.

“죽여줘...”

“네?”

또 다시 물 없이 고구마를 삼킨 듯 답답한 상황이 찾아왔다. 처음부터 그랬지만 지금도 역시 이해불가다. ‘죽여줘?’ 처음엔 내 귀를 의심했다. ‘죽어줘’란 말을 잘 못 들은 건가? 아니면 이 양반이 정신 줄을 놓고 헛소리를 하는 건가? 답답함에 이맛살을 찌추리고 있자니 그가 돌연 사진 한잔을 꺼내 보였다.

“이게... 누... 누구?”

생면부지의 사내였다. 넙대대한 얼굴에 작은 눈, 미소를 짓고 있지만 왠지 비열해 보이고 표정에선 알 수 없는 거만함이 느껴졌다. 확실히 처음 보는 얼굴임엔 틀림 없었다. 문제는 그가 내 팔을 붙들고 사정하듯 뭔가를 떠들어대기 시작했는데, 그 말을 통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 자식이야! 넌 할 수 있잖아. 죽여줘, 네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하게, 가장 고통스럽게... 이 개 자식이 처절하게 울며 제발 죽여 달라고 빌고 또 빌 게 만들어줘! 그리곤 죽여 버려! 너한텐 쉬운 일이잖아 안 그래?”

어안이 벙벙했다. ‘지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았지만 역시나 답이 나오질 않는다. 그럴 만도 했다. 아니 처음부터 그랬다.

‘내가 살인자고 여섯이나 죽인 악마야. 이 남자 딸도 죽였어. 그런데 생판 본적 없는 놈 사진을 내밀면서 얘도 죽여 달래. 그것도 고통스럽게...’

이쯤 되자 슬슬 회의감이 들었다. 이 사람 얘기를 계속 들어줘야 하나? 이 사람 진짜 미친 건 아닐까? 왜 아니겠는가? 상황이란 본디 A가 있어야 B가 있고 C가 있어야 D가 따라온다. 헌데 이 사람 말은 A도 B도 없이 C만 덩그라니 내놓은 후 자질구레한 설명 없이 곧장 X와 Z가 나온다.

결국 나는 결단을 내리고야 말았다.

“저기요...”

“해... 해줄 거야?”

사내의 표정에서 화색이 돌았다. 마스크로 가려도 보일만큼 활짝 웃는다. 조금 전까지 흥분해 나를 윽박지르던 그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를 더 실망시키고 싶었다.

“저기, 말씀 중에 죄송하지만...”

“아... 안 돼! 해야 돼! 넌 해야 돼! 아... 안 하면, 나 다 불어버릴 거야. 널 경찰서에 던져 넣을 거야! 내가 다 가지고 있어 증거! 그래!”

“아! 아니요... 선생님, 저, 제 말씀은 그... 그게 아니라...”

사내의 눈빛에 의아함이 번졌다. 그래, 조금 전 내 표정도 이랬겠지? 미약하지만 뭔가를 되갚아주고 있다는 생각에 묘한 쾌감이 밀려왔다. 하지만 어쩔까? 지금 이 순간, 나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진실하다.

“안 나요...”

“뭐가?”

“안 난다구요. 그러니까 기억이, 이게 싹 다... 통째로, 전부, 아주 완벽하게... 하나도 기억이 안 나요.”

내 말을 들은 사내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후우우우...’하고 길게 한숨을 토해 냈다. 슬픔, 절망, 아쉬움, 고통, 그중 무엇인진 모르겠지만 복잡한 감정들이 느껴진 건 확실했다. 물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다. 하늘에 맹세코 정말 기억이 안 나는데 나보고 어쩌란 말인가? 나는 빳빳이 고개를 세웠다. ‘당당하다.’ ‘하늘에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진실이다.’ 딴엔 그런 뜻이었다.

사내도 어쩔 수 없다 생각했던지, 씁쓸한 표정으로 물러섰다. 어깨가 축 늘어진 걸로 보아 상심이 큰 모양이었다. 마음 같아선 위로라도 건네고 싶었지만 내가 그럴 상황도 아니고, 그런다고 그의 기분이 별반 나아질 것 같지 않았다. 해서 애써 모른 척 시선을 피하고 있자니 그가 저만치로 걸어가 무언가를 주워 든다. 그리곤 성큼 성큼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

‘그그극’ ‘그그극’ 보이진 않지만 무언가가 바닥에 끌린다. 그가 중얼거렸다.

“이 뻔뻔한 새끼! 구제불능! 쓰레기 같은 놈...”

생각했다. ‘뭐지?’ ‘지금 설마 나한테 하는 소리?‘ 사실 그즈음의 나는 살짝 빈정이 상해 있던 터였다. 모든 것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설령 마음에 들지 않다 한들 그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문제일 뿐, 내가 어찌 해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사실 기억을 잃은 것도 따지고 보면 그의 책임일지 모른다. 대체 무슨 짓을 했길래, 멀쩡한 사람이 기억을 잃었단 말인가? 그래놓고 뭐? 뻔뻔해? 구제불능? 쓰레기? 나도 모르게 분노가 치밀었다. 내게 일어나고 있는 비인간적 처사에 대해 확실히 따져 물을 필요가 있었다. 그건 진실의 편에 선 자만이 할 수 있는 신성한 의무라고 생각했다.

헌데 그가 보이지 않았다.

‘툭’

그의 모습대신 차갑고 단단한 것이 어깨에 와 닿는다. 고개를 돌리니 은색의 기다란 몸체가 시야를 가린다. ‘이건 설마?’ 나도 모르게 ‘꿀꺽’ 마른 침을 삼켰다. 내 눈이 맞다면, 알루미늄 야구 배트가 틀림없었다. ‘아니야. 아니야!’ 도리질을 쳤다. 알지만 믿을 수 없고, 보았지만 부정하고 싶었다. 그 순간 그가 ‘툇!’하고 손바닥에 침을 뱉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다. 흡사 야구선수마냥 방망이를 머리끝까지 치켜든다. 그리곤 말했다.

“너 좀 맞자!”

“아악! 아아악!”

내가 미쳤지. 애초에 말이 통할 인간이 아니었다. 대등한 관계에서라면 모를까. 묶인 자와 묶이지 않은 자, 아니 묶인 자와 단단한 알루미늄 야구 배트를 손에 든 자 사이에서 진실은 그닥 중요한 요소가 아니다. 이 현격한 관계의 불균형 앞에선 오직 힘만이 유일한 진실이 된다.

“하아아 하아 하아...”

“다시 묻는다. 뭐? 기억이 없어?”

“지... 진짜에요. 정말이에요. 한 번만 믿어주세요!”

“이 새끼가 끝까지!”

역시나 인간은 불완전하다. 눈앞의 진실에도 불구하고 오직 자신이 믿고 싶은 것만을 쫓는다.

“으악! 아아악!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자! 이래도 기억이 안 나? 어디 정말 그런지 한 번 볼까? 이 천하의 나쁜 놈! 대갈빡을 박살내 버려도 어디 그 말이 나오나 한 번 보자! 이 X새끼!”

“잘 못 했어요. 죄송합니다. 제발... 제발 살려주세요... 흐흐흑 그런데 지... 진짜에요. 정말 기억이 안 나는데 어떡해요. 아... 나 억울해 정말!”

“쇼 하지 마! 누가 네 놈 속셈 모를 줄 알고? 어물쩡 넘어가겠다 이거 아냐! 앙?”

“아닙니다. 정말이에요. 진짜 하나도 기억이 하나도 안 나요... 흐흐흑... 선생님은 영화도 안 보세요? 그 뭐야! 기억 상실! 그래! 사람이 대갈빡에, 아니 머리에 심한 충격을 받으면 기억을 잃기도 하고 그런다구요.”

“뭐? 기억 상실?”

“선생님이 더 잘 아실 거 아니에요. 뭘로 쳤는지, 어딜 어떻게 쳤는지, 얼마나 무지막지하게 두드려 팼는지! 봐! 지금 뜨끔하셨죠? 거 봐! 다 당신 때문이네! 당신이 이렇게 만들어 놓고 대체 나한테 왜 그러냐구요!”

“이 새끼가 끝까지!”

그가 소리치며 겁박하자 억울해진 나는 악에 바쳐 소리쳤다.

“정말이에요. 제가 이 마당에 왜 거짓말을 하겠어요. 여기가 경찰서도 아니고, 법정도 아니고, 애초에 기억이 난다. 안 난다. 그 말 하나로 은근 슬쩍 넘어갈 상황도 아니잖아요. 아아 아프다. 흐헝헝헝...”

“거짓말 마!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 니 놈이 그 애 목 조르는 거! 하얗게 질려서 파닥거리는 그 애 몸뚱이에 칼로 장난치는 것도!”

“누... 누가 안 했데요. 제 말은요. 그거 제가 했다 쳐요. 근데 그게 기억이 안 난다고요. 제 머리통 상태를 좀 보세요. 이... 이쪽에 눈 옆에 흐르는 거, 피 맞죠? 그쵸? 아까부터 계속 흐르더라구요. 지금도 머리가 죽도록 아파요. 이 상태로 기억이 멀쩡하면 그게 더 이상한 거 아닙니까?”

“웃기지 마! 그 많은 사람을 죽여 놓고 어떻게 기억이 안 날 수가 있어? 고작 머리 몇 대 맞은 게 뭔 대수라고?”

“아! 정말 이 양반이 평생 속고만 사셨나! 하늘에 맹세코 진짜라니까요! 처음 눈 떴을 때부터 그랬어요. 본인이 했으니까 더 잘 알 거 아녜요. 암튼 저는 그냥 정말로 기억이 안 나요. 내가 뭘 했는지. 왜 여기에 있는지, 아저씨가 누구고, 심지어 내 얼굴은 어떤지... 그냥 싹 다 기억이 안 나요. 지우개로 지운 것 같다고요.”

한 바탕 하소연을 끝내자 비로소 그가 주춤하며 두어 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아..’ ‘이런 망할...’ 같은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울음소리 같은 흐느낌도 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무언가 좋은 생각을 떠올린 듯 그가 배트 끝을 내 뺨에 가져다 대며 말했다.

