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아..." 나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손에 들려 있는 종이를 힐끗 바라보았다.

종이에는 이번 시험으로 내가 '부진아'판정을 받았음과 함께 '희망 사다리 교실'이라는 방과후 특수교육을 받을 것을 안내하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나는 지금부터 이 종이를 부모님께 건네고 앞으로의 일에 대해 상담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아아..." 그 생각을 하니 다시 한 번 또 절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런 일은 40여년을 살아도 도저히 적응이 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옛날부터 그랬지.' 나는 속으로 조용히 읊조리며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보았다.

까마득히 어린 초등학교 시절부터 게으르고 산만한 성격 탓에 공부도 못해, 친구도 많이 사귀지 못했고, 이에 당연히 학업이며 여러 분야가 골고루 부진했기에 별 거 아닌 대학을 졸업해 그대로 별 거 없는 직장에 취업했다.

취업은 했지만 일머리도 없고 사회성도 없는데다 뭐든 대충, 시키는 일도 제대로 하지 않는 나태한 성격이 겹쳐 회사에 큰 손해를 입히고 말았고, 그 길로 해고당해 백수가 되었다.

당연하지만 100%내 잘못이라서 뭐 할 말도 없다. 이후에도 먹고는 살아야 했기에 이런저런 회사를 찔러보았으나 스펙도 없고 경력도 변변찮았기에 좋은 소식이 들려오는 일은 없었다. 그나마 회사를 다니며 모아둔 돈으로 2~3년 정도는 버틸 수 있었지만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보니 이미 재취직 기회는 놓치고 잔고는 0원에 가까워져, 뭐 편하고 돈 많이 주는 알바라도 없나 찾아보던 중에 모 대기업의 생동성 알바에 지원하게 되었다.

대기업이라는 직함, 깔끔한 외관과 그야말로 '성실한 사람들'이 바쁘게 돌아다니는 견실한 내부 풍경에 나는 안심하고 이런저런 검사를 받고 기업에서 개발 중이라는 영양제를 맞은 뒤 귀가했다.

'틀림없이 그 주사가 문제였겠지.' 오랜만에 돈을 받은 나는 비싼 술과 각종 안주를 양껏 즐긴 뒤 취한 상태 그대로 잠이 들었고, 눈을 뜨니 8살 초등학생이 되어 있었다.

처음 보는 집에 처음 보는 사람들,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생전에도 그런 만화나 소설을 즐겨 보는 편이었기에 이런 상황을 의외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이른바 나는 전생한 것으로, 이제야 생전의 기억이 돌아온 것일 터였다.

그제야 다시금 살펴본 지금의 삶은 전생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황이 좋았다. 외모도 나쁘지 않고 크고 안정적인 기업에 다니는 능력있고 온화한 '아빠'와 전업주부로 빈틈없이 집안일을 해내고 아이에게 무한한 애정을 쏟는 자상한 '엄마'에 넓고 깔끔하기 그지 없는 집안. 2회차로 손색이 없는 환경이었다.

기왕 새로 얻게 된 제 2의 인생을 '갓생'으로 살기로 마음먹은 나는 이전에 가지고 있던 지식을 토대로 그야말로 무쌍을 찍었다. 학원에서도 두각을 보여 2학년이 될 때에는 바로 의대 진학반에 배정되었고, 동년배의 아이들이 절대로 가질 수 없는 여러가지 노하우나 지식을 통해 다른 분야에서의 성취도 우수하게 해낼 수 있었다.

그야말로 인생의 황금기. 언제까지나 이런 일이 이어질 것이었고, 그럴 것이라 생각했으나 딱 한가지 문제 때문에 모든 것이 틀어졌다. 나는 '나'를 다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다.

고학년이 되기 전까지는 이전의 지식만으로도 커버가 되었으나, 해마다 전생의 기억은 빠르게 줄어들고 새로 배워야 할 것들은 많아졌다. 애당초 원래의 삶에서도 소위 '학창시절'을 끝낸 지 10여년이 되었으므로, 계속해서 '우수함'을 유지하려면 나도 어느 정도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쉽게 되던 공부가 점점 난이도를 더해가자 나는 점점 공부에 흥미를 잃기 시작했고, 흥미가 사라진 자리에는 전생에서 딸려온 나태와 오락에 대한 욕구가 마구마구 솟아났다. 결국 또래에 비해 많은 지식적 기반과 부모님의 아낌없는 지원이 있었음에도 나의 성적은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고, 의대반에서 내쳐진 걸 시작으로 고학년이 되어서는 이렇게 '부진아'판정까지 받게 되고 말았다. 놀아도 너무 놀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걸 그랬어.' 한숨을 쉬며 지난 날을 후회해보았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아무래도 사람이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