“이거 보이지?”

“뭐하자는 거예요?”

비릿한 피 냄새가 알루미늄 배트 특유의 쇳내와 어우러져 콧속을 간지럽힌다. 한창 맞을 땐 몰랐는데 가까이서 보니 곳곳이 온통 새빨간 피다.

그래 분명 피 같은 내 피 일 것이다.

“이 방망이 보이냐고!”

“보여요! 보인다구요! 거 근데 고함 좀 안 지르면 안 돼요? 머리가 울려요. 머리가!”

“자 그럼 우리 이렇게 하자! 내가 이걸로 네 머리를 쳐서 기억이 사라렸잖아? 그치?”

“그... 그렇... 겠죠? 아마도?”

“그럼 말야... 네가 말한 그 영화에서처럼 내가 이걸로...”

그는 웃으며 흡사 야구선수라도 된 양 눈앞에서 배트를 ‘휭휭’ 돌려댔다. 어딘가 맛이 간 눈빛이었다. 차가운 풍압이 얼굴에 와 닿았지만 내 속에선 분노가 끓어올랐다.

“미... 미쳤어요?”

“아니야! 이게 그러더라고, 다시 충격을 주면 멀쩡하게 돌아올 거야.”

“이봐요! 이게 무슨... 영화도 아니고, 그게 가당키나 해요? 작살이 나지 않으면 다행이지?”

“그럼 어떡해. 이 방법밖에 없는데... 잘 들어! 여긴 아무도 몰라. 경찰도, 주변 사람들도, 심지어 우리 엄마도 몰라. 무슨 말인지 알겠어? 네깟 놈 하나 죽어도 아무 문제 안 된다고! 그리고 너... 너 나쁜 놈이잖아!”

“왜 그러세요. 지... 진정하시고. 우리... 마... 말로... 예?”

“그러니까! 빨리 말해! 기억난다고, 안 그럼 나도 어쩔 수가 없어. 이거 맞고 기억이 나든가. 그게 아니면... 너랑 나, 다 같이 끝장나는 수밖에 없다고!”

그가 흥분해 방망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손끝에 들린 방망이가 금방이라도 내 골통을 박살낼 것처럼 움찔거린다. 직감했다. ‘아 끝이구나!’ 아찔하니 소름이 돋았다. 아랫도리가 뜨끈해지며 축축해졌다. 두려우면서 한편으론 억울했다. ‘빌어먹을, 죽기 직전이 되면 이제껏 살아온 인생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고 하던데...’ 난 그런 것도 없었다. 하긴 그럴 만도 했다. 살아온 기억 중 남은 것이라곤 조금 전에 눈을 떠 보낸 십여 분에 불과하다. 그마져도 좋은 기억 하나 없이 의자에 묶여 맞고 욕먹고 요상한 헛소리에 사람 죽여 달라 협박당한 것뿐이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 못 됐을까?’

절체절명의 순간이 되자, 백짓장이 된 내 머리통이 돌연 요상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언제 보았는지도 기억나지 않는 다큐멘터리 속의 한 장면이었다.

‘풀숲을 지나던 뱀이 돌연 자세를 낮춥니다. 사냥감을 포착했군요. 오늘의 목표는 아직은 천적을 탐지하는 능력이 부족한 어린 새끼 들쥐입니다.’

해설자의 말대로 뱀 한 마리가 풀숲에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그리곤 새끼 쥐가 부주의하게 다가오자 날렵하게 몸을 던진다. 놀란 새끼 쥐가 펄쩍 뛰어올랐지만 노련한 사냥꾼의 이빨을 피하기엔 역부족이다. 새끼 쥐의 다리가 버둥댄다. 그래, 어린 너도 살고 싶었겠지. 하지만 오늘의 일용할 양식을 마련하려는 뱀의 의지를 거스르기엔 한참 모자랐다. 쥐가 버둥댈수록 뱀의 이빨은 더욱 단단하게 숨통을 조였다.

헌데 그 때였다. 어디선가 ‘쪼르륵’ 들쥐 한 마리가 달려왔다. 신기한 광경이었다. 뱀은 모두가 아는 쥐의 천적이 아닌가. 응당 도망쳐야 마땅할 상대를 눈앞에 두고도 놈은 겁 없이 돌진했다.

그러자 해설자가 말했다.

‘새끼가 붙잡히자 어미 쥐는 놀랍게도 도망치는 대신 뱀을 공격하는 쪽을 선택했습니다. 보십시오. 힘에서도 체격에서도 뱀은 비교 할 수 없을 만큼 강한 상대입니다. 하지만 조금도 물러서지 않습니다. 용감히 맞서 싸웁니다. 이쯤 되자 불안해진 쪽은 오히려 뱀입니다. 생태계는 잔혹합니다. 승자는 불을 보듯 뻔하지만, 만약 쥐에게 작은 상처라도 입는다면 뱀의 미래는 불투명해질 수도 있습니다. 그저 가벼운 한 끼 식사 때문에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당황한 뱀이 조금씩 물러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곤 제 목숨조차 돌보지 않는 어미 쥐의 극성스런 공격에 결국 줄행랑을 치고 맙니다. 물고 있던 먹이마저 내동댕이치고 말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실로 눈물겨운 장면이었다. 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말하지만, 이 싸움에 승자는 없었다. 뱀은 모처럼의 먹이를 잃었고, 새끼 쥐는 이미 죽어 뱀의 아가리에서 풀려난 순간에도 움직이지 않았다. 물론 그건 어미 쥐도 마찬가지였다. 상처가 깊었을까? 아니면 독이 퍼졌을까? 새끼의 주변을 맴돌던 어미 쥐는 결국 새끼 쥐 곁에 누웠다.

‘결국 이럴 거면서 대체 왜 그 지랄을 한 건데?’

물론 이 다큐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나도 안다. 그만큼 부모의 사랑이 깊고 무섭다는 얘기겠지. 그래 맞다. 하찮은 동물조차 이 정도인데 사람은 오죽할까?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뱀이라면, 그는 쥐다.’

‘그것도 꽁꽁 묶여 보잘 것 없는 쥐의 이빨에도 ’찍‘ 소리 한 번 못 하고 죽어야 하는 뱀!’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데, 그게 참... 말처럼 쉽지가 않다.

내가 그랬다.

까짓 거 뭐 어떤가?

죽어달라는 것도 아니고, 죽여 달라는 것뿐인데...

그깟 쥐 한 마리쯤, 꿀꺽 삼키고 돌아오면 되는 거 아닌가?

이렇게 죽으나 저렇게 죽으나 매한가지라면 말이다.

“자! 간다!”

“에... X발! 딱 걸렸네...”

“뭐?”

갑작스런 내 말에 그는 놀란 표정으로 물었고, 나는 나를 이 지경까지 몰고 온 이 상황이 우습고 어처구니가 없어 이를 다 드러내고 실실 쪼개며 대답했다.

“씨X, 이 노친네... 눈치 하나는 빨라가지고... 히히히! 첨에 내가 댁한테 대갈통을 딱 맞았을 때, 그때 말예요. 이런 생각이 들더라구요. ‘야! 이거 기억 안 난다하고 야부리 좀 털어서 어물쩡 넘어가 볼까?’ 했는데, 어우 못 당하겠네! 와! 보통 식견이 아니시네. 맞습니다. 저 살인자 맞구요. 걔네... 그래 그 여섯 명, 싸그리 다 제가 죽인 겁니다. 됐죠? 그리고 아까 걔... 사진, 그 새끼도 제가 죽여 드릴게요. 잔인하게... 뭐 말만 하세요. 뭐가 어렵겠어요. 어차피 이게 처음도 아니고, 자! 그럼 이제 얘기 다 된 건가요?”

“너! 그... 그거 진짜야?”

“아! 그럼요. 살인마가 살인해 드린다는데, 뭘 또 진짜냐고 물어요. 제가 벌써 여섯 죽였잖아요? 거기서 하나 더 는다고 뭐 달라지는 거 있어요? 없죠? 헤헤헤 그럼 얘기 끝난 거죠. 이게 또 제 자랑은 아니지만, 제가 살인마치곤 신용이 아주 끝내주는 놈입니다. 암요. 그럼요! 그러니까 선생님도 일단 그... 예, 그 방망이부터 내려놓고, 우리 솔직하게 탁 털어놓고 건설적인 대화를 한 번 나눠보자. 뭐 그겁니다. 하하하하!”

“고맙다!”

그때였다. 그가 돌연 나를 와락 끌어안더니 펑펑 울기 시작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성난 황소처럼 달려들던 인간이 한 순간에 울보가 되어버리다니, 갑자기 후회가 밀려들었다. ‘해준다.’ ‘다 죽여 버리겠다.’ 진즉에 그런 빈말이라도 할 걸, 하지만 아직 긴장의 끈을 놓기엔 일렀다. 여전히 난 묶여 있고, 내 생사는 그의 손아귀에 달려 있다.

“그나저나 어떻게 하면 될 까요?”

“뭘?”

“아까 걔요. 걔를 죽이려면 뭐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그가 돌연 물러섰다. 주저하는 눈빛으로 두리번대다 바닥에 놓은 방망이를 슬쩍 발로 밀어낸다.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었다.

“아니, 흉기 말고. 그 새끼 이름이 뭐고, 어디에 살며, 뭐하는 놈인지. 뭘 알아야 찾아가서 죽이든 살리든 할 거 아닙니까!”

“역시 전문가라 다르시네. 허허허...”

‘전문가?’ 이상하게 그 어감이 마음에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졸지에 살인마가 된 탓에 영 기분이 꺼림칙했는데, 같은 말이라도 ‘전문가’ 그러니까 ‘킬러’라고 바꿔 부르니 왠지 쌈빡한 이미지다. 그래서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이 판국에 어감이나 따지고 있다니, 어쩌면 난 정말 살인마였을지도...’

하지만 그 전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었다.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조건?”

“네, 조건... 왭니까?”

“왜라니, 뭘 말하는 겐가?”

“그 새끼요. 그 자식 왜 죽이냐구요.”

“그... 그건...”

그의 눈빛이 떨린다. 나는 한 눈에 그가 망설이고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더 강하게 밀어 붙였다.

“죽여준다고. 선생님 말씀대로 이 새끼 아주 피 칠갑을 해드린다고. 근데 그 전에, 왜 죽이는지. 어째서 죽여야 하는지. 나도 앞뒤 사정은 좀 알아야겠습니다. 말씀해보세요. 이 새끼가 대체 선생님한테 무슨 짓을 한 겁니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는 쓰러져 오열했다. 설움이 북받치는 양 어깨가 들썩이고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해 ‘쿵쿵’ 머리로 바닥을 내리친다. 그가 울음을 멈추고 입을 연 건 몇 분의 시간이 흐른 후였다.

“내겐 딸이 있다네.”

사정은 이랬다.

딸의 이름은 ‘장하진’ 상투적인 전개지만 딸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웠다. 그냥 아버지 입장에서 보기에 좀 예쁜 수준이 아니라 유수의 연예기획사에 캐스팅 될 만큼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단다. 그런 딸이 죽은 건, 불과 일 년 전의 일이었다.

“하진아! 안 돼! 안 돼!”

여기서 잠깐, 난 당연히 정황상 아까 그 허여멀건하게 생긴 놈이 그의 딸 장하진을 무참히 살해했다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자살입니다. 국과수에서 검사 해보나 마나에요.”

경찰 조사에서도 사인은 명확히 자살로 판명됐다. ‘장하진’은 이미 오래전부터 우울증을 앓아왔고 진단서와 약 그리고 결정적으로 유서가 함께 놓여 있었다.

‘저는 힘없는 신인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

그 유서는 심지어 내용조차 완벽했다. 물론 워드 프로세서로 작성한 출력물이 아닌 자필이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리고 ‘장하진’이 죽은 지 정확히 엿새 뒤, 그는 익명의 존재로부터 한 통의 전화와 함께 작은 소포를 건네받는다.

[착각하지 마, 다치는 건 결국 너야. 스타 만들어 달라며 먼저 찾아온 것도 너고, 가랑이 벌린 것도 다 네 의지로 한 거야. 그런데 이제 와서 뭐? 폭로? 웃기지 마! 내가 네 년 데리고 나간 자리가 어디 보통자리인 줄 알아? 국회의원, 재벌 총수 그리고 언론사 사주, 대한민국에 난다 긴다 하는 놈들은 다 모인 자리야. 너도 기억 할 텐데? 광고에 투자에 드라마 캐스팅에, 그 분들 입김이면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일이 없는 거, 그런데 뭐? 기자회견? 할 테면 해 봐! 개미새끼라도 한 마리 얼씬 거릴 것 같아? 그리고 말이야. 네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사람들은 네 얘기에 아무런 관심이 없어. 국회의원, 재벌 총수가 연루된 접대 자리? 웃기지마! 자고 일어나면 떠 있는 게 정치인들 스캔들이고 가십이야. 그런 건 적당한 기사 몇 개 터트려주면 자동으로 잊혀져. 무슨 말인지 알아? 그런 거 말이야. 핫한 신인 여성 연기자의 섹스 동영상 같은 거. 너 알지? 대중들, 겉으로는 깨끗한 척 고고한 척 오만 가식을 다 떨지만, 실제론 말 못할 관음증 환자들이지. 장담하는데, 이거 터트리면 넌 이상 대한민국에서 얼굴 들고 못 살아. 전 국민이 수근 댈 거야. 봐라! 저기 장하진이 지나간다. 그래 저 년! 성공에 눈멀어 제 몸뚱이 팔고 가랑이나 벌리던 국가대표 창녀! 장.하.진! 그러니까 좋은 말로 할 때 명부 가져와. 시간은 내일까지야.]

녹취 음성이 끝나자 통화는 곧장 종료되었지만, 곧바로 낯 뜨거운 영상 하나가 전달 됐다. 그는 비틀거렸고 박살난 휴대폰을 품어 안은 채 내리 사흘을 앓아누웠다. 나도 따라 죽을까 하는 생각마저 했단다. 그런 그를 일으킨 것이 바로 영상과 함께 전달된 익명의 소포였다. 그 안엔 이름만 대면 누구나 알 법한 유명인들의 이름과 함께 한 줄의 글귀가 적혀 있었다.

‘아직도 자살이라 생각하십니까?’

곧 그는 즉시 진실을 캐기 시작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딸의 죽음과 연관된 흑막의 대부분을 간파할 수 있었다. 모두 우편으로 받은 문건 덕분이었다. 그리곤 이 모든 비극의 핵심을 포착했다.

‘방준모’

하진이 소속되어 있던 엔터회사의 대표이자 정재계 인사들과의 술자리 및 성 접대를 주도한 인물이었다. 부모를 잘 만났던지 젊은 나이에 수많은 회사와 클럽 그리고 몇 개의 연예 메니지먼트 회사를 소유하고 있었다. 문득 장하진이 불쌍하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그 죽은 장하진과 방준모, 두 사람의 부모가 바뀌었다면? 장하진의 인생이 어찌 변했을지 장담 할 순 없지만 적어도 스폰을 받기 위해 억지로 그런 자리에 끌려 나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역시 대한민국은 부모를 잘 만나야 한다.

하지만 여기 이 부모도 보통내기는 아니다.

딸을 위해 안 가본 곳이 없고, 안 해본 일이 없단다. 방송국에도 찾아가고 유치장에 갇혔다는데, 이쯤 되면 눈물겨운 부성애가 아닐 수 없다. 나를 찾은 것만 해도 그렇다.

“죽여야겠다. 내가 죽더라도 그놈을 죽여야 한다! 그래야 억울하게 죽은 우리 하진이가 편히 눈을 감는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지...”

“아니 그럼 가서 죽이면 되지... 왜...”

“왜 자넬 찾아왔냐고?”

“아니 뭐... 꼭 그런 뜻은 아니고... 근데 대체 왜 날 찾은 겁니까?”

어쩌면 제일 궁금했던 부분이었다. 그냥 살인이 아닌 복수다. 그럼 응당 제 손으로 해야. 보람(?)도 있고, 의의(?)도 있고, 암튼 그게 제일 깔끔했을 텐데, 왜 남의 손을 빌려서 똥 싸고 밑 안 닦고 나온 양 찝찝한 상황을 만들었을까?

그러자 그가 말했다.

“딸이 있어.”

“아니 그건 알고...”

“죽은 하진이에겐 동생이 있네...”

“아하!”

그가 복수를 실행에 옮기지 못 한 건 열 살 터울의 둘째 하은이 때문이었다.

“올해 중학생이 됐어. 터울이 좀 지지, 얼마나 착하고 똑똑한지 몰라.”

“그렇군요.”

“그런데 자폐가 있다네.”

“자폐요?”

“그래서라네. 우리 하진이 죽게 만든 놈, 그 못된 놈 쳐 죽이고 나도 따라 죽어야 하는데, 그래서 우리 하진이 다시 만났을 때, 괜찮다. 다 끝났다. 이 못난 애비가 네 한(恨) 다 풀었다. 그렇게 말해줘야 하는데... 나까지 없어지면 우리 하은이, 그 착하고 순수한 아이는 어쩌나, 누가 그 애를 돌봐 줄까, 그런 생각에... 크흐흐흑, 이해하겠나? 이미 하진이를 잃었는데... 하은이마저 불행해지면... 안 돼! 그건 절대 안 돼! 하은아... 하은아... 흑흑”

사연을 이야기하며 그는 점차 격앙되기 시작하더니 끝내 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누구에게나 끓는점이란 게 있다. 그에겐 딸이 바로 그 끓는점이었다. 둘째의 이름을 연거푸 뱉으며 그의 두 눈은 가스레인지 위의 냄비처럼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걸 분노라고 해야 할지, 아님 공명심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알 수 없는 감정이 자글자글 얼굴을 덥히고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그래서 자넬 찾았지.”

어처구니없는 발상이었지만 그의 계획은 이랬다. 자신은 이미 신분이 노출되어 놈에게 접근하기가 어렵다. 힘과 체력 그리고 기술적인(?) 부분도 부족하다. 게다가 둘째 하은이를 건사해야 한다는 의무감에 선뜻 일을 벌일 자신도 없다. 하지만 복수를 포기 할 수는 없으니, 자신을 대신할 누군가를 찾기 시작한 거다.

그리고 그게 바로 나다.

“참 황당한 양반이구만... 겁두 없수?”

“면목이 없네... 처음엔 돈을 주고 사람을 살까 했지만, 그 금액이라는 게...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더군, 나 같은 사람은 평생을 가도 쥘 수 없는..., 해서 수소문해보니, 불법 체류 중인 조선족 중에 더러 그런 일을 해주는 사람들이 있다더군. 터무니없는 액수에도 말이네.”

“오케이! 그거네! 아... 아니지... 그랬으면 날 찾아왔을 리가 없지.”

“맞네. 참으로 짐승 같은 놈들이었지. 총 육백에 착수금조로 삼백을 먼저 달라 하길래 내 주었더니 며칠 뒤 연락이 와서는 다짜고짜 삼백을 더 내놓으라더군, 상대가 좋지 않다나? 내 그건 어렵다 애초에 육백으로 이야기가 되었고, 남은 삼백은 일이 완수되면 주겠다했더니 아 글쎄 그럼 일을 못하겠다. 강짜를 놓더군. 이미 내어준 삼백도 돌려주지 못한다며 말이네.”

“와! 이 나쁜 새끼들!”

“마지못해 여기저기 읍소하여 돈 삼백을 더 구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네.”

“왜요? 그 삼백 먹고 튀었어요?”

“이 거 보이나?”

그가 옷깃을 당기자 어깨 전체를 뒤덮은 흉측한 상처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설마?”