결국 집 앞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머뭇거렸지만, 부모님은 온화한 분이고 지금까지 공부할 시간에 만화책을 읽거나 게임을 해도 그저 미소를 지으며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으니 그렇게까지 화를 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지금까지를 생각하면 걱정은 해도 뭐라고 크게 혼내지는 않겠지. 아니, 애초에 화를 내는 걸 본 적이 없는걸.' 합리화를 거듭한 끝에 멋대로 결론을 내린 나는 어린아이다운 천진한 미소를 지으며 문을 열었다.

"다녀왔습니다!"
"다녀왔니?"
"어라?"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평상시라면 현관에서 나를 맞이해주는 건 전업주부인 엄마뿐이었는데, 이번에는 아빠도 그 옆에서 함께 미소를 지으며 서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이미 선생님한테 이야기를 들은 건가?' 합리화 속에 묻어뒀던 불안감이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지금까지는 그래도 '평범'의 범주에 속해 있었기에 별 터치를 하지 않았을 뿐이고 사실은 내 생각보다 이런 부분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들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얼굴은 평온한데...' 나는 언제나와 같이 얼굴에 가득 차 있는 그들의 사람 좋은 미소를 살피며 빠르게 말을 이었다. 우선은 대화의 주도권을 찾자는 생각 때문이었다.

"네, 아빠도 오셨네요. 오늘은 일을 일찍 마치셨나봐요?"
"그렇다고 볼 수도 있고 아니라고 볼 수도 있지요, A씨." 그 말을 들은 나의 심장이 덜컥 내리앉았다. A, 분명 그건 '이전 생'의 내 이름이었기 때문이었다.

당황한 내가 뭐라고 말을 꺼낼 틈도 없이 '엄마'는 자연스럽게 다가와 현관문을 굳게 잠갔다. 분명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에 오히려 맥이 탁 풀렸달까, 겨우 입이 떨어진 나는 '아빠'를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저를 전생시킨 것이 당신들입니까?"
"아뇨,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그는 아까보다 환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보충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신은 '전생'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도 이미 짐작하고 있듯 A라는 당신의 육체는 이미 불타 가루가 되었고, 세간에서 영혼이라고 부르는 부분도 육체와 함께 사그라들었겠지요."
"하지만 저는 여기에 이렇게 있는데요. 자신이 A라는 기억도 생생하구요..."

"생전...에 하셨던 생동성 알바 기억하시죠? 사실 그 때 건강검진이라는 명목으로 여러분이 들어갔던 기계는 기억을 추출·복사하는 용도의 기계였습니다. 저희는 거기서 추출한 기억을 갓 태어난 어린 아이에게 주입하고, 8살이 되면 자연스럽게 그 기억이 떠오르도록 해뒀지요. 그렇게 해서 제 2의 삶을 얻었을 때 사람들의 태도 변화를 중심으로 신체, 환경이 한 인간의 성장에 미치는 영향, 공교육의 효율 따위의 부가적인 연구결과를 얻으려 했습니다."
"그럼 왜..." 이어질 말을 대충 예상했는지, 그는 내가 말을 끝내기를 기다리지 않고 바로 말을 이어나갔다.

"나름 야심차게 준비한 프로젝트긴 했는데, 이런 저런 비용도 많이 드는데다 당신이 12살이 되는 동안 다른 연구를 통해 부차적인 데이터도 다 확보가 되었고, '새로운 삶을 얻었을 때의 태도나 성취도의 변화'따위의 연구도 그닥 성과를 내지 못해서요. 그래서 이번 진단평가의 결과를 토대로 '중단'을 할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네요. 정말 안타깝습니다."

'아빠'의 말이 끝나자 '엄마'는 언제나와 같은 미소를 지으며 나의 팔을 걷어올리곤, 그대로 팔에 어떤 주사를 꽂아넣었다.

관을 통해 흘러들어오는 용액의 냉기와 그에 반해 급격히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나는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공부를 열심히 할 걸'하고 후회했다.

아무래도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 모양이다.