“박쥐처럼, 그 놈에게도 거래를 제안 했더군. 나한테 돈을 받고서도 말이야. 돈 없고 힘없는 나보단 그 놈 편에 붙는 쪽이 더 낫겠다는 얄팍한 계산이었겠지.”

“이런 망할!”

“욕할 것도 없네. 애초에 그런 놈들인 걸 알면서도 헛된 욕심을 품은 내 잘 못이지.”

“그래서 결국...”

“겨우 목숨은 부지했네만 벼랑 끝에 내몰린 기분이었지. 그때 신문에서 자네에 대한 기사를 봤네. 이거다 싶었지. 신이 내게 어떤 가르침을 주신 것 같은 기분이었네.”

그때 느꼈다. 복수란 감정이 얼마나 깊고 위대한지를, 생각해보라.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내가 어디 보통사람인가? 하나도 아니고 무려 여섯을 살해한 희대의 연쇄 살인마다. 아마 경찰도 눈에 불을 켜고 찾았을 거다. 헌데 사람 잡는 일을 업으로 삼는 놈들조차도 하지 못한 일을, 한낱 평범한 아버지가 해낸 거다. 단지 복수에 대한 열망만으로 말이다.

“사전조사에만 두 달이 걸렸지. 범행 장소, 수법 그리고 사용된 흉기의 종류와 그에 따른 특이점, 내로라하는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찾아가 자문도 받았어. 경찰이 놓쳤을지 모를 별도의 동선(動線)을 추적하고 현장조사를 통해 단서를 수집했지. 땅을 파고 숲을 뒤졌어. 개울가의 조그마한 자갈 하나까지 모두 뒤집어 흔적을 쫓았어. 어디 그 뿐인가? 경찰 수사 일지에서 드러난 알리바이를 토대로 각각의 용의자들을 하나씩 따라붙어 확인하고 또 확인했지.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날들의 연속이었다네. 포기할 뻔 한 적도 많았지. 하지만... 신은 끝내 날 버리지 않았어. 결국 자넬 내게 주었지.”

“젠장! 좋습니다. 그렇다 치자 구요. 그런데 뭐였습니까?

“뭘 말인가?”

“내가 선생님한테 붙잡히고 만 그 이유요. 나, 사실 아까부터 되게 궁금했거든요. 어떻게 한 걸까? 날고 긴다는 짭새들도 못 잡은 날, 이 양반은 대체 무슨 수로 이렇게 잡아 앉혀 놨을까? 선생님이라면 안 궁금하시겠어요?”

“하아아...”

내 물음에 그는 깊은 한숨을 토해내더니 이내 눈을 감았다.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했다. 차분히 숨을 고르고 입술을 오물댔다. 그리곤 다시 눈을 떠 어둠속 먼발치를 지그시 응시하며 말했다.

“살인은 보통 금품 아니면 원한에 의해 발생되지. 그게 우발적인 것이든 계획에 의한 것이든 말이야. 원한 범죄는 당연히 원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이 용의 선상에 설 테고, 금품에 의한 범죄는 보통 그 죽음으로 인해 가장 큰 이득을 보는 자가 범인이지.”

“그래서요?”

“헌데 연쇄 살인은 궤(軌)가 달라. 살의의 충족이 먼저고 대상은 특정되지 않지. 피해자 상호간에 연관성이 확보되지 않기 때문에 주로 범행 장소 주변의 거주자나 동종 범죄 혹은 전과자, 해당 범행 시각을 기준으로 주변을 지났거나 목격된 바 있는 자들을 통상 용의자로 특정해 조사하지.”

“그렇군요.”

“허나 특정한 이유로 인해 후보군이 많아진다면 그도 쉽지 않은 일이지. 그래서 보통은 이 몇 가지 기준을 합쳐서 채로 거르듯 혐의가 옅은 사람들을 먼저 지워나간다네... 일종의 교집합인 셈이지.”

“아... 그럼 저는 범행 장소 주변에 살던 동종 범죄 이력을 가진 전과자인데 범행 시각에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걸렸다. 이건가요?”

“그럴 리가, 그랬다면 내 차례는 오지 않았겠지. 경철이 먼저 나섰을 테니 말일세. 나는 조금 다르게 보았네. 어떤 미련한 인간이 의심받을 줄 뻔히 알면서 제 집 주변에서 일을 치르겠는가? 주위를 보게, 온통 차들 뿐이네. 자가용은 물론이고 대중교통만으로도 어디든 갈 수 있는 좋은 세상이 왔지. 그래서 난...”

“범행 장소 주변에 사는 놈들은 오히려 빼버렸다?”

“그럴 리가 있겠나. 그래도 올 수는 있어야 살인을 저지를 게 아닌가.”

“아니 그럼 어쨌다는 겁니까?”

“너무 가까운 사람들은 빼고, 완전히 닿을 수 없는 거리는 빼고. 그게 핵심이었네. 과연 이게 가능할까 싶을 만치 먼 곳에 사는 용의자들의 리스트를 뽑는 것 말이네. 생각해보게. 만약 자네가 코가 찡그려질 만큼 심한 악취가 나는 오물을 들고 있다면, 그걸 어디에 버리겠는가?”

“그야. 당연히 냄새가 안 나게... ”

“그렇지. 바로 그거야. 자네가 버릴 수 있는 가장 먼 곳, 그러니 범인도 당연히 애매한 거리에서 줄타기를 벌이리라 생각했지.”

“그래도 만만치 않은 숫자일 텐데?”

“결국 실마리를 준 건 현장 조사였네. 철저하게 범인의 동선을 추적하고, 범행 전과 후로 나누어 진입 구간과 탈출 구간을 분석하고 혹여 놓쳤을지 모를 수십 개의 가상 루트를 그려냈지. 신발이 두 켤레나 갈아 신을 만치 매달렸어. 경찰이 발표한 내용과 내가 조사한 것이 일치하는 지. 조금이라도 특이점이라 할 만한 것이 없는지. 쉽지 않았어. 인내의 시간이었지. 헌데 그러던 중 우연히 작은 틈 하나를 발견했지.”

“틈?”

“그래 틈, 사체를 개울가에 유기한 박수진 사건에서 말이야. 돌이켜보면 그 사건은 일종의 이정표였지. 영리한 노림수이면서 동시에 얄팍한 속임수이기도 했지.”

“왜죠?”

“그때까지 경찰은 혼란에 빠져 있었어. 미친 X 널뛰기 하듯 범행 장소를 수시로 바꾸니 종잡을 수가 없었던 게지. 앞서 말했듯 정확한 행동반경을 알아야 범인의 위치를 특정할 수 있으니 말이야. 그때 터진 것이 바로 그 개울가 시체 유기 사건이었어. 겉으론 다른 사건들과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였지만 경찰의 수사는 그 사건을 계기로 크게 변하네. 경찰이 주목한 바는 그거야. 이제까지와 달리 범행 장소 주변에 변변찮은 인가(人家)나 정기적으로 오가는 대중교통이 거의 없다는 점. 게다가 그 곳은 피해자의 평소 행동반경에서 크게 벗어난 위치였어. 경찰은 곧 대대적인 탐문수사에 들어갔네. 그럴만도 했지. 피해자 박수진은 여자치고는 큰 172센티미터의 키에 60킬로그램이 넘는 체중의 소유자였으니까. 대중교통으로 이동하면 너무 눈에 띄고, 걸어가기엔 시간도 거리도 녹록치 않고...”

“차로 갔겠죠 뭐.”

“그래, 이걸 깨달은 순간 경찰은 아마 환호성을 내지르며 기뻐했을 게야. 당연하지. 요즘이 어떤 세상인가? 대한민국 방방곡곡 도로란 도로에 죄다 CCTV를 달아 놓지 않았겠나? 마침 부근엔 4대의 과속 단속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었지. 게다가 장소는 차량통행이 뜸한 구부정한 산길이네. 그 시간에 오갔을 차량이라 봐야 얼마나 되겠냐는 셈이었지. 드디어 덜미를 잡았다 생각했을 게야. CCTV에 포착된 모든 차량을 수배한 뒤 하나하나 탐문하다보면 범인을 잡는 건 시간문제다 생각했겠지. 헌데 함정은 거기에 있었어.”

“함정이요? 무슨?”

“범인이 차량을 이용해 박수진을 옮겼을 거라는 확신, 그게 바로 놈이 파놓은 함정이었던 거지. 앞서 말했지만 범행 장소엔 개울이 있었어. 개울이니만치 협소한데다 수량도 많지 않아 한 복판에 이르러도 겨우 복숭아뼈 언저리에 차는 그런 곳이었지. 경찰이 범행에 사용된 흉기를 찾은 곳도 바로 그곳이었지. 그래 맞아. 거기야. 이제까지 한 번도 발견된 적 없는 흉기가 거기서 처음 발견되었지. 경찰은 그날 비가 오고 몹시 어두워 범인이 실수로 그걸 빠뜨린 것 같다고 했지만 난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어.”

“뭔 또 의구심입니까?”

“왜 안 그렇겠나. 지난 세 번의 살인을 말끔하게 해치운 자네야. 흔적 하나 남기지 않았다고. 헌데 왜 갑자기 흉기를? 그때 난 그게 미끼임을 깨달았지. 연이은 다섯 번의 살인, 그리고 3번째 살인을 기점으로 공개수사로 전환한 경찰, 연일 터져 나오는 세상과 미디어의 관심. 자넨 아마 초조했을 거야. 괜찮을까? 계속 이래도 되는 걸까? 아니 어쩌면 오히려 잡을 테면 잡아 보라며 우릴 시험했을 수도 있지. 자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 낼 테니. 한 번 풀어봐라. 그리곤 엉뚱한 답을 들고 우왕좌왕하는 우릴 보며 쾌감에 젖었을지도 모르겠군. 하지만 난 달랐어. 그게 속임수인 걸 알았지. 시선을 돌리려 했구나. 무얼 숨겼을까? 그런 생각으로 철저히 주변을 뒤졌어. 밤이 새도록 몇 날 며칠을 누비며 개울가에 가라앉은 자갈 하나하나를 뒤집어보며 찾고 또 찾았지. 헌데 그때 길을 지나던 누군가가 그러더군.”

‘어이쿠 캠핑 나오신 모양인데 조심하세요. 이따가 비 온다는데, 이게 바짝 말라서 우스워 보여도 비만 오면 무섭게 불어납니다. 눈 깜짝 할 사이에 차올라요.’

“설마 배?”

“그래, 보트였어. 무동력 고무보트, 난 즉시 지도를 펴고 피해자 박수진의 평소 이동 경로를 다시 살폈지. 역시나 그 안에 답이 있더군. 최초 실종 위치로 추정되는 양설리 국도변은 지대가 높아. 그리고 지천을 끼고 작은 다리가 놓여 있지. 박수진이 마지막으로 목격된 곳도 바로 여기 개울을 가로지르는 다리 부근이었어. 수업이 마치고 돌아가는 박수진을 아마 자네는 여기 이 지점에 숨어 있다가 잡아챘을 게야. CCTV도 없고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으며 다리를 건너며 꺾이는 지점이라 한 쪽에 숨으면 반대편에선 이쪽이 보이지 않아. 하지만 꺾여있는 이 지점에 숨은 자는 양 쪽 모두를 주시 할 수 있지. 아울러 다리 밑에 미리 숨겨두었을 고무보트로 이동하기에도 최적의 지점이고 말이야.”

그의 논리적인 추리와 끈질긴 추적과정을 듣고 있자니 놀라움과 동시에 감탄이 터져 나왔다. 경찰도 어쩌지 못한 살인마를 상대로 일개 소시민이 어떻게 이런 날카로운 추리를 펼친단 말인가. 하지만 반대로 불만도 좀 생겼다. 이렇게 똑똑하고 말씀도 조리 있게 잘 하는 양반이, 왜 처음엔 설명은 고사하고 ‘넌 살인자다!’ 시종일관 그 밑도 끝도 없는 얘기만 해대며 매질을 했냐 이거다.

‘이차 저차 해서 내 딸이 죽었고 복수하려고 이래저래 알아봤는데 잘 안 됐다. 그래서 요런 저런 방법으로 날 찾아서 잡아왔으니 내 대신 네가 이렇게 저렇게 찾아가서 복수 좀 해다오.’

차근차근 순리대로... 얼마나 좋으냔 말이다.

“자 그렇게 자네는 여기 이 상류 지점에서 박수진을 최초 포획한 후 다리 밑에 숨겨두었던 무동력 고무보트를 이용, 사체가 발견된 여기 이 중간지점으로 이동하네. 그리곤 용의주도하게도 박수진을 위협해 개울가와 위편 도로 사이를 끌고 다니지. 다수의 족적과 명확한 흔적을 남겨 경찰의 수사에 혼선을 주기 위해서였지. 실제로 내가 갔을 때도 무의미하게 짓밟힌 풀과 꺾이고 부러진 작은 나뭇가지들이 다수 발견되었어. 당연하지, 비가 왔으니까. 어설픈 족적은 쓸려 내려 갈 것을 알았던 거야. 이후에도 자네는 평소답지 않게 이미 사망한 박수진의 사체를 끌고 다니며 몇 차례 더 흉기를 휘둘렀네. 그 부분은 경찰 발표에서도 이미 언급된 바 있지. 조금만 더 고심했더라면 경찰도 분명 이를 간파 할 수 있었을 테지만, 그들은 이미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있었어. 여론도 좋지 않았지. 빨리 사건을 해결하라는 모종의 압박도 있었을 게야. 이 나이가 되니 알겠더군, 우리는 종종 잘못된 길에 들어서. 하지만 그건 절대 정답을 몰라서가 아니야. 정답은 이미 알고 있어. 다만 그 정답이란 길은 항상 가장 어렵고 먼 길이지. 그래서 결국 우리는 언제나 쉬운 선택을 하고 또 항상 후회를 하지...”

그가 씁쓸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택했던 쉬운 길은 무엇이고 어떤 후회를 남겼을까? 그리고 나는 왜 그 길에서 벗어났을까? 머리가 복잡했다.

“이후 자네는 경찰의 예상과 달리 보트를 이용해 곧장 하류로 이동했네. 경찰이 예상한 도주로와는 완전히 반대의 방향으로 말이야. 아마 여기, 아니면 여기였을 게야. 굽이쳐 흐르며 유속이 완만해지는데다 수풀이 우거져 목격자로부터 몸을 은신하기에 좋겠지, 또 차량을 숨겨 둘 만한 공터도 있고 말이야. 물론 나였다면 아마 좀 더 내려가서 이 지점을 활용했을 거야. 조금만 가면 통행량이 많은 큰 도로가 나오는데다. 3개의 교차로가 있으니 CCTV나 경찰의 눈을 따돌리기에도 그만이지.”

“그렇군요. 좋습니다. 하지만 CCTV를 볼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방금 하신 말씀처럼 보트를 이용해 완벽히 빠져나갔는데. 저는 어떻게 찾은 겁니까?”

“자네 말에 답이 있네. 보트, 그게 결정적 단서였지.”

“아니, 뭐 보트에 이름이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막말로 내가 어디서 하나 훔쳐왔다 칩시다. 그럼 답 없는 거 아니요!”

“보트를 훔쳤다? 그럴 수도 있겠지.”

“거봐요. 순 엉터리네.”

“하지만 생각해보게 비가 오고 있었어. 주변 지형에 익숙한 마을 주민조차 물이 불어날지 모르니 조심해라. 경고를 할 만큼 물살이 세지는 시기야. 게다가 범행 시각은 야심한 밤이었네. 보트 조작에 익숙지도 않은 일반인이 충동적으로 보트를 훔쳐 거사를 치르기엔 위험한 선택이지. 아마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을 걸세. 그 급류를 납치한 여자와 함께 간다? 전문가가 아니면 불가능해. 그렇다고 사전에 연습 따위를 할 수 있는 상황도 아닐 테고 말이야. 난 즉시 일대에서 활동하던 래프팅 업체들을 찾아 나섰네. 물론 약간의 어려움은 있었어. 정부 사업으로 상류에 보가 생기며 일대엔 수량(水量)이 줄어들었고, 대다수 래프팅 업체들이 문을 닫은 후였거든, 또 그런 업체들은 영세해서 정직원도 드물고 근무자의 이력 같은 걸 관리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난 확신했지. 살인마라면, 이 정도의 살의를 지닌 자라면 분명 무언가 의심이 갈만한 정황이나 흔적을 남겼으리라고 말일세.”

“그래서 뭘 남겼던가요?”

“즉시 근 십년간 일대에서 벌어진 래프팅 사고들을 검색했지. 대형 사고가 아니다보니 다루는 언론이 적었지만 지방 일간지 중 하나가 유독 작은 사건을 크게 부풀리는 경향이 있더군. 그래서 거길 뒤졌더니... 자네가 있더군.”

그가 휴대폰을 내밀었다. 그 속엔 스크랩 되어 있는 신문기사 몇 줄이 눈에 들어왔다.

‘래프팅 사고 잇달아. 안전장치는 유명무실? 2명 사망 2명 실종’

“기사는 사고라고 소개했지만, 과연... 그게 사실일까? 누군가의 비뚤어진 욕망이 발현된 비극은 아니었을까? 촉이 왔지. 더 볼 것도 없다고 생각했어. 게다가 선택의 여지도 없었지. 자네라면 어쩌겠나? 수십 명에 달하는 용의자들의 신상을 일일이 캐볼 수 있겠나? 아니면 십여 대의 CCTV를 뒤져서 얻은 수백 대의 차량 번호를 확인하고 일일이 찾아다니겠는가? 심지어 나는 경찰도 아니야. 하지만 매년 잘해야 서너 건에 불과한 안전사고 중 사망자가 발생한 사건만을 쫓겠나? 물론 이것도 결국 타협이고 쉬운 길을 택한 것에 불과하지만 운명이란 참 괴상한 놈이야. 때론 쉬운 것에서 해답을 찾기도 하니까.”

“대단하십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그의 말을 다 듣고 나니 또 한 번 감탄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내심 불안한 마음도 들었다.

‘이렇게 집요하고 끈질긴 사람을 과연 내가 상대할 수 있을까?’

갑갑한 기분이었다. 단순히 로프에 묶여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는 오랜 시간을 공들여 복수란 이름의 거미줄을 쳐 놓았다. 그리고 난 그 거미줄에 걸린 한낱 나방의 신세다. 어떻게든 빠져나가려 애를 쓰지만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또 모든 기억을 잃은 지금의 내가 그가 말하는 살인이란 걸 해낼 수 있을지? 두려웠다. 이렇게 아등바등 대다 결국 벌레처럼 짓이겨지는 건 아닐까? 겁이 났다.

그때 그가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신고 안 할게... 풀어줄게 그러니까 제발. 그 놈만 죽여만 줘!”

“하아...”

“그 놈만 죽여주면 내가 찾은 것들, 사건 관련 증거들, 죄다 땅에 묻을 거야. 내 기억도 죽은 우리 하진이와 함께 가슴 속에 묻을 것이고.”

그가 품에서 누런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잘 봐! 거절하면 이거 가지고 경찰서로 갈 거야. 여기 다 있어. 자네가 저지른 범행에 대한 모든 게 말이야. 사진, 흉기 그리고 신상에 대한 것까지 몽땅 다! 그 뿐인 줄 알아? 똑같은 게 한 부 더 있어. 그건 내가 여기서 죽어도 정확히 일주일 뒤에 경찰서로 날아가. 무슨 말인지 알지?”

그냥 하는 소리 같진 않았다. 이만치 준비를 했으니, 이후의 일에 대한 대비도 충실히 해두었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하아아’ 한숨과 함께 체념이 밀려왔다. 출구가 보이지 않는 거대한 미로 속에 같혀 있는 기분이었다.

“알겠습니다. 알았으니까. 일단 이거나 좀 풀어주세요.”

“좋아. 대신 허튼 수작 부리면 안 돼! 지금 나하고 딱 약조 한 거야!”

“아 글쎄 알았다구요!”

나도 모르게 짜증을 냈다. 하라니까 또 어쩔 수 없으니까 하긴 해야겠는데, 너무 막막했다. 다른 걸 떠내 내가 제일 문제였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살인마라니, 그딴 건 들어 본 적도 없다. 범행 수법은커녕 제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는 살인마가 대체 무슨 수로 사람을 죽인단 말인가? 고민하는 사이 그가 나를 묶은 밧줄을 풀었다. 오랫동안 피가 통하지 않아 내 몸인데도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가볍게 스트레칭을 한 후 칼로 사람을 찌르듯 팔을 세게 흔들어보았다. 혹시나 옛 기억에 실마리가 남아 있지는 않나 하는 기대 탓이었다. 그러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여전히 내 머릿속은 공허했고 팔의 움직임은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머리론 잊어도, 몸은 기억을 한다는데. 이건 뭐, 와 닿는 게 없네, 살인의 짜릿함, 칼을 쑤셔 넣을 때의 쾌감, 그게 뭐든 이 안에 있었을 거 아냐!’

답답함에 가슴을 두드리니, 그가 아니 하진이 아버지가 껄껄 웃으며 말했다.

“역시 자세가 나오는구먼, 좋아 바로 그거야! 경쾌하고 날렵해!”

“아 네... 어련하겠습니까! 연쇄 살인마인데...”

“잊지 말게. 일주일이야., 일주일 뒤엔 나도 어찌할 도리가 없어. 자네 자료가 경찰로 넘어갈 거야.”

“아! 안다구요. 거 빚쟁이도 아닌데, 독촉 좀 하지 맙시다.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까!”

“좋아. 기분 나빴다면 미안하네. 이게 위로가 될지는 모르겠네만. 다른 생각 말고 이거 하나만 명심하게!”

“뭘요?”

거듭된 잔소리에 짜증이나 쌀쌀맞게 되묻자 그가 말했다.

“성공만 하면, 그 새끼 죽이고 잡혀도 자넨 초범이야”

“초범... 이요?”

“그래! 초범, 비록 살인일지언정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단 말이지. 길어봐야 10년이고 변호사만 잘 쓰면 5년도 가능하단 말이지!”

초범, 정상참작의 여지, 길면 10년, 짧게는 5년, 빌어먹을 쌍욕이 나올 뻔 했다. 그런 시덥지않은 희망에 귀가 번쩍 뜨인 나 때문이었다. 무력한 내 자신이 한심해서 미칠 것만 같았다.

“게... 게다가 자넨! 정의를 실현하는 거야! 그래 정의! 어차피 돈 밖에 모르는 괴물 같은 놈들이야. 그들에게 고통 받고 멸시받은 모두를 위해 정의의 심판을 내리는 거지! 오! 신이시여! 여기 죄 많은 당신의 아들을 굽어 살피소서. 당신의 권능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바와 같이 여기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아멘!”

“아... 네... 거 되게 감동적인 위로네요. 아주 실용적이고 무척 위안이 됩니다.”

“마음에 들진 않겠지만 어쩌겠나. 내가 해 줄 수 게 이것뿐인 걸... 신중하게 판단하게. 실패하는 날엔 모든 게 끝장이야. 그 즉시 범행 증거 일체가 경찰에 넘어 갈 테고, 그땐 아마 자네... 다시는 햇빛 볼 수 없을 게야. 그리고 자넨 저... 전문가가 아닌가? 잘만 하면 아무 증거 없이 해치울 수도 있을게야. 그럼 완벽해지는 거 아닌가?”

‘꿀꺽’ 마른 침이 목구멍을 넘어간다. 이건 절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다. 내가 실패하면 그는 반드시 그렇게 하고 말거다. 우발적 살인도 아닌 연쇄 살인, 그것도 희생자만 무려 여섯이다. 정상 참작은커녕 신문 1면을 화려하게 장식하며 사형을 언도 받겠지. 재고의 여지도 가석방 여지도 없을 것이다. 감방 안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내가 한 짓이라지만 기억도 나지 않는 과거에 발목을 잡히는 건 억울하단 생각이 들었다.

‘할 수 있어. 할 수 있다고! 아무 것도 아니야. 따지고 보면 처음도 아니잖아? 나... 난, 전문가니까...’

허세를 부리며 스스로를 다독였다. 쉬운 산수다. 계산해보면 밑지는 장사도 아니다. 누구라도 같은 선택을 할 거다. 스스로를 합리화 했다.

‘연쇄 살인마로 사형 판결 받고 평생을 감방에서 썩기 vs 초범으로 5~10년 정도 죗값을 치르고 나와 밝고 아름다운 새 삶 살기’

선택의 저울은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정의 실현’ 형량도 형량이지만 명분 또한 기가 막히지 않은가? 실정법상으론 살인이지만 한 편으론 악당을 물리치고 정의를 수호하는 일이다. 불쌍하게 죽은 한 여자의 한을 달래주고 나 역시 본래 받아야 할 죗값을 덜어낼 수 있다. 꿩 먹고 알 먹고, 도랑치고 가재 잡고, 살인하고 정의 수호하고, 더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세상사 어차피 생각하기 나름이다. 그런 생각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하진이 아버지가 다가와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우렁차게 외쳤다.

“파이팅이야!”

“아.. 네... 파... 파이팅!”

그렇게 나는 생에 최초로, 아니 처음 같은 일곱 번째 살인을 저지르기 위해 길을 나섰다.

* * * * *

문소리가 나더니 어둡던 실내가 환하게 밝아졌다. 깜빡 졸았나 싶어 기지개를 펴며 몸을 일으키니 놈이 물었다.

“너 뭐야?”

조금 놀란 눈치다. 당연하다. 늦은 시간 돌아왔는데 웬 낯선 남자가 제 집 소파에 앉아있으니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다.

“방준모씨 되시죠?”

질문을 질문으로 답하는 몰상식한 사람이 되고 싶진 않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살인마라던데요?’ 대답이라기엔 생뚱맞을 뿐더러 애매하기까지 하다. 나조차 내 정체성에 대해 납득 할 수 없는데, 누구에게 강요한단 말인가? 그러자 놈도 대답대신 질문을 던졌다.

“경찰은 아닌 거 같고... 누가 보냈니?”

나만큼이나 몰상식한 놈인 듯 했다. 질문에 또 질문, 거기에 대뜸 반말까지. 뭐 상관은 없다. 어차피 대답이 필요한 상황은 아니니까.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이 놈이다.’하는 쌔한 느낌이 왔다. 경계하는 눈빛과 매섭게 쏘아보는 눈초리가 그랬다. 아니나 다를까? 슬며시 뒤로 발을 뺀다. 주위를 곁눈질 하는 모양새가 아마도 다른 일행이 있는지 살피는 눈치였다. 암,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누구에게나 목숨은 소중한 거니까.

그게 악당이든 살인마든 말이다.

“누가 나 좀 손봐달라고 하디? 누구야?”

“그런 얘기를 아무렇지도 않게 하시는 거 보니... 지은 죄가 많으신가 봐요?”

“죄? 풋... 야 이 새끼야! 너 내가 누군 줄이나 알아?”

“알죠. 아주 잘 알죠. 아버님은 언론사 사주(社主)시고, 아드님이신 방준모씨는 엔터 회사 몇 개 굴리시면서 어린 여자 연예인들 잡아먹는 게 취미이자 특기인 발정난 X새끼시고!”

“아... 나 이런 또라이 새끼를 봤나.”

놈이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중얼대더니 도망치기는커녕 셔츠 소매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뭐지?’싶어 보고 있자니 현관 앞 신발장에서 기다란 골프채를 꺼낸다. ‘휭휭’ 바람소리가 제법이다. 여차하면 내 골통을 아작 낼 기세다. 역시나 믿는 구석이 있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걸 어쩐다? 나 역시 놈의 자신감을 똥으로 만들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어쭈?”

품에서 칼을 꺼내자 비로소 놈의 얼굴에서 특유의 오만함이 사라진다. 골프채를 움켜쥐고 긴장된 눈초리로 노려본다. 캄캄한 어둠 속에서 처음 눈을 떴을 때, 나도 저런 표정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난 기억을 잃었고 오늘 놈은 목숨을 잃는다. 그런 각오로 다가서며 말했다.

“그러게 죄를 짓지 말았어야지.”

“누가 보냈어? 아니다. 됐고, 얼마야? 따블로 줄게! 대신에 가서 그 새끼 죽여.”

“오... 따블?”

“그래. 고민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돈 때문에 하는 거 아냐? 부족하면 더 줄 테니까 말만 해. 왜? 못 믿겠어? 봐! 지금도 한 칠팔백은 바로 줄 수 있어.”

놈이 한 발 다가서며 지갑을 내밀었다. 얼핏 봐도 지갑이 두툼하다. 수표와 오만원짜리 지폐가 가득 들어 차 있다. ‘어쭈, 이 놈 봐라? 무서워 벌벌 떨 줄 알았는데, 역으로 거래를?’ 역시 듣던 대로다 싶었다. 그래서 한 술 더 떠 놈에게 공손히 머리를 숙였다.

“아이구우... 뭐 이런 걸 다...”

“옳지, 잘 생각했어. 사람이 머리를 써야지. 하하핫”

내가 황송한 표정으로 다가서자 놈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상황이 제 의도대로 흘러간다는 생각에 흐뭇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난 토악질이 날 것 같았다. 돈이면 못 살 것이 없는 더러운 세상이지만, 때로...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음을 말이다.

“아아악!”

거리를 가늠하다 이 때다 싶어 기습적으로 팔을 휘두르니 비명과 함께 놈의 손끝에서 피가 솟구쳤다. 본래는 수표를 쥐고 흔든 놈의 오만한 손모가지를 잘라주는 것이었지만 놀라 급히 손을 빼는 통에 손가락 마디 일부만 깊게 베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효과가 제법 괜찮았다.

“이... 이 미친 새끼!”

손가락 일부가 잘려 너덜대자 방준모의 표정이 달라졌다. 일단 특유의 거만함이 사라졌다.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눈앞에 내가 서 있으니 상처를 붙잡고 끙끙댈 여유조차 없다. 물론 가장 큰 소득은 골프채였다. 놈이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쥐고 흔들던 유일한 무기가 무력해진 것이다. 지금도 흥분해 ‘이 새끼, 저 새끼’ 찾으며 휘두르긴 하는데 오른손의 검지와 중지 그리고 엄지까지 일부 상처를 입어 영점이 잡히질 않는다. 게다가 두 손을 모두 쓸 때와 한 쪽 뿐일 때, 그 위력은 천지차이다.

“아이쿠 이걸 어쩌나? 당분간 골프는커녕 젓가락질도 못 하시겠네?”

내가 비아냥대자 방준모가 흥분하기 시작했다. 마치 자신에겐 아무런 문제가 없는 양 다시금 골프채를 휘두르기 시작했는데 역시나 어색하다. 빠르지도 정확하지도 않은데다 이를 의식해 동작이 커져 더 엉성하기만 했다. 마음 같아선 골프채 따윈 내던지고 냅다 도망치고 싶은 눈친데 어느새 나는 문 앞을 가로 막았고, 믿었던 수표다발은 쓰레기처럼 바닥을 뒹군다.

‘으아아아!’

놈이 돌연 괴성을 질렀다. 한 순간에 궁지에 몰린 제 처지가 견디기 힘든 모양이었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곧장 달려들었다. 내친 김에 놈의 뱃가죽에 칼을 박아 넣어 상황을 마무리 짓겠단 심산이었다. 헌데 반응이 생각보다 날렵하다. 육중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황급히 뒷걸음질을 치더니 소파 뒤에 숨어 또 골프채를 휘두른다. 헛웃음만 나왔다. 거만한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눈물과 콧물이 뒤범벅된 얼굴이다 .

“오지 마!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방준모는 연신 아이처럼 소리쳤다. 신기한 일은 그 모습에서 야릇한 쾌감이 느껴졌다는 사실이다. 상대보다 안전한 곳에 서서, 가장 소중한 것을 쥐고 흔드는 ‘절대자’로서의 감흥, ‘아... 내가 이 맛에 사람을 죽였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나는 웃으며 천천히 놈에게 다가갔다. 놈은 새빨개진 얼굴로 골프채를 휘둘러댔지만 그건 내가 가장 바라던 바였다. 흥분해 동작이 커지니 틈도 커진다. 간격을 가늠한 후 냅다 달려들어 가슴팍을 걷어차니 ‘어이쿠!’ 하며 놈이 아우성과 함께 엉덩방아를 찧었다.

“죽어!”

“헉...”

완벽한 일격이었다. 기합과 함께 복부에 칼을 박아 넣자, 둔탁한 감각과 함께 ‘줄줄줄’ 뜨끈한 액체가 손가락을 타고 흐른다. 끝났다는 생각에 알 수 없는 짜릿함이 전해졌다. 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홀가분해진 기분이었다. 헌데 그게 실수였다. 야릇한 쾌감을 즐기며 방심하는 사이 갑자기 ‘빡’하는 소리가 들렸다. 맞은편 벽에 걸린 TV가 저절로 켜진다. 리모컨처럼 보이는 검고 긴 플라스틱이 박살 나 흩어진다. 현기증과 함께 뜨끈한 액체가 내 이마를 타고 ‘줄줄줄’ 흐른다. 나도 엉덩방아를 찧으며 보기 좋게 뒤로 넘어갔다.

“X새끼...”

얼굴이 찡그려졌다. 분노와 함께 헛구역질이 밀려왔다. 세상이 다 빙빙 도는 양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하지만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다. 뱃가죽에 칼을 박아 넣었음에도 놈은 아직 죽지 않았다. 쉬는 것은 일을 끝낸 다음이다. 나는 그런 생각으로 필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허나 잘 되지 않았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처럼 한참을 허우적거린 연후에야 겨우 무릎을 펼 수 있었다. 다행이었던 건 놈도 나만큼이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크흑.... 큽...”

바닥은 온통 피로 흥건하고 놈은 벽에 기대 호흡을 가다듬고 있었다. 벽 곳곳에 손자국이 나 있는 걸로 보아 놈도 몸을 일으키려 제법 애를 쓴 모양이었다. ‘도망치려던 걸까? 아니.. 설마 나를?’ 불현 듯 분노가 치밀었다. 거기다 조금 전에 켜진 TV소리 때문에 귀가 ‘윙윙’ 울리고 머리가 아팠다. 빨리 이 일을 마무리 짓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가... 가... 쿨럭... 오지 마...”

내가 비틀대며 다가서자 놈이 마지막 사력을 다해 발을 굴렀다. 흡사 자전거라도 탄 양 필사적이다. 한편으론 땡깡을 부리는 어린아이 같기도 했다. ‘부질없는 짓을...; 나는 중얼거리며 달려들었다. 발길질을 피해 옆으로 몸을 튼 다음 냅다 옆구리를 걷어찼다. ‘욱’ 하며 숨 막히는 소리가 들렸다. 놈의 몸이 벽을 타고 한 쪽으로 무너진다. 기회다 싶어 고꾸라진 놈의 멱살을 잡고 안면에 주먹을 날렸다.

“죽어! 죽어! 죽어어!”

놈이 황급히 팔을 휘둘러 막아보려 안간힘을 썼지만 역부족이다. 코뼈가 부러지는 소리와 함께 이가 부러져 나뒹군다. 나도 아팠다. 한창 두들길 때는 흥분해서 몰랐는데 피 떡이 된 놈의 얼굴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주먹이 아프다. 이마처럼 단단한 부위를 때리다 삔 모양이었다.

“살려... 줘... 사... 살려...주세요.”

놈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핏물을 게워내며 사정했다. 뱃가죽에선 아직도 뭉클뭉클 피가 솟구친다. 칼을 뽑아 제대로 한 번만 찔러 주면 끝난다. 하지만 나는 그와의 약속을 기억했다.

“이 자식이야! 넌 할 수 있잖아. 죽여줘, 네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잔인하게, 가장 고통스럽게... 이 개 자식이 처절하게 울며 제발 죽여 달라고 빌고 또 빌 게 만들어줘! 그리곤 죽여 버려! 너한텐 쉬운 일이잖아 안 그래?”

조용히 팔을 뻗었다. ‘그래... 칼은 너무 쉽지.’ 놈에겐 천천히 고통을 느끼며 죽어가는 편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자 이제 벌을 받을 시간이야”

나는 힘주어 놈의 목을 졸랐다. 버둥댄다. 주먹으로 팔을 두드리고 두 다리가 심하게 요동친다. 하지만 출혈로 이미 기력을 잃은 놈을 해치우는 것은 병아리 목을 조르는 것 마냥 쉬웠다.

“후우...”

놈의 동공이 하얗게 뒤로 넘어갔다. 내 팔을 두들기던 손이 힘없이 떨어졌다. 비로소 나는 크게 심호흡했다. ‘끝났다.’ 하지만 그 순간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을 죽였다.’

‘이래도 되는 걸까?’

마냥 유쾌한 기분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충분히 각오했던 상황이기도 했다. 나는 그와의 대화를 떠올리며 스스로를 다잡았다.

“성공만 하면, 그 새끼 죽이고 잡혀도 자넨 초범이야”

“초범... 이요?”

“그래! 초범, 비록 살인일지언정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단 말이지. 길어봐야 10년이고 변호사만 잘 쓰면 5년도 가능하단 말이지!”

문득 궁금해졌다. ‘국선변호사를 쓰면 몇 년이나 받을까?’ ‘역시 10년인가?’ ‘괜찮은 국선 변호사도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애초에 계획했던 대로 가스 밸브를 자르고 전자레인지 안에 라이터를 던져 넣었다. 이제 작동 버튼을 누르고 나가면 몇 분 안에 폭발과 함께 화재가 발생한다. 완전범죄까진 아니지만 최소한 내 흔적 정도는 지울 수 있으리라 믿었다.

헌데 그 순간이었다.

[아나운서님도 방송 오래하시더니 전문가 다 되셨네. 허허허...]

[전문가라뇨. 송구스럽습니다. 선생님]

‘전문가?’

낯익은 그 단어가 내 귀를 잡아 끌었다.

[한 차례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자숙하신 후에 꽤 오랜만의 연출 복귀입니다. 어떠세요? 항간에는 이번 복귀에 대해 조금 이르지 않냐는 우려의 목소리도 높습니다.]

[허허 그 얘기를 하자니 얼굴이 다 화끈거리네요. 저 술 끊었습니다. 그 일 있고 차도 없애버렸고요. 평생 죄송한 마음으로 사죄하면서... 오직 작품으로 보답하겠다. 딱 그 마음 하나뿐이니. 부디 노여워하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모쪼록 양해를 구해 봅니다.]

[네, 알겠습니다. 오늘 ‘명사에게 듣는다.‘는 배우이자 작가 그리고 극단까지 운영하고 계신 팔색조 매력의 연출가 장승수 선생님을 모시고 최근 근황과 신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습니다. 선생님 마지막으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뭐 별 거 있겠습니까? 이번 작품 많이들 찾아주시길 바랄 뿐이지요.]

[아... 오늘은 안 하시나요? 그 왜 있잖아요. 선생님 특유의 시그니쳐라 할 수 있는...]

[아! 그거요? 뭐 시그니쳐라고 할 거야 없지만, 뭐 좋습니다. 하하하 작품만 잘 된다면야, 뭔들 못 하겠습니까. 자! 우리 배우들, 스탭들... 전부 파이팅이야!]

[네 저도 파이팅!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어느새 나는 TV 앞에 서 있었다. 연출가는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파이팅’을 외쳤고, 나는 화면속 그의 얼굴에 손을 가져다 댔다. 이마와 하관을 가리니 절로 욕지거리가 흘러나온다.

“이 사기꾼새끼...”

* * * * *

“넌 살인자다.”

나직이 말하니 황급히 주위를 돌아본다. 적잖이 놀란 눈치다. 나는 비웃으며 다가갔다.

“자네였군... 일은 잘 처리했나?”

“물론입죠. 전문가답게 아주 파이팅 하게 해치웠습니다.”

“수고했네. 헌데 어째 자네 말투가...”

“비꼬는 거 같죠? 왤까요? 선생님께서 방금 전까지 직접 운전하시는 모습을 봐서일까요? 아니면 지금 선생님 입에서 술 냄새가 폴폴 나서일까요? 그것도 아님, 제가 방준모 그 새끼를 죽이러 갔다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아서일까요?”

“설마 기억이... 기억이 돌아왔나?”

“촉촉하게 젖은 새벽 공기, 풀벌레 소리, 그리고 나를 향해 달려오던 맹렬한 불빛... 전부는 아니지만 그 기억만큼은 아주 생생하게 떠올랐지 뭡니까.”

내가 언성을 높이며 다가서자 곧장 그도 뒤로 물러섰다. 그리곤 몹시 당황하며 말했다.

“오.. 오해일세...”

“오해? 이 사기꾼... 다 거짓말이었지? 그치? 애초에 내가 살인마 따위 일 리가 없잖아! 안 그래?”

나는 흥분해 그의 멱살을 쥐고 흔들며 소리쳤다. 그러자 돌연 그가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자넨 그 밤 거길 왜 갔나?”

“뭐?”

“기억이 났다니까 묻는 걸세. 그 새벽에 거길 왜 갔냐고!”

갑자기 어지러웠다. 그의 물음에 답할 수 없었다.

“거긴 여섯 번 째 희생자의 시신이 발견된 곳과 불과 십 수 미터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지. 인적도 몹시 드문 곳이고 말이야.”

“그... 그건... 아... 안 나... 기억이... 안 나... 그것까진 기억이...”

“역시 그렇군! 혹시... 기억이 안 나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싶지 않은 건 아닌가?”

“아니야! 내가 왜 그런 짓을... 살인을... 내가 왜!”

“역시 부인하는 군... 내 그럴 줄 알았지, 자 그럼 하나 더 묻지... 오십이 넘은 나와 서른이 갓 넘어 보이는 자네, 만약 우리 두 사람이 육탄전을 벌인다면 누가 더 유리할까? 야구 배트? 아니! 차에 시동을 거는 쪽일 테지!”

“그... 그런...”

갑자기 머리가 아팠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된 양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가 질책하듯 계속 소리쳤다.

“그때랑 똑같아. 내가 지금처럼 다그쳐 묻자. 자넨 똑같이 말했네. 여기가 어디냐, 기억이 안 난다. 아무것도... 그리곤 다시 기절했지. 그래, 그래서 난 자넬 데리고 곧장 그리로 갔지. 아무도 모르는 곳... 그리고 그 곳에서 난 자네에게 복수를 부탁했네.”

“거짓말... 거짓말이야!”

“거짓말? 지금 날 죽여도 좋아! 하지만 복수를 하고 오란 말이야! 그 놈을 해치웠나? 그 망할 자식을 죽였냐고!”

“주... 죽였어요. 죽였습니다. 그 놈을 죽였다구요!”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난 분명히 말했어. 자네가 저지른 죄의 증거를 모두 가지고 있다고,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면 곧장 경찰서로 달려가겠다고!”

“저... 정말입니다. 뉴스... 그래요 뉴스에 나올 거에요. 놈을 목 졸라 죽이고 불을 질렀어요. 제가 지른 건 아니고, 가스관을 끊고 전자레인지에 라이터를 넣어 돌리고 나왔어요. ‘쾅’하는 소리도 들었어요.”

“그건 지켜보면 알 일이고... 일단 알겠으니 돌아가게 내 확인해 보겠네...”

그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그의 휴대폰 액정화면에는 ‘우리 딸“이란 세 글자가 선명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하은아... 지금부터 아빠가 하는 말 놀라지 말고 잘 듣거라. 일이 잘 된 모양이다. 네 언니의 일 말이야. 그러니 뉴스를 확인하고 그게 사실이면 준비해두었던 서류는 가지고 나가 태워도 좋다.”

매우 단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곧 하나둘 눈물이 송글송글 맺히더니 이내 뚝뚝 떨어졌다.

“드디어... 드디어 네 언니 하진이가 마음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된 게야. 흑흑... 그... 그러니... 너도 이제 아무 걱정 말고 치료에만... 치료에만 전념하자꾸나...”

나는 조용히 돌아섰다. 무언가 허망하면서도 시원섭섭한 느낌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결국 넌 살인마였냐?”

나로선 대답 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그 밤의 기억이라곤 겨우 축축한 새벽공기를 맞으며 걸었던 것과 멀리서 밝은 불빛 하나가 나를 향해 맹렬히 달려온 것뿐이다. 왜 내가 그 곳에 있었는지, 그 곳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양준모에게 머리를 좀 더 세게 얻어맞았다면 달랐을까? 지금이라도 기억이 되돌릴 어떤 방법이 있진 않을까?

그 순간 저 멀리서 밝은 불빛 하나가 나를 향해 맹렬히 달려왔다.

* * * * *

[아빠, 아까는 왜 그런 거야?]

“뭐가?”

[아니 갑자기 나보고 하은이라고 하질 않나... 그거는 아빠 이번 작품 극중 배역 이름이잖아. 하진이 하은이, 살인마한테 살해당한 주인공 딸]

“크크크 그럴 일이 있어.”

[뭐야! 아빠 지금 운전해? 뭐야! 또 술 마신 건 아니지?]

“아... 아니야...”

[그런데 왜 자동차 소리가 나, 정신 차려 아빠! 아빠 음주운전으로 면허 취소되서 지금 무면허야! 그러다 걸리면 정말 큰 일 나!]

“어허! 잔소리는... 꼭 지 엄마를 닮아서...”

[왜 저번에도 새벽에 술 먹고 차 끌고 가다가 사고 냈잖아! 범퍼며 뭐며 죄다 찌그러져서 내가 그거 몰래 고치느라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카센터 아저씨가 고라니라도 들이 박은 거냐며 안 그래도 계속 캐물었단 말야!]

“안 그래도 지금 그 일 때문에 골치 아파 죽겠다. 그러니 그만 좀 해! 그 일... 어차피 오늘로 끝났어. 끝!”

[됐고, 일찍 들어오기나 해요. 참! 아빠 뉴스 봤어? 아빠네 회사 전 대표 있잖아. 그 왜... 여자 연예인들 데리고 성상납하고 아빠 음주운전으로 자숙할 때 계약 위반이라고 위약금 청구소송 걸었던 그 사람...]

“죽었지?”

[어떻게 알았어? 아빠도 봤구나? 집에 불이 났데! 벌 받은 거지 뭐. 그렇게 나쁜 짓을 해대더니만 어휴..., 아빠가 그 사람 때문에 진짜 고생 많이 했는데, 친구 분하는 레프팅 회사에서 잡일까지 하고... 그나저나 아빠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있어... 아빠만 아는 어느 저수지, 뭐 좀 버리고 오려고...”

그제야 기억이 났다. 모든 것이 또렷하고 선명하다. 내가 왜 피투성이가 되어 이 차 뒷좌석에 누워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당장 무엇을 해야 할지만큼은 무엇보다 명확했다. 재빨리 몸을 일으켜 운전 중인 놈의 목에 팔을 걸었다. 그리곤 죽을힘을 다해 잡아 당겼다.

“으읍!”

놈의 비명과 함께 차는 갈지자로 도로를 오갔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몸은 이미 만신창이였지만 뒤늦게 깨달은 진실과 농락당했다는 분노가 어우러져 믿을 수 없는 아드레날린을 쏟아냈다. 그리곤 ‘끼이이익’ ‘쾅’ 하며 몸이 가벼워졌다. 무중력 상태에 이른 양 두 다리가 허공으로 치솟는다. 하늘과 땅이 뒤집히고 도로와 가드 레일 대신 가파른 언덕 밑 낭떠러지가 보인다. ‘끝인가?’ 절망이 밀려온다. 하지만 기분만큼은 이상할 정도로 후련하다. 그 순간 목을 조른 팔을 잡아 뜯으며 놈이 소리쳤다.

“이익... 이 미친 새끼!”

나 역시 룸미러에 비친 놈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아니, 난 살인자다.”



neptunuse 님께서 쓰신 동명의 글에서 모티브를 얻어 작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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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그함마르셸드
아름답네요
0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9-05-18 05:48:45
rkgnl99
읽어주어서 감사합니다.
10 추천 반대 삭제 신고 2019-05-19 15:19:39
R9882
비전문가이지만 이런류 소설을 좋아하는 읽는이로써 보면 이야기가 굉장히 몰입감이 있고 각 캐릭터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고서도 누가 말하는 건지 바로 알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 좋은데 1화 2화 3화 형식으로 상중하로 나눠서 올리셨으면 더 집중하기 편했을 것 같아요.
1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9-05-21 14:50:54
rkgnl99
전에는 한 방이 올릴 수 있는 걸 구태여 나눠 올린다고 한 소리 먹어서요. ^^;
10 추천 반대 삭제 신고 2019-06-03 16:10:23
R9882
그렇구나. 그런사람도 있었네 아무튼 재미있게.읽었어요.
00 추천 반대 삭제 신고 2019-06-03 16:13:02
삶이무의미함
잘봤습니다. 필력이 예~전보다 많이 좋아지신게 눈에 보입니다 건필하세요
1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9-05-23 09:26:49
rkgnl99
감사합니다. 작가님도 건승하십시오.
00 추천 반대 삭제 신고 2019-06-03 16:10:35
선천적신사
잘 읽고 갑니다!
00 추천 반대 댓글 삭제 신고 2019-06-25 21: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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